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6월 11일)은 성소수자의 날이란다. 성소수자들은 퀴어축제를 열고 보수단체는 그 반대집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오늘 읽었던 책에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은 성소수자의 날" 서울광장 퀴어축제..동성애 반대 맞불집회도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60611142859087

 

오늘날 동성애와 성소수자 의제는 보수 개신교 세력과 우익 단체들이 '종북' 다음으로 주요하게 다루는 문제가 됐다. 국가기구는 이런 목소리를 핑계로 차별을 정당화하는 일을 되풀이하고 있다. 성소수자 인권을 긍정하는 제도적 조치를 취하려 할 때마다 대다수 국민을 자칭하는 이들의 거센 공격을 받게 되면서 공적 공간에서 성소수자 인권 의제를 다루는 것은 극도로 기피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가로막는 전통적인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반공주의(레드콤플렉스)에 더해 이른바 '레인보 콤플렉스'가 등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상황은 일베 현상으로 대표되는 소수자 혐오의 부상과도 맞닿아 있다. 성소수자와 더불어 여성, 이주민, 종북 좌파, 전라도, 세월호 유가족 등 체계적 인 차별과 권력의 피해자들을 향한 노골적인 혐오의 표출이 희망 없는 시대에 좌절과 무기력이 낳은 공백을 채우고 있다. (230-231쪽)

 

 

혐오의 정치는 사회문제의 원인을 미움받는 특정 집단으로 돌리는 마녀사냥의 정치이기도 하다. 혐오의 시대에 성소수자들은 출신율 저하와 에이즈 확산부터 국가 안보 위기, 심지어 건강보험료 인상의 주범으로서 가정, 사회, 국가를 위협 한다고 지목된다. 이주민 혐오나 여성 혐오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주민은 내국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지역을 더럽히고 범죄를 저지르는 집단으로 매도당한다. 여성들은 특혜와 보호를 받으면서도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김치녀로 비하된다. 경제위기와 불평등의 심화 속에서 지배자들은 복지를 축소하고 노동시장 구조를 개악함으로써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제물로 삼아 위기를벗어나려 하고 있다. 이런 현실이 양산하는 불평등과 불안은 혐오가 자라나는 토양이다. 극단적인 경쟁만이 사람들에게 주어진 선택지인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생각, 민주주의와 인권 보 장이 필요하다는 합의는 형식적인 수준일지라도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역사적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부추겨 차별과 탄압을 정당화한 시대를 살펴보면 지배 질서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민주적 권리 전반을 후퇴시키고 소수자들을 속죄양 삼는 정치적 배경이 존재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독일 민족의 우월함과 순수성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유대인 이주민, 성소수자들이 글자 그 대로 대량 학살당했다. 스탈린주의 소련에서는 동성애자를 파시스트로, 나중에는 자본주의적 일탈자로 비난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매카시즘 선풍의 또 다른 희생양은 동성애자들이었다. '종북 게이'를 떠올리게 하는 코미 핑코 퀴어 commie pinko queer 호모빨갱이라는 표현이 당시 언론에 둥장했다. 최근 러시아와 아프리카 일부 국가들에서도 서구에 대한 반감을 이용해 동성애를 비전통적이라고 비난하며 반민주적인 독재정권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성소수자 혐오를 활용하곤 한다. 2008년 이후 지속된 세게적인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 상황에서 미국, 유럽 등에서 나치의 부상과 함께 성소수자 혐오와 이주민 혐오가 부각되기도 했다. 시민 혁명으로 오랜 독재자를 권좌에서 끌어내린 이집트에서는 군부의 통치가 부활하면서 동성애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있다. (235-2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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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학계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이름의 웹사이트가 생겼다. 대학에 몸담은 수백명의 여자들이 그동안 남자들에게 가르침당하고, 무시당하고, 말을 가로채인 경험을 그 웹사이트에서 공유했다. 또 내 글이 발표된 직후에 '맨스플레인(mansplain)'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는데, 가끔은 내가 그 말을 만든 사람으로 언급되기도 했다. (남자man와 설명하다explain를 합한 신조어 '맨스플레인'은 남자들이 무턱대고 여자들에게 아는 척 설명하려 드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 ) 사실 나는 그 단어의 탄생과는 관계가 없다. 현실에서 그 개념을 구현한 남자들과 더불어 내 글이 그 단어의 탄생에 영감을 좀 준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정작 나는 그 단어가 약간 미심쩍게 느껴지기 때문에 잘 쓰진 않는다. 그 단어는 모든 남자에게 그런 타고난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실제로는 남자들 중에서도 일부가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려 들고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으려는 것뿐이다. 혹시라도 본문에서 내 뜻이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봐 부연하자면, 나도 애가 흥미가 있지만 미처 몰랐던 사실에 대해서 그 내용을 잘 아는 상대가 설명해주는 것은 아주 좋아한다. 대화가 어긋나는 것은 내가 알고 상대가 모르는 것을 상대가 내게 가르치려 들 때다.)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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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우리는 끔찍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아직 현재진행형이다.

