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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2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ㅣ 한국 현대사 산책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이승만 민간인 학살의 원년. 48년 이후로 백 만명의 국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희대의 살인마를 국부라고.
419 혁명을 통해 국민이 쫓아낸 독재자가 이승만이다. 이승만을 국부라 칭한다는 건 대한민국 헌법의 기초가 되는 419를 부정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승만의 백만 명 학살을 지지한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므로,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 이게 빨갱이 아닌가.) 이승만을 국부라 부르는 것들, 법으로 엄정히 다스려야한다. 국회의원들은 왜 멍하니 있는 걸까.
1월 7일, 인도인 의장 메논을 위시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입국했다.
2월 7일, 남로당은 강경 투쟁의 일환으로, 2.7 파업을 일으킨다.
2월 10일,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담긴,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발표한다.
3월 12일, 유엔위원단은 찬성 4개국, 반대 2개국, 기권 2개국으로 남한만의 단독 선거에 찬성한다. 한민족의 분단을 반대한다는 연설을 했던 의장 메논은 이승만이 계획한 모윤숙의 ‘미인계’에 마음을 돌린다. 모윤숙은 대표적인 친일파 작가기도 했건만, 한민족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패륜을 저질렀다.
정경모는 “한국의 진짜 건국의 아버지는 인도인 메논”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같은 날, ‘7거두 공동성명’이 발표된다. 7거두는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 김창숙 등을 일컫는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는 동족상잔의 참화를 불러올 것이라는 것.
2월 14일, 공창제도가 폐지된다. 공창은 폐지되었으나, 매춘부 2천 여명은 대부분 사창으로 전업한다. 육체적 매음과 정신적 매음 중 무엇이 더 더러운까. 채만식은 <낙조>에서 ‘춘자’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지.
“난 양갈보야 난 xx놈한테 정조를 팔아먹었어. xx놈의 자식이 애 뱄어. 그러니까 난 더런 년야.......그렇지만서두 난, 누구들처럼, 정신적 매음을 한 일 없어. 민족을 팔아먹구 민족의 자손까지 팔아먹는 민족적 정신 매음은 아니했어. 더럽기루 들면 누가 정말 더럴꾸? 이 얌체빠진 서방님네들아!”
제주 4. 3 항쟁
4월 3일, 350명의 무장대가 제주도 내 12개 지서를 공격한다. ‘제주 4. 3항쟁’의 시작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30만 명으로 알려져있다. 이중 10%인 3만 명이 빨갱이라는 죄명으로 살해당했다. (8만명이 살해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47년 3. 1 사건 이후 제주도민과 친일 경찰들이 자주 충돌했었다고 한다. 3월 우도와 중문리 사건, 6월 종달리 사건, 8월 북촌리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48년 3월, 청년 3명이 경찰의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민심이 동요하였다.
4월 22일부터 경비대와 무장대의 평화협상이 체결된다. 그러나 협상 사흘만에 우익청년단이 제주읍 오라리 마을을 방화하는 세칭 ‘오라리 사건’이 벌어진다. 5월 3일 미군이 경비대에게 총공격을 명령한다. 협상 결과만 믿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에게 경찰이 총격을 가한다. 당시 경비대 연대장 김익렬은 이렇게 말했다.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도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
김익렬이 경찰의 행동을 의심할만한 증거물과 사진첩을 제시하자, 경무부장 조병옥은 김익렬을 빨갱이로 몬다. 김익렬은 해임되고 서울에 가서 경비대사령관 준장 송호성에게 보고한다. 김익렬의 보고를 들은 송호성은 “제주도 사람은 이제 다 죽었구나”하고 걱정했다고 한다.
5월 15일 11사단이 제주도로 들어온다. 기존의 9연대는 11연대에 합편된다. ‘무차별 체포’ 작전을 펼친 박진경은 미군의 인정을 받아 대령으로 진급하지만 하사 손선호에게 살해당한다. 손선호는 박진경 살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우리가 화북이란 부락을 갔을 때 15세 가량 되는 아이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껴안고 있는 것을 보고 무조건 살해하였다. (중략) 사격 연습을 한다고 부락의 소 기타 가축을 난살하였으며 폭도의 있는 곳을 안다고 안내한 양민을 안내처에 폭도가 없으면 총살하고 말았다. 또 매일 한 사람이 한 사람의 폭도를 체포해야 한다는 등 부하에 대한 애정도 전연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발생하게 된다. 미군정은 군대, 경찰, 서북청년단을 위시로 한 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명했다.
4월 19일, 김구는 남북 협상을 위해 북행길에 오른다. 이후 홍명희, 조소앙, 조완구, 엄항성, 김규식 등이 북으로 출발한다.
4월 30일 김두봉의 집에서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두봉의 ‘4김 회동’이 열린다.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실시된다. 김구, 김규식은 거부한다.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승리라고 선전했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이야기 였다. 한 외신기자는 이렇게 보도했다.
