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는 시인인가? 서평가인가? 우매한 질문이다. 그는 시인이면서 서평가니까. <글쓰기는 스타일이다>를 채 읽지 못했는데 언제 또 서평집을 내신건지. 고즈넉한 시골에서 읽고 쓰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을 그가 좋아하면 반갑고 (아, 당신도!) 모르는 작가의 책이 나오면 나의 무지를 들여다 볼 수 있어 좋다.
사계절 동안 그가 함께한 책들을 따라가 본다.
봄.
벤야민의 <일방통행로>로 시작된다. 도서관에 갔더니 이 책과 함께 <발터벤야민의 공부법>과 <가면들의 병기창>이 새로 들어와 얼른 집어왔다. <일방통행로>는 읽었지만 <베를린의 어린 시절>과 <아케이드 프로젝트1,2>를 아직 읽지 못했다.
벤야민 공부하라는 계시인걸까.
롤랑 바르트의 <애도일기>
최근에 바르트의 <롤랑 바르트의 마지막 강의>를 봐도 바르트의 어머니 사랑은 절절하다. <애도일기>가 나온지는 몰랐다.
시인은 나보코프의 <롤리타>를 다시 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나 역시 다시 읽고 싶다. 첫 문장에 홀딱 반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구나.
롤리타, 내 삶의 빛, 내 몸의 불이여, 나의 죄, 나의 영혼이여, 롤-리-타. 혀끝이 입천장을 따라 세 걸음 걷다가 세 걸음째에 앞니를 가볍게 건드린다. 롤.리.타
김동규? 나로선 금시초문이다. 시인은 김동규의 <철학의 모비딕>,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멜랑콜리 미학>을 읽었다고 한다. 하이데거 전공자인 듯.
이어 한병철의 <피로사회>와 <시간의 향기>
한병철은 프루스트의 소설에서 빌려 온 “고요한, 맑은 울림과 향기를 지닌, 투명한” “수정의 시간”에 대해 말하며, 그 시간이 지속의 감정이 온전하게 유지되도록 만들고, 마침내는 “향기가 지닌 시간적 연장성 덕택에 자아는 자기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말한다. 향기로운 시간의 수정의 경험은 “해체의 위협에 직면한 자아를 하나의 동일성 속에, 하나의 자화상 속에 안착하게 해줌으로써” 행복한 느낌을 주는 자기 귀환에 이르게 한다.
“고유하게 존재하는 자는, 말하자면 늘 시간이 있다. 그가 항상 시간이 있는 것은 시간이 곧 자기이기 때문이다.”
난 늘 시간이 있는데, 내가 시간이었던 거얌??
좋은 삶은, 하이데거의 용어를 빌리자면, “머뭇거림”, “느긋함”, “수줍음”, “기다림”, “자체”가 온존하는 삶, “오직 일만 하는 어리석음”에 맞서는 지혜로운 삶, 바로 느림과 지속성을 거머쥐는 “사색적 삶”이다.
임형남, 노은주의 <이야기로 집을 짓다>는 건축을 이야기로 푼 책이라고 한다. 재밌겠다.
정지돈의 <건축이냐, 혁명이냐>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에 적당할 듯.
데리야마 슈지 <책을 버리고 거리로 나가자>
데리야마 슈지라는 미치광이가 있었다니! 그의 영화를 아직 보지 못했다. 와, 짧고 굵은 삶이다.
최근에 <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과 손열음의 <하노버에서 온 음악편지>를 재밌게 읽었다. 이런 류의 책들을 더 읽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리셀 셔면의 <피아노 이야기>가 그러한 책일 듯.
좋은 연주자란 벌레나 독사, 시와 철학, 소리의 현상학과 인체 공학에 두루 조예가 있어야 한다. “피아노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건반위의 철학자’라니. 확 끌린다.
권오운, <우리말 소반다듬이>
시인은 우리말을 굴려 먹고사는 작가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권혁웅, <몬스터 멜랑콜리아>
오, 역시 권혁웅이다. 언제 또 온갖 괴물들을 모아 놓았단 말인가.
정수복, <파리를 생각한다>
아, 파리를 생각하다니, 파리는 느껴야지.
