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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산책 1940년대편 1 - 8.15 해방에서 6.25 전야까지, 개정판 ㅣ 한국 현대사 산책 1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1월
평점 :
1945년을 상상해 볼까. 이미 삼십년이 넘도록 일제 치하에 살았다. 어느 날 갑자기 도둑같이 해방이 찾아왔다. 영화 <암살>의 염석진의 말처럼 그 누가 해방 될 거라 상상이나 했을까. 절대다수의 민중들은 포기하고 살았고, 소수의 독립운동가가 있었고, 또한 소수이지만 절대 권력을 차지한 친일파 무리들이 있었다.
해방을 맞아 거의 모든 국민이 울고 웃고 서로 얼싸안고 껴안고, 너무 좋아 마당에서 뒹구는 사람들도 있었다. 남녀노소가 기뻐 날 뛸 때, 친일파들은 얼마나 어리둥절하고 막막하고 무서웠을까. 특히나 친일파 경찰들, 거의 전부가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다.
그러나, 역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미군정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으로 들어와 산속 깊이 도망친 친일파들을 다시 불러들여 정부요직을 맡겼다. 반민족 행위로 총살을 당했어야 할 이들이 살아남아 대를 이어 현대의 대한민국 상위 1%가 되다니.
마르크스는 말했다. “역사는 두 번 반복된다. 한 번은 비극으로, 또 한 번은 희극으로”. 마르크스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에게 식민지가 되었던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거의 수백 번 이상 똑같이 반복되었다. 희극 따윈 없었다. 끝없는 비극만이 펼쳐졌다.
똑같은 비극들이 무수히 되풀이 되었음에도 나는 몰랐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내 자신의 무지를 돌아보며 얼마나 통곡을 했던가. ‘그랬구나, 내가 이렇게 몰라서 저들은 또 똑같은 살육을 저질렀구나. 국민들이 모르니까 저들은 백만 명의 국민을 학살한 독재자를 국부라 칭하며, 오늘도 끊임없이 빨갱이 타령으로 아무 죄 없는 국민들을 학살했고, 학살하고, 학살하겠구나.’
현대사에 대한 무지를 참회한다.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을 1945년부터 정리해보겠다. 산책이라? 한국 현대사를 과연 산책하는 심정으로 읽을 수 있을까? 읽을 때마다 부들부들 떤다. 저절로 눈물이 터진다. 국민들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하게 살육한 살인마인, 친일파, 분단 세력, 독재협력세력들이 아직도 이 땅에서 여전히 대통령을 해쳐먹고 제1야당을 해쳐먹고 있다니! 그들을 지지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게 도무지 내 상식으론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은 과연 제대로 된 역사책을 읽고도 새누리당을 지지하는 걸까. 역사책을 읽고도 새누리당을 지지한다는 건, 인간으로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니 독재협력 세력들이 오늘도 역사책을 바꾸려고 기를 쓰고 혈안이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복수하는 최소한의 방법은 책을 손에 드는 것이다. 수량화된 데이터가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해 그 시대를 직접 느끼는 것.
나치는 흔히 유대인 600만 명을 살해했다고 알려져 있다. 600만 명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간다. <춤춰라 우리의 밤을 그리고 이 세계에 오는 아침을 맞이하라>에서 사사키 아타루는 이렇게 말했다.
“1942년부터니까 2년여에 걸쳐 600만 명을 죽인다고 하면 대체로 하루에 만 명꼴입니다. 하루에 만 명을 죽인다는 말은 곧 하루에 만 구의 시체가 생산된다는 뜻입니다. 하루에 만 구의 시체를 어떻게 소각했을까요?”
스티븐 핑커처럼 역사를 단지 숫자로, 데이터로 환원한다면 우리는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역사란 죽어가는 만 명의 얼굴을 상상하는 것이다. 차가운 물에서 허우적거리며 죽어야 했던 304명, 한 명, 한 명의 아이들 얼굴을 떠올리는 것. 반복한다. “타인에게 가해진 비인간적인 행위는 내 안에 있는 인간성을 파괴한다.”
