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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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을 정치관련 책들과 읽는게 맞는게 싶지만, 실은 정치 이야기이다. 정치란 우리 삶이니까.

 

기본적으로 정의는 정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언론은 그 역할을 저버렸다.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나온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그 폐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특히 심각하다. 매체 성향에 맞는 정치인 잘못은 눈감아주면서 성향이 다른 정치인에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종북 대 애국', '독재 대 민주', '친노 대 친박'으로 나누고 재단함으로써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 사안은 같은데 해석은 정반대다.(339쪽)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을 사람을, 사회를 단죄하는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스스로가 그 권력에 도취되어 있다. 정의를 말 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이다.  

몸통은 검찰권이다. 임용된 지 몇달 안 된 실무수습 검사가 어떻게 검사실에서 피의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가. 특수부 부장을 지낸 검사가 어떻게 차명계좌까지 만들어놓고 기업과 다단계 사기범 측근의 돈을 받은 것인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 건 검사들 손에 쥐어진 힘이었다.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수사 대상과 범위가 달라지고 기소 여부가 결정되면 적용할 법조문이 가려지는 현실, 권한을 앞세워 권력과 돈, 향응을 추구하고 싶은 일부 검사들의 욕망을 수준 이하의 동료들이 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행정부가 국회를, 사법부가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 너무 당연히 여겨진다. 국회의원들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들의 입이 될만한 국회를 깔보는 행동일 수 있다. 자기네들 리그에 붙여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불체포 특권을 두고 있다. 1당 독재였던 소련 헌법에도 "최고회의 대의원은 최고회의의 동의없이 체포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왕이 마음대로 의원들을 가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 특권이 왜 필요할까. 3권 분립에 따른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수사,재판을 통해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의원, 특히 야당 의원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173쪽)

 

그리고 그 행정부의 권력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사실 국민들은 권한을 준것이지, 그들에게 권력을 준것은 아니다.

나는 공권력이란 말은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공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75쪽)

 

게다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행정부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주의의 폐해까지도 말이다.

"관료는 민원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례로 다룬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도 현장의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청와대 관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승객, 승무원 476명은 '집계해서 위에 보고해야 할 숫자'였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재는 사람이 일으킨 재앙에 머물지 않는다. 비인간화된 사회와 교육이 빚어낸 인간성 소외의 재앙인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의 공허한 눈빛은 수많은 사람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듯, 인간에 대한 열량을 소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40쪽)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미 사회는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상위계층이 모든 것을 점점 장악해 나가고 있고, 그 토대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관심은 10~20년 후 대원외고 출신이 법조계의 주축이 됐을 때 재판과 수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이냐다. 과거 경기고는 전국, 각계각층에서 충원됐다. 가난한 수재가 적지 않았다. 성향도 이질적이었다. 인권운동의 상징인 고 조영래 변호사, 정통보수를 대편하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진보사법의 대표 주자 박시환 전 대법관,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학교 출신 법조인이다.

반면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출신은 계층적 동질성이 강하다. 특목고 입학생 중 절반가량이 서울 강남 3구에 거주한다. 부모가 법조인, 의사,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경우가 많다. 기성 법조인들은 "재판, 수사하는 자와 받는 자의 출신 계층이 다르다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111쪽)

 

문제는 개개인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사회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하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에 가깝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거리낌없이 적어낼 줄 알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봉사도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활동이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24쪽)

 

저자가 이렇듯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에 대한 충격때문이다. 세월호는 사회의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렇게 가슴아픈 현실의 민낯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일단 권석천의 글에는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 듯 하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법망을 조임으로써 범법자는 끝까지 단죄하되 공포의 희생자는 막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아무리 소수의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려 있다.(322쪽)

 

정의로운 사회는 멀기만 한 것일까?

'정의가 이기는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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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야당을 갖고싶다
금태섭 지음 / 푸른숲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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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논란의 여지가 가능한 책이다. 안철수의 창당과정과 민주당과의 합당과정에 앞장 섰던 금태섭의 책이기 때문이다. 정치에 관심이 있어, 안철수의 정치행보를 알고 싶다면 읽어볼만하고, 안철수의 아쉬움점 등도 읽어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지적은 충분히 생각해 볼만하다.

