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으로 불려 왔던 '북미정상회담'이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아직도 불씨가 완전히 다 꺼진 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 다양한 속보가 아직도 잔불처럼 깜빡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회담 하나를 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입방아에 앞다투어 올렸을지를 생각하면 여간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이 회담에 쏠린 사람들의 이목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으며, 또한 이 회담을 두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엄청난 텍스트만 하더라도 어떻게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한가롭고도 쓸데없는 '심심풀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 회담의 성사 내지는 성공 여부가 초래할 온갖 심대한 변화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 거대한 변화가 두고두고 숱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못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토록 거대한 판'이 산산조각난 결정적 동기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곰곰 되짚어 보게 되고, 그런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의 '내면 심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화를 겪은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따스한 기미'조차 없었던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이 연탄을 보고 노래했던 '너는 언제 한번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을 새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만큼, 그들 둘 사이는 도대체 뜨거워지기는 커녕 미지근한 기미조차도 없이 언제나 찬 바람만 쌩쌩 불었고, 여차하면 '불바다' 내지는 '분노의 화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끔찍한 사이였다.

 

이토록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으니 '세기의 담판'이 성사되기 위한 '맨 처음 고백'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또한 북미정상회담은 단지 북미간의 일도 아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북한 비핵화'와 'CVID'만큼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도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니 김정은이 40여일 사이에 중국을 두 번이나 바삐 오가고, 폼페이오가 그 멀리서 평양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또한 북미 수뇌들의 메신저 역을 떠맡은 온갖 사람들이 때론 거칠게, 때로는 달콤하게 온갖 다양한 언사를 거듭 주고받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깨진 판'을 다시 이어붙일 수 있다는 희망섞인 속보가 연일 날아들 정도로 숨가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긴 하지만, 적어도 '판'이 깨어질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은 인간의 심리 가운데 몇 가지는 결국 누군가의 분개, 혹은 누군가의 모욕감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들의 '도덕 감정'에 대한 훌륭한 교사였던 아담 스미스 교수님의 강의 한 대목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게 되고, '굴욕과 모욕 사이'를 절묘하게 간파한 우리의 세르반테스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다시금 펼쳐 보게 되었다.(『돈키호테』 속에 담긴 이런 대목 하나만 다시 꺼내 보더라도 이토록 훌륭한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토록 재미나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심오한 인간 심리를 칼날같이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 * *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65∼66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 * *

 

 

『돈키호테_2권』에 등장하는 '굴욕과 모욕의 차이'에 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배경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걸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615년에 발표된『돈키호테_2권』은 애시당초엔 세르반테스의 구상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1605년에 발표된 『돈키호테_1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사정이 돌변했다. 온갖 정체불명의 속편들이 난무했고, 범람하는 수많은 해적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도저히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가짜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과 더불어 독자들의 불같은 성화에 견디지 못한 세르반테스는 결국 속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죽기 몇 달 전에 가까스로 출간된 그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무려 68세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가 10년 만에 다시 속편으로 쓴 『돈키호테_2권』은 1권에서 이미 모험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고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다시 '모험'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했다.(그나마 1권에서 돈키호테가 멀쩡히 살아서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2권에서 (숱한 해적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가 막힌 설정'을 도입한다. 2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이미 1권의 이야기가 시중에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있다는 설정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겪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빤히 알고도 속이는 공작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공작부인은 사냥터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숲속을 헤매던 돈키호테와 산초를 공작의 궁전으로 데려온다. 공작은 궁궐에 있는 하인들을 '사전 교육'까지 시켜 돈키호테를 '진짜 중세의 기사'로 대접하도록 꾸민다. 드디어 꿈꾸던 모험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돈키호테와 산초는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지에 빠져든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바로 자신들의 꾐에 넘어간 돈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기가 막힌 행동들을 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바로 이 와중에 '굴욕과 모욕에 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돈키호테와 산초가 머물고 있는 공작의 궁전 만찬에 성직자가 한 명 초대되는데,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초대된 그 성직자가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직자는 거인이니 비겁자니 마법이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저 사람이 바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작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읽는 그 자체가 바로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몇 번이나 공작을 나무란 바 있었으니, 자기가 의심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는 마구 화를 내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나리, 나리께서는 이 알량한 자의 행동을 우리 주님께 보고드려야 합니다. 이 돈키호테인지, 돈 바보인지, 아니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작자는 나리가 바라는 만큼 그렇게 우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는 이 작자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을 하도록 쉽사리 기회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설교를 돈키호테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당신, 머리가 텅 빈 자여, 스스로 편력 기사이고 거인들을 이기고 악당들을 사로잡았다는 생각을 그 뇌 속에 집어넣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좋게 말할 때 잘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서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나 키우고, 재산이나 살피시오. 바보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당신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두시오. 재수 없게 그런 편력 기사가 있었다느니, 오늘날도 있다느니 하는 것들을 대체 어디서 들은 거요? 에스파냐 어디에 거인이 있으며, 라만차의 어디에 악당이 있단 말이오?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니 뭐니, 당신과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는 그 모든 잡동사니 같은 바보 짓거리들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오?」

 

돈키호테는 존경받는 그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제 그가 입을 다물자, 공작 부부에 대한 존경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친 채 당황한 얼굴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는 말했다.이 말만으로도 한 장을 이룰 만하다.(402∼403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2권』, <31장, 수많은 큰 사건들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31장이 끝난다. 곧바로 이어지는 32장에 '굴욕모욕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과 산초 판사 특유의 입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대목을 (다소 길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5쪽 분량으로 충분히 인용해 볼까 싶다. 핵심적인 부분만 덜렁 떼어 옮기면 아무래도 이러저러한 전후 사정들이 모조리 생략될 테고, 돈키호테가 느낀 '인간 심리의 복잡미묘한 차이'를 두루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돈키호테는 마치 수은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며 더듬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와 지금 내 앞에 계신 분, 그리고 당신의 직분에 대해 내가 늘 가져 왔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경심이 당연히 터뜨려야 할 내 분노의 손을 막으며 붙들어 매고 있소이다. 내가 방금 말씀드린 이유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무기는 여인들의 무기와 마찬가지로 혀이기에, 나 또한 혀로 나리와 똑같이 싸움을 벌일 작정이오. 나리에게는 그런 모욕적인 비난보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를 기대하고 있었소. 좋은 의도로 하는 성스러운 비난은 이와 다른 정황을 필요로 하며 다른 기회를 요구하오. 그러니까 적어도 공공연하게, 그것도 그토록 신랄하게 나를 비난한 것은 좋은 의도로 하는 비난의 한계를 죄다 넘는 일이오. 훌륭한 비난은 신랄함보다 부드러움 위에 훨씬 더 잘 안착하기 때문이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죄인을 얼간이니 바보니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오. 아니라면 말씀해 보시오. 나한테서 어떤 어리석은 짓을 보았기에 나를 지탄하며 모욕을 가하는 것이오? 게다가 내게 아내가 있는지 자식들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과 처자식 돌보는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다니. 덮어놓고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그 집의 주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거요? 어느 기숙사에서 궁핍하게 자라 고작해야 그 지역에서 20레과나 30레과 안에 있는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적이 없는 자가 갑자기 기사도 규정을 들먹이고 편력기사들을 판단하겠다고 끼어들어도 된단 말이오?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찾는 대신 혹독한 시련을 통해 불멸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 간 길을 따르는 것을 설마 헛된 일이거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보는 건 아니시겠지? 만일 기사나 뛰어나신 분이나 관대하신 분이나 태생이 높으신 분이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하지만 기사의 길에 들어온 적도 없고, 그 길을 밟은 적도 없는 학생이 나를 멍청이로 본다면 난 콧방귀도 안 뀔 테요. 나는 기사이며,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사로 죽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오만한 야심의 광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하고 비굴한 아부의 광야로 가며, 또 어떤 이는 속임수 많은 위선의 광야로, 어떤 이는 참된 종교의 광야로 가지만 나는 나의 숙명에 따라 편력 기사도의 좁은 길로 가오. 그 길을 따르고자 나는 재산을 경멸하지만 명예는 아니오. 나는 지금까지 모욕을 갚고 굽은 것을 바로잡으며 무례함을 벌했고 거인을 이기고 괴물들을 짓밟았소이다. …… 나는 나의 의도를 늘 훌륭한 목적에 두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이러한 일을 떠받드는 자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지, 위대하신 공작 각하 내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우, 정말 잘하십니다요!」 산초가 말했다. 「나리, 더 이상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요. 우리 나리, 우리 주인님, 설명도 필요없습니다요. 더 이상 말할 것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더 이상 세상에 참고 버틸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요. 더군다나 이분이 편력 기사들은 세상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부정하고 계시지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아는 것은 전혀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혹시, 형제여 …….」 성직자가 말했다. 「자네가 주인으로부터 섬을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그 산초 판사인가?」

 

「예, 그렇습니다요.」 산초가 대답했다. 「어느 누구나처럼 저도 섬을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라. 그러면 너도 좋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함께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풀을 뜯는 사람>들 중 하나이며, <좋은 나무에 기대는 자는 좋은 그늘을 쓴다>라는 걸 아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요. 저는 좋은 주인에게 기대어 그분을 모시고 다닌 지 몇 달이 되었습니다요.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그분처럼 다른 인간이 될 겁니다요. 그분이 사시면 저도 사는 것이니, 주인 나리께서 통치하실 나라가 있을 것이므로 제가 다스릴 섬도 있을 겁니다요.」

 

「분명 있고말고, 산초 친구여.」 이때 공작이 말했다. 「내가 돈키호테 나리의 대리자로서, 내게 남아도는 꽤 괜찮은 섬을 하나 자네에게 통치하도록 하겠네.」

 

「무릎을 꿇게, 산초.」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리고 자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각하의 발에 입을 맞추게.」

 

산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성직자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사제복을 두고 말하고자 합니다. 각하도 이 죄인들만큼이나 멍청하십니다. 이들이 미친 사람들인지 아닌지 제대로 좀 보시지요! 제정신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들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마당이란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이 사람들과 계십시오.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동안 저는 저의 집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않았고, 공작 부부의 간청과 만류도 소용없이 먹지도 않은 채 가버렸다. 비록 공작은 그가 당치 않을 정도로 화를 낸 것이 어찌나 우스운지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말도 많이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돈키호테에게 말했다.

