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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의 예술 - 포스터로 읽는 100여 년 저항과 투쟁의 역사
조 리폰 지음, 김경애 옮김, 국제앰네스티 기획 / 씨네21북스 / 2022년 7월
평점 :
뒷표지, 믿을 만한 배우이자 작가 둘의 꼿꼿한 추천사를 눈여겨 읽게 된다. 140여 개의 인권 포스터 그림을 엮고 그 배경과 포스터 내용을 큐레이터처럼 설명해주는 이 책에 대해 비교적 우리와 가까이 있는 사람의 시선이다. 가뭄과 오염 식수에 병들고 말라가는 아프리카 아이들이 나오는 공익광고를 두고 그런 걸 왜 티비에서 보여주느냐며 물을 가라앉혀 마시면 안 되냐던 사람과 옥신각신하다 급기야 그걸 다 믿어야 되냐고 따지기에 가슴이 막혀 입을 닫고 말았다.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지구상에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적당히 외면하고 진실을 보지 않으려 하는 비교적 안락한 우리의 시선에 이 책은 일침이 된다. Not Here, But Now!
국제앰네스티와 함께 선별한 포스터를 하나씩 보고 설명을 읽는 데 자발적으로 시간이 걸린다. 그 배경을 꼼꼼히 알고 넘어가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이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이끌 것이다. 확장하여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도서도 찾게 된다. 주마간산으로 보지 말고 반드시 설명과 문구, 포스터 안에 그려져 있는 디테일한 것들까지 찾아보길 권유한다. 포스터는 일반적으로 선전과 선동의 이미지가 있지만 이것이 올바른 사안과 진실을 담을 때 일깨움을 주고 참여와 연대를 호소하는 효과는 적지 않다.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 이들에겐 무용지물일 테지만 그럼에도 그 영향력은 크다고 믿는다. 지금, 우리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미해결된 문제와 갈수록 심해지는 문제로 엮여 지구라는 단 하나의 공간에서 살고 있다. ‘살고’와 ‘있다’는 중요한 문제다. 누군가가 외롭거나 자유롭지 않거나 울고 있다면 나도 외롭고 자유롭지 않고 울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 그것은 내가 더이상 내가 아니라 우리로 같이 가슴 아파할 줄 아는 마음에서 비롯한다. “한 사람이 사슬에 묶여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서문)”
서문에서 밝힌 예술작품에 대한 말은 기억해둘 만하다. 예술작품은 우리의 자유에 따라 그 과정도 결과도 완성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우리의 자유란 어디에 기반한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으로 돌아간다. 그 물음에 자문하고 자답하는 과정이 이 작품집의 포스터를 하나 하나 만나는 보람이다.
“예술작품은 폐쇄된 특이성이 아니라 참여로 완성되는 공동체 행위라는 점에서 존재 가치를 지니며,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자유에 따라 그 과정이 완성된다. 따라서 예술작품은 본질적으로 찬성과 참여라는 매우 정치적 행위에 가깝다(9쪽).”
백여 년의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예술성을 담보한 포스터가 고스란히 담는다. 하나같이 개성있고,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고, 아름답다. 어떤 작품은 귀엽기도 하다. 몇몇 충격적인 그림은 그만큼 강하고 높은 목소리를 내고자하는 열망으로 비친다. 여전한 사안들로 크게 나누어 구성한다. 모두 소외되고 억압받고 외면당하는 사람들, 하지만 끊임없이 소리쳐 자유와 정의를 위해 싸우고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목차에서 나누어 표제화한 구호만 읽어보아도 그 뜨거움이 목구멍에 차오른다. 사람이 불법일 수 없는 난민과 이민자, 진정한 여성 해방과 참여권, 더이상 금지나 장벽으로 여기지 않는 성 정체성,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과 핵무기의 종식,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자유로운 사상과 이념,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에 항거하며 증오와 혐오로 이어지지 않는 피부색을 부르짖는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지속가능한 지구환경을 위해 기후위기와 플라스틱 등 각종 오염, 생태계의 파괴를 경고한다. 동물과 자연의 권리가 인간의 권리와 분리될 수 없음이다.