정치판은 합리적인 토론이 통하지 않고 내부 비판이 금기시 되는 장이 되었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 중에서 새누리당의 부패와 편협성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지지할 정당을 찾기 어려워졌다. 그런 점들을 비판했다가는 싸늘한 눈길이 돌아오기 때문이다.

 

진보 쪽도 마찬가지다. 민주당의 무능과 폐쇄성을 지적하면 가뜩이나 불리한데 우리 편끼리 싸우면 어떻게 하느냐는 비난의 화살이 쏟아진다. 인터넷에서 활동하는 수 많은 '정치 고수'들에게 조중동에 이용당하는 걸 모르고 자기 진영에 총을 쏜다며 공격을 받기도 한다. 선거 때마다 있었던 야권 연대의 모습을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선거 관련 부정을 저지른 정치인이라고 해도 연대의 대상이라는 이유로 관대하게 받아들이고 심지어 당연히 해야 할 사퇴를 놓고도 야권 지식인들은 일제히 위대한 결단이라며 칭송한다. 이런 모습이 '자기편'이 아닌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206쪽)

 

사실 그간 한국정치는 양당중에 하나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본인의 정치적 의사와 맞는 정당을 찾기 힘든 구조였다. 옛날 민주당이 보수에서 진보까지 아울렀지만, 지역적 색채가 강했고, 지금의 야당은 지역색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지만, 정치적으로 많은 이들을 포용하기에 부족하다. 그런 점에서 다양한 선택이 필요한데, 현실적인 가능성은 의문이다.

 

저자가 이기는 야당을 위해서 가장 주목하는 바는 의제설정 능력이다. 그러나 지금의 야당은 의제설정능력이 없다고 봐야 한다. 다른 정치전문가들도 지적하는 바다. 반대만 할 줄 알지 대안을 못 내놓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나 정의만을 내세우는 야당을 지지해달라고 하는 시대는 갔다.막연히 '민생문제'에 집중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야당은 그 이상의 '똑똑하고 유능한 의제 설정 능력'을 보여주고 그것을 통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303쪽) 

 

또 하나의 중요한 지적은 바로 젊은 정치인의 등장이다. 사실 김대중,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미 40대에 당을 대표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선의원들의 나이가 50대를 넘어서고 있다. 전문정치인의 부재는 그만큼 아마추어 정치인들이 계속 정치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선진국에는 상당히 젊은 나이에 정부 수반에 오른 정치인들이 꽤 많다. 영국의 존 메이저는 47세에, 토니 블레어는 44세에 각각 수상이 됐고, 버락 오바마는 47세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20대 초반부터 지역사회 혹은 정당의 기초 조직에서 활동하면서 경력을 쌓아왔다. 존 메이저가 시장통에 설치된 연단 위에 올라가서 연설을 하기 시작한 것은 21세 때였다. 토니 블레어는 22세에 노동당에 가입해서 정치를 시작했고, 오바마도 대학 재학 중이던 20세에 첫 정치 연설을 했다.(307쪽)

 

그의 생각에 동의하듯 안하듯 인정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이기는 야당을 갚고 싶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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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여, 정당으로 쳐들어가라! - '정치 사랑'외에 탈출구는 없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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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사회의 현실이다. 중간계층이 점점 엷어지고 있다. 중장년에게는 불안이 청년들에게는 좌절이 일상화되고 있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 세상이다.

 

