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정치 - 신자유주의의 통치술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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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한국은 심리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지 않았다. ‘투명사회는 더더욱 아니다. 한국에 대해 말하자면 <위험사회>의 울리히 벡, <쓰레기가 되는 삶>들의 지그문트 바우만, <호모 사케르>의 아감벤, <구별짓기>의 부르디에의 이론이 한병철의 이론 보다는 더 적절할 것이다.

 

어떤 국가든 한병철이 비판하는 심리정치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역사의 일반적 흐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은 어이없게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할 색누리당이라는 군사독재 잔당들이 권력을 잡는 바람에 한병철의 이론이 맞지 않는 국가가 돼버리고 말았다.

 

한국은 투명사회가 아니다. 메르스 사태에서 볼 수 있듯 국가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다. 국가는 정보를 독점하려 한다. 국민이 반드시 알아야할 정보자체도 공개하지 않는다. 국민이 죽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다. 한국의 빅브라더는 눈곱만큼도 스마트하지 않을뿐더러 친절하지도 않다. 여전히 규율 권력을 작동시킨다. 정보를 공유하려는 국민들을 유언비어 유포라는 이유로 협박하고 감금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존중한 JTBC 손석희는 소환 당했고, 정부와 박근혜가 아몰랑으로 일관하고 있을 때 메르스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던 박원순 시장은 검찰로부터 허위사실유포 혐의로 수사를 받는 중이다.

 

친절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이 한국 사회와는 들어맞지가 않는다.

우리의 대통령께서 독재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일까.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해선 국가에 대한 논의는 배제하고 신자유주의에 대한 논의로 한정하는 편이 나을 듯싶다. (후진국 국민으로서 감수해야하는 불편함)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유롭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개인은 자본의 페니스에 불과하다. 신자유주의에서 긍정성은 부정성만큼이나 폭력적이다. 오늘날 신자유주의는 빅데이터를 우상화한다. 그러나, 한병철이 보기에 빅데이터는 통계에 불과할 뿐이다. 통계를 통한 지식은 유일무이한 것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것은 절대적 무지에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경험해야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바보가 돼야만 한다.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

 

들뢰즈는 말했다. “철학은 언제나 바보노릇이라고. 철학사는 바보짓의 역사다. 오직 바보만이 완전히 다른 것에 접근할 수 있다. 바보만이 동일자의 지옥속으로 빠져들지 않는다.


네트워크에서 벗어나 상상을 초월하는 외부 공간에 거주해야 한다.

 

 

 

메모한 문장들

 

자유의 위기.

 

우리는 자유 자체가 강제를 생성하는 특수한 역사적 시기를 살고 있다. 할 수 있음의 자유는 심지어 명령과 금지를 만들어내는 해야 함의 규율보다 더 큰 강제를 낳는다. 해야 함에는 제한이 있지만, 할 수 있음에는 제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음에서 유래하는 강제는 한계가 없다. 그리하여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빠진다. 자유는 본래 강제의 반대 형상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강제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처럼 강제의 반대여야 할 자유가 강제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 자유롭다고 여기는 성과주체는 실제로는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 성과주체는 주인에 묶여 있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착취한다는 점에서 절대적 노예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적 주체는 자기 자신의 경영자로서 목적에서 자유로운 관계를 맺을 능력이 없다. 경영자 사이에서는 목적 없는 우정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들 곁에 있음을 의미한다. 인도게르만어에서 자유Freiheit와 친구Freund는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개인적 자유는 스스로의 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에 악용된다는 점에서 노예 상태와 다름없다. 그러니까 자본은 자신의 번식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착취하는 것이다. “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 번식을 추동한다. 자본은 끊임없이 살아 있는 새끼들을 친다. 오늘날 과도한 형태에 이른 개인의 자유는 결국 자본 자체의 과잉을 의미할 따름이다.

 

자본의 독재.

