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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수업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법륜 지음, 유근택 그림 / 휴(休)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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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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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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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지 않는다 하여도 무조건 한권 구매하는 것이 이 사회와 정치를 발전 시키는 길이다. 쥐를 잡고 수꼴을 잡고 부패한 세력을 잡고 모피아를 잡고 경제 독점의 대기업 총수 집안을 잡고 썪은 정치 세력을 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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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늘 나남창작선 114
안정효 지음 / 열음사 / 199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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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안정효에게 강한 친근감이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그의 작품들을 책, 소설을 통해서 접하기 이전에 '영화'를 통해서 접했다는 사실이 그 첫번째 이유가 될 것이다. 그의 소설들이 영화화한 작품들을 언급해 본다면 '은마는 오지 않는다',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등이다. '이 소설들이 왜 영화화 되었을까?' 생각을 해 보았는데, 소설을 읽어 보면 왜? 영화화가 되었는지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등장시키는 일련의 에피소드와 사건들이 누가 읽어 보아도 쉽게 공감이 가는 우리내들의 지난 과거속, 추억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들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소설 속의 에피소드들과 비슷한 경험들을 개인적인 일상에서 모두 비밀스럽게 체험해 보았기 때문에 소설이 독자들에게 먹히는 것이다. 해서 안정효 소설 읽기는 어찌 되었든지 '즐거움'과 '흥미'를 준다는 것은 사실이다. 읽다 보니 재미 있어서 읽기를 멈추지 않는 것. 그러다가 소설은 페이지를 다한다. 그 것이 안정효의 소설 속에는 들어 있다.

  또 다른 친근감은 바로 '미국' 이라는 화두인데, 그의 소설은 참으로 '미국'과 많은 연관, 관련이 되어 있다. '은마'가 말하는 것은 '노랑 머리의 백인', '양코베기 미군'을 의미하는 것이고, '베트남 전쟁'도 미국이 개최국이 되어서 이루어진 전쟁이며, '헐루우드'는 서울 충무로가 아닌 '미국의 영화판', '지명'이다. 이 것들이 아니더라도 안정효의 소설 속 인물들은 '미국'에 산다던가, '미국'으로 여행을 간다 던가 등등의 좌우지간 '미국'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고 매번 자주 등장을 한다. 헌데, 문제는 안정효란 이 땅의 한 개인만이 '미국'이란 세계와 관련, 연관되어 있는가? 하는 것일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의 모든 '복식'과 '문화'들이 미국적 사회의 삶과 모습에 너무나 많은 영향을 받는 양태로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그런 사회적 세태 속에 있는 개인들이라면 '안정효'가 아니라 '김정효'란 독자도 미국적 세계에 영향을 받는 개인들 중 하나일 것이며, 이 글을 쓰는 리뷰어도 그런 세상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 중 한 명 일 것이다.   

  작금의 현실 속에서 미국 이라는 '화두'는 점점 더 커져가는 '말거리' 중에 하나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들 모두가 그들과 관계가 된 것들이다. '율곡 사업', 'F-15 전투기 선정 문제', '이지스 전함 무기 체계 도입', '솔트레이크 시티 동계 올림픽 오노의 헐리우드 액션 사건', '미국에 의해 자행되는 불법적 사건들 중에서 미국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건', 'SOFA 개정 문제', '이라크 파병 문제', '아테네 올림픽 폴 햄의 금메달 갈취 사건' 등 언론 등을 통해서 불거저 나오는 문제들 중에서 '미국'이란 '화두'는 '뜨거운 감자'에 속한다. 다루기가 어렵지만 이 영양 덩어리를 아깝게 던져 버릴수도 없는 문제이다. 이런 미국적인 세계화, 지구화 속에서 미국이란 화두를 사회학적, 정치학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을 수는 없다. 미국의 패권적 세계주의에 종속되지 않으려면... 