 

「<사자의 기사> 나리, 나리께서는 나름대로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소. 그러니 그 굴욕에 대해 더 이상 유감은 없을 것이오. 사실 그것이 굴욕으로 보일지 모르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소. 나리도 잘 알다시피, 여자의 말로 굴욕을 당할 수 없듯이 성직자의 말로도 굴욕을 당할 수 없으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굴욕을 당할 수 없는 자는 아무도 모욕할 수 없지요.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이나 성직자들은 모욕을 당해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굴욕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굴욕모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모욕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한 사람이 길에서 딴 데 정신이 팔려 서 있는데, 무기를 든 사람 열 명이 와서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칼을 뽑아 들어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상대방의 수가 많아서 복수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때, 이런 경우 그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랍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더 확실시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때렸다고 합시다. 그러고는 기다리지 않고 도망을 가고 맞은 사람이 그 사람을 쫓아가지만 붙들지 못할 때, 이 맞은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욕은 그에 맞서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린 사람이 불시에 때렸더라도 그 후에 멈춰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상대와 맞서려고 했다면, 맞은 사람은 모욕굴욕을 함께 당한 겁니다. 굴욕스러운 건 기습적으로 맞은 것 때문이며 모욕적인 건 자기를 때린 사람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저주스러운 결투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굴욕은 당했을 수 있지만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나 여자들은 도망갈 필요도 느끼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으며, 버티고 서서 기다릴 이유도 없지요. 성스러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이들과 같으니, 이 세 부류의 인간들은 공격을 위한 무기나 방어를 위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라 해도 누구를 모욕하는 일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지요. 아까 전에 내가 굴욕을 당했을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다시 어떤 의미에서든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모욕을 당할 수 없는 자야말로 어떤 모욕도 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훌륭하신 분이 내게 하신 말씀을 유감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렇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분이 이 자리에 좀 더 계셨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뿐입니다. 그분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깨우치게 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

 

 - 『돈키호테_2권』, <32장,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돈키호테가 한 대답과 다른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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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다.

 - 헤럴드 블룸

 

 * * *

 

보르헤스의 소설집 한 권을 뚝딱(?) 읽고 나서 그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이고 또 어떤 것일까?

 

어쨌든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나서 뭔가를 어떤 식으로든 얘기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런데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얘기할 수 있을까? 도무지 손아귀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지금에?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뚝딱' 읽고 났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 할 이야기가 많은 줄 알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희귀한 아이템'들만 하더라도 제법 수두룩했으니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내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자주 마주친 사물들이나 사람들이었다.(난생 처음 들어보는 희귀하고도 기억해 둘 만한 지명이나 장소들도 아주 많았지만, 여기에 펼쳐 놓기엔 너무 많아서 일부러 생략했다.)

 

아주 다양한 책들, 낯선 여러 지역과 도시들, 신비주의 철학자와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

미로, 거울, 칼, 백과사전, 애매모호한 시간과 공간들.

기억, 불면증, 꿈.

무한함, 우주, 신.

기하학, 숫자, 원, 직선.

문학, 작가, 도서관, 사서, 잡지, 출판사, 보르헤스, 눈 멈.

(자주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복도들과 계단들…

그 밖에 여러 철학자들, 가령, 쇼펜하우어, 니체, 칸트, 라이프니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 존 로크, 헤겔, 스피노자, 제논, 엘레아 학파, 피타고라스, 야콥 뵈메, 비코, 조지 버클리 등등

그 밖에 여러 작가들, 가령,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토머스 칼라일, 아서 코난 도일, 윌키 콜린스, G.K.체스터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호메로스, 러디어드 키플링, T.S.엘리엇, 리처드 버턴, 폴 발레리, 알퐁스 도데, 랭보,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플로베르, 윌리엄 제임스, 베르길리우스, 제임스 조이스, 루이스 캐럴, 프란츠 카프카, 아가사 크리스티, 사무엘 존슨, 존 던, 오스카 와일드, 아폴로도로스, 헤로도토스, 타키투스, 드 퀸시, 레온 블로이, 클라우제비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로버트 브라우닝, 빅토르 위고, 꽁도르세, 헤시오도스, 슈펭글러, 에드거 엘런 포,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등등. 

 

이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양 손에 가득 움켜쥐고 나서도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그래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를 다시 펼쳐 읽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읽은 그 소설은 처음 한두 번 억지로(?) 읽을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픽션들』에 담긴 17편의 단편소설들을 다 읽고 난 뒤여서 어느새 내 몸이 보르헤스에게 제법 적응된 때문일까. 틀륀…이 갑자기 너무나 쉽고도 재미있게 읽혔다. 아하, 이게 이래서 이런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저런 걸 등장시켜서 저렇게 이어가는구나 싶은 느낌이 아주 생생했다. 흡사 어두컴컴한 '미로' 속으로 갑자기 끌려 들어갔던 낯선 여행자가 맨 처음엔 천지간에 아무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혼동을 겪다가, 나중에야 차츰 어두운 미궁 속에서 서서히 시력을 회복하면서 '미로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난 뒤에 느끼는 깊은 안도감을 맛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보르헤스 소설의 특징은 아주 많다. 이른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은 가짜 사실주의, 환상적인 허구, 탐정소설 구조, 책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은유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혼돈스런 의식들, 언어 유희 등등

 

가령 『픽션들』에 담긴 첫 번째 단편 소설인「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이야말로 어쩌면 '보르헤스 작품의 특징들'에 대한 자진 신고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그의 많은 작품에는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치 작가 '보르헤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인칭 화자를 바탕으로 한 소설작법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이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ㅡ손을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독자들ㅡ에게만 경이로울 수도 있고, 하잘것없기도 한 현실을 간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모순 속에 개입한다.(18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르헤스의 많은 소설들에서 '화자'는 이처럼 독자들을 경이롭게 만들기 위해, 아주 다양한 모순들을 개입시킨다. 또한 그가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많은 이름들은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한 차례 더 읽은 우리는 그 딱딱한 산문의 저변에 깔려 있는 매우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발견했다. 지형에 관한 부분에서 명시하고 있는 열세 개의 이름들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단지 셋뿐이었다. 쿠라산, 아르메니아, 에르제륨.(21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이처럼 보르헤스의 소설은 '아주 다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말하는 '가상의 작품에 대한 비평' 그 자체가 소설의 내용을 이루면서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이 혹성(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 그들에게 있어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30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실체가 전혀 없는 '가상의 세계'는 아니다. 틀뢴이라는 그 찬란한 역사는 17세기쯤 스위스의 루체른 혹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동을 시작했고, 1814년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혹성을 하나 창조하라'는 제안이 이뤄지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약 300명에 달하는 공동저자들에게 「틀뢴의 백과사전」제1판이 전달된다. 틀뢴이 현실세계에 침입한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는 건 1942년이다. 이처럼 '틀뢴'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모호한 세계이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이 보이는 태도야말로 작가 보르헤스의 관점에 가깝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은 진리, 심지어 그럴 듯한 진실성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놀라움을 찾는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환상문학의 한 지류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체계란 어떤 한 관점에 온 우주의 모든 관점들을 종속시키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34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은 상상의 세계이지만 끊임없이 현실에 개입한다. 맑시즘과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모두를 거부했던 보르헤스는 틀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도리어 '현실'보다 더 우위에 있을 가능성을 탐색한다.

 

거의 순식간에 현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ㅡ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ㅡ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48∼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틀뢴은 어쩌면 인간을 그저 골탕먹이려고 만들어 놓은 '미노타우로스가 갇힌 미로'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해독할 수 있는 미로다. 그러나 그것을 해독할 만한 독자들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틀뢴은 방대한 암호처럼 모호하며, 환상으로 가득 찬 문학적 우주 그 자체이다.

 

확실히 틀뢴은 미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미로, 인간에 의해 해독되도록 운명지어진 그런 미로이다.(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 * *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은 '삶의 순환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멋진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작중인물>인 봄베이의 변호사 미르 바하두르 알리가 1932년 말 봄베이에서 출판한 작품의 이름이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은 봄베이에 살고 있는 한 법과대학생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 사이에 벌어진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다가 유혈참극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한 힌두교인을 죽인다. 그리고는 피신과 방황과 구도로 점철되는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유랑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갑자기ㅡ'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모래사장에 박혀 있는 한쪽 발뿐인 사람의 발자국 앞에서 경험했던 그런 신비스러운 공포감과 함께'ㅡ어떤 신비스러운 인식에 도달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로부터 이러한 깨달음이 유래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이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이 있다.> 

 

그 대학생은 그를 찾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알모따심이라 불리는> 그 인물과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법과대학생이 <안쪽에 문과 수많은 구슬들이 달린 돗자리와 후광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 낭하에 도달하지만,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소설이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알모따심(여덟 번의 전쟁에서 이기고, 여덟 아들과 여덟 딸을 낳았고, 8천 명의 노예들을 남겼고, 왕국을 8년, 8일 밤낮의 기간 동안 통치했던 아바시다 왕국의 여덟 번째 왕의 이름)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피난처를 찾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32년판에서 주인공이 수행한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였다는 사실은 비유로 따져볼 때 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희백했음을 설득력 있게 말해 준다.(61∼62쪽)

 

 

이 소설은 작중 가상의 인물이 쓴 가상의 작품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해 소설 속 화자인 '내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알모따심에 대한 비밀은 엉뚱하게도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작가 자신이 덧붙인 '기나긴 주석' 끄트머리에서 발견된다.

 

이 시와 미르 바하두르 알리의 소설과의 접촉이 아주 과대한 것은 아니다. 제20장에서 한 페르시아 서적상이 알모따심이 했던 말이라고 한 그 말은 알모따심이 했던 다른 말들의 과장 해석인 듯싶다. 이러저러한 유사성들은 <찾음을 당하고 있는 자>와 <찾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찾는 자>가 <찾음을 당하는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책의 다른 장은 알모따심이 바로 그 법대생이 죽였다고 믿었던 <힌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원주]

 

 

 

 * * *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책 속의 책 이야기'로서는 더할나위없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야말로 '액자 소설'의 진정한 창조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프랑스어로 『돈키호테』를 쓴 작가 삐에르 메나르와 아는 사이이다. 화자인 '나'는 그의 작품 목록을 무려 4쪽에 걸쳐서 19개나 길게 나열한다. 물론 그 작품 목록들은 '사실'과 교묘하게 비틀어 놓은 허구적인 작품들이다. 목록 나열을 끝낸 화자의 다음 말이야말로 또다른 『돈키호테』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제 다른 작품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지하에 묻혀 있고, 진정으로 위대하고, 탁월한 작품 말이다. 아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란 게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 미완성 작품. 이 작품, 아마 우리들 시대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일지도 모를 이 작품은 『돈키호테』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넌센스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넌센스를 정당한 것으로 논증해 보이기 위한 것이 바로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74쪽)

 

 

보르헤스의 이런 시도야말로 어쩌면 가장 돈키호테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키호테야말로 '기사도 책 속에 푹 빠져 지내다가'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험을 시작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

 

사실 『돈키호테』의 원저자는 (세르반테스에 따르면) 아랍 사람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였다. 세르반테스는 그가 쓴 소설을 독자들에게 다시 전달하는 '전달자'일 뿐이었다. 작품의 원저자가 따로 있고, 그 사람이 쓴 이야기를 다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서사 구조를 단숨에 획득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속에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1부의 9장과 22장'에 들어 있다.

