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지 이게? 네 권? 네 권 읽었다고?! 아무래도 믿기지가 않아 도서관 대출 이력을 조회해봤다. 이것도 안 읽었고, 이건 읽다 말았고.....헐 맞네. 네 권. 아뉘. 네 권 읽을 동안 왜 몰랐을까??
12월 달 그만큼 정신이 없었나 보다. 기존의 일과 병행하여 새로운 일을 시작했는데, 휴, 육체적으로 이렇게 힘들 거라고는 미처 예상을 하지 못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책 볼 겨를이 없었나 보다. 조지 오웰의 <파리와 런던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패로디한 <서울과 경기에서의 밑바닥 생활>을 쓰고 싶을 정도로 최하층의 직업을 전전하는 중이다. 이번 직업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거다. 일반적 상식으론 내 나이에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므로.
아, 맞다. 한 권 더. 카프카, <소송>을 읽었다! 다섯 권!!
네 권 읽은 주제에 민망하긴 하지만 이달의 책으론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를 꼽아야겠지.
카프카의 <소송>을 빼먹다니. 미안하다. 하라리. 이달의 책으론 카프카의 <소송>을 뽑는다.
로쟈님의 카프카 강의를 신청했었더랬다. 난생 처음이었다. 강의를 신청하기는. 며칠 동안 아무 연락이 없어 포기하고 있었는데, 강의 하루 전날에서야 문자가 왔다. 가고 싶긴 했지만 이미 다른 일정을 잡아놓았기에 갈 수가 없었다. 며칠이라도 일찍 통보해주면 안 되는 시스템인걸까?
1.어쩌면 이것이 카프카. 라이너 슈타흐.
저자인 라이너 슈타흐는 카프카 전기만 세 권을 쓴 사람이다. 몇 가지 일화를 제외하고는 왠지 전기에 다 담을 수 없었던 부스러기들을 긁어모은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든다. 카프카 소설에 대해서는 전혀, 카프카 에 대해선 아주 자질구레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카프카 덕후가 더 이상 읽을 만한 카프카에 관한 책이 없다면 읽어봄직하다. 카프카에 전혀 관심 없던 독자가 카프카를 알기 위해 이 책을 읽겠다면 스토커처럼 쫓아다니며 말리고 싶다.
어쩌면 이것은 카프카가 아니다.
2. 카프카답지 않은 카프카. 묘조 기요코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지 않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는 거다. 전기로부터 출발하면 소설의 모든 문장을 작가의 삶과 연관시키려는 욕망을 자제하기 어렵다. 묘조 기요코의 일종의 망상록. 카프카기에 이런 망상이 쓰여지는 거겠지.
작가의 말처럼 해석은 “절망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특히나 카프카라면.
3.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놀라울 뿐이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책 두께를 다시 보고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걸 다 읽었다고? 인문과학 책 중 이 정도의 가독성을 보유한 이가 누굴까?
‘자유의지’를 논한 파트가 가장 흥미로웠다. 나는 여전히 ‘자유의지는 있는가 없는가?’ 고민중이었건만 유발 하라리는 없다고 잘라말한다. 영혼도 없고 자아도 없다.
‘자유의지를 지닌 개인 따위는 없다’는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기술’이라니!
아뉘, 언제부터, 없어진거얌??!!
어쩌면 이 부분이 <사피엔스>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 아닐까 싶다. 내 동생은 “<사피엔스>랑 똑같아”라고 했는데, 아니, 똑같지가 않다. <사피엔스>때만 하더라도 사피엔스에게는 미래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다. <호모 데우스>에선 사피엔스에겐 자유 의지 따위는 없다. <호모 데우스> 뒷 표지엔 “우리는 어떤 운명을 선택할 것인가?”라고 쓰여있지만 자유 의지도 없는 일개 데이터 처리 과정이 무슨 운명을 선택해??
<사피엔스>에서 제시됐던 실날같은 희망의 끈마저 끊긴 셈이다. ‘하라리의 알고리즘’대로라면 미래는 이제 불 보듯 뻔하지 않은가? 데이터를 장악한 소수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 것이고, 나 같은 천민은 자본주의의 노예였듯 이제 ‘데이터교’의 노예로 살아가야 된다.
‘무엇이 더 나쁠까?’가 기껏해야 우리가 던질 수 있는 물음이다.
예전엔 누군가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읽고 한동안 우울증에 빠졌다고 했던데, 나는 <호모 데우스>를 읽고 우울해졌다. 2017년도에 읽은 가장 우울한 책이다. 그래도 걱정할 건 없다.
이건 그저 데이터 처리 과정일뿐이니까.
