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와의 경쟁 - 진화하는 기술, 사라지는 일자리, 인간의 미래는?
에릭 브린욜프슨 & 앤드루 매카피 지음, 정지훈 외 옮김 / 틔움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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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Race against the Machine이다. 번역은 <기계와의 경쟁>으로 되어 있지만, '기계와의 경주'가 어울려보인다. 책 자체가 기계와의 경쟁보다는 기계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책은 경제침체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경제침체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한다. 기계의 변화를 인간이 못 쫓아가서 발생한다고 이야기한다.

 

침체론자는 미국의 중간 소득 감소와 전체적인 경제 성장 둔화가 상당히 오래전부터 이뤄져 왔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진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기술혁신의 속도가 늦어진 것을 원인으로 생각하지만 우리는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기술혁신의 속도를 인류가 쫓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간단히 말해, 사람이 기계와의 경주에서 패한것이다.(33쪽)

 

기술혁신은 체스판의 후반부와 같이 기하급수적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의 발전은 경제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기술적 실업의 발생이다.

 

기술이 계속해서 발달하고 오직 사람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기계가 위협하기 시작하면, 미래 어느 순간부터는 점점 더 많은 일이 기계의 몫으로 넘어갈 것이다. 적어도 미국에서는 이 같은 사실이 이미 증명되었다. 지난 30년 동안 미국의 비숙련 노동자 임금은 계속해서 낮아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급여 수준이 최저 생활비 이상이 될 때 기술적 실업이 발생하며 (84쪽)

 

기술적 실업은 우리가 겪고 있는 실제 위협이다. 이 위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술 변화가 만들어내는 3가지 승자와 패자 집단을 올바르게 정의해야 한다. (1) 고숙련 근로자대 저숙련 근로자 (2) 슈퍼스타 대 기타 일반인 (3) 자본 대 노동.(85쪽)

 

1. 고숙련 노동자 대 저숙련 노동자

흥미로운 것은, 높은 교육을 받은 근로자의 경우 공급이 늘어도 이들의 임금은 계속 올랐다는 것이다. 공급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도 급여가 계속 올랐다는 것은 숙련된 근로자에 대한 상대적 수요가 증가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최소한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가장 낮은 임금을 받게 되었고, 이 같은 변화는 전체적으로 소득 불균형을 심화시켰다.(87쪽)

 

2. 슈퍼스타 대 기타 일반인

많은 산업 분야에서 소수의 승자가 대부분의 보상을 가져간다. 대중음악가, 프로 운동선수, 전문 경영인 등을 생각해보라. 기술은 정보 상품 뿐 아니라 비즈니스 프로세스 그 자체를 복제한다. 그 결과 한사람의 재능, 통찰력, 결정이 한 국가 혹은 전 세계 시장에 영향을 준다. (91쪽)

기술의 발전으로 단 한명이 판매할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를 값싸고 쉽게 복제할 수 있다면,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드는 한 사람이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 다음 품질의 제품을 생산하는 사람은 시장의 아주 적은 부분만을 확보할 뿐이다. (92쪽)

실제 일반 근로자와 CEO의 월급을 비교해보면, 1990년에는 70배의 차이를 보였지만 2005년에는 300배까지 늘었다. .. 이런 현상이 정보통신 기술의 활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으며 다른 경영진의 급여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기술의 도움으로 창업주, CEO, 엔터테인먼트 스타, 그리고 금융 부문의 전문가들은 글로벌 시장을 오가며 자신의 능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이전 시대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보상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94쪽)

 

3. 자본 대 노동

기업 순이익이 국내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0년 사이에 최고치였다. 반면에 노동에 대한 각종 보상은 임금과 모든 수당을 포함해도 50년 중 최저치였다. 노동보다 자본이 점점 더 큰 몫을 가져가고 있다.(97쪽)

 

기술의 발전은 불평등한 세상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현재의 기술혁신은 이런 불평등을 더 가속화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저자들은 다소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 기술혁신을 인류가 쫓아가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교육과 제도의 변화를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결국 교육이나 제도가 아무리 변화한다고 해도 기술혁신의 속도를 쫓아갈 수는 없을 것 같다.