“민간 경비대원은 도끼자루, 야구배트, 곤봉 등을 휴대하고 있었고 모든 조선 경찰은 미국 카빈 총으로 무장하였다. 선거일은 휴일이나 분위기는 계엄하의 도시와 같았다. ”
친일경찰 문제로 조병옥을 비판했다가 사직한 최능진은 5. 10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갑구에 출마해 이승만과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측의 방해공작으로 등록 무효 선고를 받아 이승만은 무투표 당선되었다.
중도파와 좌파들의 선거 보이코트는 과연 옳았을까? 대다수의 사학자들은 선거 보이코트가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합법화 길을 열어 주었다고 평가한다.
7월 12일, 제헌국회는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했다. 7월 20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180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된다.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내외에 선포하는 기념식이 거행된다. 이승만의 기념사는 주로 맥아더에 대한 찬양의 말 뿐이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찬사는 없었다. 12월 12일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했다.
9월 9일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으며, 김일성을 수상으로 하는 각료가 구성된다. 김일성의 ‘국토 완정론’에 따르면, 평양은 ‘임시 수도’이고, 남한 공산화를 통해 서울을 수도로 삼아야 국토의 완정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대한민국 역시 무력을 통해 북한을 흡수하겠다는 ‘흡수통일론’을 제시한 바, 남북간의 갈등과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친일파들의 무수한 방해질에도 불구하고, 9월 22일 드디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된다. 반민법에 근거, 국회 내에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이른바 ‘반민특위’가 구성된다.
130만 명의 단원을 둘 만큼 급팽창한 이범석의 족청을 견제하기 위해 이승만은 대한청년단을 발족시킨다. 단장은 신성모, 감찰국장은 김두한이 맡았다. 경남 거창에선 ‘대동 청년단’이 조직된다.
여수항쟁
10월 15일 여수 신월리에 주둔하고 있던 제 14연대는 육군 사령부로부터 19일 오후 6시를 기해 대대를 제주도로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받는다. 14연대 사병들은 월북, 선상 반란, 여수 봉기롤 고민하다, 여수에서의 봉기를 결정한다. 이들은 “우리는 동족상잔의 제주도 출동을 반대한다”를 구호를 외치면서, 제주에서의 ‘진압군’을 포기하고 ‘반란군’을 택한다. 불과 네 시간 만에 여수를 장악한 반란군은 순천, 벌교, 보성, 고흥, 광양, 구례를 거쳐 22일 곡성까지 점령한다.
미군정과 군경의 잔인한 보복극이 시작된다. 진압작전은 10월 26일부터 시작된다. 전 육군 병력의 3분의 1인 5개 연대, 7척의 해군 함정, 전 공군력에 해당하는 10대의 비행기까지 총 동원된다. 진압군이 막상 여수에 진입하고 보니 시내는 텅 비어 있었다. 반란군은 이미 산 속으로 도주했던 것. 엄청난 병력과 장비를 동원했건만 군경은 웃음거리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셈이다. 반란군을 찾을 수 없게 된 진압군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 보복을 자행한다.
진압군은 여수 서국민학교에 4만 명을 집결 시켜놓고 보복 대상자를 골라내기 시작했다. 마구잡이식 보복이었다. 예컨대, 당시 가담자들이 신발공장에서 ‘찌까다비(일할 때 신는 신발)을 신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압군은 그 신발을 신은 청년은 무조건 사살했다. 학생복을 입었다고, 머리가 짧다고, 국방색 러닝 셔츠를 입었다는 죄로 살해되었다.
반란군의 잔인성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은 5연대 지휘관 대위 김종원의 행태였다. 5연대는 상륙 작전을 하면서 마구잡이로 쏘아댄 박격포탄에 의해 12연대 수색대가 맞아 중대장과 하사관 한 명이 전사한다. 김종원은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돌산섬을 비롯해 여기저기를 뒤져보지만 반란군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이에 김종원은 군내리에서 3명, 남면 안도에서 20명을 죽이고, 중앙국민학교에서는 붙잡혀온 청년들에게 ‘칼 시험’을 해본다는 이유로 일본도로 7명의 청년을 베어 죽였다. 김종원은 이후 6.25때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문교부는 문인들을 현지에 파견 시찰을 시킨 다음 정부에 유리한 글을 쓰게 했다.
박종화, 이헌구, 정비석, 최영수, 김 송.
여순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2천 600명이 넘었다. 미국은 여순사건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여순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숙군이 시작된다. 군의 약 5%에 달하는 4천 749명이 숙청당했고, 이중 2천명이 총살당했다. 숙군 작업 와중에 소령 박정희도 체포된다. 여순사건이 터지나 박정희는 토벌사령부에 작전장교로 차출되었었다. 박정희는 남로당 프락치였다.
만주군에서 광복군으로, 좌익에서 우익으로 변신한 박정희는 군부 내 남로당원의 명단을 모두 털어놓아 결국 목숨을 건진다.
9월 29일 내란행위특별조치 법안이 다시 등장하여 국회 본회의에 제출된다. 이 법은 곧 ‘국가보안법’으로 이름이 바뀐다. 야당 국회의원 조헌영은 이렇게 말했다.