포스터마다 설명을 잘 해두어 이해하기 쉽게 독자를 안내한다. 오래 들여다보며 그 배경과 의미를 파악할수록 우리가 몰랐거나 지나쳤던 세상의 일들을 되돌아보게 되고 그것이 개인적인 사안에서도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면에 서서히 감동의 물결이 일어난다. 사진, 그림, 목판화, 콜라쥬, 다양한 서체와 색감으로 기법도 어조도 다채롭고 분위기와 이미지도 각양각색이다. 세계의 곳곳이 더이상 먼 나라가 아니라 우리와 멀지 않은 이웃이라는 사실은 엄연하다.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는 국경과 성별, 종교와 피부색을 넘어야 한다.
2018년 미국-멕시코 구역에서 벌어졌던 가족의 분리라는 두려운 순간을 전하는 이 포스터는 아일랜드의 노마 바르가 성조기를 직감적으로 재구성하여 작업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 논란의 중심에 있던 정책에서 한발 물러났지만 아직도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1976년, 서방 다른 국가들보다 늦게 페미니즘이 시작된 이탈리아의 포스터다. 다른 포스터도 그렇지만 특히 이 포스터는 그림으로써 많은 목소리를 자세히 담고 있다. 성 정체성에 대해 덜 알려진 엘리너 루스벨트의 말은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 선포한다. - “여성은 티백과 같은 존재이다. 티백이 뜨거운 물을 얼마나 잘 견디는지 직접 넣어보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이 포스터 아래쪽에 코르크 따개를 걷어차는 여성은 이렇게 말한다. “여성의 해방 없이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혁명이 없다면 여성의 자유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UN Women ad series reveals widespread sexism | UN Women – Headquarters
이 책에서 링크해 들어가본 사이트다. 네 명의 여성 중 아시아계 한 명을 포스터로 작업했다.
여성에게 가해진 금지와 차별의 언어를 확인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평화는 힘으로 지켜질 수 없다. 오직 이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고 했다. 1923년 케테 콜비츠가 그린 이 그림은 전쟁의 생존자들에게 전쟁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자고 소리없이 외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아들을 잃은 아픔을 어머니 케테는 목탄화로 더욱 참혹하게 전한다. 해골에 가까운 아이들을 꼭 끌어안은 처참한 어머니, 저항하고 위로하는 어머니로서 강인한 케테 콜비츠는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떴다. 케테 콜비츠의 그림을 이 작품집에서 만나니 한겨울 베를린의 '케테 콜비츠 뮤지엄'에서 만났던 가슴 먹먹한 작품들(조각과 그림, 자화상과 소품)이 떠올라 다시 목울대가 뜨거워진다.
세상은 작은 목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퍼질 때 조금씩 변화해갈 것이다. 여전히 산재한 문제들도 그렇게 거듭하는 목소리로 조금씩 바뀌어나가리라 믿는다. 환경과 인권, 소수자의 권리를 위해 활동해온 행동주의자, 지은이 조 리폰은 “예술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우리를 도전하도록 만들며, 새롭게 연결시킨다”는 말로 이 작품집의 의도를 밝혔다. 포스터 작품들을 '읽'다가도 연장선에서 다른 읽을거리를 찾게 되는 게 많다. 이 작품집을 덮고나면 누구나 적어도 읽기(알기)와 작은 행동으로 확장되기를 열렬히 바란다.
자유의 의미가 퇴색하고 왜곡된 것 같은 징후가 곳곳에서 보인다. 재치 있고 훌륭한 작품들로 권위에 저항하고 침묵하거나 은폐된 진실을 알리는 이 작품집이 진정한 자유를 옹호하고 향유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길 바란다. 자유가 특정인과 특정 집단,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구호라면 무엇 때문에 자유를 외칠 것인가. 서문의 그 문장을 되뇐다. “한 사람이 사슬에 묶여 있다면 우리 모두가 사슬에 묶여 있는 것이다.”
인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인권은 우리가 공유하는 가치에 뿌리내리고 있는 규칙으로 인간성, 평등, 진실, 정의의 가치를 반영한다. 인권은 법률로 규정하고 보호한다. 그러므로 아무리 권력을 가진 자라도 이익과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특정 권리만을 선별해서 보호해서는 안 된다.- 후기 국제앰네스티, 중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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