 

인공지능을 갖춘 기계의 등장은 분명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갈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저자들의 해답중에 하나는 인간과 기계가 협조할 수 있다고 본다. 기계의 도움과 인간의 판단이 결합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인간과 기계의 체스경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그 뒤의 체스경기에서는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조를 이룬 팀들이 좋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장점을 더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경제적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지적은 새겨들어야 한다. 저자들의 해답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계를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공존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인공지능, 로봇의 시대를 맞이하는 인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은 분명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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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 국민학교에서 역사교과서 파동까지
김한종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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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 국사교과서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 초까지 국정으로 발행되었다. 국사교과서가 원래부터 국정도서였던 것은 아니다.
...

1973년 2월 16일에 문교부는 중학교 국사 교과서 11종에 대해 개편을 지시했다. '①유신정신의 반영, ② 새마을, 수출증대, 교육재료 보강, ③급변하는 국제사회에 적응, ④변동된 교재 및 통계 보완 ⑤ 국사교육 강화'내용을 반영하라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부의 정책을 선전, 홍보하는 방향으로 개편하라는 노골적인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208-209쪽)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은 1970년대의 일이다. 바로 박정희가 종신독재를 꿈꾼 유신정권의 시점이다. 한국전쟁 당시에도 검인정 체제였지만, 국정화까지는 아니었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역사는 지난한 싸움의 연속이다. 해방후 역사학자들과 역사교육자들은 식민사학의 극복을 위해 싸웠다.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식민지가 되었다는 '정체성론'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조선후기를 연구해 조선후기 '자본주의의 맹아' 등의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정체성론'과 '타율성론', '당파성론' 등 시민들의 뇌리에 남아있는 인식까지 바꾸기는 힘들다.

붕당정치는, 국왕이 자기 마음대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집단으로 한정되기는 하지만 꽤 많은 사람의 의견을 수립하여 정책을 결정하는 공론정치이며 집단 간의 경쟁으로 올바른 정치를 유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렇게 알고 있다고 해서 역사인식 자체가 정말로 달라지는지는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붕당정치는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당쟁으로 다가온다. 권력을 잡기 위한 다툼은 추하고, 학생들은 이 과정에서 선한 편과 악한 편을 가린다. 숙종조에 있었던 서인과 남인의 대립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을 비교하면서 여전히 '인현왕후는 선, 장희빈은 악'으로 다가온다. 서인과 남인의 정책, 정치적·경제적 기반 등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은 역사지식이지 역사의식의 내면화로 이어지지 않았다. (169쪽)

 

역사교육의 거대한 걸림돌은 식민사학 뿐만 아니라 일제가 그랬던 것 처럼 지배층은 역사를 자기 입맛에 맞게 교육하려고 한다.

대표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해 역사에 깊숙히 개입한다. 삼별초의 몽골항쟁이나 충무공 이순신 등에 대한 무인들의 성과를 대대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군사정권의 정당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 역사학계는 민중사학이 등장한다. 민중사학은 역사 주체를 지배층이 아닌 민중으로 보고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근현대사 부분에서 성과를 보였다. 민중사학 덕에 사회동요 등으로 설명되던 역사교육이 사회구조의 변동 등으로 바뀌었고, 일제시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이 추가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사교과서의 현대사 기술은 경제성장 논리로만 설명되었다. 하지만 보수지배층은 이러한 작은 변화에도 거부감을 갖게 되고 1990년대 국사교육 준거와 관련된 파동이 일어난다.

 

1980년대 특징중의 다른 하나는 재야사학자라 불리는 사이비사학자들의 영향력 확대이다. 이들은 검증되지 않은 한단고기 등 상고사 내용을 바탕으로 위대한 한민족을 이야기하는데, 박정희 정권에 이어 무력으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과 결탁한다. 이들은 강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보여 12,12 군사정변과 5,18광주항쟁으로 정통성이 부족했던 전두환정권에 의해 역사교육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최근까지도 한사군 등과 관련해 여전히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민중사학에 의한 근현대사 연구결과가 미미하게나마 교과서에 반영되기 시작한 건 보수우익에는 충격이었던 것 같다.

