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중반에 가지 한 박스가 왔다. 웬 건가 했는데 알고 보니 옆지기가 주문했던 것. 원래 들기름으로 무친 가지나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말린 가지로 더 맛나게 반찬해 먹자고 주문을 했던 것이다. 처음 해 보긴 하지만 한 박스에 거의 75개 정도 든 가지를 용감하게 단번에 쓱싹 칼질했다. 가지 하나를 꼭지 부분은 남기고 사등분 정도로 칼질해 주면 옆지기가 세탁소 옷걸이 하나에 대여섯 개를 걸어 널었다. 어디서 본 모양이다. 이렇게 말리면 된다고.
근사하게 말라가고 있었다. 8월23일 촬영
다하고 나니 옷걸이 수가 제법 되었다. 햇볕 잘 들고 바람 잘 통하는 베란다 쪽으로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 보았다. 비가 자주 왔고 흐린 날이 많아서 어쩌나 했지만 더디긴 해도 별탈 없이 잘 말라갔다. 처음엔 가지 무게에 축 처지던 빨랫줄이 어느 날부터 괜찮아지는 거다. 제 속의 물기를 날리면서 가벼워지는 기특한 것들은 점점 냄새도 달큰하게 풍겼다. 우리의 가지는 잘 있냐, 이러며 매일 들여다보길래 피식 웃었지만 나도 매일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신기해 했으니 뭐.
3, 4주 정도가 지났던가. 제법 모양도 좋게 잘 마른 가지를 옷걸이에서 다 걷어내어 꼭지 부분은 자르고 나머지 부분을 길이로 이등분하여 냉동실에 보관했다. 오늘까지 모두 4번 나누어 볶아서 다 먹었다. 굴소스, 진간장, 마늘다대기, 매실청, 들기름, 통깨. 내가 먹어봐도 꼬들꼬들 맛났다. 야채를 건조하면 영양가도 높아진다지. 오늘은 어머님에게도 반찬해서 보내드렸더니 맛나다고 전화가 왔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참 웃기는 게, 이제 다시는 안 해도 되게 생겼다.
첫 번째로 성공했던 마른 가지가 반 정도 남아 있는 시점에서 완전히 기분 상승해 있던 옆지기가 어느 날, 가지 한 박스 더 살까, 이러는 거다. 헉! 집중할 일도 있고 바쁘다고 했는데 이러니 시큰둥 놀랐지만 그 고집을 누가 꺾나. 한 박스가 또 배달왔고 이번엔 총 78개의 가지를 똑 같이 잘랐다. 손목이 좀 아팠지만 또 예쁘게 잘 마르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으니 여기까진 괜찮았다. 문제는 여기서 사람이 조금 편하려고 잔꾀를 부리면 안 된다는 것. 일을 조금 빨리 끝내려고 그랬는지 옷걸이 하나에 다닥다닥 붙여서 가지를 걸었다는 사실. 굳이 띄엄띄엄 널 필요 없겠더라고, 이러면서. 설마?, 했지만 그러겠다고 하니 별말 안 했는데 그게 문제였다. 한 옷걸이에 9-10개를 걸었으니 과밀지역에서 가지들은 숨을 못 쉬었을 수밖에 없었다. 9월 27일이 가지 한 박스 두 번째 건조의 1일차였고 이때까진 결과를 알지 못했다. 그저 첫 번째와 같이 잘 마를 거라고만 생각했지.
며칠 후부터인가 가지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자세히 보니 곰팡이가 피고 있는 것이다. 시커먼 곰팡이 부분을 잘라내면 또 있고 또 있고... 포자가 다 죽질 않고 퍼지는 모양이었다. 너무 다닥다닥 붙여서 널어 그렇다고 말해도 그 이유일리가 없다고 하니 기가 막혔다. 선풍기를 가져다 돌리지 않나, 햇볕이 더 잘 드는 반대쪽 베란다로 모두 옮기질 않나. 아무 소용 없었다. 그렇게 잘라내 버리고 또 잘라내 버리고 해서 지금은 먹을 만한 게 반도 안 남아있다. 내일쯤 옷걸이에서 다 걷어내면 한움큼 정도 되려나 싶다. 귀한 교훈을 얻은 거지. 아직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말은 절대 안 한다. 식품건조기 살까 하다 그것도 안 하기로 했다. 물건을 더 사는 건 안 하는 걸로. 다음엔 말린 가지 1킬로 주문하자, 이런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굳 아이디어!!