 

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가장 큰 경이로움과 흥미를 느꼈던 부분도 바로 이러한 '세르반테스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였다, 여기서 잠시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로 되돌아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어떤 인물인지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겸.

 

한편으로는 돈키호테가 읽은 책 가운데 「질투의 환멸」이니, 『에나레스의 요정과 목동』과 같은 최신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도 최근에 일어난 일이며, 따라서 아직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을 사람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유명한 에스파냐의 용사이자 라만차 기사의 빛이요 거울인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전 생애와 기적들을 반드시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어지럽혔다. 돈키호테야말로 이 재난 많은 시대에 편력 기사의 임무와 그 수행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를 바로잡고, 과부를 돕고, 채찍을 휘두르고, 말을 타고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다니던 처자들이 어느 비열한 놈이나 촌놈이나 가공할 만한 거인들에게 순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지난날에는 그런 놈들에게 당하는 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80년 동안 단 하루도 남의 지붕 밑에서 자지 않고 어머니가 낳아 준 그 상태 그대로 무덤으로 간 처자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멋진 돈키호테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되고 찬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고, 나 역시 여기에 들인 노력과 열성을 생각해서라도 이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늘과 우연과 행운이 나를 돕지 않는다면 세상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을 사람은 두 시간 남짓이나마 누릴 수 있었던 재미와 즐거움을 영원히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책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뭉치들을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역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훌륭하고 더 오래된 다른 언어를 해독해 줄 사람이라 해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운좋게도 한 사나이를 찾아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잡기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책 중간을 펼쳐 보더니 잠깐 읽다가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물었더니 이 책의 여백에 쓴 주석이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좀 읽어 달라고 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읽어 주었다.

 

「내가 말한 주석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솜씨만큼은 라만차를 통틀어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 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타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비단 장수를 제치고 그 소년에게 돈 반 레알을 줘 종이 뭉치와 잡기장을 모조리 사들였다. 만일 소년이 빈틈없는 아이라 내가 얼마나 그 물건들을 원했는지 알았더라면 6레알 이상은 확실히 받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어인과 함께 성당의 본당 회랑으로 가서 돈키호테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모조리, 더하거나 빼는 것 하나 없이 에스파냐 말로 고쳐 주면 원하는 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건포도 2아로바와 밀 2파네가로 만족하며 짧은 시일 내에 충실하게 잘 번역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 훌륭한 물건을 손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한 달 보름 조금 더 걸려 전부 번역했다. 다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140∼142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약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작가가 아랍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민족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불구대천 원수이기 때문에 마땅히 써야 할 것들을 쓰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토록 훌륭한 기사를 칭찬하는 데 펜을 더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 칭찬거리들을 빠트리고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나쁜 행동에 나쁜 생각이다. 역사가란 사실을 정확하게 그대로 기록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개인의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한이나 편애와 같은 감정으로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이 이야기에 무엇인가 좋은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의 작가인 개 같은 무어인의 책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제2부는 번역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143∼144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여기서 다시 보르헤스의 『픽션들』로 되돌아 오자. 보르헤스의 소설 속 가상의 작가인 삐에르 메나르는 과연 어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ㅡ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 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ㅡ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ㅡ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단지 놀랍게 만들려는 것뿐이지.」(7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17세기의 스페인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정도로 노력한다.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 일, 무어인 또는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그의 목표에 포함되었다.(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직접 뛰어들어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왼 팔을 잃은 '참전 용사'였다.)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에 대해 잊어버리는 일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표는 일단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곧 그런 방식을 포기한다. '설사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삐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닌가.

 

삐에르 메나르가 추구하려는 목표에는 이보다 훨씬 원초적인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쓴다는 것은 근거가 있었고, 불가피했고, 그리고 거의 운명적인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사정이 다르지. 극단적이리만치 아주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찬 300년이란 세월이 그냥 헛되이 흘러간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네. 그러니까 그 사건들 중 하나만 언급한다 해도 그것은 곧바로 『돈키호테』 그 자체가 돼버리니까 말이네.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에르 메나르는 소설을 완성한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그 자신만의 『돈키호테』를.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전혀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문자 그대로 베껴져 있는 것>을 보았고, 바꾸르 남작 부인은 니체의 영향을 보았다는 식이었다. 이런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이야말로 '책 읽기'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에 다름 아니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는 단 한 글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그의 반박론자들은 전자에 비해 보다 애매모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84∼85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결국 그 어떤 텍스트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가치가 쓸모없게 혹은 더욱 훌륭하게 바뀐다는 얘기는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20세기에 프랑스 사람이 쓴 메나르의 작품이 아무리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고어체ㅡ무엇보다 외국어 문체적인ㅡ라는 '작위적인 흔적'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테고,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에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章)ㅡ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ㅡ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 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8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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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책들 가운데 '보르헤스'가 직접 쓴 책은 유감스럽게도 『픽션들』뿐이다. 지금에서야 그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등장할 만한 '책에 대한 책'을 몇 권 끄집어 냈다. 그 책들은 알베르토 망겔의 『독서의 역사』,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 매튜 배틀스의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등이었다. 그 가운데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글들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르헤스가 살아 있던) 1984년에 쓴 다음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보르헤스라는 한 작가가 우리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통된 느낌을 설명하려면, 그것의 범주를 구분하기보다는 글쓰기의 기술과 보다 정확히 직결된 어떤 동기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 첫 번째로 작문을 경제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들고 싶다. 보르헤스는 간결함의 대가다. 그는 단 편 페이지에 극도로 풍부한 개념과 시적인 요소들을 응축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텍스트 안에서 사건들은 서술되거나 암시되며, 무한성, 그리고 이어지는 개념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빛을 발한다. 이러한 밀도 높은 서술은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겁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투명하다 할 정도로 명확하며, 장식이 없으며,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시적이면서도 짧은 문체가 다양한 리듬, 문장의 운동감,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형용사들을 사용함으로써 정확하고 구체적인 보르헤스 특유의 언어에 이르게 되는 것은 스페인 언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문체가 이룬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만이 이러한 문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중략)

 

간결하게 쓰기 위해 보르헤스가 결정적으로 착안한 방법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소 간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착안한 이 결정적 방법은 보르헤스 자신을 작가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거의 마흔에 가깝도록 그가 에세이가 아닌 허구적인 산문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 준 그 방법은, 쓰고 싶었던 책을 이미 누군가가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보르헤스가 꾸며 낸 다른 언어, 다른 문화 속에서 나온 미지의 작가가 쓴 책, 그러고 나서 그러한 상상 속의 책을 다시 묘사하거나 요약, 비평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썼던 기이한 이야기인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은 보르헤스와 관련된 신화를 남겼다. 그것은, 이 작품이 《수르(Sur)》에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이 모두 이 작품이 한 인디언 출신의 작가가 쓴 책을 보르헤스가 훌륭하게 비평한 글로 알았다는 일화다. 이와 유사하게 매번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모든 보르헤스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으로 텍스트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음을 지적해 왔다. 즉 가상의 도서관이나 현실 속의 도서관에서 꺼내어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 고전 작품이나 혹은 박식한 지식이 나오는 작품, 아니면 단순히 꾸며 낸 작품들을 통해 확장한다는 것이다.(346∼348쪽)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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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피지 쪽들에 호메로스가 다 담기다니!

일리아스와 오뒷세우스의 그 많은 모험이

프리아모스 왕국의 적이었던 오뒷세우스 말야!

그 모든 것이 양피 한 조각에 갇혀 버리다니

겨우 자그마한 몇 장으로 접은 양피 조각에!

 - 마르티알리스

 

 * * *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언제부턴가 두꺼운 책들을 조금씩 넘보기 시작했더랬다. 아마도 내가 태어나서 거의 맨 처음으로 도전했던 두꺼운 책들은 지금 되돌아 보더라도 그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책이었던 듯하다. 설사 조금 더 후하게 쳐준다고 하더라도 '괜한 의무감' 때문이었다는 말을 덧보탤 수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내가 처음으로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두꺼운 책들은 무려(!)『일리아스』, 『오뒷세이아』, 『몽테뉴 수상록』, 『까라마조프 형제들』 등이었기 때문이다. 바둑으로 치자면 겨우 5,6급 정도의 실력밖에 안 되는 초급자가 프로 기사에게 맞바둑을 두자고 덤빈 꼴이였다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의 상당히 기나긴 '특별 무소속 기간' 동안 이들과 거친 씨름을 벌이기로 작정을 했더랬다. 비록 자세는 영 볼품없었지만 말이다. 1970년대의 엄혹한 시절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탓에 나에게 두발 자유화는 그저 먼 나라 이웃 나라의 얘기일 뿐이었다. 입시가 끝나고 입학이 다가올 때까지 겨울 내내 무방비 상태로 무럭무럭 자라도록 내버려둬도 두발 상태는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까까머리에서 차츰 벗어나는 듯한 어중간한 모습으로, 대학생으로는 도저히 봐줄 수 없는 그런 어설픈 시골 총각의 머리 모양새로(한 마디로 말하자면 '촌놈'으로) 나는 용감하게도 '트로이 전쟁'에 뛰어들었던 셈이다. 군불을 넉넉히 지핀 시골집 온돌방에 배를 깔고 하루 종일 이불 속에서 엎드렸다 누웠다를 반복하면서.

 

입시 과목과는 전혀 다른 책들인지라 어쨌든 꽤 여러 날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 책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오랫동안 나에게 잊지 못할 추억들을 남겨 주었다. 사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온갖 흥미로운 얘기들이 그 당시에 나에게 얼마나 재미있게 다가왔었는지는 지금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온갖 고대의 이름 모를 신들과 지명들과 인명들만 하더라도 내겐 얼마나 벅찼는지 모른다. '이걸 도대체 언제까지 읽어야 하나' 하는 회의감이 들었던 순간은 아직까지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을 정도다.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점이 있었다면 그 당시에는 독서 환경이 지금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했다는 점이었다. 책을 읽는 데 방해될 만한 요소는 일부러 찾을래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TV라고 해봐야 기껏 서너 채널밖에 없었고 그것도 밤 시간에만 볼 수 있었다. 신문조차 구독하는 게 없었고, 흔해빠진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은 그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환경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럭저럭 그 두꺼운 책들을 꽤나 오래도록 붙들고 읽었더랬다.