 

신자유주의 질서는 타자에 의한 착취를 어떤 계급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자기 착취로 탈바꿈시킨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무계급적 자기 착취를 전혀 알지 못했다. 사회 혁명이 착취하는 자와 착취당하는 자의 구별을 전제로 한다면, 무계급적 자기 착취는 바로 사회 혁명의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성과주체는 고립화되고, 이로 인해 공동의 행위를 할수 있는 정치적 우리 자체가 형성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사회나 시스템에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에게 실패의 책임을 돌리고 부끄러움을 느낀다. 바로 여기에 신자유주의적 지배 질서의 특별한 영리함이 있다. 신자유주의 질서는 시스템에 대한 저항 자체가 일어나지 않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적 지배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자기 착취적 질서 속에서 사람들의 공격성은 오히려 자기 자신을 겨냥한다. 이러한 자기 공격성으로 인해 피착취자는 혁명가가 아니라 우울증 환자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려고, 즉 자유롭지 않아도 되려고, 책임을지지 않으려고, 여원히 채무자로 머무는 것인지도 모른다. 거액의 부채는 우리가 자유로울 능력이 없다는 증거가 아닐까? 자본은 우리를 다시 채무자(죄인)로 만드는 새로운 신이 아닐까? 발터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종교로 파악한다. 자본주의는 죄를 씻기는커녕 오히려 빚을 지우는 제의를 벌이는 최초의 사례. 죄를 씻을 길이 없기 때문에, 부자유의 상태가 영구화된다. “죄를 씻을 길을 알지 못하는 엄청난 부채의식을 빚을 갚기 위해서가 아니라 빚을 보편화하기 위해서 제의에 의존한다.”

 

투명성의 독재 : 한국사회와 아직은.

스마트 권력 ; 왜 한국은 아직도 규율 권력인가.

 

규율 권력은 여전히 전적으로 부정성의 영향 속에 있다. 그것은 허용이 아니라 금지의 형태로 구현된다. 규율 권력은 이러한 부정성으로 인해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를 기술하는 데는 전혀 적합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지배 질서는 긍정성의 빛을 발산한다.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기술은 섬세하고 유연하며 스마트한 형태를 취하며, 결국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속된 주체는 자신이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한다. 예속된 주체에게 지배 관계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다. 그래서 그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규율 권력은 비효율적이다. 사람들을 명령과 금지의 코르셋 속에 폭력적으로 욱여넣기 위해 막대한 힘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지배 관계에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권력의 기술이 훨신 더 효율적이다.

 

신자유주의적 권력 기술의 목표는 인간을 온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친철한 스마트 권력은 예속된 주체의 의지에 정면으로 반하기보다는 그들의 의지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조종한다.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하기보다 그러라고 말하는 권력이며, 억압적이기보다 유혹적인 권력이다. 그것은 긍정적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것을 착취하려고 애쓴다. 그것은 금지하는 대신 유혹한다. 그것은 주체와 대적하는 대신 주체의 욕구에 부응한다.

 

자유분방하고 친절한 모습으로 자극하고 유혹하는 스마트 권력은 명령하고 위협하고 규제하는 권력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좋아요 버튼은 스마트 권력의 인장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고 소통하면서, 즉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서 스스로를 지배 관계 속에 빠뜨린다. 신자유주의는 좋아요-자본주의다. 그런 의미에서 신자유주의는 강제와 금지를 통해 작동하던 19세기 자본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두더지와 뱀


두더지는 개방을 견디지 못한다. 이제 두더지의 자리를 뱀이 대신한다. 뱀은 규율 사회의 뒤를 이은 신자유주의적 통제사회의 동물이다. 두더지와 달리 뱀은 닫힌 공간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뱀은 오히려 움직임을 통해 공간을 열어간다. 두더지는 노동자다. 반면 뱀은 경영자다. 뱀은 신자유주의 체제의 동물이다.

 

규율 체제는 들뢰즈에 따르면 마치 처럼 조직되어 있다. 그것은 생정치의 체제다. 반면 신자유주의 체제는 마치 영혼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심리정치가 이 체제의 통치 형식이 된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경쟁을 끊임없이 확산시킨다.” 이로써 유익한 승부욕과 탁월한 행위 동기가 촉발된다는 것이다.

 

생정치

 

규율 권력은 표준화하는 권력이다. 그것은 주체를 규범, 명령, 금지의 체계에 예속시키고, 일탈적이거나 비정상적인 요소를 제거한다. 바로 이러한 조련의 부정적 성격이 규율 권력의 본질적 요소다.