  안정효의 소설은 그런면에서 좋은 교과서 예문 내지는 참고 자료이다.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의 역사나 양상들을 그의 작품들이 단면들을 소상히 보여 주기 때문이다. '반미'를 하든, '친미'를 하든, '용미'를 하든 일단은 판단의 근거가 되는 자료들을 충분히 검토해 보고난 후에 판단을 해도 할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세번째로 안정효가 친근한 이유는 그가 이 소설, '미늘'의 소재로도 등장 시켰듯이... 그도 낚시를 좋아하는 강태공 중에 한 명이기 때문에 리뷰어에게 아주 친근감 있게 다가온다. 실제로 우리 주변에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얼머나 많은지는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회사가 쉬는 날 가방을 둘러 매고서 낚시터로 향하는 아빠들이 얼마나 부지기수인지... '가정에도 좀 관심을 갖어 주시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그가 자주 가는 낚시터가 경기도 '김포'나 '강화'라는 것도 마음에 드는데 이 글을 쓰는 리뷰어이 고향이 경기도 김포이고 그 쪽 낚시터를 많이 다녀 보아서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씩 낚시터에서 심심할 때면 안정효가 혹시 오지 않았나? 그를 찾는 어리석은 생각과 짓거리를 떠올려 본곤 한다.

  그대가 낚시를 좋아하는 분이시라면 이 소설에서 안정효가 뻥을 치는지 아님, 그가 어느 정도의 강태공의 수준에 도달한 사람인지를 직접 평가해 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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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은 왜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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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랑 전설'이라는 것을 남들과 똑같이 학교에 다니다 보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서 몇 번 들어본 기억이 있었다.

  원래 김영하란 작가, 인간을 좋아하는 지라! 당연히 책을 집어 들어고 읽어 내려 갔는데,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바로 수불석권...

  '김영하 소설 쓰기'의 파격적인 구성적 단면을 극명하게 엿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소설의 주제적 내용이 되는 '아랑 살해 사건'을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전에 작가와 등장 할 인물들이 인터뷰를 하는 대목은 연극이나 영화에서 보는 배역 캐스팅 장면을 연상하게 한다.

  이 작품도 작가의 다른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경계가 다른 곳을 여기 저기 넘나든다. 경계가 서로 다른 곳을 넘나드는 것이 이 번에는 과거의 사실, 진실과 현재의 구전, 기록이 중심을 이룬다. 

  대다수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민중이든 대중이든... 그 사람들이 평범하게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감추어진 사실과 진실'은 얼마나 다른 것인지에 대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추적해 들어가 결국 파헤쳐 낸다. 마지막까지 작품을 다 읽어야지만 알게 되는 '아랑의 죽음'에 대한 내막은 '더러운 것', '잘못된 것', '정의에 위배되는 것'이 어떻게 포장이 되고 치장이 되어, 새롭게 가공이 된 채로 갖은자, 기득권 층들의 삶에 유리하게 기여하게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현실이, 아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작가의 예리함과 직관력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세상은 여러 겹으로 구성이 되어 있다. 단순히 세상은 이중적인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복잡하고 '다중적'이다. 그러나 결국 아랑의 죽음은 다름 아닌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수구 보수적인 벼슬아치의 성적 욕망'과 '개인적 치부' 라는 가장 원초적이며 유아적인 인간의 속성, 그 것이 원인이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감탄하게 되는 또 한가지는 김영하가 바라보는 세상이 참으로 공평하고도 냉정하며, 작가 김영하의 예리한 인간 조직에 대한 통찰을 엿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아랑이 죽은 사인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말단 하급 관리가 새로 부임한 수구적 보수 관리에게 죽지 않을 정도로 얻어 맏는 대목에서 그 것을 느끼게 된다. 작가로부터 주인공의 시점을 받고 있는 자도 현실에서는 똑같은 사회의 일원으로 예외없이 공평하게 대우를 받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독자로서 책을 읽어 내려가는 개인적인 동정심과는 상관없이... 마치 창작을 한 작가 김영하나 그의 책과 글들을 소비하면서 살아가는 그리하여 지금 리뷰를 쓰고 있는 나 자신도... 이 두 사람도 똑같은 공평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인 것 처럼... 태어나서 배고프고, 아프며, 죄지으면 벌받고, 감옥에 가기는 매 한가지이며... 저마다 때가 되면 천국이든 지옥이든 어디로든 가긴 갈 것이다. 억울하고 비참하게 살해된 한 많은 삶을 살다 가버린  아랑은, 살인의 진실과 내막과는 상관없이 좋은 곳에서 평안하게 잠들었길  바래본다.

