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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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하면 왠지 쎄보이는 여자라는 이미지가 있다. 뭐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고, 조작된 이미지인지는 머리로는 충분히 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란 각인효과가 참 크다.

 

아디치에는 책에서(TED 강의에서) 그 과정을 유쾌하게 설명한다. 페미니스트가 부정적인 의미를 갖자 그녀는 '행복한 페미니스트'라고 붙이는 등.

 

물론 이런 이야기는 대체로 농담이었지만, 이것만보아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에 얼마나 많은 함의가 깔려 있는가, 그것도 부정적인 함의가 깔려 있는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남자를 싫어하고, 브래지어도 싫어하고, 아프리카 문화를 싫어하고, 늘 여자가 우위에 있어야 한 다고 생각하고, 화장을 하지 않고, 면도도 하지 않고, 늘 화가 나 있고, 유머감각이 없고, 심지어 데오도란트도 안 쓴다는 거지요. (14쪽)

 

아디치에의 말을 조금 더 들어보자.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37-39쪽)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이기 때문에라는 규정이 우리의 삶을 얽매는가. 생각해보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자니까, 여자니까라는 프레임속에 살아왔다. 비단 부모의 이야기 뿐이 아니라, 학교에서, 심지어는 TV에서도 그런 점을 강조한다. 개인과는 상관없이...

 

       

 

젠더 문제는 분명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젠더문제를 문제가 아니라고 배워왔으니까.

젠더는 대화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이 주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여깁니다. 남자도 여자도 젠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며, 혹은 젠더 문제를 성급히 부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현 상태 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이기를 바꾸는 것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 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 년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 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 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 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어떤 남자들은 페미니즘이란 개념에 위협을 느낍니다. 내 챙각에 그런 반응은 남자아이들이 자라면서 받았던 교육, 즉 그들은 남자니까 “당연히” 우위를 차지해야 하며 만일 그러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존감이 훼손될 거라는 가르침이 야기한 불안감 탓입니다. (44쪽)

 

젠더문제에 대해 조금 더 진지하게 접근해보자.

그러니 남자들은 말 그대로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합리적인 현상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천 년 전에는요. 당시에는 육체적 힘이 생존에 가장 중요한 자질이었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강한 사람이 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남자가 육체적으로 더 강합니다. (물론 예외도 많지만요.)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전혀 다릅니다. 오늘날 지도자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은 육체적으로 더 강한 사람이 아닙니다. 더 지적이고 더 많이 알고, 더 창의적이고, 더 혁신적인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런 자질들을 좌우하는 호르몬은 없습니다. 남자 못지않게 여자도 지적일 수 있고, 혁신적일 수 있고,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화했습니다. 그러나 젠더에 대한 우리의 생각들은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습니다. (21쪽)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쟁취해냈지만, 아직 우리는 젠더문제에 대해서는 민주적이지 못하다.

 

아직 남자들은 페미니스트가 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민주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페미니스트를 아래와 같이 정의한다면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래전 그날 내가 사전을 찾아보았을 때,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페미니스트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사람(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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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하는 입 - 혐오발언이란 무엇인가 질문의 책 2
모로오카 야스코 지음, 조승미.이혜진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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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정도 읽었던 책을 주말내내 정리중)

 

여성혐오에 대한 책을 읽어가면서 어느정도 감을 잡아가는 중이다. 일단 남성인 나는 기본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실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그런면에서 이 책은 혐오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을 잡아주는 좋은 책이다.

 

1980년대 미국 대학교에서는 비백인과 여성의 입학을 차별하는 사건이 빈발했다. 당사자와 교수 등을 중심으로 차별 표현 시정이나 금지 등 언어를 중심으로 문화적인 차별을 철폐하고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하는 운동이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대학이 혐오발언을 포함한 괴롭힘 행위 전반을 막는 규제를 채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규제의 합헌성을 둘러싼 논쟁이 미국에서 사회문제가 되면서 혐오발언이란 말도 널리 퍼졌다(75쪽)

 