 

푸코의 딜레마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푸코의 권력 분석에서 맹점으로 남아 있다. 푸코는 신자유주의적 지배 체제가 자아의 기술을 완전히 포섭했다는 것, 신자유주의적 자아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자아의 부단한 최적화가 지배와 착취의 효율적 형식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화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힐링 혹은 킬링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은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끝없는 최적화의 명령은 고통마저 착취한다. 미국의 유명한 모티베이션 트레이너인 앤서니 로빈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CANI 원칙을 꼭 지켜라! Constant Never Ending Improvement. 부단히, 끝없이 개선할 것! 부단히 끝없이 더 나아지고 싶다는 소망, 모든 인간이 느끼는 소망을 솔직히 인정하라. 불만족, 긴장으로 인한 일시적인 컨디션 난조에서 생겨나는 스트레스가 다시 힘을 만들어 낸다. 이것은 당신이 삶 속에서 필요로 하는 종류의 고통이다.” 그러니까 오직 최적화라는 목적의 관점에서 이용 가능한 고통만이 용인되는 것이다.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친절한 빅브라더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금지하고 방지하고 억압하기 보다, 내다보고 허용하고 기획한다. 소비는 억제되지 않고 극대화된다. 결핍이 아니라 괴잉, 즉 과도한 긍정성이 생성된다. 우리는 커뮤니케이션하고 소비하도록 독려받는다.

 

우리는 고문과 협박으로 자백을 강요받는 대신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다 털어놓는다. 스마트폰이 고문실을 대신한다. 빅브라더는 이제 친절한 표정으로 다가온다.

 

감성 자본주의

 

게임화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화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 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빅데이터

 

오늘날 수치와 데이터는 절대화되는 데 그치지 않고 섹슈얼하고 물신적인 성격까지 지니게 되었다. 예컨대 양화된 자아는 그야말로 리비도적 에너지로 작동한다. 다타이즘은 전반적으로 리비도적인, 심지어 포르노적이기까지 한 특성을 나아낸다. 다타이스트들은 데이터와 성교한다. 그래서 요즘에는 데이터 성애자에 대한 얘기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데이터 성애자들은 철두철미하게 디지털하다고 한다. 그들은 데이터를 섹시한다고 느낀다. 디기투스(손가락)는 팔루스(남근)에 가까워진다.

 

빅데이터는 벤야민이 말하는 영화 카메라에 비유할 수 있다. 데이터 마이닝은 디지털 돋보기로서 인간의 행동을 확대하여 의식이 작용하는 행동 공간 뒤에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또 하나의 행동 공간을 조명해준다. 빅데이터의 미시물리학은 액톰, 즉 의식에서 벗어나 있는 미시행동을 가시화할 것이다. 빅데이터는 또한 개개인이 의식하지 못하는 집단적 행동 패턴도 드러낼 것이다. 이로써 집단 무의식에의 접근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미시물리학적 또는 미시심리학적 관계망을 시각적 무의식이라는 벤야민의 개념을 변형하여 디지털 무의식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으리라.

 

데이터 회사인 액시엄은 약 3억 명에 이르는 미국인의 개인 정보를 가지고 장사를 한다. 그러니 사실상 거의 모든 미국인의 개인 정보가 액시엄의 소유 아래 있는 것이다. 액시엄은 이제 미국인에 대해 FBI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 액시엄은 인간을 70개의 범주로 나눈다


액시엄의 카탈로그에 인간은 70개 종류의 상품으로 제시되어 있다. 필요에 따라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경제적 가치가 낮은 사람은 웨이스트쓰레기로 지칭된다. 시장 가치가 비교적 높은 소비자는 슈팅 스타그룹에 들어 있다. 나이는 36세에서 45세로 활동적이고, 아침 일찍 일어나 조깅을 하며, 아이는 없으나 기혼이고, 여행을 즐기며 시트콤 사인필드를 시청한다.

 

빅데이터는 새로운 디지털 계급사회를 만들어낸다. “쓰레기로 분류되는 사람은 최하층 계급에 속한다. 점수가 낮은 사람은 신용대출을 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놉티콘과 나란힌 바놉티콘이 수립된다. 파놉티콘이 시스템에 갇힌 수감자를 감시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에서 떨어져있거나 시스템에 대해 적대적인 자들을 불청객으로 낙인 찍고 배제하는 기구다. 고전적인 파놉티콘이 훈육의 기능을 수행한다면, 바놉티콘은 시스템의 안전과 효율을 보장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 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테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한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 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도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심리학적 프로그래밍과 제어를 통해 지배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지속시키는 통치술이다. 따라서 자유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는 삶의 기술은 탈심리학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의 기술은 예속화의 매체인 심리정치를 무장해제시킨다. 주체는 탈심리화되고, 비워진다. 이로써 아직 이름이 없는 삶의 형식을 위한 자유가 생겨난다.