<1년만 미쳐라>,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서른살 꿈에 미쳐라>, <30대, 다시 공부에 미쳐라> ...
이렇듯 미치라고 외치던 때가 있었지만, 아무리 미쳐도 안되더라는 걸 깨닫는 데인 오랜시간이 걸리치 않았다. 그 어떤 미침으로도 이른바 '잉여사회'라는 구조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잉여사회>의 저자 최태섭은 잉여사회를 "수많은 잉여가 아귀다툼을 하고, 그중 몇몇이 이기지만 결국은 착취당할 기회를 갖게 되는 종류의 사회"라고 정의한다. "우리 시대의 잉여는 풍요가 아니라 양극화로 대변되는 격차와 집중의 산물이고, 무너지고 있는 중간층의 잔해 속에서 태어난 것이며, 좌절한 이상주의자이기는커녕 이상이라는 것이 사라진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그런 잔해와 폐허 위에서 자립의 가능성을 박탈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라고 윽박지르는 이상한 마케팅이 사회 전 분야에 걸쳐 기승을 부리고 있다. '미려차'는 말은 좀 사라졌을망정,... 자부심은 '열정'이란 말로 대체되어 "당신의 열정을 보여달라"거나 "좀더 열정을 가지고 일해라"라는 주문이 난무한다. 한 텔레비전 광고는 "당신이 머리가 아픈건 열정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이제 열정을 갖지는 않는 당신은 죄인"이 된다. 이런 현실을 고랍하는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새로운 명령>의 저자들은 "열정은 어느덧 착취의 언어가 되었다"라고 단언한다.
"열정은 제도화 되었다. 오늘날 면접관들은 열정을 '측정'한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답변은 간단한다. '악조건들을 얼마나 버텨내는지' 확인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면접관들에게는 우리를 모욕할 권리가 주어진다."(24~25쪽)

 

하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진보(?)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냥 정부만 비판하면 국민들이 따라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선거마다 패배하고 있는데, 패배해도 문제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우리가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그것이 바로 한국형 진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특성이기도 하다. 늘 현실분석을 희망사항으로 대체하면서, 현실을 지적하는 사람에게 '증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붓는 버릇, 그리고 시간이 흘러 자신들의 희망사항이 전혀 실현되지 않았는데도 아무런 성찰과 반성없이 자기들이 옳았다고 버티는 '유체이탈' 성향은 지금도 건재하다. (66쪽)

 

진보는 보수와의 관계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다"라는 걸 드러내는 자기 존재증명에 정치적 역량을 탕진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이 즐겨 쓰는 '정체성'이니 '선명성'이니 하는 말이 바로 그런 자기 존재증명의 슬로건이다. 변호사 출신 새정치민주연합의 한 재선의원은 "이 정당에서 내가 아무리 주도적인 활동을 해도, 결국 듣는 말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였다. 아무리 뛰어도 나의 위치는 주변부였다"라고 토로했다.(83쪽)

 

586정치인들만 그러는 게 아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은 새정치민주연합의 생활 이데올로기라고 보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변화에 대비하고 변화를 추진해야 할 사람들마저 "당신 80년대에 뭐했어?"라는 추궁에 대비하기 위해서인지 보수에 대해 호전적인 자세를 취하며 거친 언어를 구사한다. '싸가지 없는 진보'라고 비판하지만, '싸가지 없음'은 도덕적 우월감이나 선민의식의 표현이기에 그런 비판이야말로 싸가지 없는 게 되고 만다.(86쪽) 

 

현실을 모르는게 당연하다. 지금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큰 정당은 여전히 80년대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586 친노라는 이들이 80년대 민주화의 대가를 정당안에서 챙기고 있다. 국민은 뒷전이다. 그래서 현실문제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를 한다. 그런데 현재 청년들은 구조보다 더 시급한 문제에 걸려있다. 당장 하루하루가 힘들다. 그런 그들을 이해를 못하는 제1야당.

 

승리의 경험이 전무한 상황에선 투표로 힘을 키우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다. 권지웅은 20대의 낮은 투표율에 대해 이렇게 항변한다. "정치적 무력감이 큰 탓이죠. 내가 해서 될까? 이런 거죠. 젊은 세대들은 집단적 행위를 통해 뭔가를 얻은 경험이 크지 않아요. 정치적 행위를 통한 성공을 경험해 본 적 없는 정체 상태의 시민에게 왜 투표하지 않느냐는 다그침이 통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투표에 관심이 없거나 할 수 없는 사람의 조건을 바꿔주는 방식으로 투표하게 해주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지요. '투표하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왜 투표하지 못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작은 승리'의 경험을 갖는 것이 중요하며, 따라서 구조 타령보다는 미시적인 각론에 충실해야 한다. 가려운 곳을 제대로 짚어서 긁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형성되는 신뢰로 세력화를 이루고, 그렇게 결집된 힘으로 구조 개혁도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런 기반 없이 외쳐대는 구조개혁은 양심의 알리바이를 확보하기 위한 마스터베이션에 전락하기 쉽상이다.(118~119쪽)

 

오히려 새정치민주연합보다는 청년들이 만든 작은 유니온들이 더 실질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국회의원 하나 없지만 아르바이트생들의 권리를 보호하는 일에 더 앞장서고 있다.