  대다수 모든 인간들이 잘 못된 미화와 과장들에 속아서 살아간다는 것도 이 소설이 주는 교훈 중 한가지 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표명되고 발표 되어지는 역사와 기록이 이처럼 '진실', '사실'과는 다를 수가 있는데 매스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과연 얼마나 '거짓의 늪' 속에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수가 없는 노릇이다. 진실과 사실은 소수의 누군가를 위해서 충분히 은폐가 되고 유기 될수도 있는 것임을 소설은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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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199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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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뷰'를 하기 전에 우선 밝혀야 할 한 가지는 리뷰를 하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국의 작가 중 그 첫번째가 이 단편 소설집의 주인인 '김영하'이다.

  우선 이 단편 소설집을 살펴보기 전에 '인간 김영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를 좋아 하는 단순한 이유는 그가 나처럼 젊고, 남자이며, 똑똑하기(?) 때문이다. 이 단순한 3가지 이유로 인해서 그가 쓰는 글들에 쉽게 공감이 가며, 감정 이입이 필요한 단계에서는 작가의 기발하고도 독특한 상상력의 표현에 박수를 보내 줄 의향이 쉽게 생긴다.

  어쩌면 김영하가 그의 단편 소설에서 보여주는 기발하고도 독특한 소설 쓰기의 소재와 기법들은 기발한 것이 아닐 수 도 있다. 그러나 독특하고 기발하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실제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고 빚어지는 일들, 우리가 자신들만의 삶에 만 관심을 두고서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 갈때, 무관심해서 스쳐지나가는 일들을 이벤트적 상상력이 깃들어 있는, 별스런 이벤트적 현실들을 작가는 포착해 내어서 소설이란 이름으로 썼다는 것이다. '참 별스런 내용들도 소설로 가능한 것이구나!' 란 생각이 들며 '문자화로, 소설화로 취급되는 것들에 대한 지평과 사람들의 용인, 인정이 넓어지겠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한마디로 그의 소설은 얼핏 쉬운 듯 보이며 그냥 거침없이 질주를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보자면 '벼락을 한번 맞아 보아서, 또 다시 그 벼락을 다시 맞아 보기 위해서, 천둥 번개가 치는 비오는 날, 벼락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의 모임'에 관한 이야기를 누가 소설로 써서 발표하겠다는 생각이나 했겠느냔?! 이말이다. 그런 과감함과 도전의 용기, 참신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가 쓰는 '단편'들에서는 예전의 기성 작가군들이 근엄하게 혹은, 엄숙하게 어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려는 심각성이 없어서 좋다. 물론 그의 책에서 배울점이나 본받을 만한 점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책은 일상에서 평범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감을 선물해 준다. 조금은 청량감이 있는 이야기들을 독자를 향해서 풀어 놓는다.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심각한 주제와 문체의 답답함, 유식한 척 만을 하는 작가의 책만을 읽다보면 나름의 일장일단이 있겠으나, 답답해서 질식하고 만다. 대표적으로 이문열의 소설들을 읽어보면 알수가 있다! 그의 소설은 학교나 대학에서 가르치는 학습과 배움 보다도 소설 읽기가 더 무거우며 힘들고, 한편으로는 어렵다.(소위 말하는 깊이 있는 주제를 다루는 대작가이다. 철학적, 사회적 문제와 이슈들을 소재로 하는...) '공부하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독자가 보수적인 한국적 윤리학 책을 읽은 느낌이 들게 만드는 경우를 만들 때가 간간이 있다.(어떤 평론가가 이문열을 이렇게 평가 했다. 오래 되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래와 전망에 대한 결여') 

  그러나 김영하는 이문열처럼 그런 식으로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의 책을 읽다보면 경쾌함과 가벼움을 느끼게 되지만, 일탈과 벗어남을 많이 느끼게 되지만, 작가는 아슬아슬하고도 교묘하게 자신의 소설이 삼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위험한 소재(예를 들어서 성직자인 신부가 여자와 섹스를 한다는 내용의 소설, 여성의 음모를 면도 하는 소재 등)와 서술 기법, 상상력의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이류, 일류란 줄을 좌우로 중심을 잡아가며 나란히 앞으로 추구해 간다. '오랜된(?) 비평가'들에게 욕먹지 않을 정도의 청량감과 신선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해 준다.