정수복의 <파리를 생각한다>를 읽으며 파리의 골목들을 더듬고, 노상카페에서 한가롭게 차를 마신다. <파리를 여자였다>(안드레아 와이스). <셰익스피어 &컴퍼니>(실비아 비치), <시간이 멈춰선 파리의 고서점> (제레미 머서), <파리의 좌안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를 함께 읽어도 좋다.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달팽이 안단테>
달팽이와의 1년 동안 동거의 기록이라니, 재밌을 듯.
자크 랑시에르, <감성의 분할>
<감성의 분할>은 해묵은 과제, 즉 예술 일반 혹은 미학적인 것의 자율성을 정치 윤리성의 맥락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따져 묻고 그 본질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강석경, <신성한 봄>
시인은 토지문학관 입소, 도서실에서 강석경의 신작 <신성한 봄>을 집어와 단숨에 읽었다고. 손이 데일 듯 뜨겁다는 강석경의 문장들.
태고의 욕정, 호모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대물림한 바람 소리 숭숭 나는 욕정, 끝없이 욕구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류의 야성이며 기갈든 황무지. 네 배꼽을 어미 짐승처럼 핥아주고 정액을 연유처럼 들이켤게, 네 뱃가죽 위에서
죽어도 좋아.
이거, 무시무시하다.
니나 상코비치, <혼자 책 읽는 시간>
날마다 책 한권 일기를 실천하는 여자의 자전체 체험과 책 이야기를 섞은 흥미로운 책이라고. 사랑하는 언니의 죽음을 이겨내기 위해 그녀는 자기 치유의 수단으로 책을 읽었다. 1년 동안의 그녀의 독서 원칙을 따라가 보는 건 ?
어떤 저자의 책도 한 권 이상은 읽지 않는다.
이미 읽은 책은 읽지 않는다.
읽은 책에 대해서는 모두 서평을 쓴다.
새 책, 새 저자의 책을 읽는다.
좋아하는 작가의 옛날 책을 읽는다.
하루에 다섯 권도 읽을 순 있다. 1년 내내 하루에 한 권 씩 읽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네 아이를 돌보면서 가사 노동을 하는 중임에도 하루에 한 권 씩의 책을 읽었다니! 거기다 서평까지. 생계걱정만 없다면 평생 저렇게 살고 싶다.
매일 나는 모든 책과 저자와 등장인물들과 결론에 대해 읽고 삼키고 소화하고 생각했다. 나 자신을 저자가 창조한 세계에 푹 담그고, 삶의 변화와 전환을 다루는 새로운 방식들을 목격했고, 유머와 감정이입과 연결의 도구를 발견했다.
이브 파칼레, <걷는 행복>
크리스토프 라무르, <걷기의 철학>
조지프 A 아마토,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
레베카 솔닛, <걷기의 역사>
다비드 르 브르통, <걷기 예찬>
‘걷기’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걷기’란 “사소한 움직임들이 한데 모여 전체가 된 것” (조지프 A 아마토, <걷기, 인간과 세상의 대화>)이고, “뼈와 힘줄, 근육, 신경충격의 일이다. 한마디로 에너지 이동의 문제”(이브 파칼레, <걷는 행복>)이다.
한스 페터 뒤르, <나체와 수치의 역사>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로저 트리그, <인간 본성과 사회생물학>
다 벗고 살순 없는 걸까. 안 되겠지.
나체일 때 사람들은 더 ‘현재적’이 됩니다.
과거(걱정)나 미래(계획)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현재의 순간에 의미를 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더 상처받기 쉽고 의식적으로 더 자주
더 많이 자각하게 되고 더 많이 느끼게 되고,
그래서 더 자유롭고 더 진실하게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 필립 카곰, <나체의 역사>
나체가 음란한 게 아니다. 나체를 음란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관념, 위선적 도덕의식, 체면이 음란한 것이다.
한병철, <피로사회>
에밀 시오랑, <절망의 끝에서>
에밀 시오랑, <독설의 팡세>
더는 잃을 것도 없는 상태, 인생의 밑바닥, 그 절망의 나락에 빠졌을 때 거기서 나올 수 있는 힘은 다름 아닌 절망에서 나온다. 용기를 내서 말하자면, 지금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절망의 감수성’, 혹은 절망에 반향되어 나오는 ‘부조리에 대한 정열’ 따위가 아닐까? 바로 분노, 혹은 광기로 치달을 수 있는 요기에서 현실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동력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에밀 시오랑, 루마니아 철학자. 처음 듣는 이름이다. 극작가 이오네스코, 신화학자 엘리아데와 더불어 루마니아 출신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란다. 인용된 문장만 보아도 그의 역설과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인간은 삶과 죽음에 유예되어 영원히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의 비극을 살고 있다. 내가 인간이라는 것이 지긋지긋하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즉시 인간임을 포기하리라.