 

나 역시 '2세대 진보정치'와 '2세대 사회운동'의 만남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청년유니온(노동)'과 달팽이유니온(주거)'처럼 거대 구조 보다는 의제중심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이 필요하다. 진보는 구조에 더 신경써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누울 자리 보고 발 뻗어야 한다"라는 말로 답을 대신할 수 있겠다. 청년들이 각자도생의 길로 내몰린 현 상황에서 구조 타령은 허황된 선문답으로 흐를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정작 청년들이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실질적으로 청년들을 위한 정책은 없다. 지금 논의되고 있는 정년이나 임금피크제, 노동법은 모두 기성세대와 관련있는 일이다. 여야 모두 청년의 문제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대안 역시 가지고 있지 못하다. 더욱더 청년의 청치참여가 필요한 대목이다.

 

물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쉽지 않다. 강준만은 공간의 활용을 이야기한다. 얼마나 현실적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청년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장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에 대한 투자는 소모적 복지가 아니다. 세대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 지속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 출발은 청년 정치인 양성에 있다. 세대갈등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청년들이 이내 좌절하고 꿈을 접는 나라는 미래가 어둡다.(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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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의 정치 썰전 - 보수와 진보를 향한 촌철살인 돌직구 이철희의 정치 썰전 1
이철희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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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를 통해서 보는 정치는 참 한심하다. 심지어는 정치가 이 나라의 걸림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럴까?

 

 정치불신, 그 중에서도 특히 국회에 대한 불신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 국회가 잘하는 게 없으니 불신의 강도가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국회가 왜 못하는지는 짚어볼 문제다. 입법부가 국정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표현처럼 한국은 행정부 우위의 심리적 토대가 아주 튼튼하다. 국회도 국민의 대표로 구성되는 만큼 그들의 판단대로 입법 과정을 처리할 권한을 갖고 있다. 행정부는 잘하려고 하는데 입법부가 당리당략 때문에 제동을 걸고 있다는 식의 이해는 심각한 왜곡이다. 군사독재정권의 잔재다. 헌법에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는 산순한 사실에 비춰보더라도, 입법부는 행정부가 하는 일에 열심히 보조를 맞춰야 한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과거 정통성이 부족한 군사정권의 독재자들은 입법부를 거수하는 '통법부;로 만들었다. 걸핏하면 날치기를 일삼았다. 몸싸움이 벌어지는 국회를 누군들 좋아하랴. 국회 불신이 높아질수록 대통령에 대한 기대는 높아지고, 대통령이 국민의 대변자라는 인식은 강해졌다. 군사정부가 아니더라도 대통령은 입법부와 제도적으로 경쟁해야 하기 때문에 입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질수록 득을 보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행정부는 끊임없이 '지질한' 국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한다.(52쪽)

 

행정부가 하고 싶은 일은 입법부인 국회에 발목이 잡히고, 사법부가 입법부의 구성원인 국회의원들의 범죄 등 치부를 드러낼때면 과연 국회의원들이 왜 필요할까 싶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행정부, 사법부가 자기멋대로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입법부 즉, 국회가 꼭 필요하다. 국회에 대한 증오가 넘칠 수록 덕을 보는 이들은 따로 있다.

대통령제는 삼권분립, 특히 입법부와 행정부 간의 제도적 경쟁을 전제로 한다.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모두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되기 때문이다. 이중적 정통성이다. 그 때문에 대통령과 국회의원은 국정 운영을 놓고 경쟁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대통령제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자 단점이다. 둘이 극단적으로 대립할 경우 이를 해소할 제도적 장치가 없다. ... 두 기관의 대립을 파국으로 이끌지 않도록 하는 거의 유일한 동력이 바로 여론이다. 여론의 압박을 의식해 이러다가 다음 선거에서 패배할 수 있다는 계산으로 타협이 이루어진다. 미국은 대체로 이런 방식으로 이 제도의 단점을 해결해왔다. 한국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정계 개편 또는 탄핵이었다. (51쪽)

 

이 국회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정당정치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여당인 새누리당은 기본적인 정당이라 하기 어렵다.