국정교과서 비판을 그대로 보아 넘길 경우, 앞으로 더 큰 폭의 개정을 감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민중사관에 대한 비판과 국사 교과서 개편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교육과정 개정이나 국사 교과서 개편을 둘러싸고 장차 겪게 될 대립을 예고하는 것이었다.(292쪽)

 

1990년대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반영한 '국사교육 내용 준거안'이 발표되었다. 새로운 준거안은 먼저 용어의 변경을 시도하였다. 5·16은 쿠데타로 제주4·3항쟁등이 그 예이다. 그리고 냉전이데올로기에 의해 왜곡된 역사적 사실을 바로잡고자 했다. 모스크바3상회나 한국전쟁 중 민간인학살 등에 기술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준거안에 대한 보수언론들은 맹렬한 비판을 가한다.

국사교과서 내용 자체도 아니고,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준거안 시안을 놓고 언론은 왜 이처럼 극렬한 반응을 보인 것일까? 누구나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는 단지 국사 교과서 내용의 문제 때문만이 아니었다. 당시의 사회상황과 정치적 목적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었다.

준거안 파동은 1980년대 중반부터 나타나는 역사학계의 진보적 움직임과 역사 교과서 비판의 반작용이었다. 일부 정치·사회 세력은, 준거안과 같이 국사교과서가 서술될 경우에 자신들의 존립근거가 위협을 받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예를 들어 반탁운동은, 우익 세력이 자신들이 대한민국을 세운 정통 세력임을 주장하는 근거였다. '반탁=우익=애국, 친탁=좌익=매국'이 오랫동안 이들의 존재가치를 뒷받침해주었다. 이들에게 모스크바 3상회의를 달리 해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5·16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5·16은 당시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선전되었다.그러기에 5·16을 '군사혁명' 또는 '혁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준거안 시안대로 서술하면 5·16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쿠데타로 전락할 상황이었다. 이는 5·16을 기반으로 정치권력을 장악하였으며 이후에도 권력을 유지하던 사람들에게는 존재를 위협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330~331쪽)

 

이런 보수우익의 반응은 2000년대 중반에 있었던 금성출판사 역사교과서 문제와도 맥을 같이한다. 특히 박근혜정부가 들어서서는 더 이상 검인정 교과서 체제에서는 이런 역사적 연구결과들이 교과서에 반영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다.

 

역사교과서와 관련된 논란은 식민지 시대부터 계속되었다. 일제, 군사정권, MB, 박근헤 정부. 역사교과서를 대하는 태도가 어찌도 이렇게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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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교육의 역사 -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역사교육이 걸어온 길
역사교육연구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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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역사교육이 시작을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전기 <동몽선습>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몽선습>은 역사서라기 보다는 중국중심의 충, 효 등이 강조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자국사라는 개념이 생겼다.

<동사강목>은 유교적 도덕 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강목체 역사서답게 대의명분과 충성, 절의라는 도덕 기준에 따라 자국사를 바라보고, 절의를 지킨 인물과 애국 항재을 강조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하던 견해를 부정하고,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기준이 지리에 있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전통적 화이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강목체 사서의 기본 특징인 유교적 교훈 중심의 정치사, 사대부 중심의 역사인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자적인 자국사 연구와 편찬에서 일대 획을 그은 책이었다. (55쪽)

 

조선말에 이르러서 주체적인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지만, 일제시대 들어 역사교육자체가 말살되는 데에까지 이른다. 일제시대의 국사는 일본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는데, <보통학교 국사>가 대표적이다.