혐오발언의 역사가 그리 짧지 만은 않다. 30여년 후 지금의 대한민국과 그리 다르지 않다. 민주화가 되었지만 많은 부분에서 인식은 그만큼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여성혐오는 단순히 남성-여성만의 문제라고 볼 수 없다. 남성이라는 지배권력과 피지배권력과의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는 미군 후텐마 비행장의 오키나와현 내 이전을 강행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환경영향평가서를 2011년 연말까지 제출하려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평가서를 연내에 제출할지 아닌지 왜 확답을 피하느냐고 보도진이 묻자, 다나카 국장은 (여자를) 강간하기 전에 이제부터 강간하겠다고 말하고 하느냐”고 말했고 이 사실이 보도되자 다음날 경질되었다. 일본과 오키나와의 관계를 강간하는 남성과 당하는 여성의 관계처럼 폭력적 지배-피지배, 차별-피차별로 봤던 것이다. 오키나와를 차별하는 동시에 여성을 차별하는 속내를 들켜버린 셈이다. (68쪽)

2010년 12월에는 성소수자를 무시하고 차별하는 발언을 쏟아냈다. "TV를 보면 동성애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나온다. 일본은 너무 제멋대로인 상태다.” “(동성애자는) 역시 어딘가 모자라 보입니다 유전 탓이겠죠. 불쌍하죠." 2013년 1월 13일 자《주간 포스트》 대담도 문제였다. “결국 동성애자란 건 불쌍한 겁 니다.” “미와 아키히로를  보면 남자가 그 나이가 먹고 그런 꼴로 나오느냐고 생각하는데, 동시에 불쌍해지기도 해요. 유전 공학을 연구하는 선생님께 들으니 인간뿐 아니라 포유류나 그 어떤 세계에도 몇 퍼센트는 꼭 순수한 호모가 생긴다고 하더 군요” 남자인 주제에 싸구려 여자처럼 하고 다니고 남자답지 못하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남존여비의식이 특히 동성애자 남성에 대한 멸시로 이어진 것이다.  (70쪽)

 

혐오발언은 기본적으로 소수자 차별이다. 범죄라고 할 수는 없지만, 법으로 규제를 해야 한다.

 

혐오발언과 증오범죄는 소수자 차별이며 공격이란 점에서 본질이 같다. 그런데 혐오발언은 유형력을 수반하지 않는 언행에 의한 폭력, 증오범죄는 '주요하게 유형력을 동반하는 범죄'를 가리킨다. 혐오발언이 반드시 범죄 라고는 볼 수 없고, 엄밀히 보자면 증오범죄의 일부도 아니다. (77)


혐오발언이란 넓게는 인종, 민족, 국적, 성별, 성적 지향과 같은 속성을 갖는 소수자 집단이나 개인에게 그 속성을 이유로 가하는 차별표현이다. 그리고 혐오 발언의 본질은 소수자에 대한 자별, 적대, 폭력의 선동(자유권규약 20조),"차별을 선동하는 모든 행위(인종차별철폐조약 4조 본문),이자  표현에 의한 폭력, 공격, 박해이다. 국제인권기준에는 혐오발언의 정도에 따라 악질적인 것은 형사 규제, 그보다 덜한 것은 민사 규제, 그보다도 덜한 것은 법 규제가 아닌 것으로 억제하라고 요구한다. 모든 혐오발언이 범죄는 아니지만, 이를 둘러싼 법규제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 세 가지를 확실히 구별 하는 것이다. (84쪽)

 