회사의 오너가 '내 회사 내 마음대로 하다'는 생각은 틀렸다. 전근대적 사고다. 일반 기업도 이럴진대 하물며 개인의 사유재산이 아닌 정당은 더더욱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정당은 사유재가 아니라 공공재다. 정당에 국민 세금을 지원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오늘의 새누리당이 있기까지 얼마나 큰 공헌을 했든, 자신이 얼마나 새누리당을 아끼든 상관없이, 당은 그가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사적소유물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공당公黨이 아니라 사당私黨이 된다. (138쪽)

 

대한민국의 여당은 현재 박근혜 개인 사당에 가깝다.

그렇다면 새정치민주연합은 무능하고 게으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지난 2012년 대선에서 행해진 국정원의 대선 개입에 줄기차게 매달렸다. 정보기관의 대선 개입은 국기 문란의 행위다. 어떤 경우에도 합리화딜 수 없는 부벙이다. 그런데 그첢 중요한 사건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새정치민주연합은 당황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터져도 유권자, 특히 야권을 지지하는 유권자가 4·29 재·보궐 선거 때 투표장에 적극 나오지 않은 현상에도 그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상대가 잘못하고, 그를 악마로 지목하기만 하면 유권자들이 분노의 응징 투표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짧은 생각이다. 악마화와 음모론은 무지르 숨기는 변명이자 위험한 자위다. 사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상대방의 그것과 차별화되는 해법을 선명하게 제시하는 등 유권자가 투표 동기를 갖게 만드는 것은 정당의 몫이다. ... 이런 역량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정말 무능하고 게으르다. (248~249쪽)

 

이렇게 계속 진보(?)가 무능하다면 미국, 영국처럼 되어 버린다. 여야 할 것 없이 보수, 기업을 대변하는 정당으로 말이다. 그런 것을 막기 위해서는 강한 야당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처럼 반정부 노선보다는 전략과 리더십이 필요하다. 의제를 선점하고 추진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것은 한 개인의 노력에 의해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격차 때문에 개인의 노력은 애당초 변수조차 되지 못하는 현실, 이것을 두고 요즘엔 '헬조선'이라는 말까지 쓴다. 암울한 현실에 눌려 자기 자신을 쥐어짜며 자학하지 말고 더불어 손잡고 함께 나서야 한다. 고립된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함께하는 노력과 사회적 해법이 바로 정치다. 정치를 통해 우리 삶을 바꿔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정치를 외면하고 좋은 사회나 내 삶이 편안한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다. 이제 정치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10쪽)

 

* 책을 읽는게 그렇게 편하지는 않다. 박근혜나 새누리당에 대한 비판은 이미 많이 접했지만, 새정치의 민낯을 보는 것은 마음 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비판을 받아들여 이겨나야 한다. 물론 586친노꼰대들이 장악한 새정치가 과연 극복해낼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의 민주당은 참 무능하다. 정치는 크게 선거 정치와 일상 정치로 나눌 수 있다. 대충 짚어봐도 2004년 총선 승리 이후 숱하게 치른 선거에서 거의 대부분 패배했다. 패배 친화적 정당 또는 만년 야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일상 정치는 어떤가? 128석이란 거대 의석을 거느린 정당임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에 맞는 정책을 입법화시킨 예가 없다. 선거 정치와 일상 정치 모두에서 역사상 이처럼 무능한 정당이 있는지 의문이다.(223쪽)