 

그 책들을 끝까지 다 읽었는지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지만 아마도 완벽하게 다 읽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나마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끝까지 다 읽고 나서 독후감까지 끄적거려 놓은 게 지금까지도 남아 있긴 하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때의 무모한 도전이 내심 흐뭇하기도 하고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 나이에 도대체 뭘 얼마나 안다고 그런 책들을 붙잡고 그토록 낑낑댔을까. 다시 생각해 봐도 내게 '두꺼운 책들'은 그저 호기심이나 의무감의 대상이었지 처음부터 흥미의 대상은 결코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숱한 걸작 소설들 가운데 하필이면 『까라마조프 형제들』을 선택한 이유 또한 별 다른 건 딱히 없었다. 그저 우리집에 남자 형제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었다.

 

사진 1_호메로스, 몽테뉴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들은 당연히(?)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없다. 『까라마조프 형제들』은 새 책으로 장만하지도 못했다. 그토록 인상 깊게 읽었는데도 말이다. 아무튼 그 당시의 독서 경험이 두고두고 나에게 지속적으로 어떤 영향들을 끼치고 있다는 것만큼은 아주 분명히 느끼고 있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이 책들만 보면 이내 '고향집, 1980년 겨울'로 곧장 달려가곤 한다. 거기가 내 몸과 마음의 영원한 고향이므로.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해서도 '두꺼운 책들'에 대한 괜한 욕심이 다시 발동했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들이 (다시) 『몽테뉴 수상록』, 홉스의 『리바이어던』,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허먼 멜빌의 『모비딕』, 스탕달의 『적과 흑』, D.H.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괴테의 『파우스트』 등이었다. 플라톤의 『국가』, 막스 베버의 『사회경제사』,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입문』, 슘페터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 등도 읽었다. 다른 얇은 책들도 더러 읽지 않은 건 아니었으나 보잘 것 없는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왠지 나는 그 나이에 그다지 썩 어울리지 않게(?) 웅편거작들에 꽤나 욕심을 냈던 것 같다.

 

사진 2_플라톤, 막스 베버

군대에서 읽은 책들도 이제는 단 한 권조차 남아 있지 않다. 그 때의 경험 때문에 다시 읽은 책들도 플라톤과 베버 정도다. 그래도 그 당시의 독서 경험이 내겐 소중했다. 심지어 알라딘에 처음으로 글을 올린 것도 '그때의 경험' 덕분이었다. 자본주의가 어떻게 해서 성립.발생되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넓혀준 대작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복학한 이후로는 아주 오랫동안 이상한 담을 쌓기 시작했다. 책과 나 사이에 쌓인 담은 아무런 노력 없이도 저절로 계속 높아만 갔다. 이래저래 '사회생활'로 아주 바빴던 탓도 있었고, 책 없이도 충분히 즐길 만한 일들이 제법 많았는지도 모른다. 술 마시는 데만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을 쏟아부었으니 말이다. 그런 시기에 대작들을 읽는다는 건 아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시기에 내갸 읽은 '장편'이라고 해 봐야 겨우(?) 이문열의 『 삼국지』나 조정래의 『태백산맥』정도가 고작이었다. 한때는 『소설 목민심서』, 『소설 동의보감』까지도 괜스레 대작으로 여길 정도였다. 이때의 독서 편력은 이를테면 '중세의 암흑기'나 다름없을 정도였다.

 

그러다가 다시 책읽기에 살금살금 빠져든 게 대략 10여 년 전부터였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나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가 너무나 흥미롭게 읽혔고, 그 여세를 몰아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는 물론이고,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쓰인 작품들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찾아 읽었던 듯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세계사 책에서나 가까스로 만날 수 있었던 사람들이 쓴 아주 오래된 고전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갑자기 '르네상스'를 맞이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투퀴디데스를 만나고 나니 내가 새로이 만나야 될 흥미로운 인물들이 책 속에서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해서 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를 만나고, 키케로와 세네카와 플루타르코스를 만나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베르길리우스와 오비디우스를 잇따라 만났다.

 

 

 

사진 3_헤로도토스, 투키디데스, 크세노폰, 타키투스, 카이사르, 에드워드 기번

고대 서양의 역사뿐 아니라 서양 세계의 '온갖 다양한 뿌리들'이 헤로도토스와 투퀴디데스의 책 속 곳곳에 박혀 있다. 그들이 '역사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훗날의 역사가들은 대부분 이들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사진 4_헤시오도스, 아리스토텔레스, 아우렐리우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세네카, 아폴로도로스

고대 그리스와 로마를 빛낸 시인들과 철학자들의 영향력은 일반적으로 생각보는 것보다는 훨씬 뿌리가 깊다.

 

사진 5_소포클레스,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메난드로스

숱한 문학 작품의 '발원지'와 같은 작품들이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을 통해 '고대 그리스 비극'의 심오한 철학적 깊이를 거듭 탐구했고, 플라톤 또한 '아리스토파네스가 없었다면' 어찌 삶을 견딜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그쯤에 이르니 두꺼운 책들이나 어렵게 느껴지는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가시는 대신에 책 속에 담긴 묘한 비밀들이 차츰 엿보이기 시작했다. 그건 다름아닌 '텍스트와의 연관성' 때문이었는데,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 속에서 차츰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나 이야기'를 예전보다 훨씬 더 자주 마주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간통 같은 독서) 가령 단테의 『신곡』속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만 만나는 게 아니라, 트로이 전쟁에서 맹활약하던 아킬레우스와 오뒷세우스를 만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책에서 몽테뉴가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만나고, 톨스토이의 소설 속에서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 속에 등장한 이야기를 다시 만나는 식이었다.

 

사진 6_단테, 베르길리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몽테뉴, 톨스토이

단테는 타락한 민중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신곡』을 썼다기 보다는 탁월한 '문학작품'으로 지옥과 연옥과 천국을 그려냈다. 그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를 평생의 스승으로 흠모했다는 사실이야말로 '책'이 지닌 마법과도 같은 위력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책'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슨 수로 그토록 서로 다른 태양과 공기 속에서 살았던 낯선 인물들을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스승과 제자 사이' 혹은 '절친한 친구 사이'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경험들은 차츰 철학으로도 번졌다.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무수한 고대 철학자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레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의 『그리스 철학자 열전』을 찾아 읽게 되고, 오랫동안 정들었던 쇼펜하우어와 헤어지자 말자 이내 니체를 찾게 되고, 니체의 작품들 속에서 다시 고대 그리스의 비극시인들과 철학자들을 다시 만나는 식이었다.

 

사진 7_쇼펜하우어,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루크레티우스

 

 

사진 8_니체

니체는 언제나 강인하고 격렬하면서도 과격하다. 그러나 니체를 만나고 나면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왜곡'인지에 대해 훨씬 더 깊이 배울 수 있다. 그만큼 수많은 분야를 아주 활기차게 자유자재로 훨훨 넘나든 철학자도 드물다. 철학, 종교, 도덕, 역사, 음악, 문학 등등등.

 

 

이런 경험이 극한까지 치달았던 건 무엇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만났을 때였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런 사전 준비작업도 없이 무모하게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곧장 뛰어든 건 아니었다. 누군가로부터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월든』을 소개받은 적이 이미 있었고, 그 풍요로운 『월든』 속에서 다시 호메로스, 헤로도토스, 오비디우스, 소포클레스는 물론 몽테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허먼 멜빌 등등을 다시 만났고, 그런 교유 덕분에 비로소 나는 어른들이 읽는 『걸리버 여행기』와  『로빈슨 크루소』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런 얽히고 설킨 만남 덕분에 나는 마침내 제임스 조이스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어렵사리 그를 만나고 나니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웅편거작에 대한 공포심'이 거의 다 사라진 듯한 느낌이 찾아왔다. 그토록 어려운 난관마저 뚫고 나왔는데 내 앞을 가로막을 책들이 더이상 뭐가 더 있단 말인가 싶은 '엄청난 자신감'이 와락 다가왔다고나 할까.

 

사진 9_제임스 조이스,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제임스 조이스에게는 너무 일찍 다가갈 필요가 없다.『율리시스』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그럴 만나기 위해 너무 늦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클리프턴 패디먼의『평생 독서 계획』속에 담긴 책을 대략 3할 정도 읽고 나서 『율리시스』를 만나는 건 꽤나 좋은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 http://blog.aladin.co.kr/oren/8597281

 

 

사진 10_헨리 데이빗 소로우, 랄프 왈도 에머슨

소로우는 자연을 벗삼아 평생을 콩코드에서 살았지만 '독서'를 통해 무수한 사람들과 아주 활발한 교류를 나눴던 사람이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은 같은 콩코드 주민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이었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

사람들은 장부를 기입하고 장사에서 속지 않기 위해서 셈을 배운 것처럼 하찮은 목적을 위해서 읽기를 배운다. 고귀한 지적 운동으로서의 독서에 대해서 그들은 거의 또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진정한 의미의 독서인 것이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 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P150)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나는 우리 콩코드 땅이 배출한 인물들보다 더 현명한 사람들과 사귀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들의 이름이 이곳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말이다. 내가 플라톤의 이름을 듣고도 끝내 그의 저서를 읽지 않을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플라톤이 바로 우리 마을 사람인데도 내가 그를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며, 그가 바로 옆집 사람인데도 그의 말을 들어보지 못하고 그 말의 예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런데 실상은 어떠한가? 플라톤의 《대화편》은 그의 영원불멸한 지혜를 담은 책이며 바로 옆 선반에 놓여 있는데도 나는 그 책을 거의 들추지 않는다.(P154)

 

 -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고 나서는 '두꺼운 책들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모조리 제거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마음 속에만 담아 왔던 대작들을 향해 겁없이 뛰어들 수 있었다. 단김에 소뿔 빼듯이 덥석 붙잡은 게 『전쟁과 평화』였다. 이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통해 '무모한 용기'에서 비롯되는 거대한 감동의 쓰나미를 충분히 맛본 터여서 더더욱 『전쟁과 평화』가 '전쟁 보다는 평화 쪽으로' 아주 순조롭게 풀려나갔다.