혐오발언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을 때, 정치적인 마녀사냥이 필요할 때 권력은 혐오를 이용한다. 그리고 그 결과 인류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했다. 일본-조선과의 관계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관동대지진이 일어났을때 일본은 조선인에 대한 학살을 저질렀다. 혐오발언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혐오발언이 초래하는 또 다른 해악은 편견을 확산시켜 고정관념으로 만들고, 편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하여 결국 차별 구조를 강화하는 것이다. 사회 심리학자 고든 윌러드 올포트에 따르면 혐오발언은 증오를 사회에 퍼뜨리고 폭력과 협박을 증대시키는 연속체의 일부이며 궁극적으로는 제노사이드나 전쟁으로 이끈다. 독일에서는 나치가 유대인에게 되풀이해온 혐오발언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 수백만 명을 희생시킨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거액의 배상금을 치르느라 경제가 피폐해졌고, 국민들은 허덕였다. 사회에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나치는 패전의 원인이 유대인과 공산주의자의 책략과 음모라고 선전했다. 또 일부 고소득층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선동했다. 유대인이 '기생충', '열등민족'이므로 사회에서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유대인 캠페인으로 나치는 지지 기반을 넓혔고 결국 1933년에 정권을 잡았다. 집권 직후 반유대법이 제정되어 유대인의 직업, 영업, 재산을 제한하고 시민권을 박탈했다. 많은 독일인이 이에 반대하지 않았고 일부는 스스로 유대인 공격에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독일에서는 모든 국민들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 과거사 반성에 바탕을 두고 유대인 학살 사실 을 부정하는 것은 금지되며, 혐오발언은 엄한 형사처벌을 받는다. 
1994년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투치족 수십만 명을 학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학살은 후투족 정부 고위관리와 라디오방송이 “투치족은 바퀴벌레다 쳐 죽여라"라는 식으로 혐오발언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는 르완다 국제전범법정 판경에서 인정된 사실이다. (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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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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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별점 두개와 세개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지나치게 프로이트등의 이론에 기대고 있는 점과 일본인에 의해 씌여져 잘 알지 못하는 일본의 저자와 개념이 등장하고, 또 어렵다. 읽기에도 불편하고(읽기에 불편하다는 점은 다른 한편으로 아직 내 자신이 여성혐오라는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성으로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과 여성이 갖는 차별에 대해 보편적으로는 인정하지만 실제에서는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남성이기 때문에)

 

저자는 차별이라는 정의부터 하고 시작한다.

차별이란 어떤 이를 타자화함으로써 그것을 공유하는 다른 이와 동일화하는 행위이다. (42쪽)

 

그래서 여성혐오는 여성에 대한 타자화와 차별이 근본임을 이야기한다. 페미니스트란 바로 그런 차별과의 갈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남성의 여성 혐오는 타자에 대한 차별인 동시에 모멸이다. 남성은 여성이 될 걱정이 없기 때문에 안심하고 여성을 타자화하고 차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여성에게 있어 여성 혐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가 된다. 자기 혐오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모든사람에게 있어 고통스러운 것이다. 사회적 약자는 그 종류를 막론하고 모두 비슷한 '범주 폭력'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범주는 지배적인 집단social majority/dominant group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여성이 되는 것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렇게 적었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떤 식으로 여성이 되는 것일까? 그것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받아들이는 것에 의해서이다. 
....
사람은 여성이 될 때 '여성'이라는 범주가 짊어진 역사적 여성 혐오의 모든 것을 일단 받아들인다. 그 범주가 부여하는 지정석에 안주하면 '여성'은 탄생한다. 그러나 페미니스트란 그 ‘지정석'에 위화감을 느끼는 자, 여성 혐오에 적응하지 않은 자들을 가리킨다. 때문에 여성 혐오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페미니스트는 없다.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은 이 여성 혐오와의 갈등을 의미한다. (156-158쪽)

 

이런 여성에 대한 차별의 근본 원인은 지배적 집단이 남성이기 때문이다. 저자의 지적중에 의미있는 것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그 사회적 성을 결정하는 것은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소수자역시 남성에 속하지 못하고(특히 남자 동성애자들에 대한 침해가 심한 것을 보면) 배제된 자들이다.

 

남자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남성이 된다고 생각했었다. 착각이었다. 남자는 남자들의 집단에 동일화하는 것을 통해 남성이 된다. 
남자를 '남성'으로 만드는 것은 다른 남자들이며 남자가 남성이 되었음을 승인하는 것도 다른 남자들이다. 여자는 기껏해야 남자가 남성이 되기 위한 수단, 혹은 남성됨의 증명으로 부여되거나 쫓아오는 보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여자를 '여성'으로 만드는 것은 남자이며 '여성됨을 증명하는것도 남자들이다. 
...
남성에게 이성애 질서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성이 성적 주체임 을 증명하기 위한 장치이다. 이성애 장치 아래에서 남자와 여자는 대등한 짝이 될 수 없다 남성은 성적 욕망의 주체, 여성은 성적 욕 망의 객체 위치를 차지하며 이 관계는 남녀 사이에 비대칭적이다. 이성애 질서란 남성은 동성 남자를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해서는 안 되며 남성이 아닌 자(즉 여성만을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하라는 명령을 가리킨다 뒤집어 말하면 남성에 의해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된 자는 남성 아님 여성이 된다 그것이 남성일 때 그자는 여성 화, 즉 '여자 같은 남자가 된다 여기서 '여성이란 그 정의상 남성 의 성적 욕망의 객체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성의 성적 욕 망을 환기시키지 않는 여자는 정의상여자가 아니게 된다. (288-289쪽)