 총선과 대선 연패가 두 차례나 있었는데, 그 패배 후에도 야당에선 새로움이 낡음을 대체하려는 치열한 시도, 즉 세대교체의 시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980년대 학생운동 출신의 당내그룹이 심각하게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386이 486을 지나 586으로 접어들었건만 무얼 남겼는지 기억이 희미하다. 찬란했던 숭고함은 어디가고 따분한 무능으로 허벅지 살만 불렸다. ...
친노 대 비노의 퇴행적 갈등구도는 굳...건하게 유지되었다. 친노 대 비노의 진영 대결은 돌부처도 돌아앉게 할 정도의 꼴사나운 드잡이 행태를 비호하는 숙주였고, 새 인물의 등장을 막는 방벽이었다.(231~2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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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합시다
이철희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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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과 여당, 그리고 각 정당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싸움질이다. 꼴보기 사납나? 난, 싸움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뭐 새누리당이야 사람으로 모이니 정책 보다는 사람들간의 헤게모니 싸움일 것이고,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은 각 계파마다 생각이 다르다. 당연히 싸움이 날 수 밖에 없는 구조 아닌가. 사람도 지역문제를 우선에 두는 사람이 있고, 경제문제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듯이 말이다. 열심히 싸우는 게 정치인의 바른 문제가 아닐까 싶다. 그런 싸움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고 누가 생떼를 쓰는지, 누가 다른 생각을 하는지 들여다 봐야 할 것이다.

의회는 원래 시끄러운 도떼기시장이다. 지역에서 각 세력과 대표들이 와서 자원을 배분받기 위해 법을 만드는 이곳에서는 서로 많이 가져가기 위해 싸울 수 밖에 없다. 비록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더라도 말이다. 싸운다는 것은 노력한다는 뜻이다. 국회에 모인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대표성을 가진 사람이며, 따라서 누군가의 이익을 지켜줘야 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싸워야 한다. (16쪽)

 

우리나라 진보의 역사는 짧지 않다. 보수가 오랫동안 권력을 잡아서 그렇지, 진보 역시 오랫동안 존재한 엄연한 정치집단이다. 그러나 최근의 선거를 보면 지고만 있다. 김대중, 노무현의 리더십을 넘어서는 인물도 보이지 않고, 정책도 시민과 유리되어 있다. 자신들만의 세상에 갖혀 버린 것은 아닌가 걱정된다. 최근 안철수의 탈당으로 새정치에 사람들이 모여들고는 있지만 내부의 혁신이 없는 새정치가 어떤 정책이나 리더십을 보일 지 걱정된다.

 

진보는 자신이 옳은 쪽, 선한 쪽이라는 믿음이 교조로 굳어진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이러한 사고방식이 진보에 팽배해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선거 때 마다 '어떻게 박근혜에게 표를 줄 수 있느냐'는 식의 얘기를 꺼내 든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유권자에게 투표는 가치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가 선이고 악이냐를 따지는 과넘이 아닌 누가 현실적인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을까를 가리는 관점에서 '왜 박근혜를 좋아할까'라는 질문을 던져야 했다. 박근혜는 독재자의 딸이라고 얕보고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대중을 욕할 게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탓해야 한다. 독재자의 딸에게 표를 던질 정도로 진보가 못났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19쪽)

 

 

 2000년대 이후로만 보면 의제도 잘 설정하는 등 시민에 대한 전략, 선거에 대한 전략은 진보보다 몇 수 위다. 시민들이 원하는 바를 콕 집어낸다. 하지만 태생적 한계는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대한민국 보수의 뿌리는 생각보다 깊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의 사림, 그중에서도 노론이 대한민국 보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500년 중 300년 가까이 집권한 노론은 조선 말 나라를 잃자 곧 친일파로 변신한다. 해방 이후에는 김구 중심의 통일 노선과 충돌하는 이승만 중심의 단정 노선의 주축이 되는데 이들이 바로 친미 세력으로 발전한다. 이처럼 노론, 친일, 단정, 친미로 이어지는 일련의 세려이 대한민국 보수의 역사, 보수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다. 근대사로 들어오면 이들은 '성장'이란 아젠다를 내세운 산업화 세력으로 발전한다.
...
북한을 공포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반공논리는 한편으로는 야당을 믿을 수 없다는 논리로 발전하기도 한다. 자신의 장점을 내세우기보다는 여전히 상대를 부정하는 논리로 자신의 정당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보수의 태생적 비극이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의 보수가 승승장구하는 것은 도대...체 왜일까? 이런 논리가 그나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산업화와 고도성장 덕분이다. 보릿고개를 넘겼다는 자부심은 보수의 존재 이유가 됐다. 문제는 이것이 생명을 다했다는 것ㅇ다. 우리 사회의 담론은 산업화를 거쳐 이미 민주화로 넘어간 지 오래다. 그런데 보수는 산업화 이후 다른 어젠다를 만들어내지 못한 채 여전히 헤매고 있는 것이다.
....
지금의 새누리당은 역대 여당 중 가장 공격적인 여당이라 할 만하다. 야당도 아닌 여당이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긍정적인 자기 플랜이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시대 담론을담보하지 못한 부작용이 지금의 호전적인 여당을 만들어냈다. (107~109쪽)