"천황은 히로시마 대본영에 계셨는데 좁은 집무실에서 밤낮으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셨다. 그리고 황송하옵게도, 출정군인과 고락을 함께하시겠다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숨기시고 마디마디가 에이는 혹한에도 스토브조차 사용하지 않으실 정도였다. 그리하여 출정 장병은 집을 잊고 몸을 던져서 점점 충성과 용맹을 나타내고, 국민은 모두 이것을 후원하여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사에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와 같은 커다라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보통학교 국사 하권, 134~135쪽>"

 

천황의 솔선수범과 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당파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율곡은 이것을 걱정하여 그 싸움을 그치게 하려고 힘을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고, 점차 많은 당파를 만들어 각각 정권을 잡으려고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려 꾀하매, 이때부터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도 조선인 사이에 노,소,남,북 4색의 구분이 있음은 그 잔재이다.<보통학교 국사>하권 11쪽"

 

<보통학교 국사>에는 위대한 일본제국의 역사상과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상이 하나의 교과서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친 것이다. (115쪽)

 

일제강점기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역시 역사에 개입하게 하는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교육을 국민통합과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광복 이후에도 교육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렇듯 한국사교육을 민족의식과 국민의식 형성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려는 과도한 정책적 의도와 경향은 황국신민화 정책기의 역사교육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150쪽)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해방 직후만 해도 역사교과서에 38선의 성립과 남북 문제에 관해 미국과 소련 양쪽에 공평하게 책임을 돌리는 서술이 우세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민족의 대립이 동족상잔으로 이어지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외세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다른 반쪽이 가장 중요한 적으로 등장하는 적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경계의 대상이었던 외세가 '새로운 적'인 민족의 다른 반쪽을 넘어서기 위한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다. 전쟁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속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핵심 사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남북 양쪽에서 정권 유지와 반대 세력 축출에 6·25전쟁과 남북 분단을 활용하는 폐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169쪽)

 

역사교과서과 본격적으로 정권의 홍보물로 전락한 것은 박정희시대 후반부부터이다.

1969년 교육과정의 부분 개정 이후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변화를 살펴보면, 각 시대별로 대외관계를 중시했으며, 현대사 부분에서 베트남 파병,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국가비상사태 선언, 남북 대화 등 구체적인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5·16 쿠테타를 혁명으로 부르면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 개정은 이후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방향을 보여주었으며,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출발점이 되었다.(177쪽)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국적있는 교육'을 강화하며 국사교과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아울러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을 역사 읽기 교재로 활용한다.

"고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는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발휘되었는데, 특히 이것은 무인의 전통으로 이어져, 일찌기 거란과의 항쟁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거니와, 몽고와의 항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라거나, "삼별초가 3~4년 동안에 걸쳐 대몽 자주 항쟁을 벌인 것은 역시 고려 무인의 전통적 기백을 드러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라는 <시련과극복>의 서술은 무인의 국난 극복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단적인 사례다. 이러한 서술은 박정희 정부가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192~193쪽)

 

그런데, 이러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역사교과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1994년에 있었다. 당시의 역사연구를 반영하여 6·25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바꾼다거나, 4·3항쟁으로 용어를 바꾸고 이승만과정의 독재화 과정 및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등에 객관적 서술을 권고했는데, 이는 보수 우파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개정 시안의 내용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과 단체들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시안의 내용이 '위험한' 민중사관에 근거하여 북한을 지지하고 남한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비판에 직면한 교육부는 논란이 된 용어나 내용을 대부분 종전의 교과서와 같이 되돌렸다. ...

이 사건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으며, 정권의 홍보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에 대한 보수·우익의 반격이었다. 민중사학이나 기존의 교과서 비판에 맞서 보수·우익 관점의 <국사>교과서 서술을 그대로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의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은 2000년대 들어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와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과 역사 이념 논쟁으로 이어졌다.(222쪽) 

 

2000년대 후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다시 역사교과서에 손을 댄다.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나타나 역사전쟁의 선봉에 선다. 금성출판사는 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뉴라이트 파동과 관련해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태동이라는 시각을 제시한다. 1980년대 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한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국사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성의 입장에서 보려는 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한 점 등이 비슷하다.