 

읽기에는 힘들지만 여성혐오와 그에 대한 인식의 기반을 가지기에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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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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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면 이전의 우리나라는 여성차별의 시대였다. 여성차별이 약화된 - 실제로는 여전한- 시대에 여성차별은 여성혐오로 대체된다. 기존에 나쁜 여자의 이미지가 있었다면 '김치녀', '김여사'로 대변되는 여성은 혐오의 대상이다.

 

 흥미로운 것은 '나쁜 여자'와 '착한 여자라는 이분법적 구분 자체가 흐려진 현 상황이다. 여성을 성녀와 창녀로 나누어 보상과 처벌을 반복하는 것은 가부장적 사회질서가 여성을 통제하는 매우 오래된 방식이지만, 현재의 '여성 혐오 현상은 거의 모든 한국 여 성들을 '나쁜 여자로 만든다, 2006년에 등장한 '된장녀' 담론과 현재의 김치녀, 담론을 보라 "모든 여성은 아니지만 일부 여성들이 분수에 맞지 않는 사치를 부린다는 궁핍한 이유로 굳이 스타벅스 커피잔을 들고 다니는 여성을 색출해왔다면, 이제는 그럴 필요조차 사라졌다 김치녀라는 말이 내포하듯 이제 한국의 모든 여성이 '나쁜 여자의 몇 가지 유형 안에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이 유형들은 마치 거푸집과 같아서 여성 전체를 엇비슷한 방식으로 찍어낼 수 있게 되었다. 지금과 같은 구도 속에서는 어떤 여성도 이 거푸집을피해갈수가 없다. (17쪽)

 

실제 여성혐오는 광범위하다. 진보적인 팟캐스트도 여혐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젊은 진보 작가들의 여성폭력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여성혐오를 양산하는 이벤트들은 조작된 경우도 심심치 않다. 사실확인에 앞서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단죄를 하고 끝나 버린다.

 

그리고 이 여성혐오는 지난한 싸움이다. 지속적인 동일한 혐오에 동일한 대응. 정희진이 이야기하는 '낡은 새로움'은 이 싸움에 걸맞는 언어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남성실업의 일상화가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협이 여성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우리는 언제나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같은 억압'에 반복해서 대응해야 하고,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한다. 나는 이 고통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여성 혐오 현상에 대해서 대응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평생을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모욕에 대응하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다. 미국처럼 사법상 혐오 범죄 hate crime 규제를 법제화하 거나 국가가 해결할 일이다 그러나 한국사회는 언제나 피해자가 나서야 하고, 가해자는 표현의 자유를 외친다. 
그러나 공중파 방송에서의 노골적인 발화는 다르다 그래서 나는 이런글을'또' 쓴다. 물론 작금의 여성혐오 현상은 남성 실업의 일상화, 즉 자본주의의 질적인 변화와 매체 환경의 급격한 변화와 맞물린 시대적 배경이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지금 벌어지는 일련의 현상을 낡은 새로움이라고 본다. 여성 혐오, 약자 혐오, 피해자 혐오에 대해 한국사회는 유독 관대하다. 자신과 체제에 대한 분노를 약자에게 투사하는 방식,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문화, 모든 계급 갈등을 봉합하는 막강한 남성 연대 종속적 남성 입장에서는 패권적 남성에 대한'짝사랑. (98쪽)

 

그리고 그 차별, 혐오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젠더를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성별은 인류가만든위계와 불평등 중 가장 오래된 제도다. 이렇게 장구한 역사 때문에 제도라는 생각은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문화, 무의식, 인간 몸의 일부로 체화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차별적 제도, 인간의 모든 지배와 피지배 관계의 모델이 된 것이다. 계급, 연령, 인종적 소수자, 환자, 장애인이나 성소수자 같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무시와 억압, 착취, 혐오는 남성이 여성에게 한 행위를 기준으로 삼고 '배운' 것이다. (115쪽)