여기서 몇 년 전 썼던 글 '변신'을 발췌해 옮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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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관처럼 코를 가까이 댄다. 달콤하지도 상큼하지도 않은 냄새가 얌전히 안겨든다. 오래된 책갈피에서 나는 도타운 냄새다. 만지면 부서질 듯 가녀린 꽃잎 위로 시간의 살비듬이 포슬포슬 내려앉았다.
조금은 지쳐 있던 그해 봄, 아주 커다란 꽃바구니를 배달받았다. 이런 걸 보낼 사람이 없는데 싶어 수신인을 재확인했다. 발신인은 적혀 있지 않았다. 둥그런 등바구니에 선홍색 물이 묻어날 것 같은 한아름 장미가 터질 듯 들어앉아 있는데 앞다투어 내민 얼굴을 대충 헤아려봐도 이백 송이는 되어 보였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바구니를 안으로 옮기려다 긴 리본에 적힌 고전적인 글귀에 발이 걸렸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던 날을 상기했다. 설렐 일이라곤 없을 줄 알았는데, 이런 방식의 고백이라니! 오래전 멀리 떨어진 어린 아내에게 손편지로 보내오던 눈 맑은 이등병의 글귀가 떠올랐다. 비무장 상태에서 변칙적인 한 방에 낯이 간질간질 가슴이 두방망이질해댔다. 집안 한가운데쯤 피아노 옆자리로 옮겨놓으니 은은한 향취가 온 집에 맴돌았다. 일주일이 그렇게 솔솔 흘러갔다.
날이 갈수록 꽃송이들이 변해갔다. 근사한 마른 꽃이 되어가는 모양새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향기는 옅어지고 물기는 차츰 날아가 파슬파슬해졌다. 한껏 부풀었던 꽃송이는 부피가 줄고 붉게 타던 겹겹의 꽃잎은 시간이 갈수록 색이 짙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부터 힘을 빼고 색을 벗어 버렸다. 그야말로 인기 있는 립스틱 색상명, 말린 장미꽃 색이 되었다. 무심한 듯 차분하게 열정을 잘 다독인, 편안하면서도 세련미를 풍기는 색상이었다.
마른 장미꽃 바구니를 일 년이 넘도록 버리지 못했다. 먼지가 된 시간을 온몸으로 안으며 거듭 피어난 꽃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습윤이 증발하고 잘린 줄기의 먼 기억이 부른 은근한 흙냄새가 꽃잎 위로 켜켜이 쌓여가는 시간의 분진粉塵을 말해 주었다. 다음 해 기념일을 맞이하고도 한참 지난 후에야 이별을 마음먹었다. 아이들이 스치고 지나다니며 꽃이파리가 바스러지는 게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못내 아쉬워 한 묶음 남겨 낮은 장식장 위에 정물로 앉은 청화백자 푼주에 뉘어두었다. 직립해 있던 꽃가지들이 또 다른 자리를 찾아 누운 모양새가 보기에도 썩 좋았다.
마른 꽃을 좀 더 오래 고이 간직할 순 없을까. 먼저 한 다발을 적당히 모아 꽃잎에 헤어스프레이를 살짝 뿌려주면 이쁜 모양새로 말리는 데 도움이 된다. 잘린 줄기 끝이 하늘을 보도록 거꾸로 매달아 둬야 하는데,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이면 최상이다. 햇빛이 센 곳에 두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금세 시들어 버린다. 물기가 서서히 증발하지 못하고 일순간에 다 타버리는 것이다. 무모하고 성급한 정열에 심신을 소진하고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 이카로스의 밀랍 날개를 생각한다. 모든 일에는 온전한 마음과 적절한 기술과 좋은 타이밍이 요구된다. 일도 사랑도 그렇다. 정성은 오래, 전부 쏟아야 진가를 발휘한다. 꽃을 말리는 일도 그렇다.