원할 때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살고 있다. 자살이라는 가능성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오래전에 자살했을 것이다.“
에밀 시오랑은 84세까지 살았다고.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이 세상이 의미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모든 것은 결국 무로 귀착되며,
세상의 법칙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면서 끝없이 번민하는 인간의 불행 속에서
나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나 같은 인간이 있다는 것은 삶이라는, 태양 위를 덮고 있는 어둠이 너무 커서
결국 빛을 가리게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김현진, <뜨겁게 안녕>
<뜨겁게 안녕>은 거대도시에서 빈민으로,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뜨겁게 이 사회와 몸 비비며 사는 20대의 거침없는 서울 생활 사수기거나 분투기다.
서효진, <이게 다 야구때문이야>
비정규직 노동은 야구의 ‘원포인트 릴리프’와 닮아 있다. 투수가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투수판을 내려오는 때가 있는데, 이게 ‘원포인트 릴리프’다. 서효인은 모든 투수의 꿈인 ‘퍼펙트게임’을 이렇게 적는다.
결국 실패하겠지만, 다음 등판이 남아 있다.
실패의 예정, 그리고 도전, 사는 것 자체가
‘퍼펙트게임’이니까.
파울볼은 ‘일시적 유예’ 상태다. 파울볼을 쳐낸 타자는 아웃되지 않고 다시 타석에 들어설 수 있다. ‘파울 볼’은 ‘아직 죽지 않았어. 그러니 힘내’의 줄임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500권, 피도 살도 안 되는 100권>
다치바나 다카시, 사토 마사루, <지의 정원>
폴 드 만 <독서의 알레고리>
요네하라 마리, <대단한 책>
시인이 시골로 내려간 건 2000년 여름이었다고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책을 읽기 위해. 시인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부러울 따름이다.
세상에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그보다 조금 덜 읽은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아간다. 책을 더 읽었다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책에 몰입하고 뭔가를 창조해낸 사람들 덕분에 이 세상은 보다 더 살 만한 세상이 된다는 건 사실이다. 밥을 먹듯이 날마다 책을 골라 읽어라. 세상의 혼란과 잡담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척도로 온전히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그렇게 하라!
파리누쉬 사니이, <나의 몫>
저자는 현대 이란 여성 작가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중간에 읽기를 멈출 수 없을 만큼 이야기는 생동한다고.
윤구병,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윤구병, <흙을 밟으며 산다>
윤구병, <꿈이 있는 공동체 학교>
아 부끄럽다. 나는 윤구병이란 이름도 금시초문. 국립대 교수자리를 작파하고 변산에 내려가 농부가 되어 공동체를 이끄신 분이라고 한다. 윤구병은 화학비료, 제초제, 농약을 쓰지 않는 ‘삼무농법’에서 더 나아가 비닐 안 쓰고, 항생제, 방부제 섞인 사료로 빚어진 짐승 똥으로 만든 유기질 비료 안 쓰는 ‘오무농법’을 고집, 병들고 썩어가는 땅을 되살려냈다. 동네 노인들도 “농사의 ‘농’자도 모르는 젊은 것들이 땅심을 되돌려놓았구먼”하며 찬사를 쏟아냈다고.
엘렌 디사나아케, <미학적 인간 – 호모 에스테티쿠스>
움베르토 에코, <미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출구>
문광훈, <숨은 조화 –심미적 경험의 파장>
박항률, 누구지 싶었는데 글을 읽고 보니 얼마 전 읽은 정호승 시인의 산문집 표지 그림을 그리신 분이다.
박항률의 그림에는 소녀와 소년들이 등장하고 그 배경에는 주로 새와 나비와 꽃이 나온다. 이 작은 오브제들은 화폭 안에서 매우 정적으로 배치된다. 고요는 고요 그 자체로써 영원성이라는 의미를 얻고 이 생명들이 처한 근원적 현존의 장으로 바뀐다. 박항률은 만질 수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고요를 그려내는 화가다. 고요는 마음의 해탈을 가리키는 표상이다.
2015. 7.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