 

역사교육의 역사로 보면 우리에게 역사교육은 항상 왜곡으로 가득차 있다. 정치적인 공세는 다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는데까지 돌아간다. 역사계의 성과에는 눈을 감고 가르치고 싶은 것만 왜곡해서 가르치겠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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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 위험한 교과서, 바로 읽기 - 뉴라이트의 위험한 역사 인식에 맞닥뜨려 오늘, 대한민국을 돌아보다!
역사교육연대회의, 김종훈 외 지음 / 서해문집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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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정부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를 추진하고 있다. 현 역사교과서의 반발은 2000년대 중반부터 있어왔다. 2008년에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가 그 시초이고, 그 뒤 교학사 교과서이다. 국정화된 역사교과서의 방향은 가늠해 볼 수 있는 것이 아마도 2008년 출간된 뉴라이트 교과서일 것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현행교과서가 자학적 사관에 빠져있고, 자랑스런 대한민국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교묘하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은 친일파들이 만들어낸 독재개발이다. 그래서 자랑스러운 역사는 일부 시간에만 한정된다. 조선 중후반 서술의 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식민지 시대를 거쳐 대한민국의 기초를 쌓았다고 본다. 광복절을 이야기하지 않고, 건국절을 이야기하며 친일파들을 옹호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단지 친일파를 긍정적으로 말하기 위함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조선이 잘못해서 일제가 들어올 수 밖에 없다는 식으로 몰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중화제국론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조선에 대한 청의 규정력을 과대포장하고, 그것을 해체시킨 것이 일본이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고종의 황제 즉위에 대하여, 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개화파의 노력이나 실추된 권위를 회복하려는 고종의 의도보다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배했다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강조하는 서술(56~57쪽)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이러한 서술은 일본이 조선을 독립시켜주었으나 결국 스스로 자강개혁에 실패하여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서술로 이어진다. (81쪽)

 

대놓고 일본의 시각을 대변하는 경우도 있다.

방곡령에 대한 설명에서도 "조선왕조는 흉년을 명분으로 방곡령을 발동하여 일본상인에게 타격을 주었다."(45쪽)고 했는데, 이는 당시 일본인들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82쪽)

 

러일전쟁의 배경에 대한 설명을 보자. 러시아에 대해서는 '야심'이라고 하는 반면, 일본에 대해서는 '진출'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도 형평성에 어긋난다. 이같이 '침략'을 '진출'이라고 하는 것은 일본의 우익세력들이 후쇼샤 교과서를 통해 역사 인식을 바꾸려고 시도하는 대표적 사례로서 (83쪽)

 

그리고 조선후기 민중봉기나 일제시대 의병 등 일반인들에 대해서는 평가절하한다. 이들의 사고방식은 역사는 위대한 지도자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는 시각일 것이다. 그 위대한 지도자란 이승만과 박정희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공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돌리지만, 과는 대충얼버무리며 넘어간다. 기본적으로 학자적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교과서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건국의 지도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근대화 혁명의 지도자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적 역할을 강조한다. 역사를 설명할 때 구조와 행위자(주체)를 어떻게 결합시켜 서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책은 전반적으로 엘리트 집단, 그리고 그 정점이 되는 지도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일관성이 흔들린다.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집권기에 달성된 긍정적인 업적을 이야기 할 때는 지도자의 역할이 부작된다. 반면 유신체제의 수립 원인 등 비민주적 정치 행태가 언급될 때에는 중공업화, 안보 위기, 당시 정치 구조의 한계 등 환경적·구조적 문제가 강조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뛰어난 능력과 업적은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 본문 서술과 별도의 박스 등을 통해 여러 번 자세히 소개되나. 그렇지만 1960년 3·15부정선거를 언급하는 대목은 "자유당 강경파는"으로 시작된다.(뉴라이트 교과서 173쪽)

 

뉴라이트 교과서가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식민지 근대화이다. 식민지시절 경제발전을 통해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의 초석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조선말기를 부정적으로 인식하게 해서 일제 식민지를 당연한 결과로 생각하게 하고, 경제발전의 배경에는 일제가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며서 독립운동을 자연스럽게 배제한다. 결과적으로 친일파들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공을 세웠음을 보이지 않게 이야기한다.