1945년 ; 도둑처럼 찾아온 해방
8월 10일, 일본은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을 결정했다. 조선총독부는 송진우, 김준연에게 거절당하고 여운형에게 행정권을 이양한다. 그러나, 38도 선 이북을 소련이 점령하고, 이남은 미국이 점령할 것이 확실해지자, 총독부는 행정권 이양을 거부한다. 그러나,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한다. 8월 16일 건국치안대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제일 먼저 경찰의 약 50%를 차지하고 있던 친일파 경찰들을 추방한다. 일본인 경찰이 그대로 있었던 반면 친일파 경찰 약 80프로가 도망쳤다.
8월 6일 미국은 일본의 히로시마에, 그리고 8일에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16만 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 (조선인 4만명 포함)
8월 14일, 30분 만에 두 대령이 지도에 38선을 그어 맥아더에게 보냈다. 8월 15일 소련이 제안을 수락한다. 생각해보면 희한한 일이다. 전범 국가인 일본 땅을 나눠 먹어야지 왜 한국을 나눠 먹은 걸까. 한국은 일본 대신 분단된 셈이다.
소련군이 8월 24일 평양에 입성했다. 북에서 소련군은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다. 북한에선 좌우 대립이 없었다. 북한은 친일파에 관대하지 않았다. 우익과 친일파들은 죄다 남한으로 탈출했다.
지금이야 공산주의자는 빨갱이라 불렸지만, 이 당시에 ‘공산주의자 = 애국자’로 통하던 시기였다. “한국 공산주의의 가장 위대한 영도자”로 불렸던 박헌영은 9월 3일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 건준에서 박헌영의 영향력이 커지자 우파인 안재홍이 떨어져 나가고 건준은 좌경화된다. 건준은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한다. 이른바 인공.
9월 7일 미군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의 지위로 인천항을 통해 남한으로 들어온다. 미군정은 ‘인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를 인정했을뿐. 미국은 한국인을 야만인으로 경멸했다. 한국인을 gook라고 불렀다지. 먹을 걸 얻어 가는 아이를 향해 총을 쏘는 미국인들이 비일비재 했다고.
9월 4일 “일본과 협력한 한인 집단”을 주축으로 한민당이 창설된다. 미국이 점령군인 해방정국에서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대지주 출신인 친일파, 해방후엔 친미파, 정당으로 보자면 한민당. 좌파 일색인 인공을 분쇄하기 위해, 미군정이 실시한 대책은 ‘정당은 오라’는 성명을 내건 정당신고제. 1개월 내에 40~50개의 정당이 난립했다고.
미군정에서 주요 직책들은 한민당, 친일파 세력에게 돌아갔다. 조병옥, 장택상, 김용무, 이인. 미군과 친일파들은 도망친 친일파 경찰들을 다시 불러들인다. 친일파 경찰의 가장 큰 문제점은 ‘고문 수사’였으니. 오늘도 거리를 거닐다가 무언가를 보고 움찔했다. 경찰이었다. 왜 경찰복을 보면 저절로 움츠러들까. 친일 경찰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감이 유전자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친일파 경찰들이 공권력을 장악했다는 것. 이후 한국사 고비고비마다 끔찍한 살육의 씨앗이 아니었을까.
10월 4일 국부 격 살인마 이승만이 귀국한다. 당시 이승만의 인기를 따라올 사람은 없었다고. 우파든 좌파든 이승만을 옹립하려고 난리였다니. 이승만은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친일파 거부 백낙승으로부터 매달 50만원, 박흥식으로부터 200만원의 정치자금을 받는다. (이 당시 쌀 한가마니는 750원)
10월 23일.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초당파적인 모임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창설되고, 회장엔 이승만이 추대된다. 박헌영이 “친일파 제거에 의한 민족통일 원칙”을 주장하자, 이승만은 되레 공산당을 비판하면서 친일파를 두둔한다. 이때부턴가? 빨갱이 타령은? 세상에, 1945년부터 지난 71년간 우려먹다니. 21세기까지 독재협력세력인 새누리당과 가스통 할배, 일베들의 끊임없는 레퍼토리.