 

사진 11_세르반테스, 톨스토이

이들 두 작가는 인류를 대표하는 소설가로 불려도 결코 손색이 없는 인물들이다. 두 작품 모두 어머어마하게 긴 분량을 자랑하지만 책의 두께보다 훨씬 더 거대한 감동을 지닌 걸작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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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뛰어난 장군이자 외교관이자 웅변가로 맹활약했던 오뒷세우스의 이야기를 그린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대한 오마주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침공에 대한 '러시아 민중들의 저항'에 대한 오마주로 볼 수 있다면, 후세 사람으로부터 영광스럽게도 '최후의 그리스인'으로 불린 역사가 플루타르코스가 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이들 두 작품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왜냐하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야말로 고대의 무수한 전쟁터에서 실제로 벌어진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평화로운 시대를 살다 간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불굴의 용기와 지혜를 발휘한 위대한 인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실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문장력에 대한 명성은 이미 『몽테뉴 수상록』을 통해서도 눈과 귀가 아프도록 익히 들어왔던 터였고, 이미 발췌 번역본인 천병희 선생님의『플루타르코스 영웅전』까지 읽었던 터라 '영웅전 전집'에 대한 심리적인 장벽 같은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그토록 방대한 책을 단숨에(?) 완독하고 나서 곧바로 다시 집어들고 나서 (두 번째인 만큼) 아주 느긋하게 즐기면서 재독했던 일은 다른 책들에서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다.

 

사진 12_플루타르코스

도서출판 숲에서 펴낸『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영웅 10명'만 담은 발췌 번역본이다. 완역본을 읽으면 발췌본에서 모자이크식으로 따로따로 움직이던 인물들이 어느새 여기저기서 동시에 한꺼번에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만 하더라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 루쿨루스, 세르토리우스, 술라, 키케로, 카토, 브루투스, 안토니우스 등과 동선이 겹치는데 『영웅전 전집』에는 이들의 전기가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고 나서도 왠지 모르게 '두꺼운 책들'에 대해 여전히 미진한 듯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던 건 순전히 셰익스피어 때문이었다. 인류 최고의 시인이라고 불러도 조금도 이상할 게 없는 이 위대한 시인의 작품들을 읽지 않고는 어딘가 구멍이 뚫린 듯한 허전함을 도저히 메울 길이 없을 듯했다. 더군다나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는 동안에 내가 셰익스피어를 미리 만나지 못했던 일을 가슴 깊이 통탄했던 일들까지 생각하면 더더욱 셰익스피어를 미룰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랄프 왈도 에머슨이 쓴 『위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서 이미 셰익스피어에 대한 이야기를 제법 자세히 소개 받은 터였고, 에머슨이 남긴 명언까지도 심심찮게 떠올렸던 터였다.(☞ 기어이 만날 수밖에 없게 된 셰익스피어)

 

“만일 전 세계의 도서관이 불타고 있다면 나는 뛰어 들어가 『셰익스피어 전집』과 『플라톤 전집』 그리고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구해낼 것이다”

 - 랄프 왈도 에머슨

 

사진 13_셰익스피어

최종철 교수가 '전10권'을 목표로 출간한 『셰익스피어 전집』시리즈. 전집 1권, 4권, 5권 , 7권에 담긴 작품들(모두 16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뛰어난 걸작들이다. 이 시리즈의 장점은 무엇보다 셰익스피어 전공 교수의 '운율을 살린 운문 번역'이면서 '가장 최신의 번역'이라는 점이다.

 

사진 14_셰익스피어

민음사 판 <셰익스피어 전집 시리즈>로는 아직 출간되지 않은 작품들은 다른 번역자의 판본으로 읽었다. 신정옥 교수가 '전작품'을 완역한 '전예원' 판은 번역된지 너무 오래된 상태여서 '외국어 표기'가 눈에 거슬리는 경우가 많고, 산문체 번역이어서 '시적인 대사'를 감상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동서문화사의 번역들도 대체로 무난했다.

 

 

셰익스피어를 읽고 나니 아주 잠깐 동안은 '두꺼운 책들에 대한 갈망'이 일순 가시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그건 순전히 착각일 뿐이었다. 그건 마치 토마스 만의 소설 『마의 산』에 나오는 주인공인 23세의 청년 한스 카스토르프가 스위스의 다보스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인 베르크호프에서 자주 겪었던 '수은주의 변덕'을 닮았을 뿐이었다.

 

10월도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시작되었다. 그 자체로는 완전히 겸손하고 소리 없는 시작이다. 신호도 표시도 없이 슬그머니 들어오는 바람에 눈을 부릅뜨고 주의하지 않으면 이를 쉽사리 놓쳐 버리게 된다. 시간에는 사실 눈금이 없고, 새로운 달이나 해가 시작될 때 천둥이 치는 것도 아니고 나팔 소리가 울리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될 때 예포를 쏘거나 종을 치는 것도 인간뿐이다.(434쪽)

 

 - 토마스 만, 『마의 산_상권』, <제5장_수은주의 변덕> 중에서 

 

 

그랬다. 셰익스피어를 때론 힘겹게, 때론 너무나 가슴이 벅차 오르는 희열로 신나게 내달리는 기분으로 읽을 때도 있었으나, 현실 속의 나는 아직도 기껏 토마스 만의 『마의 산』도 구경하지 못한 터였다. 아, 도저히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곧장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과 『마의 산』을 찾아 읽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소설계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찰스 디킨스의 대표적인 장편소설들인 『위대한 유산』, 『데이비드 코퍼필드』, 『황폐한 집』을 내처 읽었다.

 

사진 15_토마스 만, 찰스 디킨스 

 

아... 그런데...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너무나 재미있는 소설이면서도 예상 외로(?) 분량 또한 엄청났다. 도대체 찰스 디킨스의 소설들은 얼마나 긴 걸까? 이렇게 긴 데도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어도 좋단 말인가?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찰스 디킨스의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서머싯 몸'이 '세계 10대 소설'로 꼽은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생각보다 그리 많이 읽지 않는 걸까? 게다가 많은 문학평론가들로부터 찰스 디킨스의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고 평가받는 『황폐한 집』은 또 어떻고? 말 그대로 '황폐한 집'으로 내팽겨 친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그렇다고 이게 꼭 찰스 디킨스만의 문제일까? 톨스토이는? 도스토예프스키는? 아니, 그렇다면 마르셀 푸르스트의 그토록 악명높은 길이를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도대체 얼마나 긴 걸까? 여기에 대한 합리적인 공통의 잣대는 없을까?

 

이런 얄궂은 생각들이 마구 스쳐갔던 게 벌써 스무 날이나 지난 과거가 되었다. 그래서 나중에 '언젠가는' 꼭 한 번쯤 시도해 봤으면 싶었던 '나만의 작업'을 슬금슬금 시작했다. 굳이 이 작업에 대해 따로 제목을 붙이고자 한다면 '름난 웅편거작들의 작품 길이에 대한 소고'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쎄, 그런 말은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니 그냥 대충 넘어가자. 아무튼 재미삼아 만들어 본 결과물을 간단히 소개하면 이렇다.

 

 

이 도표를 만들 때 '나만의 독창적이면서도 자의적인 판단'이 상당히 많이 개입됐다. 그걸 미리 밝힌다. 이런 표는 결국 '나 자신의 과거의 독서 경험과 미래의 독서 계획'을 일정 부분 반영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점을 미리 충분히 확인한 뒤에 이 표를 살펴야 불필요한 오해를 줄일 수 있을 듯하다.

 

1. 이 표는 이름난 걸작들을 똑같은 잣대를 써서 '물리적인 작품의 길이'를 서로 비교해 보는 게 주목적이다.

   그래서 똑같은 판형으로 출판된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총 275권)'를 기준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2. 여러 작품을 '합본'한 경우는 최대한 배제했다.

    예), 쇼펜하우어의 『세상을 보는 지혜』(1,023쪽),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국가/향연』(824쪽),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정략론』(665쪽), 카프카의 『성/심판/변신』(610쪽) 등

 

3. 여러 작품을 모은 '합본'이지만 (너무 중요한 작가여서) 예외적으로 포함시킨 작품은 딱 둘만 넣었다.

   예), 셰익스피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655쪽), 니체의 다섯 작품을 모은 책(1,030쪽)

 

4. 단일 작품으로서의 통일성이 부족하거나, 비평가들로부터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작품들은 제외했다.

   예) 『아라비안나이트』(전5권, 5,336쪽), 『솔로몬 탈무드』(810쪽), 『그림동화전집』(1,344쪽) 등

 

5. 분량이 방대한 작품을 중심으로 길이를 비교하는 게 주목적이어서 '인위적인 하한선'을 둘 수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널리 알려진 세 작품(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위대한 유산』)이 모두 560쪽이었다.

 

6. 대작이지만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에 아예 없는 작품들은 제외되었다.

   ex)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등

   또한,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쇠망사』(526쪽)는 축약본의 번역본이어서 제외했다.

 

7. 지나치게 어려운 작품이거나 지나치게 대중적이다 싶은 작품은 일부러 제외했다.

    ex) 칸트의 『순수이성비판』(770쪽),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686쪽), 밀턴의 『실낙원』(644쪽),

          마가렛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332쪽) 등

 

 

이렇게 도표로 어렵사리 비교한 결과를 '한 눈에' 볼 수는 없을까? 물론 있다! 챠트로 만들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그림인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인류의 천재들이 빚어낸 불멸의 걸작들이 이 챠트 하나에 다 담기다니!

 

까마득한 옛날에 내가 처음으로 도전했던 '몹시도 두꺼운 책들'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혹은 『몽테뉴 수상록』을 붙잡고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가 먼 미래에는 이런 그림까지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했던 건 결코 아니었다. 어쩌면, 어쩌다 보니 그럭저럭 여기까지 왔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지도 모르겠다.

 

혹은, 까마득한 옛날에 어느 책에서 얼핏 스치듯이 보았던 서머싯 몸의 <세계 10대 소설 목록> 가운데 내가 읽은 작품이 단 하나, 『까라마조프 형제들』밖에 없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 어쩌면 나를 여기까지 몰래 이끌고 왔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에 와서 문득 뒤돌아 보니 <세계 10대 소설>에서 어느새 두 작품만 내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로 놀랍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 글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덥석 붙잡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책들이 아직까지도 몹시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그보다 부담이 훨씬 덜한(?)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으로 살짝 방향을 틀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런 시도가 누군가에게 일어났으면 좋겠다. 그런 측정 불가능한 미래의 자그마한 가능성들이야말로 이런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가장 진지하면서도 호의적인 반응일 테니까 말이다.

 

사진 16_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에 포함된 작품들

사진에 없는 '10대 소설' 작품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까라마조프 형제들』, 허먼 멜빌의 『모비딕』, 헨리 필딩의 『톰 존스의 모험』등이다. 내가 여태껏 읽지 못한 두 작품은 『폭풍의 언덕』과 『톰 존스의 모험』이다.