 

뉴라이트 특유의 식민지근대화론은 대한민국을 일제 식민통치(조선총독부)의 근대화 성과를 계승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또한 이들의 건국절 제기는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 '친일의 면죄부'를 줄 뿐 아니라 애국자이자 건국 공로자로 만들어주고 있으니, 뉴라이트 교과서야말로 친일 세력과 그 후계자들에게는 가뭄 끝에 단비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286쪽)

 

또한 일제에 협력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보통의 한국인들도 강제적으로 또는 자발적으로 전시체제에 참여하였다. 황민화 교육이 한창이던 전시기에 수많은 한국인 학생이 각급 학교에 다투어 진학하였다. 졸업생들은 전시공업화 정책으로 늘어난 국내외 일자리에 취업하였다. 하급직의 관료와 회사원은 징집된 일본인들이 떠나면서 남긴 자리를 이어받았다.

상공업자들은 1943년 전반까지 계속된 전시 경제의 호황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일제의 광기어린 전시체제에 저항하기는 어려웠다. 공공연히 협력자로 나서지 않은 애국지사들도 식민지 말기 수년간은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다.(170쪽, 뉴라이트 교과서 132쪽에서 재인용)

일제 체제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저항하기 어려웠다는 점을 들어 은근슬쩍 항일운동에 대한 언급없이 넘어간다. 이 글만 읽으면 일제 말기에는 독립운동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독립에 기여한 바가 없음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독립불가론을 강조해 친일이 어쩔 수 없었던 것임을 강조하여, 독립운동을 역사에서 지운다.

 

뉴라이트 교과서는 '여자정신근로령' 부분은 박스 안에 자세히 쓰고 위안부 문제는 사진 설명으로 작게 기술하였다. 정신대 문제를 자세하게 쓴 것은 이 문제가 위안부 문제와 다름을 강조하고 싶어서인 것으로 보인다. 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업자들이 여성들에게 큰 돈벌이가 있다고 하자 여성들이 이러한 꾐에 빠져서 갔다는 식으로 서술하였다.(뉴라이트 교과서 93쪽) 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피해자들이 말하고 있는 강제연행, 인신매매, 유괴 등을 이 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134쪽)

 

국정교과서의 방향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는 없지만, 국정화를 노골적으로 강행한 것을 보았을 때, 박근혜정부가 만들어 낼 국정교과서는 노골적으로 근대화를 강조할 것이다. 이승만의 건국과 박정희의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면서 친일파는 건국의 영웅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대한민국 건국절 70주년에 영웅으로 드러나는 사람들, 그냥 친일파로 보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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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까 - 현장 교사들이 쓴 역사교육론
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일종의 역사교육론에 관련된 책이어서 일반인이 읽기에는 부담될 수 있다. 실제 교육사례 등은 관심도가 적으니까 말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관련되어 역사전쟁, 역사교육에 대한 책을 찾아 읽다 보니 이 책까지 손에 들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책 전체보다는 현재 벌어지는 일에 대한 관심분야에 집중해서 읽을 수 밖에 없다.

 

교과서 사용에 관한 국가의 결정권이 이 정도로 강력한 나라는 소수 사회주의 국가를 제외하고는 보기 드물다. 교과서 제도에 관한한 우리는 아직 일제 군국주의와 유신체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셈이다.