  '김영하 소설 읽기'에서 재미와 즐거움들을 책장을 넘기는 동안 느낄 수가 있을 것이며 심각한 교훈주의적 소설은 아니지만 사고의 다양성을 독자들에게 주려는 작가의 비의식적인, 간접적 의도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 소위 괴짜들이 많아야 세상이 즐거워 지고 재미나는 것이 아닌가? 넥타이 부대의 정형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난 개인적으로 좋아한다. 가수 조영남 류의 자유인들을... 미술과 음악 예술의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들을...)

  엉뚱함과 생경함, 파격적인 인상들... 그 것이 그의 본래적 성향에서 파생된 것인지?! 아님, 무의식적인 산물인 것인지는 모르겠다?! 아님, 자신만의 글쓰기적 통로를 타고 나온 문제적인 특별한 방법인지는 문외한인 리뷰어의 입장에서는 연구 해야할 문제인 것 같다. 짐작해 보면... 어쩜, 어느 정도는 자신이 의도하고서 그런 식의 파격적인 형식의 글을 쓰는 것도 같다.(너 튀고 싶니?) 자세한 것은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지 못했으니, 독자로서는 알 길이 없다!

  엄숙주의적이지 않고 고루하지도 않으며 학구적인 풍으로 책을 쓰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읽기에 부담이 없어서 좋다. 유식하고 잘난 체 하는 것이 아닌, 이 작가에게서는 읽는 도중에 '일탈감'과 '형식'과 '틀'에 얽매여 있지 않는 글쓰기의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가 있다. 적어도 자유 분방하고 글쓰기에 대해서 만큼은 호방하며, 자신의 글쓰기에 있어서 관대한 마음을 작가 스스로가 갖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바로 그 자신도 그 심각하지 않은 대중 문화의 소비자, 독자로서 성장해 온 나와 같은 세대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창작자가 되기 이전의 소비자로서의 자신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감상자, 혹은 대중 문화의 소비자로서, 어쩌면 키취의 모습으로서 형성되어진 창작자 자신을 '수 많은 인용들을 통해서' 자신의 소설들에서 과감히 드러낸다. 그가 '글을 쓰는 형식'과 '도입'과 '인용'하는 대중 문화 작품과 인물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마치 미술이라면 꼴라주이며 모자이크다. 수학이라면 계속해서 엉뚱한 것이 더해지는 것이고 과학이라면 엇박자의 시스템이다.  

  그의 소설들 속에서는 독자의 입장에서 소설이 전개 되기도 하고, 소설을 읽는 자와 소설의 쓰는 자의 경계가 사라져 가는 기이한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권위적인 인간들은 뭔가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하며 한가지 방식만을 경직되게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길들여져서 움직일 수가 없는 방식으로... 사회에서의 자신의 입지, 사회적인 위상, 기득권 등을 지켜 나가는데, 더 관심이 있기에 '석회처럼 딱딱해져 가며, 간경화처럼 경직되어 가더라도 기존의 것에 인습적인 태도'를 보이는데, 김영하의 글쓰기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묻어나지 않아서 좋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더 많이 나이가 든다고 해도 지금처럼 파격적이며 일탈적이고 경계를 구분하기가 묘하며 독자들이 읽는 동안에 재미와 즐거움, 때로는 심금도 울려줄 수 있으면서,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해 낼 수 있는 작품을 끊임없이 많이, 많이 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모든 것들이 경화되고 딱딱하게만 굳어가는 세월 속에서 딱딱하게 굳지 않기를 바래본다.'

   삼류 리뷰어가 횡설수설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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