“속담에 고양이가 쥐를 못 잡고 씨암탉을 잡는다는 격으로 이 법률을 발표하고 나면 안 걸릴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일본 놈 시대와 같이 잡아다 물 먹이고 이 놈 자식이 그랬지 하면 예예 그랬습니다. 이래서 거기 다 걸려 들어갈 수 있습니다. ”
국가보안법은 한민당과 이승만 지지세력 연합에 의해 11월 20일 국회를 통과해 12월 1일 공포된다. 국가보안법은 곧 괴력을 발휘한다. 49년 4월까지 국가보안법으로만 체포된 숫자는 8만 9천 700명이었다. 49년 한 해에만11만 명 이상이 체포되었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7개 일간지와 1개 통신사가 폐간 및 폐쇄당했다. 많은 기자들이 체포되었고 발행인 및 편집자들이 제거되었다. 방송은 아예 정부 산하로 들어가게 된다.
제주에서의 ‘인간 사냥’
48년 11월 중순부터 49년 3월까지 제주도 160여개 마을 가운데 130여개 마을의 수만 주민들이 학살당한다.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군정 치하보다 학살은 더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0월 17일 제 9연대장 송요찬은 포고문을 발표한다. “ 10월 20일 이후 군 행동 종료 기간 중 전 도의 해안선부터 5km 이외의 지점 및 산악지대의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함. 만일 차 포고에 위반하는 자에 대하여서는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악명높은 ‘초토화 작전’이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해하겠다는 것.
10월 18일 제주 해안이 봉쇄된다. 10월 19일 제주에 파병될 예정이었던 14연대 1개 대대는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11월 17일 제주에 계엄령이 선포된다. 이승만이 앞장서 서북청년회 단원들이 경찰이나 경비대원으로 옷을 갈아입고 초토화 작전에 투입된다.
이승만은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 “제주도 4. 3 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로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하여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서청 단원들은 47년 3.1 사건 직후부터 제주로 들어왔다. 김종민에 따르면, 서청단원은 주로 엿장수를 하다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했다. 4.3이 발발하자 서청은 경찰 또는 군인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 과거에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사지 않았던 사람들은 총살되었다.
12월 말 토벌대가 9연대 (연대장 송요찬)에서 2연대 (연대장 함병선)로 교체되면서 서청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상상을 초월하는 집단 광기가 펼쳐졌다. 13살 소년을 고문해서 죽게 만든 사건이 9월 15일 자 중앙 언론에 보도 된 이후, <경향신문> 제주지사장 현인화, <서울신문> 제주지사장 이상희, <제주신보> 편집국장이 총살당했다.
‘집단 광기’의 조짐은 사태 초기부터 있었다. 김종민에 따르면, 처음엔 ‘말 태우기’와 ‘뺨 때리기’가 유행했다. 토벌대는 할아버지와 손자를 마주 세워놓고 서로 뺨을 때리도록 했다. 또한 가족들을 총살 당할 때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치게 했다.
‘대살’도 행해졌다. 가족 중 청년이 사라진 집안 사람들은 ‘도피자 가족’이라 하여 총살당했다. 12월 13일 대정면 상모리와 하모리 주민 48명이 도피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당했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을 집결시킨 후 총살극을 구경시켰다 하여 이 사건을 ‘관광총살’이라고도 부른다.
49년 1월 17일 북촌리 학살 사건에선 장교들이 군인들에게 ‘사살 연습’을 시켰다.
미군과 이승만은 왜 이토록 잔인한 방식으로 ‘인간 사냥’을 해야만 했을까?
2003년 10월 15일 제주 4.3 사건 위원회(위원장 총리 고건)가 확정한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는 유혈 사태를 초래한 초토화작전 및 집단 인명피해(집단학살)의 최종 책임은 당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 이승만에게 있다고 지적했으며, 10월 31일 대통령 노무현은 사건 발생 55년 만에 당시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하였다.
2006년 4월 3일, 58돌을 맞은 제주 4. 3 사건 희생자 위령제에 국가원수로서는 처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참석해 추도사를 통해 제주도민에게 사과했다.
박근혜와 새누리당은 최근 제주도민을 잔인하게 학살한 ‘서북청년단’을 다시 조직하려고 안달이다. 민주주의 국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연쇄살인마 단체’를 허용할 것인가? 서북청년단은 단순한 우익 단체가 아니다. 좌, 우익의 문제가 아니다. 인권의 잣대로 바라봐야 한다. 서북청년단은 한국 역사상 가장 악랄한 살인마들 중 하나다.
독일은 네오 나치 집단인 ‘하얀 늑대단’을 불법단체로 규정, 10개 주에서 소탕 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한국 역시 ‘서북청년단’ 같은 학살 집단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된다.
48년 7월 20일, 런던에서 개최된 제14회 국제 올림픽에 한국은 최초로 참가한다. 58개국 가운데 32위를 차지한다. 축구에서는 스웨덴에게 12대 0으로 패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