 

 

카프카는 책이 얼음을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라면 왜 그런 책들을 읽어야 하느냐고 말했다. 너무나 좋은 비유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어린 시절에 시골에서 자랄 때는 '얼음'과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거의 대부분의 시간은 얼음 위에서 썰매를 타는 데 시간을 보냈지 얼음을 깨는 데 애를 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어릴 땐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기분만큼 신나고 상쾌한 일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가끔씩은 얼음 위에서 미끄러져 꽈당 넘어질 때도 있었다. 얼음이 너무 매끄러우면 넘어지기 싫은 데도 아주 쉽게 벌러덩 넘어지는 수가 있다. 그런데 정말로 얼음을 깨트려야 할 때도 가끔씩은 있었다! 얼음 아래에서 살고 있는 물고기를 잡을 때였다!

 

그렇다. 그럴 때 가장 필요로 하는 무기가 바로 도끼였다! 도끼만 있으면 아무리 추운 한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얼음도 아주 쉽게 깰 수 있었다! 얼음이 너무 단단하다거나 너무 매끄럽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얼음은 결국 얼음일 뿐이다. 그 얼음을 깨트릴 도끼는 이미 셀 수도 없이 많이 만들어져 있다. 얼마만큼 훌륭한 도끼로 얼마만큼 두꺼운 얼음을 깨트릴 것인가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나는 몹시도 두꺼운 책들이 두꺼운 얼음을 깨트리는 데 아주 유용한 도구로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다. 이토록 두꺼운 책들이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수로 '얼음'처럼 매끄럽고 단단한 표면들을 지닌 『마의 산』 같은 데를 오를 생각이나 했겠으며, 장차 저토록 방대한 풍모를 자랑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쪽으로 나 있는 길을 찾아 나설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이제 다시 책을 붙들 시간이 다가온다. 이런 글을 쓰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왜 이런 글을 끄적이고 있을까. 이런 책들과 함께 했던 수많은 순간들이 못내 그립고, 이런 두툼한 책들을 볼 때마다 그들이 못내 고맙기 때문이다. 이 글에 담긴 책들이 나에게 안겨준 즐거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컸지만, 그들이 내게 고통을 안겨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어찌 내가 틈날 때마다 이 책들을 거듭 보듬고 쓰다듬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접힌 부분 펼치기 ▼

 

몇 년 전에도 두꺼운 책들에 대해 기나긴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그때 함께 올렸던 음악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5번>이었다. 그 음악은 들을 때마다 심장이 고동친다. 무슨 어려운 일이든 능히 해낼 수 있을 듯한 '대책없는 자신감'도 무럭무럭 솟는다. 이런 글을 쓸 때 괜히 덧붙이고 싶은 음악이 아닐 수 없다.

 

예전에 썼던 글 속에 담긴 책들 가운데 '그때까지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이제는 어느새 '나도' 읽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보람이 느껴진다. 이런 글을 쓸 때마다 '온갖 책들을 사진에 다시 담아 보는 일'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작업이 아무런 댓가조차 없는 건 아니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세월 따라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뿐만 아니라 그 책들을 대하는 나 자신까지 조금씩 변해 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해 주기 때문이다.

 

사진에 담아본 두꺼운 책들 2012-12-24 20:16:00

밑줄긋기와 필사(筆寫)에 대하여... 2016-02-01 15:58:00

책을 읽는 순서에 대하여... 2016-06-16 00:03:00

평생 독서 계획 점검 2017-05-03 01:46:00

 

펼친 부분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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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권에 대한 '알라딘 상품넣기'는 내가 읽은 책들 혹은 내가 앞으로 읽고 싶은 판본을 중심으로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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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4-15 0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거대한 스케일의 포스팅을 만날 때마다 움찔합니다. 이런 글 쓰라고 있는 공간에서 난 도대체 뭘 써대고 있나 싶어서.....

정말 잘 읽었습니다. 존경스럽네요. 읽으신 것도, 쓰신 것도 전부 다요!

oren 2018-04-15 21:00   좋아요 0 | URL
물론 처음부터 제가 이렇게 거대한(?) 글을 쓰려고 했던 건 아니에요. 그저 이 책 저 책들을 살피며 쪽수를 계속 적다 보니 그만 일이 조금 커지고 말았던 거예요.

그리고, 알라딘을 이용하는 목적들은 사람들마다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을 듯해요. 저마다 자신들에게 알맞는 방식으로 알맞게 활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봐요. 다만, 예전에 비해 너무나 경박(輕薄)해지고 단소(短小)해지는 느낌을 떨치긴 어렵지만요...

겨울호랑이 2018-04-15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oren님의 독서 여정과 앞으로의 중장기 계획을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저도 oren님처럼 정리하면서 읽어야 하는데, 아직은 많이 모자라네요... 새벽 사이 내린 눈 위로 나 있는 한 사람의 발자국을 보면서 따라가는 것처럼 oren님의 계획을 보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행복하 하루 되세요.!

oren 2018-04-15 21:07   좋아요 1 | URL
저 또한 겨울호랑이 님께서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읽고 쓰시는 다양한 책과 글로부터 많은 자극을 받곤 한답니다.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취향은 서로 다 다르게 마련이니, 제가 어지럽게 이리저리 제멋대로 내디딘 발자국만 믿고 너무 바싹 뒤따라오진 마시길요~

포스트잇 2018-04-15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장대하십니다..
겐지이야기가 저렇게 딱 두 권으로 정리되는군요.
번역과 출판사에 대한 생각을 한번 접으면 선택지가 더 열리는 경지^^
동양권 저서들에 대한 oren님의 장정 계획도 있으신가요?
부럽습니다...

oren 2018-04-15 21:26   좋아요 0 | URL
<겐지 이야기>는 어떤 판본으로는 무려 10 권짜리로 나온 것도 보이더군요. 저도 동서문화사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하는 편이 아닌데, 이름난 고전들 가운데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번역본이 아예 없거나 그다지 신통치 않을 경우에는 여간 고마운 게 아닐 때도 많더군요.

동양권 저서들도 읽고 싶은 책들은 많은데 무슨 까닭인지 여태 좀처럼 가까워지기가 쉽지 않더군요. 사마천의 『사기』를 펼쳐 보다가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 백이와 숙제의 이야기를 보고 ‘이미 아는 식상한 얘기들뿐‘이라는 인상을 너무 강하게 받았던 것 같기도 해요. 아니면 40대에 다시 읽었던 ‘온갖 권모술수로 가득찬‘ 『삼국지』에 적잖이 충격을 받은 탓인지도요. 그래도 <겐지 이야기>, <마하바라따> 등등 읽을 거리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고 봅니다.^^

혜덕화 2018-04-15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듭 되는 찰스디킨스 예찬에, 드디어 오늘 위대한 유산과 세익스피어 1권, 4권 주문했습니다.
요즘 농사 짓느라 거의 책을 읽지 못하고 있는데, 두꺼운 책 시도라도 해 봐야겠어요.
레미제라블은 대학 1학년때 학교 도서관에서 정말 두꺼운 책 3권짜리 읽은 기억이 있어요.
그것도 한 페이지에 삼단으로 다단 인쇄 되었던 것 같은데....
정말 눈물과 한숨과 기쁨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던 제 인생의 책이었습니다.
님 덕분에 고전에 눈을 돌려 봅니다.

oren 2018-04-15 21:40   좋아요 0 | URL
아... <위대한 유산>은 결코 실망스럽지 않을 거예요. 셰익스피어 전집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전집 1』에 있는 <베니스의 상인>과 <좋으실 대로>는 특히 강추합니다. 두 작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포셔와 로잘린드가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이지요. 『전집 4』에 담긴 작품 중에는 <줄리어스 시저>가 <햄릿> 보다는 훨씬 더 재미가 있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옛날에 읽었던 책들은 대부분 세로쓰기에다가 ‘2단‘ 또는 ‘3단‘ 구성도 더러 있었던 것 같아요. 그토록 두툼한 『레 미제라블』을 대학 1학년 때 독파하시고, 두툼한 고전에 대한 희열까지 만끽하셨다니 괜스레 동지애를 느낍니다.^^

카알벨루치 2018-11-15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렌님 이건 파노라마, 다큐멘터리 입미다 우아~거대한 서사시 paper ....!!!👍👍👍

oren 2018-11-15 23:44   좋아요 0 | URL
너무 격한 댓글이네요. ㅎㅎ

kavinlee 2018-12-13 15: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혹시나해서 검색한 두꺼운 책 키워드에 이런 대단한 분이 계셨다니 놀랍고 부럽고 가슴이뛰네요..모든 책을 다 도전하려고하ㅡ는데요...혹시 읽으신 책중에 반드시 읽어야하는 5권만 추천해주세요...그것부터 시작해보렵니다

oren 2018-12-13 23:42   좋아요 0 | URL
제가 읽은 책 중에 ‘반드시 읽어야 하는 5권‘ 같은 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제가 읽은 책들 가운데 우선순위가 아예 없을 수는 없을 터이므로, 제 나름의 추천 목록을 덧붙여 봅니다.

<추천 도서_소설 분야>

1. 세르반테스, 『돈키호테』
2.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
3.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
4. 에밀리 디킨슨, 『폭풍의 언덕』
5.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추천도서_비소설 분야>

1. 몽테뉴, 『수상록』
2. 헨리 데이빗 소로우, 『월든』
3.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4. 헤로도토스, 『역사』
5.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조재연 2019-09-24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oren님의 서평을 봤습니다. 방대한 서재, 색인까지 만드는 노력.. 서평 포스팅에서 대단한 내공이 느껴집니다.
특히 서재는 부럽습니다.. 혼자 있어도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을듯.

oren 2019-09-25 12:15   좋아요 0 | URL
별로 대단한 게 없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거짓말만이, 그리고 그보다 좀 덜하지만 옹고집은 모든 기회에 억눌러서 나오지도 크지도 못하게 막아야 할 결함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그들과 함께 커 간다. 그리고 주둥이에 이런 못된 버릇이 생기는 것을 놓아 두면, 거기서 빠져나오기란 놀라울 만큼 어려운 일이다.
 - 몽테뉴

 

 

 * * *

 

극소수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오래도록 은폐된 추악한 비밀'이 어느날 느닷없이 만천하에 폭로될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자.