 

여성 뿐만이 아니다. 성소수자의 혐오 역시 이에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 혐오와 성소수자 혐오에는 공통의 기반이 있다. 성별 고정관념과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그것이다. 성소수자들의 존재는 여성 차별적인 성별 고정관념과 가족 제도를 위반한다. 여성들의 삶의 변화가 여성의 평등과 해방을 위한 열망으로 분출했을 때마다 성소수자들도 운명의 변화를 꿈꿨던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다. 여성 혐오는 단지 비뚤어진 인식과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형식적인 평등 이미지로 인해 기만적으로 은폐되는 체계적 차별과 폭력의 문제다. 한국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은 시민성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이기 때문에 혐오의 파괴적 영향을 좀 더 극적으로 보여주는 위치에 있다. 다른 한편에서, 오늘날 여성 혐오 현상은 성소 수자 운동의 목표와 전략에 중요한 교훈을 던진다. 제도적 인정과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천대와 혐오를 없앨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230쪽)

 

결국 여성에 대한 혐오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연결되어 있다. 민주주의가 위협받을 때 사회문제의 원인을 소수자에 돌려버리는 것이다. 살기가 점점 힘들어질 때 소수자에 대한 마녀사냥으로 그 출구를 찾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법적 규제와 더불어 민주주의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민주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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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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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따금 불쑥 아무 상관없는 일들이나 음모론을 늘 어놓는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지만, 내 경험 상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자신감이 넘쳐서 정면 대결을 일삼는 사람은 유독 한쪽 성에 많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그리고 다른 여자들을 가르치려 든다.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든 모르든 어떤 남자들은 그렇다.

 

여자라면 누구나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어느 분야에서든 종종 괴로움을 겪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나서서 말하기를 주저하고, 용감 하게 나서서 말하더라도 경청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은 길거리 성희롱과 마찬가지로 젊은 여자들에게 이 세상은 당신들의 것이 아님을 넌지시 암시함으로써 여자들을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현상 때문에 여자들은 자기불신과 자기절제를 익히게 되는 데 비해 남자들은 근거 없는 과잉 확신을 키운다. (15쪽)

 

저자 레베카 솔닛은 황당한 경험을 한다. 한 파티에서 한 남자가 자신이 작가라는 이야기를 듣자, 책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상대방인 레베카 솔닛이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남녀관계에 있어서 종종 보게되는 장면인 것 같다. 물론 나 자신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애써 기억을 더듬어보면 나 자신도 무언가 자꾸 설명하려 든 것이기 때문에. 물론 이런 내용이 불편하다. 그래도 남들보다는 남녀평등에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는 자신이 고른 피해자에게는 아무런 권리도 자유도 없지만 자신에게는 그녀를 통제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 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45쪽)

강간을 비롯한 폭력적인 행동들, 극단적으로는 살인에까지 이르며 폭력을 쓰겠다는 위협까지 포함하는 이 모든 행동은 일부 남자들이 일부 여자들을 통제하려는 시도로 펼치는 방어막에 해당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그런 폭력이 두려워 스스로를 제약하며, 그러다보면 자신도 익숙해 져서 그런 상황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게 된다. (50쪽)

 

남자들이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드는데에는 근본원인은 권위주의다. 그 권위주의는 가장 큰 문제는 사회적으로 굳어져서 실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무려 40세대를 망라하는 신약 마태복음의 가계도는 아브라함에서 요셉까지 이어진다(다만 요셉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수의 아버지로 추정된다는 사실은 언급 되지 않는다).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마태복음에 나온 예수의 부계를 그림으로 표현한 일종의 토템폴-는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중세의 여러 예술작품에서 묘사되었으며, 오늘날 우리가 작성하는 가계도의 선조라고 일컬어진다. 이처럼 - 가부장제의, 가계의, 내러티브의 - 일관성은 삭제와 배제를 통해 확보된다. (103쪽)

여성을 사라지게 만드는 방법은 또 있다. 이름의 문제를 생각해보라 어떤 문화에서는 여성이 자기 이름을 간직하 지만 대부분의 다른 문화에서는 여자가 낳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성이 붙는다. 영어권 나라들에서는 최근까지도 여자가 결혼을 하면 남편의 성 앞에 ‘부인(Mrs.)을 붙여 불렀다. 여자가 결혼을 하면, 그때부터는 가령 샬럿 브론테 이기를 그만두고 아서 니콜스 부인이 되었다. 이름은 여성의 계보를 지우고 여성의 존재마저 지운다. (105-106쪽)

 

실제로 사회제도 자체가 여성을 일관성있게 배제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성에 대한 권위는 배제된 여성위에서 만들어졌다.

