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받은 집
줌파 라히리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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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단편집을 읽으면 단편들 마다 수준 차가 있기 마련 아닌가. <축복받은 집>엔 총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9편의 단편 중 단 한편도 버릴 게 없다. 완벽하다. 그야말로 경이로운 데뷔작이다. 이 책을 읽다보니 앨리스 먼로나 플래너리 오코너는 이류 작가로 보일 정도다.

 

나는 단편 소설에 어떤 위협이나 협박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소설에는 약간의 협박이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긴장 역시 꼭 필요하다. 무언가 절박한 상황, 처절한 행동이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의 경우, 소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소설 작품 속에서 긴장을 만들어 내는 것 가운데 하나는 가시적인 행동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인 단어들을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다 털어놓지 않은 것, 그저 암시만 된 것, 사물의 평평한(때로는 망가지고 뒤집어진) 표면 아래 감춰진 풍경 등에서도 그런 긴장이 발생한다.

 

프리체트 V. S. Pritchett는 단편 소설을 눈꼬리로 힐끗 본 스쳐 지나가는 무언가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힐끗 본다라는 부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먼저 무언가를 힐끗 본다. 그 다음에는 그것을 통해 생명력이 부여되고 그 순간을 조명하는 무언가가 탄생한다. 나아가 운이 좋으면 보다 깊이 있는 결과와 의미에 도달할 수도 있다.


단편 작가의 임무는 자신의 모든 힘을 이 힐끗 보는데 투자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혜와 문학적 기술이 무르익고(재능), 균형 감각과 사물의 합당성에 대한 감각이 길러진다. 사물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을 어떻게 파악할 것인가도 감지할 수 있다. 또한 명쾌하고 구체적인 언어, 디테일한 부분에까지 생명력을 부여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런 숙제를 해결할 수 있다.

 

디테일은 구체적이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므로, 언어는 정확하고 정밀하게 구사되어야 한다. 단어는 지극히 평범하게 들릴 정도로까지 정확해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임무에는 변함이 없다. 제대로 사용된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를 수 있는 힘을 가진다.

 

레이먼드 카버,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긴장감, 사물에 관한 풍성한 세부 묘사, 정확하고 정밀한 단어, 예상을 뛰어넘는 대사<섹시>, 엄청난 반전<일시적인 문제>, 포복절도할 유머<진짜 경비원>, 카타르시스를 느낄만한 감동<세번째 이자 마지막 대륙>도 있다. <축복받은 집>엔 독자가 단편소설에서 기대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완벽히 갖춰져 있다. 줌파 라히리의 단어는 모든 음계를 아우른다. <축복받은 집>은 문학이 선사할 수 있는 종합선물셋트.

 

순수문학을 표방함에도 <축복받은 집>의 어떤 단편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신춘문예용한국단편문학과의 결정적 차이다. 화려하고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 밑으로 부글부글 용암이 끓어 넘친다. 한 페이지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축복받은 집>은 영혼의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준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 그것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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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4-14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단편집에서 <섹시>를 정말 좋아해요. 사실 이 단편집 보다는 [그저 좋은 사람]을 훨씬 더 좋아하고요. 시이소오님 혹시 [그저 좋은 사람]도 읽어 보셨나요? 그 안의 단편 <지옥-천국>은 저의 패이버릿이에요! >.<

시이소오 2016-04-14 14:20   좋아요 0 | URL
그저 좋은 사람 아직 못봤어요. 덕분에 기대감에 간질거리네요^^

2016-04-14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권유군요. 꼭 읽겠어요.

시이소오 2016-04-14 15:27   좋아요 0 | URL
축복받으세요 ㅋ ^*^

조르그 2016-04-14 1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겠습니다
읽을 수밖에 없군요

시이소오 2016-04-14 17:17   좋아요 0 | URL
ㅋ 즐독되시길 ^*^

samadhi(眞我) 2016-04-14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집 별로 안 좋아하지만 읽어볼래요. 줌파 라히리라는 작가가 그렇게 천재성을 지녔다고 하니 질투나서 괴로울까봐 읽기를 미루고 있는데요.

시이소오 2016-04-14 17:54   좋아요 0 | URL
ㅋㅋ 질투하실것 까지야. 장편보다 단편에 소질이 있는 작가 같습니다. 저지대는 그저 그랬거든요. ^^

samadhi(眞我) 2016-04-14 18:13   좋아요 0 | URL
김영하같은 스타일인가봐요. 김영하도 장편은 별로거든요.

시이소오 2016-04-14 18:17   좋아요 0 | URL
작가들마다 자신에게 맞는 호흡이 있나봐요. 때려죽여도 장편은 못쓰겠다는 작가들도 있는걸보면요 ^^

samadhi(眞我) 2016-04-14 18:19   좋아요 0 | URL
정말로요. 춤도 노래도 문장도 죄다 호흡의 문제네요.

시이소오 2016-04-14 18:23   좋아요 0 | URL
호흡을 다른말로 하면 리듬일까요? 자신만의 리듬을 아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

CREBBP 2016-04-14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처음 읽었을 때의 느낌과 같네요. 저도 줌파 라히리 광팬입니다.

시이소오 2016-04-14 19:50   좋아요 0 | URL
읽고나면 다들 푹 빠지나봐요. ^*^

2016-06-22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았어요. 추천 고마워요 ^^

시이소오 2016-06-22 22:52   좋아요 0 | URL
힌님이좋으셨다니 저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