 

비밀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폭로에 대해 이 세상 사람들이 과연 얼마만큼 믿어줄 것인가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자신의 폭로가 엄청날수록 사람들은 대개 '믿을 수 없다'는 반응부터 보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때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물'이 있다면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이른바 '스모킹 건'이 뒤늦게라도 발견되기만 한다면 '폭로'를 입증하는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를 가장 명쾌하게 보여준 가장 가까운 사례는 아마도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초기에 JTBC에서 확보한 태블릿 PC였지 싶다. 그토록 명백한 증거물이 발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걸 인정하는 순간 자신들이 처하게 될 '엄청나게 불리한 입장'을 직감한 범죄자들이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던 생떼에 가까운 억지를 생각해 보라. 세상 사람들이 다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증거물이 나왔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사코 그게 조작됐거나 심지어 남의 물건이라고까지 대단한 억지를 오랫동안 부렸다.(혹시 아직도? 누군가는?)

 

또다른 폭로를 생각해 보자. '은폐된 비밀'이 너무 오래 전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이제는 '시간의 간극' 때문에 '뚜렷한 증거물'조차 별로 남아 있는 게 없는 경우라면 어떨까. 아마도 비밀을 폭로하려는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비록 자신은 명명백백한 진실을 폭로한다고 말하지만,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얼마만큼 믿어줄지 결코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딱 잘못하면 '거짓 폭로'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같은 폭로 때문에 한순간에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상을 입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 사람이 그 분야에서 오랜 기간 동안 '거물'로 행세할수록 그런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 틀림없이 무슨 '정치적인 저의'가 있다거나, 무슨 원한이나 보복 때문에 '음해 공작'을 꾸미는 것이라고 도리어 피해자를 덧씌우기 마련이니까.

 

이와 비슷한 경우를 가장 자주 봐왔던 게 바로 가장 최근에 일어난 '미투 운동의 일반적인 사례'이지 싶다. 성추행이나 성폭력은 대체로 밀페된 공간에서 은밀하게 저질러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증거물'이 존재하기 어렵다. 게다가 아주 우발적으로 극히 짧은 시간에 범행이 저질러질 경우에는 더더욱 '증거물'은 남기 어렵다. 그러니 아무리 용기 있는 '피해 여성'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당당하게 가해자를 향해 '과거의 악행'을 폭로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터이다, 이럴 때 그들이 기어코 용감하게 악행을 '폭로'하기로 결심한 가장 큰 심리적 동기는 어디에 있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이번에 쓰나미처럼 덮친 미투 운동의 근본 바탕에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이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했을 듯싶다.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남성들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억눌려 지내온 설움만 해도 이만저만이 아닌데, 거기에 더해 온갖 추악한 성추행이나 성폭행까지 당했으면서도 그걸 도리어 부끄럽게 여기며 꼭꼭 숨기고 억울하게 살 이유는 없다는 '진지한 자각'이 화산처럼 분출하는 모양새와 닮았다. 더구나 이미 그런 용기를 내는 사람이 여럿 등장한 데다가, 자신의 용기 덕분에 어렵사리 새로운 용기를 얻을 또다른 미지의 사람들까지도 고려한 끝에 더욱 '용기'를 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바로 이런 이유로 '위드 유' 해시태그도 생겼을 터이다.

 

이제 2011년 12월 23일에 일어났다고 '폭로된' 어떤 성추행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자.

 

대학생 시절에 겪은 그 억울한 피해를 '7년 동안'이나 묻고 지내왔지만, 이번에 불어닥친 미투 광풍(?)을 보면서 기어이 참지 못하고 휩쓸리듯 갑자기 '폭로'를 결심한 듯한 인상을 풍기는 그 여성의 경우는 어쩌면 '진실이 받아들여지는 단계'를 너무 과소평가했는지도 모르겠다. 피해 여성이 스스로 밝혔듯이, 그 사건은 아주 짧은 시간에 몹시 우발적으로 일어났으며, 더군다나 증거조차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주변 사람들'을 단단히 믿었던 듯하다. 자신이 당했던 피해를 일찌감치 '공유했던' 친구들만큼은 틀림없이 '확고한 증언'으로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주리라 믿었을 테니까. 비록 그 어떤 증거물 하나 뚜렷이 남아 있는 게 없다손 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세상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미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정치인한테 제대로 걸려들고 만 것이다! 더군다나 그 사람은 이미 수많은 열성 지지자들까지 단단히 확보한 유명인이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몸짓 하나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만반의 준비를 갖춘 '막강한 응원부대'를 지닌 백전노장의 야전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익명에 기댄 폭로자의 '어딘가 허술해 보이는 듯한' 폭로가 노회한 정치인을 더욱 자극했던 듯하다! 옳거니! 그런 정도의 느슨한 폭로에 그런 정도의 알리바이라면 나도 얼마든지 자신 있지, 라는 얄팍한 계산이 앞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는 10년이라는 장구한 기다림 끝에 이제 막 '봄나들이'를 준비하던 차였다. 결국 '최초의 폭로' 이후 며칠이 지난 끝에 가해자 쪽에서 나온 첫 번째 반응은 '폭로' 그 자체가 허위라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진행된 경과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격렬한 '이전투구의 연속'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생결단에 가까웠다. 누군가 둘 중 하나는 치명상을 입을 게 틀립없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진실 공방'이 어떻게 비춰졌을지 몰라도 나로서는 애시당초부터 승패가 정해진 싸움으로 보였다. 피해자로서는 일부러 '없는 사실'을 지어내서 '성추행 피해'를 폭로할 하등의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당한 선에서 사건이 하루빨리 '수습'되길 바랬다. 그런데 양측의 공방은 나날이 확전일로였고, 이 싸움을 보다 못한 훈수꾼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단연 진중권의 논리정연한 글이었다.(☞ 정봉주 '미투' 사건에 관하여) 옳거니! 이 정도의 글이라면 이제 다들 수긍하고 싸움을 그치겠지 싶었다. 아,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진중권의 글을 도리어 나무라는 댓글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중권의 글은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받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격렬한 저항을 받고 있었다! 이때 떠오른 말이 쇼펜하우어의 다음 말이었다.

 

모든 진실은 세 가지 단계를 밟는다.

 

첫째, 조롱당한다.

둘째, 격렬한 저항을 받는다.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결론은 일반적인 예상보다는 훨씬 빠른 시기에 다소 싱겁게 끝이 났다. 어쨌든 진실은 결국 하나다. 한번 지어낸 거짓말은 그걸 꾸미기 위해 또다른 거짓말을 무수히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나마나한 이 뻔한 '진실'을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그토록 '거짓말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마는 걸까. 왜 '진실'을 인정하고 난 뒤에 얻게 될 '편안한 휴식'을 애써 마다 하고, 기어코 '하나의 거짓'이 낳게 될 '수많은 거짓'을 바벨탑처럼 쌓아올리기 위해 그토록 몸부림치는 걸까. 자신이 내세우는 '거짓'이 잠시나마 진실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더러 있을 수 있지만, 그게 결코 '진실'을 영원히 묻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언제까지 다시 반복하며 깨우쳐야 옳다는 말인가.

 

이번 사건으로 우리는 또다시 '희대의 사기꾼' 한 명을 추가로 보유하게 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사기꾼들은 이 나라에 넘쳐났었다. 걸핏하면 "이 사람 보통 사람이에요"라고 온 국민 앞에서 맨날 떠들어 놓고, 뒤로는 엄청난 금액의 돈을 마구 갈취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나, 그토록 큰 소리로 "다스가 어떻다고요? BBK가 어떻다고요? 여러분, 이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인 거 아시죠?" 라고 호언장담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저는 사리사욕을 위해 '한 푼의 돈'도 받은 적이 없어요." 라면서 온갖 새빨간 거짓말을 장황하게 늘어 놓았던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는 아직도 부족한 걸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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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29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논의 ‘아킬레우스와 거북이‘ 시합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극한의 개념이 없는 상태에서 이론상으로는 영원히 아킬레우스는 거북이를 이길 수 없겠지만, 실제 시합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겠지요... 우리가 어떤 일을 바라볼 때 설명이나 개념에 매몰되었을 때는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보다 원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일을 통해 이 사람이 얻는 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가 명확하다면, 다른 설명은 개념 또는 관념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oren 2018-03-29 09:27   좋아요 1 | URL
직관‘의 중요성이겠지요. 누가 더 뚱보인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반드시 둘 다 ‘저울에 올라갈 필요‘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겠고요. 도리어 각자 저울에 올라가는 순간부터 진짜로 새로운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고요.(그 게임에서 이해관계가 크게 걸린 사람 가운데 누군가는 저울의 눈금을 어떤 방식으로든 조작할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요.) 이번 사건을 보면 애시당초부터 한 쪽은 ‘오로지 진실을 말할 동기‘ 하나밖에 없었고, 거짓을 말할 동기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웠지요. 다른 한 쪽은 완전히 그와 반대였고요.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몇몇은 이 소설을 한번이라도 읽은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지 싶다. 그만큼 강렬하고 생생하다. 찰스 디킨스의 작품들이 대체로 그러하듯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을 읽고 나서 스크루지 영감을 까맣게 잊을 수 있겠는가. 그 작품을 읽은 사람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죽을 때까지 그 영감을 잊지 못하고, 더러는 해마다 그 구두쇠 영감을 떠올리는 사람도 더러 있으리라. 좋든 싫든 크리스마스는 매년 돌아올 테니까.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방금까지 그 책을 읽은 나로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스무남은 명쯤은 거뜬히 나열할 수도 있지 싶지만, 그 인물들을 굳이 여기에 옮겨 적지는 않겠다. 그런 짓은 이 글을 쓰는 목적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적지 않은 사람들은 내가 열거하는 그 인물들에 대해서 도리어 낯설게 여길 테니까.

 

아무튼, 어느 소설에서나 그렇듯이, 『데이비드 코퍼필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유독 마음씨가 비단결 같이 고운 처녀도 몇몇 있고, 칼날 같이 날카로운 성격을 지닌 못 된 여자도 있기 마련인데, 그 가운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에밀리와 로사 다틀이다.(이 두 인물은 다른 글에서도 이미 다뤘지만 다시 또 불러냈다.)

 

에밀리는 비록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나지만, 친아버지처럼 사랑을 듬뿍 쏟아붓는 외삼촌 페거티 아저씨의 따스한 보살핌 덕분에 티없이 밝고 예쁘게 자라난다. 처녀가 되어 읍내 자그마한 옷가게에 취직을 해서도 타고난 눈썰미와 몹시 아름다운 용모 덕분에 이웃 마을 여자들이 미친 듯이 시샘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릴 때부터 페거티 아저씨네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로 가끔씩 놀러 온 적이 있었던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바닷가 마을 야머스로 놀러 온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런던에서 취직 자리를 알아보는 동안에 잠깐 짬을 낸 것이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고 런던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어릴 적 학교 동창생이자 옥스퍼드를 졸업한 귀한 집 외아들인 스티어포스와 함께였다.