여성에 대한 배제는 현실적으로 발생한다. 사회에서도 쉽게 발생하는 일들인데, 교수에 의한 조교에 대한 성폭력 문제나, 회사내 임원의 여직원에 대한 성폭력에 대한 문제가 있을때, (남성과 여성의 발언이 있을때) 여성의 발언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인식이다.

여자가 무언가 남자를 힐책하는 말을 하면, 특히 그것이 기득권의 핵심에 놓인 남자에 대한 말이라면, 사람들은 그 발언의 진실성을 의심할 뿐 아니라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능력이 있는가, 심지어 권리가 있는가의심하는 반응을 보 인다. 이런 일은 전혀 드물지 않게 벌어진다. 그동안 세대 를 막론하고 모든 여자는 자신들이 망상적이고, 헷갈려하 고, 타인을 조종하려 들고, 사악하고, 음모론적이고, 선천 적으로 부정직하다는 비난을 들어왔다. 가끔은 그 모든 표 현들을 동시에 (154쪽)

 

뿐만 아니라, 행동거지 즉 옷차림 등을 거론하며 차별하는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일어나지만, 나 조차도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문제들이다.

 

캘리포니아에서 한 살인사건이 있었다.

한명의 비참한 젊은 남성 살인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전체가 문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금요일의 아일라비스타에서 우리의 평형은 깨어졌다. 지각판 사이의 긴장이 분출해 지진이 난 것처럼, 젠더의 영역들이 약간 이동했다. 학살 때문에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방대한 대화의 네트워크에 모여서 경험을 나누고, 의미와 정의를 재고하고, 새로운 이해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곳곳의 여러 추모제에서 사람들이 촛불을 치켜들었다면, 이 대화에서는 사람들이 생각과 단어와 이야기를 치켜들었다. 그것들 또한 어둠을 밝혔다. 어쩌면 이 변화는 앞으로 더 자랄 것이고 더 지속될 것이고, 더 중요해 질 것이고, 그리하여 피해자들에 대한 영원한 기념비가될 것이다. (197쪽)

 

그리고 우리도 2016년 강남역 사건을 경험하면서 그동안 묻어 두었던 것들에 균열이 일어났다. 여성이란 무엇인지, 여성혐오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 사건으로 얼마나 바뀔지는 모르겠지만, 사회적으로 여성혐오라는 것을 드러낸 중요한 사건임에는 틀림없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결론은 많이 식상하다. 너무 뻔한 좌파적 결론을 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방되어야 할 구속은 또 있다. 경쟁과 냉혹함 과 단기적 사고와 가혹한 개인주의를 높이 사는 체제 환경파괴와 무제한 소비를 너무나 잘 뒷받침하는 체제, 한마디로 자본주의라고 불러도 무방한 체제이다. 이런 체제는 최악의 마초성을 현실로 구현하고, 지구에 존재하는 최선 의 것들을 파괴한다.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이런 체제에 좀 더잘적응하긴 하지만, 이 체제는 사실 둘 중 어느쪽에도 진정으로 유익하지 않다. 사빠띠스따(Zapatista) 혁명처럼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환경, 경제, 토착문화 둥둥 여러 관점을 폭넓게 아우르는 이데올로기에 따른 운동들을 떠 올려보자 그런 운동이야말로 페미니즘만은 아닌 페미니 즘의 미래일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이미 페미니즘의 현 재인지도 모른다, 1994년에 일어난 사빠띠스따 혁명은 지 금껏 진행되고 있으며, 그밖에 다른 사업들도 무수히 많 다 그들은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자 어떻게 살 수 있는지를 새롭게 상상하고 있다. (225-2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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