교과서 제도는 근대 공교육체제의 산물이다. 국민국가 수립과정에서 공교육은 '국민만들기'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그 가운데에서도 '수신','국어','국사'는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교과서 제도는 '국민의식'의 형성을 위해 국가가 교육 내용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

해방이후 역사과에서 국정제 교과서 제도가 중대한 문제로 논란이 된 것은 유신체제 아래 제3차 교육과정 때의 일이다. 10월 유신 이후 유신정권은 주체성 있는 국민정신교육을 강조하면서 검정제로 발행되던 국사 교과서를 국정 단일화하였다. (54쪽)

 

이런 국정교과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강요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내부적으로도 많은 문제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국정화다 보니 국사교과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집단이 있을수도 있고, 사회적으로 첨예한 부분에서는 모호하게 가져갈 수 밖에 없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근현대사와 고대사이다. 근현대사 서술에 관한 논란은 곧바로 현실 정치 세력의 정치 노선 충돌로 이어지면, 이념 투쟁의 성격을 갖는다. 1948년 4월 제주도에서 있었던 비극적 사건을 '폭동'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항쟁'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 그 인식의 차이를 좁히기는 어렵다. 고대사에 관한 논란은 문화사상, 민족정기 등 상대적으로 추상적인 관념과 연계된다. 단군을 역사적 실체로 인정해야 한다는 상고사학회,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단체, 문헌 증거만으로 말해야 한다는 실증사학 진영 등 다양하고 양극적인 주장을 조정할 여지는 거의 없다. 따라서 모호하게 초점을 흐리게 하는 방법을 동원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국정교과서가 밋밋할 수 밖에 없는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64쪽)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오래되어서 잘 몰랐는데, 최근에는 '동아시아사'라는 과목이 생긴 듯 하다. 책은 졸속하게 만들어진 문제들을 지적하다. 그에 반해 실제 역사를 고민하는 이들에 의해 <내일을 여는 역사>와 같이 정식 교과서는 아니지만 한중일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국사라는 과목이 필요한가라는 생각이 든다. 세계사와 동아시아사 정도로 구분해서 배우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다. 물론 그안에 대한민국사에 대한 비중을 늘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문제들을 이 책은 지적한다.

한국사와 세계사의 관계도 역사 교육과정의 오랜 과제다. 주된 관심은 어떻게 하면 국사와 세계사 교육을 통합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세계사의 맥락 속에서 한국사를 공부해야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한국인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취지였다.(42쪽)

 

교사들의 실제 사례가 나오기도 하고, 역사교육의 방향에 대한 고민도 있다. 현직교사들의 비판도 있고,

이웃 나라를 타자화시키는 용어 사용도 문제가 된다. 고구려의 수당전쟁과 신라의 대당전쟁 관련 서술을 읽어보면, '야심', '야욕'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는 중국에 대해 부정적 정서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서술이다. 또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침으로써 '민족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든지, 신라가 당의 야욕을 물리치고 통일을 완수한 것은 '자주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서술은 고구려·백제·신라가 '같은 민족'이고, '수·당은 다른 민족'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고대에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볼 때 이 서술은 타당하지 않다. (254쪽)

 

후삼국 시기, 홍경래 난, 동학농민전쟁 등 몇 차례 내정이 있었으나, 고려시대 이후 전쟁은 대부분 외세 침략과 그에 맞선 항쟁으로 전개되었다. 수업에서 다루는 전쟁도 대부분 이러한 경우다. 그런데 이 경우 각각의 사건은 대부분 "전 민족이 단결하여 나라의 어려움을 막아냈다."는 서사 속에 용해되고 만다. 그러나 많은 전쟁이 지배층의 무능 때문에 일어났고, 지배층이 자신의 안위를 민중의 희생보다 중시하는 속에서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전쟁을 극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

민족적 단결로 국난을 극복하자는 취지 자체는 부정될 수 없다. 그러나 민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라고 요구하거나, 존재하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민족적 위기를 과장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306쪽)

 

이 책은 역사교육에 대한 고민과 비판, 실제 역사교육 현장에서의 사례와 2000년대 후반의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논의가 있다. 그리고 점점 중요해지는 과학기술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상대적으로 소외된 여성에 대한 부분, 노동사, 생활사, 지역사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안을 한다. 이런면에서 일반인이 전체를 다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문제와 관련해 관심있는 사람들이라면 부분 발췌독이 좋을 것 같다. 역사교육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고민의 폭을 넓힐 수 있을 것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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