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



말레이시아로 이민 간다던 친구가 갑자기 생각났다. 오랜만에 통화한 친구는 어제 통화한 듯 아무렇지 않게 이민은 못 갔다고 대답했다. 준비한 이민서류는 모두 통과되었는데 초유의 바이러스 사태로 그만 발이 묶였다고, 그동안 일이 많았다며 이야기보따리가 터졌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지금 참 행복하다고 말했다. 왜 연락 안 했냐니까 식을 따로 올리지 않고 가족만 모여 간단히 식사하고 새 삶을 시작한 게 8개월 되었단다.


친구는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했다. 결혼에 종지부를 찍은 후 하고 싶은 건 다 했고 남자도 많이 만났다는 친구는 전문직 프리랜서로 잘산다. 나를 포함해 다른 동기들보다 당차고 야무진 사람이다. 15년 전에만 해도 나이는 먹어가고 자식은 없다면서 홀로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아주 약간의 두려움 같은 걸 내비치면서도 결혼이라는 제도에 다시는 걸려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사귀는 연하남은 있는데 결혼 제안을 받을 때마다 핑계를 대며 물리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던 친구가 이제는 오래 두고 본 그 남자와 죽을 때까지 함께하고 싶다며 공기 좋은 신도시에서 새소리 들으며 사는 게 참 평화롭다고 말했다.


우리의 대학 시절, 순정파 야수와 깍쟁이 미녀는 주변에서 다 아는 과커플이었다. 두 사람 모두 첫 인연이었다. 졸업할 무렵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오고 가고 하던 어느 날, 순진한 내 친구가 진지한 얼굴로 꺼낸 단어에 나는 속으로 깜짝이야!’ 했다.


그 남자를 집에 초대했단다. 식구들 모두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친구 어머니가 한 서방!”이라고 부르며 사윗감으로 대우했고 나머지 식구들에게 이제부터 모두 한 서방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당부하더란다. 그러면서 친구는 나한테 우리 엄마가 한 서방!’ 그러니까 되게 듣기 좋은 거 있지. 헤헤. 그러니까...우리 한 서방이 어쩌구저쩌구...” 눈망울이 몽글몽글해지며 자랑이 늘어졌다.


, 너는 한 서방이라고 부르면 안 되지이.”

아니야, 네가 몰라서 그렇지. 울엄마가 다들 그렇게 불러야 된다던데...”

 

남편의 남동생을 부르는 말은 두 가지다. 미혼이면 도련님, 결혼하면 서방님으로 불러야 하는 걸로 안다. 하지만 나는 도련님은 불렀는데 서방님은 언감생심 부르질 못한다. 남편의 두 남동생은 모두 결혼 후부터는 아이들이 부르는 이름 삼촌으로 불린다. 예법에 맞지 않는 호칭이지만 서방님은 어째 입에 올리기가 간질간질하다. 사극과 막장드라마 속 서방질한다는 대사 때문인지 아무튼 선입견이 부른 무슨 부작용인 것만은 확실하다.


친정 부모님에게는 박 서방이 둘이다. 큰사위, 작은사위 모두 박 씨이다 보니 함께 있을 때는 큰박 서방, 작은박 서방, 이렇게 부른다.


명절이면 그동안 일에 바빠 처가 나들이를 자주 할 수 없었던 우리의 박 서방들이 심히 힘들 때다. 여자들만 명절증후군이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박 서방들(김 서방, 이 서방, 정 서방 모두)도 못지않게 마음 쓰이는 구석이 많다. 꽉 막히는 도로를 뚫고 안전운행해서 가야지, 섭섭지 않게 지갑도 풀어야지, 동서들끼리 모여앉으면 밀고 당기며 위신도 세워야지. 더군다나 문화가 다른 처가 분위기에 맞춰 적당히 놀아줘야지.