 

학살, 전쟁, 테러, 고문, 성폭행, 자식의 죽음 ····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험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경험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세상은 보통 지독할 정도로 선형적이다. 과거가 현재를 만들었고, 현재는 미래를 만든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경험한 뇌는 다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송두리째 한 번의 순간으로부터 영원한 지배를 받게 되니 말이다.

....

세상은 끝없이 많고 복잡한 정보들의 합집합이다. 이 많은 정보를 인간의 1.5킬로그램짜리 작은 뇌가 실시간으로 받아들이고 처리하며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다. 모든 경험을 있는 그대로, 왜곡하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단 말이다. 그렇다면 기억한다는 것은 언제나 무언가가 왜곡되고 압축돼야 한다는 말과 동일하다.

'순간'이란 경험을 압축하고 왜곡하는 과정은 해마라는 뇌영역을 통해 이뤄진다고 많은 전문가가 믿는다. 우리가 경험하는 많은 순간은 우선 '기억할 가치가 있는 정보'와 '기억할 필요가 없는 정보'로 나뉜다. 이 때 나뉨의 기준은 무엇일까? 많은 기준이 가능하겠지만 대부분 '예측 코드 predictive coding'를 통해 분류된다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예측코드란 무엇인가? 뇌(특히 대뇌피질)의 핵심 기능 중 하나는 미래 예측이다. ... 뇌는 앞으로 보일 것, 들릴 것, 느껴질 것, 경험하게 될 것 등을 예측한다.

끝없는 예측을 통해 뇌는 '예측한 세상'과 '경험하는 현실' 차이를 계산한다. 예측과 현실에 차이가 없다면 그 정보는 무의미하다. ... 그렇다면 반대로 트라우마야말로 일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이 기대하기 가장 강한 기억을 내리는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뇌의 예측과 현실의 가장 큰 차이, 만약 그것이 트라우마의 정체라면 트라우마는 그 어느 경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예측과 현실의 차이가 너무도 크기에 뇌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정보와 기억을 남기는지도 모른다. 너무 밝은 빛에 노출된 카메라로는 더이상 아무것도 구별할 수 없는 것 처럼 트라우마는 뇌에 다양한 손상을 끼친다. 기억을 만들어내는 해마, 감정을 조절하는 편도체, 그리고 판단역을 좌우하는 전두엽 등 다양한 뇌 영역의 조직적·기능적 구조 그 자체가 변하기에 트라우마는 단순히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139-142쪽)

 

처음에는 잠잠하던 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공격성을 보인다. 잊자고 하자고 하고, 조롱하기도 한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인간들이 너무 많다.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지는 않는다. 일단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보다듬어 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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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제인가 서울시청에 갔다가 스피커 크게 틀어놓고 빨간 조끼 입고선 박원순 시장을 비난하는 기독교인들을 본 적이 있다. 동성애 문제 때문이었다.