(중략 _ 이 부분은 엄마의 뜨개질 내용)
대중목욕탕에서 고화枯花를 본다. 연로한 몸에는 덧없는 홍조의 시절을 건너 고갱이로 남은 마른 꽃이 알록달록하다. 생의 갈증을 이기고 풍화를 견뎌온 연륜의 꽃은 인고의 삶과 지혜의 덕망을 품고 있다.
변해가는 건 생화生花만이 아니다. 우리가 그려가는 동행도 고화枯花로 변신 중이다. 벨 듯한 향기 대신 무향의 몸을 부대끼며 무언의 말을 나눈다. 부딪혀서 금 가고 부서지지 않도록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말 한마디 삼키고 무던히 지나가는 날이 많다. 어디쯤에서 넘어지고 다치는지 이해하게 되기까지 천 개의 그늘과 만 개의 바람이 필요하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는 진실이다.
시간은 숨이다. 시간은 베일에 가린 우리 삶의 안자락을 춤추듯 들고 난다. 꽃은 그 시간을 야금야금 먹고 느린 숨을 쉬며 새로이 몸을 연다. 연지 바른 입술은 푸르죽죽한 맨살을 보이고 강퍅하게 제 향만을 뽐내던 허욕의 길을 돌아 나와 단출하게 홀로 선 자의 자태다. 보잘것없는 몸을 가려준 허식의 옷을 벗고 겨울숲으로 걸어 들어간 자의 뒷모습이다.
뜨개실을 풀어 새로 감듯 안과 밖을 되감는 중이다. 바람 좋은 창가에 말라가는 내 안의 꽃을 매단다. 그런대로 괜찮은 풍경이 되길.
* *
그런데 가지 꼭지에 영양분이 다 모여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다 버렸는데 아깝다. 가지 꼭지가 눈에도 좋다고 하여 당장 주문했고 이틀 후 요렇게 깨끗하게 말린 가지 꼭지가 왔다. 냉장실에 넣어두고 꺼내 쓴다. 가지 꼭지에는 가시가 있으니 맨손으로 덥석 잡다가는 아얏,하는데 말린 가지 꼭지는 괜찮다. 끓여서 마셔 보니 구수하다.^^
드라이플라워도 그렇고 가지를 말리는 일도 그렇고 사이라는 이름의 바람이 들고나는 시간의 숨을 생각하게 한다. 사이는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의 영지에서도 중요하다. 더구나 천공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그대들의 공존에 거리를 두라는 칼릴 지브란의 문장이 생각난다. 수분이 빠지고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들!
고등학교에 입학한 해, 검정색 표지의 <예언자>를 엄마가 데려간 동네서점에서 '어린 왕자'와 같이 내가 골랐던 기억이 있다. 그 책은 언젠가부터 사라지고 안 보이지만... 대신 강은교 번역의 양장본을 중고도서로 갖고 있다.
이런 문장의 의미를 십 대 그때는 몰랐겠지.
칼릴지브란 / 강은교 역
결혼에 대하여
그러자 알미트라는 또 다시 물었다. 그러면 스승이여, 결혼이랑 무엇입니까?
그는 대답했다.
그대들은 함께 태어났으며, 또 영원히 함께 있으리라.
죽음의 흰 날개가 그대들의 생애를 흩어 사라지게 할 때까지 함께 있으리라.
아, 그대들은 함께 있으리라, 신의 말없는 기억 속에서까지도.
허나 그대들의 공존에는 거리를 두라, 천공의 바람이 그대들 사이에서 춤추도록.
서로 사랑하라, 허나 사랑에 속박되지는 말라.
차라리 그대들 영혼의 기슭 사이엔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서로의 잔을 채우되, 어느 한 편의 잔만을 마시지는 말라.
서로 저희의 빵을 주되, 어느 한 편의 빵만을 먹지는 말라.
비록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저마다 외로운 기타 줄들처럼.
서로 가슴을 주라, 허나 간직하지는 말라.
오직 삶의 손길만이 그대들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허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서 있는 것을.
참나무와 사이프러스나무도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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