지금은 조금 달라졌지만 여기서 큰박 서방 자랑을 살짝 할까. 장인 장모에게 앞서서 마음 써주고 챙겨드리니 살갑지 못한 맏딸로서 고맙다. 부모님이 나이 들어가면서 제일 원하는 건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인데 무엇보다 큰박 서방은 그걸 잘한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사연,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에게 이야기하기에는 공감을 얻지도 못할 것 같고 회한밖에 안 드는 슬픈 개인사를 어디에다 내뱉고 싶었을 것이다. “밖에 나가면 누가 뭐 내 얘길 구구절절 듣고 있으려고 하나? 난 이렇게 말만 할 수 있어도 한이 풀어지는 것 같다구.”


큰박 서방은 오래 듣고 앉아 있었다. 다음에 또 들을 요량으로 북쪽 고향 이야기를 남겨두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씨암탉도 한 번 못 잡아준 처가지만 그저 박 서방 고맙네.’ 그런 속말을 다 알 거라 믿으며.

 

서방은 순우리말이다. 옛날에 서방맞히다시집보내다의 뜻이고 지금도 함경도에서는 장가가다의 뜻으로 서방가다를 쓴다. ‘서방에 기어이 한자를 다는 호사가들은 서재를 뜻하는 서방書房과 사위를 서쪽에서 재웠다고 서방西房을 쓰는 예를 우리말에 잘못 가져다 단 것으로 보인다.


사전을 좀 더 찾아보면 서방는 사벌(상주), 서라벌(경주), 소부리(부여), 솔부리(송악), 쇠벌, 새벌(철원), , , , , 처럼 ㅅ계통의 말로 새롭다, 크다라는 뜻도 있다. ‘은 건설방(오입판 건달), 만무방(염치 없는 사람), 심방(만능무당), 짐방(싸전 짐꾼), 창방(농악의 양반 광대)에 쓰는 으로 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뜻의 우리말이다. 그러니 우리말의 서방은 書房이나 西房 아니고 새 사람, 큰 사람이라는 뜻으로 굳이 한자어를 달 필요가 없는 말이다.


일상도 감정도 슴슴해지는 나이에 오히려 신혼의 달달함을 구가하는 친구에게 남편을 어떻게 부르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철없던 시절의 친구가 남편 될 남자에게 모두 한 서방이라고 불러야 된다고 우기던 얼굴이 귀엽게 떠오른다. 누구는 남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어이, 서방.”, 아양을 떨어야 할 때는 우리 서방니임.”이라고 한다는데, 우습게도 나는 평생 불러보지 못한 호칭이다. ‘나의 새 사람, 나의 큰 사람이라고 불러준다고 그게 어디 낯간지러울 일이냐.



- 계간 동리목월 (2021겨울. 45)









 서정오 






서정오의 옛이야기 보따리를 좋아한다. 성인시각장애인 대상으로 우리 옛이야기 스토리텔링 수업을 할 때도 서정오 이야기를 주자료로 했다. 들려드리기에 좋은 입말로 씌어 있어 더욱 좋다. 누구는 잘나 보이고 싶은 욕심에 허위 사실도 아무렇지 않게 서류에 쓰고도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는 것 같은데 그런 욕심과 허영이 무엇에 다 소용이랴. 조금 모자란 듯 바보처럼 살면 어떠랴 싶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오랜만에 셋이서 밥을 먹고 야경이 좋은 산 속 찻집에서 차를 마셨다. 내 책을 본 아는 언니가 아이템을 잘 잡았다고 해서 속으로 놀랐다. 길게 말하기 싫어 그냥 좋아하니까요,라고 말했다. 아이템을 잘 잡고 안 잡고라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이템이라니 ㅎㅎ 이런 내가 '멍'한 건지 몰라도 '똑'한 사람들은 워낙 많으니. 언니는 오래도록 소설습작을 하고 있다. 내년쯤에는 단편이야기집을 내라고 응원했다. 변함없는 분! 