 

바보

 

바보는 현대의 이단아다. 이단은 본래 선택을 의미한다. 즉 이단아는 자유로운 선택을 쥐고 있는 자다. 그는 정통에서 이탈할 용기가 있다. 그는 순응의 압박을 용감하게 떨쳐버린다. 이단아로서의 바보는 합의의 폭력에 맞서는 저항의 형상이다. 그는 아웃사이더의 마력을 보존한다. 순응의 압박이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오늘날, 이단적 의식의 날을 벼려야 할 필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절실하다.

 

바보짓은 신자유주의적 지배 권력과 그것이 강제하는 총체적 커뮤니케이션과 총체적 감시에 반기를 든다. 바보는 소통하지않는다. 바보는 소통 불가능한 것으로 소통한다. 그는 침묵의 장막 속으로 들어간다. 바보짓을 통해 침묵과 고요, 고독이 있는 자유로운 공간, 정말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순수한 내재성은 심리화되지도, 예속화되지도 않는 공허다. 내재적 삶은 비어 있는 만큼 더 가볍고, 더 풍부하고, 더 자유롭다. 개별성이나 주체성이 아니라 독특함, 특이성이 바보의 본질이다. 그래서 바보는 아직 개인도, 인격도 아닌 아기들과 근본적으로 닮았다. 개인적 속성이 아니라 비인격적 사건이 아기들의 존재를 이루는 핵심이다.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 탄툼, 특성 없는 인간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의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2015. 6. 16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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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의변증법 2016-02-2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은 책이었는데 다시 보니 더 의지가 솟아오르네요ㅎㅎ
잘 읽고 갑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01   좋아요 0 | URL
얇아요, 빨리 읽히진 않지만 은근히 재밌어요^^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사람 한병철이 썼는데 굳이 매번 한국사람이 번역하여 옮긴 이유가 궁금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1:33   좋아요 0 | URL
독일에서 독일어로 낸 책이라서요.저자는 한국보다 독일에서 더 유명하시죠 ~~

시이소오 2016-02-20 21:36   좋아요 0 | URL
한병철 책은 한국보다는 독일사회를 염두해두고 쓰인거겠죠. 선진국을 비판하기에는 이론적으로 맞아떨어지는데 한국같은 후진국하곤 좀 안들어맞아요 ^^;

북다이제스터 2016-02-20 21:37   좋아요 0 | URL
저자가 유학 간 사람이라 독일어 보다 한글에 더 능통한 사람이라서요. 번역은 반역인데 매번 국내에 굳이 직접 한글로 출판하지 않은 이유가 궁금해서요.

시이소오 2016-02-20 22:32   좋아요 0 | URL
정확힌 모르겠지만 한병철씨 입장에서야 독일사회에 대해 쓴 책을 다시 한국어로 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건 아닐까요? 정확히는 모르겠네요^^;

비로그인 2016-02-20 2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빅브라더의 감시사회, 신자유주의 정글사회, 모든 것이 가난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체제군요. 부유한 사람들은 피할 언덕도 있고 도망갈 여력도 있는데 반해 힘 없는 사람들은 암울합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2:30   좋아요 1 | URL
그러게나 말입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의 인터뷰집을 읽고 희망을 느꼈어요. 슬슬 세상이 뒤바뀔 때가 된 것 같아요^^

짜라투스트라 2016-02-2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에 좋아요를 누르면 저도 심리정치에 이용당하는 건가요??^^;; 그런 게 아니기를 바랄뿐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0 23:40   좋아요 0 | URL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했네요. ㅋ 그런게 아닙니다 ^^

cyrus 2016-02-2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체제도 잘 보면 심리정치의 원리가 있습니다. ^^

시이소오 2016-02-21 13:42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바보가 돼야겠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2-21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정말 뛰어났습니다. 항상 제 손가락 안에 뽑는 책..

시이소오 2016-02-21 15:14   좋아요 0 | URL
우와, 역쉬 ^^

2016-02-22 0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이소오 2016-02-22 11:42   좋아요 0 | URL
공부라고하기엔, 그냥 독서수준이죠.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