 

순간 드는 생각은 이거였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면 뭐라 하실까? 외려 동성애자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고 동성애자들을 핍박하던 기독교인들에겐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든 생각인데, 만약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고, 아직 우리가 일제치하에 있다면 그 기독교인들은 그냥 말만 바뀐 사람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전범으로 가득한 신사참배에 앞장서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친다.

 

 튜링은 콜로서스라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를 개발해 에니그마의 메시지를 판독하는데 성공한다.
에니그마의 판독이 없었다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어쩌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수 있다. ... 연한군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대일본제국'의 2등 시민으로 일왕을 섬기고 아베 신조 총리 밑에서 살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독일과 일본의 세계 정복 망상에서 우리를 구해준 튜링의 삶은 비극적이었다. 당시까지 영국에서 불법이었던 동성애자였던 튜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체포되어 화학적 거세를 당한다. 미국 입국이 금지되고 더 이상 국가 안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게 된 튜링은 1954년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187-188)

김대식의 말을 한번 더 고민해야 한다.

 

뇌는 비논리적이고 그룹 이기주의로 가득찼지만 민주주의는 개인에게 현명함과 타인에 대한 인내심과 배려를 요구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그렇게 어렵고 우리의 지속적인 노력이 필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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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기계와의 경쟁>은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영어 원제는 Race against the machine이다. <기계와의 경쟁> 보다는 '기계와의 경주'가 더 어울린다. 저자는 결국 기계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기계시대가 급격하게 도래할 수 있다고 본다. 체스판의 후반부를 그 예로 든다.

이 이야기는 체스 발명가와 그 나라 통치자와의 거래에서 시작되었다. 그 나라 황제는 체스 게임을 너무나 좋아서 체스 발명가에게 어떤 보상을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갖고 싶은 것을 말하라고 물었다. 그러자 체스 발명가는 다음과 같은 규칙에 따라 쌀을 달라고 했다. 체스판의 첫 번째 사각형에 쌀을 한 톨 놓고, 두 번째에는 두 톨, 세번째에는 네 톨 ... 이렇게 정확히 두 배씩 늘어나도록 쌀을 다음 사각형에 쌓아서 달라는 것이었다.

.....

32번째 사각형을 지나자, 황제는 발명자에게 40억 톨의 쌀을 줘야 했다. ... 이 상태로 체스판의 후반부로 넘어간다면, 둘 중의 한명은 커다란 곤경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커즈와일은 무엇인가 두 배씩 지속해서 증가하면, 즉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면, 처음에는 그리 눈에 띄지 않지만 뒤로 갈수록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속임수처럼 느껴진다는 것을 지적했다. 기하급수적 증가의 초기 단계에서는 선형적 증가 곡선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그 증가폭은 우리의 직관과 기대를 크게 무너뜨린다. 작은 한 톨의 쌀이 에베레스트 산 크기의 쌀 더미를 만들 듯, 컴퓨터 기술의 기하급수적 발전은 과거엔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여러 가지 일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52~53쪽, 기계와의 경쟁)

 

문제는 단순히 기술의 발전만이 아니다. 두 책이 모두 이야기하는 것이 1970년대 이후 미국의 전체적인 부는 엄청나게 증가했지만 하위 80%의 소득은 늘어나지 않은 것이다. 자동화와 더불어 이런 추세가 강해지고 있는데, 인공지능의 시대 역시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기계에 밀려야 하는가? 저자들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 체스에서 인간을 이긴 이후 체스경기는 인간과 인공지능의 조합일 때 가장 강력함을 보여줬다. 인간과 기계의 공존을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사실 체스판의 후반부는 이미 시작되었을 수 있다.

 

 

그런데 두 책의 내용이 너무 비슷하다. <제2의 기계시대>는 <기계와의 경쟁>의 증보판 정도의 느낌이다. 게다가 저자가 같은데 <기계와의 경쟁>은 앤드루 매카피, <제2의 기계시대>의 앤드루 맥아피로 표시되어 있다. 큰 문제가 없다면 전작의 명명은 따라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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