검암도서관에서 독서반을 오래도록 하는 글벗이 아침에 전화와 한 시간을 통화했다. 15명이 잘 유지하고 있고 목포로 이사간 한 분이 안타까웠는데 코로나 이후 줌으로 만날 수 있어 오히려 장점도 있더라고. 방금은 서울친구랑 잠시 통화했다. 늘 간명한 영감을 주는 친구 왈 우리는 모두 각자의 트루먼쇼를 펼치며 사는데 다른 사람은 다 알고 자신만 모르는 형국은 아닐까, 빗대어 말했다. 공감! 트루먼쇼의 주관은 저 위의 높은 분이겠지만 그 또한 명확히 아는 바 없고 그저 오늘도 감사하며! 한때 지적허영에 빠져 책도 많이 사고 그랬지만 이제는 많이 버렸다고 말한 친구다. 우리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독서토론을 하는 게 지적허영은 아니길 바라며 한 해가 저무는 무렵, 나 자신도 돌아본다.


서방,이라니 뜬금없이 생각난 사진. 크리스마스는 지났지만 아직은 2021년이다. 

모두 몸도 마음 따스한 날 보내세요^^




2017년 3월 18일 Bethlehem.  배혜경 아이폰 촬영


2017. 3. 18. 가시면류관도 상품화된 베들레헴 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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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27 14: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서방에 저렇게 좋은 뜻이 담겨있군요. 서정오님 옛이야기 들려주기 좋아합니다 ~ 서방이라 부르면 저희 남편 좀 무서워할 듯 합니다 ㅎㅎ

프레이야 2021-12-27 14:41   좋아요 3 | URL
아마도요 ㅎㅎ저희 집도 마찬가지에요.
한번도 입에 올려본 적 없는 단어라...
서정오 님 이야기 참 좋지요. 특히 입말이 재미나요.

책읽는나무 2021-12-27 15: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시동생이 있어서 나중에 도련님을 서방님이라고 어떻게 부르지???? 엄청 걱정되던데...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까진 서방님이라고 안불러도 되네요!!!ㅜㅜ
결혼하게 되면???하~~~
남편한테 서방님!!은 하~~~갑자기 공황장애가 올 것 같아요ㅋㅋㅋ
헌데...서방이란 단어가 참 좋은 뜻이었군요?
새 사람,큰 사람이 되란 말이군요!!!
남편한테 일러줘야 겠어요..새 사람! 큰 사람!!^^

프레이야 2021-12-27 15:15   좋아요 4 | URL
애들이 부르듯 삼촌~
헌사람 작은사람이 되는 것보단 나을까요 ㅎㅎ
님 먼저 해 보세요 공황장애 오는지 어떤지요 ㅋㅋ 생각만 해도 울렁증이.

얄라알라 2021-12-27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프레이야님의 기억 속에서 친구분은 ˝한 서방~˝하는 사랑스런 모습으로 찰칵, 스냅샷!
작가분의 친구가 되고 싶어요^^ 기억하시는 방식과, 말을 기억하시는 능력이 정말 작가분들은 다르신 듯!^^

프레이야 2021-12-27 16:38   좋아요 2 | URL
친구라서 고맙습니다 얄라 님
연도 몇날 몇시까지 기억한다고 어떤 친구는 경기합니다 ㅎㅎ 요샌 무뎌져서 그마저 흐릿할 때가 많아요. 아 옛날이여~

persona 2021-12-27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댁과 같은 말이었군요. 우리말 재미있네요. ㅎㅎㅎ

프레이야 2021-12-27 17:25   좋아요 3 | URL
새댁 맞네요 ㅎㅎ 새 집이네요
역시 집은 여자가!!