 

이명박 정부를 넘어 박근혜 정부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바로 관료사회의 부활이다. 행정부를 입법부, 사법부의 위에 두는 행포 역시 관료사회와 다르지 않다.

관료 중심의 국가 발전은 어느 정도의 소득수준으로 성장하는 데는 매우 유효한 전략이다. 조직이 전문화될 수록 더 큰 역량이 발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 접어들어 사회가 다원화되기 시작하면 관료 중심체제는 제대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법안을 만들어내는 전문적인 테크닉보다 서로의 입장이 상충되는 이해관계자들이 집단적으로 자기 의견을 표출하고 걸러내는 작업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다름의 문제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전문화된 관료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 일은 행정부가 아닌 의회의 몫이다.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의 논의를 통해 걸러져야 한다. 따라서 한 사회가 발전할 수록 관료의 손에서 선출직 대표에게로 권한이 넘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10쪽)

 

사실 관료주의의 결과는 1997년 IMF 경제위기였다. 그리고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에서 부활한 관료주의 이명박정권에서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박근혜 정권에서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고, 나라는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관료주의의 폐해를 시민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가난한 홍길동이 자기 삶을 바꾸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뿐이다. 하나는 개미처럼 일해서 열심히 부를 축적하는 것, 흔히 말하는 아메리칸 드림이다. 개미처럼 일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자신을 채찍질하는 자기계발서가 유행하던 시대, 이른바 국민성공시대도 있었다. 성패의 기준을 내 노력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러한 시대에도 성공하는 사람은 소수였을 뿐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실패를 맛봐야 했다. 사회가 발전하면 발전할 수록 계층간의 이동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소득의 양극화가 심해져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것을 볼 수 없다.

 

이런 현상은 아메리칸 드림의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자 자기계발서가 퇴조하고 인문사회 서적이 부상했다. 개인의 실패에 대한 문제를 사회구조 속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났다. 개인의 행불행의 문제는 이제 사회적 해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외침이 커졌다. 제레미 리프킨의 비유를 빌리면, 아메리칸 드림이 아닌 유러피안 드림을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사회를 꿈꾼다면 경제와 정치의 긴장관계는 더욱 첨예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는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삶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결국 정치 시스템을 이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164쪽)

 

 

이 책을 읽는다면 우리나라 정치를 한번에 읽어낼 수 있다. 그리고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민주당)은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는지도 보이고, 지역감정의 근원을 알수 있는 등 참 유용하다. 그리고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를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랄 같은 사실은 내가 정치를 외면할수록 누군가 이득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사회의 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몇 가지 안 된다. 시위에 나서는 직접적 행동도 있고, 단체를 만들어 활동할 수도 있지만 부담이 만만치 않다. 이 중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쉬운길이 투표나 정치참여다. 어차피 내 삶에 영향을 주는 법률은 국회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 국회에서 내 입장을 살펴서 법을 만들도록 하는게 유효한 방법이다. 내가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적 결정이 미뤄지지는 않는다. 많이 가진 이들이 더 열심히 투표하는 현상에서 알 수 있듯이, 불행하게도 정치는 참여하는 이들의 의견만 반영되기 마련이다. 결국 내 삶을 돕겠다고 하는 정당과 후보에 표를 주고, 지지를 보내는 정치참여야 말로 내 삶을 바꾸는 가장 쉽고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다. 그래서 싫어도 외면해선 안되는 것이 정치다.(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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