4. 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원래 북유럽 신화는 이렇게 웃긴 걸까? 닐 게이먼의 탁월한 윤색 덕분이려나? 여장한 토르라니?! 읽으면서 연신 낄낄댔다. 신화는 그야말로 상상력의 ‘이그라드실’이다. 북유럽 신화가 없었다면 <반지의 제왕>도 없었고, <왕좌의 게임>도 없었고 <진격의 거인>도 없었겠지.
어떻게 이런 상상력이 수천년 전에 이미 있었던 걸까? 어떻게 현대의 그 어떤 캐릭터보다도 복잡한 록키같은 캐릭터를 상상해낼 수 있었을까?
‘허구를 상상해 내는 능력’은 사피엔스의 가장 경이로운 재능이다.
5. 소송, 카프카
읽었다고 생각했지만 읽다보니 자신이 없어졌다. 카프카 책을 읽다보면 ‘어, 나도 이런 꿈꾸었는데 ’하곤 하는데, 아마도 대다수 독자들도 그렇게 느끼지 않을까. 소설을 읽는 도중에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지 책을 읽고 있는 건지 오리무중일 때가 있다. 실로 ‘카프카적인kafkaesk’적인 체험이다.
<소송>에는 전설적인 우화 <법 앞에서>가 삽입되어 있다. <법 앞에서>를 읽다보면 카프카가 얼마만큼 치밀한 작가인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9장 대성당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의 대심문관 장면이 연상될 정도로 강력하다.
소설의 마지막 피날레 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면 <소송>을 읽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런 결말을 기억 못하다니!!
이거야말로 부조리의 극치가 아닌가.
정말 “개 같군”
하루키의 소설을 읽다 카프카로 꼬리를 문 셈인데, 카프카와 하루키에 대한 평론들을 읽어보니, 평론가들은 ‘아님 말구식’으로 구체적 논리도 없이 얼토당토 않는 ‘해석’을 얼뜨기 닌자가 날리는 표창처럼 마구마구 날리더라. 그래서 나도 함 날려봐야겠다. (나는 댁들처럼 평론가도 아니라구.)
하루키는 아마도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 전에 카프카의 소설, 전기, 그리고 카프카 평론 등을 대충은 리서치 삼아 읽었을 것이다. 하루키처럼 성실한 작가가 아무런 조사 없이 카프카와 같은 대작가의 이름을 제목으로 대책 없이 갖다 붙이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는 아무래도 카프카의 <실종자>를 모티프로 삼았을 것이다. 그런 추측을 하는 이유는 우선은 나이 때문이다. <실종자>의 주인공 카알 로스만은 17세로 설정되어 있다. 원래 카프카가 설정하고 싶었던 카알 로스만의 나이는 15세라고 한다. <해변의 카프카>의 다무라 카프카의 나이가 15세다. (그 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지면관계상 생략)
아니라구?? 아님 말구.
또한 <해변의 카프카>를 쓰기 위해 카프카 소설을 읽던 중 하루키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특히나 카프카의 <소송>. 요제프 K는 이탈리아 고객을 기다리기 위해 대성당으로 간다. 그곳에서 요제프 K는 어둠속에서 손전등을 비춰 제단화를 유심히 살펴본다.
“K가 맨 처음 보고서 어림짐작으로 일부나마 알아본 것은, 제단화 가장 바깥 쪽 가장자리에 그려진 큰 키의 갑옷 입은 기사였다. 그 기사는 자기 앞의 맨땅에 – 몇 개의 풀 줄기만 여기저기 자라고 있을 뿐이었다. - 꽂아놓은 칼에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 앞에서 벌어지는 어떤 사건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것 같았다. 가만히 서서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이 놀라웠다. 아마 감시 하는 게 그의 임무가 아닐까.”
- 카프카, <소송> p272
이 한 문장 때문에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아이디어 전부를 얻었다고 볼 수 없다. 단, 저 한 문장이 소설 전체를 촉발했을 수는 있다. 하루키는 고야마 데쓰로와의 인터뷰에서 이미지를 축적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해 준 적이 있다.
“이를테면 어떤 하나의 비유나 묘사의 이미지가 있으면 다른 이미지 사이에 ‘차이’와 ‘어울림’을 고려하면서 서로 모아간다. 그러면 ‘차이’와 ‘어울림’에 따라 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생긴다. 이 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재차 만들어내는 방향성에 따라, 이미지 그룹을 다시 ‘차이와 ’어울림‘을 생각하면서 모아가면 재집적된 이미지 그룹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하나의 이미지를 다른 이미지와 분류하고 집적해가는 과정을 반복해서 확산해 가면 차츰 작품 전체의 이미지가 윤곽을 드러내게 된다는 식의 설명을 열심히 해주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p92.
즉 하루키는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그 이미지로부터 연상되는 다른 이미지들을 긁어모은다. <기사단장 죽이기>는 ‘기사’라는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출발했다는 게 나의 가정이다. 그런 점에서 하루키 소설은 일종의 ‘자유 연상’소설이다.
아니라구? 아님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