서니데이 2021-12-27 18: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베들레헴에선 가시관 굿즈를 판매하는 건가요. 크리스마스 장식하려고 둔 소품인줄 알았어요. 프레이야님 크리스마스 잘 보내셨나요.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프레이야 2021-12-27 21:58   좋아요 2 | URL
오늘 지난 집행부 마지막 모임 다녀왔는데 진짜 춥네요. 소감 한마디씩 하면서 전 또 그만 울었네요. 요새 왜 이렇게 짠한지요. 다들 좋은 분들이라 3년간 한 팀으로 일하며 정이 많이 들었어요.
가시면류관은 베들레헴 십자가의 길로 걸어가는 골목 상점에 판매하더군요. 남은 올해 하루하루 편안하게 알차게 지내세요 ^^

기억의집 2021-12-27 19:5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ㅋㅋ 저도요. 도련님은 부르겠는데… 서방님 소린 도저히 못 하겠더라구요. 전 도련님 소리도 우리 세대나 멋모르고 했지 .. 아마 요즘 애들은도련 소리 절대 안하지 싶어요 호칭 참 어려워요~

프레이야 2021-12-27 22:03   좋아요 1 | URL
사실 도련님도 좀 그랬어요 ㅎㅎ 구시대 호칭 아닐까요. 진짜 이제 그런 호칭 안 쓰면 좋겠어요. ㅋ 근데 뭐라고 부르죠 그럼? 그것도 모르겠네요. 서양식으로 그냥 이름 부를 수도 없고 애매하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1-12-28 12: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증후군이 있는 남편님들을 두신 분들이 부럽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시작으로 퍼지면서 시대가 조금씩 변화해 가는 거겠지요.
요즘 젊은 여성들은 결혼 전에 아예 시어머니로부터 며느리 역할을 면제 받는 일도 있다고 들었어요. ^^

프레이야 2021-12-29 00:48   좋아요 0 | URL
요즘 며느리는 결혼식날 잡고 시엄니 피부관리 티켓 선물하더군요. 며느리 역할 면제받으려면 어떻게 했을까 싶은데 어찌보면 딸부모 입장에선 좋다싶기도 하고 갈팡질팡이네요.

희선 2021-12-29 0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말이 한국말인데 그걸 한자로 쓰기도 했군요 서방을 찾아보니 書房서방이 나오네요 좋은 말인데 안 좋은 말로 쓰기도 하다니... 반대로 안 좋은 걸 아무렇지 않게 쓰는 일도 있을 듯합니다 영화 보고 책 읽고 독서토론 하는 건 즐거운 일이죠

프레이야 님 오늘 좋은 하루 보내세요


희선

프레이야 2021-12-29 07:54   좋아요 2 | URL
창밖으로 날이 밝았네요. 오늘은 또 저무는 한 해를 카운트다운하기 좋은 날이네요. 하루하루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두근대어요. 뜻밖의 좋은일 그렇지 않은 일 있겠지만 평화와 사랑이 중심에 있길 바랍니다.

굳이 한자 달 필요 없이 한글 이름 이쁜데 어떨 땐 한자가 달리면 뜻이 명확해지기도 하고요. 서방은 우리말 ^^
희선 님도 오늘 따뜻하게 보내세요.

han22598 2021-12-30 0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는 단어에 이렇게 다양한 이야기를 품을 수 있네요 ^^ 재밌어요 ㅎㅎ

그리고...지적허영심..맞다고 생각해요.
사실 이게 있어야..독서도 하고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탐구하고 질문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프레이야 2021-12-30 19:05   좋아요 0 | URL
넵. 허영이라 해도 착한 허영이면 좋겠습니다. 의도와 방향이 중요하겠어요^^ 한님 좋은 말씀 으샤으샤 고맙습니다.

서니데이 2021-12-30 2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저녁부터 다시 날씨가 차가워지네요.
프레이야님, 따뜻하게 입으시고 감기 조심하세요.
따뜻한 연말 보내세요.^^

프레이야 2021-12-30 22:07   좋아요 1 | URL
서니데이 님 하루 남은 한 해가 왠지 아쉽네요. 따스히 보내세요. ^^

처음처럼 2021-12-31 0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방이라고 불러주시는 분은 계시지만 서방님이라고 불러주는 경우는 아직도 없어서 아쉽네요.ㅎㅎ

프레이야 2021-12-31 16:34   좋아요 0 | URL
ㅎㅎ 그분도 저랑 비슷하신가 봅니다.
불러주시는 어르신 오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