11월 6일 중앙극장에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이른바 ‘전평’이 결성된다.
11월 12일 인공의 좌경화를 깨닫고 여운형은 조선인민당을 창당한다.
11월 23일, 임정 요인 환국 제1진이 귀국한다. 김구, 김규식, 이시영, 김상덕, 엄항섭, 민영완, 장준하, 윤경빈, 유진동 등 15명.
미군정은 임정의 명망을 이용하기로 하고 따듯히 환대하는 제스처를 취한다. 임정은 인공과 조공에 대해선 선을 긋는다. 그러나 친일 협력자에 대해선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1945년에 김구 역시 이승만처럼 친일파들로부터 정치자금을 받는다.
장준하는 임정 요원들 앞에서 임정에 폭탄을 던지고 싶다고 폭탄 발언을 한 적이 있다. 그 정도로 임정의 내분은 심각한 지경이었다. 해방 후 임정의 내분은 더 악화되었다. 그중에서도 영화 <암살>에서 조승우가 맡은 약산 김원봉이야말로 피해자가 아닐까. 임정의 제 2인자였지만 환국 후 약산은 김구, 이승만, 김규식에 이어 4인자로 소개된다.
한편 북한에선 11월 3일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한다. 12월 17일 김일성이 책임비서로 선출된다. 김일성의 권력이 강화될수록 남한에서 좌익의 입지는 더욱 어려워진다. 미군정은 우익 청년단체들을 동원해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인공을 해체시킨다.
12월 28일 미, 소, 영 세나라 수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에 관한 내용’을 주로 한 모스크바 결정이 발표된다. 신탁통치 방안은 결정되지 않은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신탁통치를 반대한다면 신탁통치를 받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한민당이 주축이 된 <동아일보>가 사건을 저지른다. 오보를 터뜨린 것.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서가 발표되기 하루 전에, 동아일보의 관측 보도였던 것.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오보를 쏟아내자, 선동된 대중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신탁통치에 다소 열린 의견을 피력했던 송진우는 암살당한다.
12월 30일 임정은 ‘미군정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다. ‘임시정부 포고 제 1호 및 제2호’를 발표한 것. 임정은 “미군정청 산하의 모든 한인 직원들은 임정의 지휘를 받을 것”과 “모든 국민은 임정의 지휘 아래 반탁 운동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이른바 임정의 주권선언이었다.
12월 31일,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반탁대회가 열린다. 30만 명의 시민이 운집했었다고. 당시 서울 인구는 120만 명. 이 당시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선호하는 사상은? 사회주의였다. 자본주의 13%, 공산주의 10%, 사회주의는 70%였다. 만일 분단되지 않았더라면? 미국이 분탕질을 치지 않았더라면, 이승만같은 버러지가 없었더라면, 한국은 덴마크, 노르웨이 같은 복지국가가 될 수 있지도 않았을까. 아, 그럴 순 없었겠다. 미국이 절대로 그렇게 놔두지 않았겠지.
<나는 여기에 연설하러 오지 않았다>에서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우리는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정도에 이르렀는데 아직도 미국을 구세주로 보는 철부지 영혼들이 있습니다. ”
이 땅엔 아직도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라 생각하는 철부지 영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긴 대다수 우매한 미국인들도 미국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착각하고 산다. 역사를 들여다본다면, 미국이 어떻게 대한민국 국민들을 학살했는지 숱하게 보게 될 것이다. 어디 대한민국뿐이겠는가.
도둑처럼 해방은 찾아왔으나, 점령군 미국에 의해 애초부터 대한민국은 뒤틀려가고 있었다.
1946년, 좌우의 갈등은 점점 첨예화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