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부탁해 - 권석천의 시각
권석천 지음 / 동아시아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정치관련 책들과 읽는게 맞는게 싶지만, 실은 정치 이야기이다. 정치란 우리 삶이니까.

 

기본적으로 정의는 정치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면에서 언론은 그 역할을 저버렸다. 세월호 참사현장에서 나온 '기레기'(기자 쓰레기)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은 아니다.  

그 폐해는 정치의 영역에서 특히 심각하다. 매체 성향에 맞는 정치인 잘못은 눈감아주면서 성향이 다른 정치인에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댄다. '종북 대 애국', '독재 대 민주', '친노 대 친박'으로 나누고 재단함으로써 진영논리를 확대 재생산한다. 그 결과 사안은 같은데 해석은 정반대다.(339쪽)

 

그것만이 아니다. 오히려 정의라는 이름을 사람을, 사회를 단죄하는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고, 스스로가 그 권력에 도취되어 있다. 정의를 말 할 수 있는 집단이 아닌 것이다.  

몸통은 검찰권이다. 임용된 지 몇달 안 된 실무수습 검사가 어떻게 검사실에서 피의자에게 성행위를 요구할 수 있는가. 특수부 부장을 지낸 검사가 어떻게 차명계좌까지 만들어놓고 기업과 다단계 사기범 측근의 돈을 받은 것인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한 건 검사들 손에 쥐어진 힘이었다. 검찰이 마음먹기에 따라 수사 대상과 범위가 달라지고 기소 여부가 결정되면 적용할 법조문이 가려지는 현실, 권한을 앞세워 권력과 돈, 향응을 추구하고 싶은 일부 검사들의 욕망을 수준 이하의 동료들이 폭로한 것이다.

 

게다가 요즘은 행정부가 국회를, 사법부가 국회를 압박하는 것이 너무 당연히 여겨진다. 국회의원들은 없어져야 할 것으로 보는데, 어떻게 보면 일반 국민들의 입이 될만한 국회를 깔보는 행동일 수 있다. 자기네들 리그에 붙여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는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져야 한다.

 

대부분의 민주국가는 불체포 특권을 두고 있다. 1당 독재였던 소련 헌법에도 "최고회의 대의원은 최고회의의 동의없이 체포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다.

왕이 마음대로 의원들을 가둘 수 있는 시대도 아닌데 이 특권이 왜 필요할까. 3권 분립에 따른 견제와 균형을 위해서다. 행정부나 사법부가 수사,재판을 통해 의회 기능을 무력화하고 의원, 특히 야당 의원을 정치적으로 탄압할 수 없도록 하자는 것이다. (173쪽)

 

그리고 그 행정부의 권력이라는 것도 잘못됐다. 사실 국민들은 권한을 준것이지, 그들에게 권력을 준것은 아니다.

나는 공권력이란 말은 되도록 쓰이지 않았으면 한다. 국민이 정부에 위임한 건 권력이 아니다. 권한이다. 권한은 한계를 지닐 수 밖에 없다. 공이란 수식어도 부적절하다. 공이 무조건 사 위에 있다는 발상은 권위주의 체제에서나 가능하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건 이른바 공권력이 과거만큼 유능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75쪽)

 

게다가 세월호 사건을 통해 행정부의 무능이 그대로 드러났다. 관료주의의 폐해까지도 말이다.

"관료는 민원인을 사람으로 대하지 않고 사례로 다룬다"고 갈파한 적이 있다. 세월호 침몰 참사에서도 현장의 해경과 해양수산부, 안전행정부, 청와대 관료들 눈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던 건 아닐까. 승객, 승무원 476명은 '집계해서 위에 보고해야 할 숫자'였던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인재는 사람이 일으킨 재앙에 머물지 않는다. 비인간화된 사회와 교육이 빚어낸 인간성 소외의 재앙인 것이다.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들의 공허한 눈빛은 수많은 사람을 위기로 몰아넣을 수 있다. 시험에 나오지 않을 질문에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듯, 인간에 대한 열량을 소비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40쪽)

 

 

그렇다고 미래가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미 사회는 다양성을 잃어버렸다. 상위계층이 모든 것을 점점 장악해 나가고 있고, 그 토대가 바뀔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제 관심은 10~20년 후 대원외고 출신이 법조계의 주축이 됐을 때 재판과 수사가 어떤 모습으로 바뀔 것이냐다. 과거 경기고는 전국, 각계각층에서 충원됐다. 가난한 수재가 적지 않았다. 성향도 이질적이었다. 인권운동의 상징인 고 조영래 변호사, 정통보수를 대편하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진보사법의 대표 주자 박시환 전 대법관,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 학교 출신 법조인이다.

반면 외고를 비롯한 특목고 출신은 계층적 동질성이 강하다. 특목고 입학생 중 절반가량이 서울 강남 3구에 거주한다. 부모가 법조인, 의사, 교수와 같은 전문적인 경우가 많다. 기성 법조인들은 "재판, 수사하는 자와 받는 자의 출신 계층이 다르다는 건 심각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111쪽)

 

문제는 개개인들 역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 사회에 낙오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

자녀의 성공을 원하는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도 스스로를 속이는 능력에 가깝다. 자기소개서는 "내가 아닌 나"를 거리낌없이 적어낼 줄 알아야 이기는 게임이다. 봉사도 마음은 중요하지 않다. '스토리텔링'이 가능한 활동이어야 한다. 술자리에서 "계층사다리가 사라졌다고 개탄하면서도 내 스펙이 아들딸에게 세습되는 건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이 없기'를 바라거나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다가는 이 사회에서 갑으로 살기 힘들다는 사실을(24쪽)

 

저자가 이렇듯 한국사회를 비판하는 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월호에 대한 충격때문이다. 세월호는 사회의 많은 것들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렇게 가슴아픈 현실의 민낯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비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을 담고 있다.

 

 

 일단 권석천의 글에는 한 걸음 떨어져 객관적으로 보는 듯 하지만 실은 사람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다.

법망을 조임으로써 범법자는 끝까지 단죄하되 공포의 희생자는 막는 전환점이 되길 기대한다. 아무리 소수의 일이라고 해도 당사자에겐 인생이 걸려 있다.(322쪽)

 

정의로운 사회는 멀기만 한 것일까?

'정의가 이기는게 아니다. 이기는 게 정의다.' 이 지랄 같은 상식을 깨는 건 슈퍼 히어로 한두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같은 세상을 꿈꾸는 이들의 어깨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우린 결국 서로에게 정의를 부탁해야 하는 존재다. (4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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