 

이렇게 우연한 기회에 친구 따라 바닷가 마을을 찾은 스티어포스는 남몰래 에밀리의 미모에 반하게 되고, 런던으로 되돌아간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기어이 일을 저지른다. 에밀리는 이미 페거티 아저씨와 함께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온 우직하고 성실한 청년 햄과 장래를 약속한 사이였으나, 스티어포스가 하인인 리티머를 몰래 그 마을에 들여보내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는 통에, 순진했던 에밀리는 헛바람에 부푼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런던내기 미남 청년인 스티어포스에게로 마음이 기울고 만다.

 

자신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처녀의 미모에 반해 천한 신분의 바닷가 처녀와 함께 무작정 도망길에 오른 스티어포스는 자신의 애인을 데리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를 전전하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게 되고, 하루 아침에 조카딸을 잃은 페거티 아저씨는 에밀리를 찾아 나폴리까지 쫓아가 보지만 끝내 그녀를 찾지 못한다. 끔찍히 아끼던 에밀리를 잃고 나서 고향의 바닷가 마을을 떠나 런던에 올라온 페거티는 극심한 상실감을 달랠 길 없이 밤낮으로 시내를 전전한다. 이제나 저제나 에밀리를 찾을 날만 기다리면서.

 

여기까지가 대략 1010쪽 분량의 기나긴 소설 가운데 540쪽까지의 이야기 전개이다. 그 이후에도 에밀리와 스티어포스의 소식은 드문드문 들려 오지만 좀체로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별로 없고, 결국 나중에 그 두 사람이 헤어졌다는 이야기만 들릴 뿐이었다. 조카딸 에밀리를 찾아 아무런 기약도 없이 길거리를 헤매던 페거티 아저씨는 간혹 런던 시내를 떠돌다가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마주치기도 하지만 둘 모두 에밀리에 대해 별다른 단서를 찾지 못하는데... 그 와중에 데이비드는 에밀리가 바닷가에 살 때 돈을 꾸러 찾아 왔던 처녀 시절 친구인 마사를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어쩌면 마사 덕분에 에밀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한가닥 새로운 희망이 이때부터 다시 살아난다...

 

이렇게 해서 소설은 다시 '팽팽한 긴장 국면'에 돌입하는데... 어느날 문득 마사가 데이비드를 찾아와 '함께 어딜 가자'고 앞장 선다. 먼저 페거티 아저씨한테 소식을 알리러 갔다가 만나지 못하고 쪽지만 남겨 놓고 왔다는 말과 함께. 그렇게 해서 데이비드는 마사와 함께 허름한 변두리 주택가에 살고 있는 '마사의 방'까지 찾아가는데... 거기서 엉뚱하게도 '로사 다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로사 다틀이 어떤 여자였던가.

 

그녀의 '특징'을 제대로 알려면 우리는 번거롭더라도 이 소설의 336쪽(<20장 스티어포스의 집>)으로 한번쯤 되돌아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게 좋다. 그녀에 대한 기가 막힌 묘사는 다시 읽어도 여전히 놀랍기만 하다.

 

식당에는 다른 부인이 있었다. 가냘프고 자그마했으며 피부가 검고, 시선을 사로잡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예쁘장하게 생긴 부인이었다. 나의 관심은 그 부인에게로 쏠렸다. 아마 뜻밖에 만났기 때문이거나, 그 부인 맞은편에 앉았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부인이 독특한 그 무엇을 지녔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부인은 검은 머리채에 눈동자도 깊고 검었으며, 야위었고, 입술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오래된 상처였다. 상처 색깔이 피부색과 다르지도 않았고 오래전에 아물었으므로, 상처라기보다는 주름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입술에서 턱까지 찢어진 상처임에는 틀림이 없고, 단지 지금은 모양이 조금 달라진 윗입술 주위를 제외하면, 식탁 너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그 부인이 나이는 서른 살가량이고,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라고 결론을 내렸다. 부인은 오랫동안 비어 있던 터라 조금 낡은 집 같아 보였지만 제법 예쁘장했다. 그 부인이 야윈 것은 그 몸 안에서 헛되이 불이 타오른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불은 그 부인의 위태로운 눈 속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 부인은 미스 다틀이라고 소개되었지만 스티어포스와 그의 어머니는 로사라고 불렀다. 미스 다틀은 이 집에서 살며, 스티어포스 부인의 오랜 친구였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생각한 것을 절대로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멀리 에둘러서 말하다 보니 어쩐지 무게 잡는 것 같았다.(336∼337쪽)

 

 

로사 다틀을 더 자세히 소개하기 위해서는 몇 쪽 뒤에 나오는 짧은 대화도 놓칠 수 없다. 그녀는 무엇이든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직성이 풀리는 여자였다!

 

나는 스티어포스가 농담을 했거나, 아니면 미스 다틀의 속내를 이끌어내게 하려고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가버리고 우리 둘만 난롯가에 앉았을 때, 나는 스티어포스가 그 이야기를 다시 꺼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다만 미스 다틀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뿐이다.

 

"대단히 영리한 여자 같은데?" 나는 오히려 되물으며 말했다.

 

"영리하다고? 그 여자는 무엇이든 숫돌에 대고 뾰족하게 갈아야 직성이 풀리거든. 요 몇 년 동안 자기의 얼굴을 뾰족하게 갈아온 것처럼 자기 자신을 날카롭게 갈아버렸지. 온몸이 칼날 같은 여자야."

 

"그건 그렇고 그 여자 입술 위의 상처가 굉장하던데!"

 

스티어포스는 고개를 숙이고 잠깐 말을 삼켰다.

 

"사실은 말이야. 그 상처는 내가 냈어."

 

"무슨 불행한 사고라도 있었어?"

 

"아니야, 내가 어렸을 때, 그 여자가 약을 올려서 내가 망치로 때렸어. 그때의 나로 말하면 장래가 촉망되는 천사와도 같은 아이였지!"(339쪽)

 

 

이제 다시 에밀리를 만나기 위해 '로사 다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마사의 방'으로 되돌아갈 차례다. 과연 거기서 에밀리를 만날 수 있을까. 나 또한 그녀의 행방을 오랫동안 알 수 없어서 참으로 답답했던 차였다.

 

 

"저라고요?" 조용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를 듣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분명히 에밀리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요." 미스 다틀이 대꾸했다. "난 당신을 만나러 왔어요. 당신은 이런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그 얼굴이 부끄럽지도 않나요?"

 

그녀의 단호하고 가차없는 증오에 찬 말투, 분노를 억누르고 있는 목소리를 듣자, 지금 그녀가 밝은 곳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눈앞에 그 모습이 또렷하게 드러났다. 번쩍이는 검은 눈동자와 분노에 떠는 모습이 눈앞에 보였다. 그녀의 입술을 가로지르는 흰 흉터가 말할 때마다 움찔거리며 덜덜 떨리고 있었다.

 

"난 제임스 스티어포스의 혼을 뺀 여자, 남자와 달아나서 고향의 천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는 여자ㅡ제임스 같은 사람의 상대라기엔 너무도 뻔뻔하고 교활한 여자가 대체 어떻게 생겼나 알고 싶어서 왔어요."

 

모욕적인 언사를 뒤집어쓴 그 불행한 아가씨가 문 쪽으로 달려가려고 하자, 욕설을 퍼붓던 자가 재빨리 그 앞을 가로막는 소리가 났다. 그러고 나서 얼마 동안 침묵이 뒤따랐다.

 

미스 다틀은 이를 악물고 발을 구르며 말했다.

 

"거기 있어! 그렇지 않으면 이 집과 온 동네에 네 소문을 퍼뜨리고 다닐테야! 네가 나를 피해 달아나려고 한다면 머리채를 휘어잡고 돌멩이 세례를 받게 해줄 것이야!"

 

겁에 질려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이 대화를 어서 끝내주고 싶은 생각은 간절했지만, 과연 내가 나서도 좋을지 자신이 없었다. 지금 나서서 에밀리를 구해줄 사람은 오직 페거티 씨뿐이었다. 그는 오지 않는 것일까? 나는 초조해서 견딜 수 없었다.

 

"이제야 찾았어!" 로사 다틀은 경멸하듯 웃으며 말했다. "연약하고 수줍은 체하고, 고개 숙여 내숭떠는 모습에 속아 넘어가다니, 제임스도 참 가엾기도 하지!"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에밀리는 애원했다. "누구신지는 모르지만 딱한 저의 내력을 알고 계실 테니까, 제발 부탁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당신도 구원을 받고 싶으시다면!"

 

"뭐, 구원을 받고 싶다면이라고! 잘도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내가 너와 무슨 공통점이라도 있단 말이야?" 미스 다틀이 불같이 화를 냈다.

 

"같은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지요." 에밀리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너같은 천한 계집이 말은 잘하는구나! 설사 내 가슴에 너에 대한 멸시와 혐오감 이외에 다른 감정이 있다 하더라도 네 그 한마디로 꽁꽁 얼어붙고 말거다. 같은 여자라구? 참 명예롭기도 하겠구나!"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요." 에밀리가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무서운 일이에요! 부탁이에요, 제가 받은 고통이 얼마나 컸으며, 얼마나 괴로운가를 생각해주세요. 아, 마사, 돌아와줘요! 아, 돌아와요, 제발 돌아와요!"

 

미스 다틀은 문에서 보이는 곳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 에밀리가 자기 방에 웅크리고 있는 것처럼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 말을 잘 들어! 그런 수법은 네 봉한테나 쓰도록 해. 눈물 따위로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봐야 네 미소로 날 매혹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소용없어. 이 돈에 팔린 노예야!"

 

"아, 제발 자비를 베푸시기 바랍니다!" 에밀리는 말했다. "제발 저를 동정해주세요. 아니면 전 아마 미쳐서 죽을지도 몰라요."

 

"그래 봐야 네가 지은 엄청난 죄에 비하면 대단한 참회도 아니야." 로사 다틀은 말했다. "넌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는 있니? 네가 엉망으로 망쳐놓은 가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아, 밤이고 낮이고 그 생각에서 벗어난 적이 없어요!" 에밀리는 말했다. 이때 그녀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무릎 꿇고 고개를 뒤로 젖혀 핏기 없는 얼굴로 상대를 계속 올려다보고 있었다. 미친 듯이 두 손을 앞으로 모아 빌었고, 머리카락이 양쪽 어깨를 가득 덮고 있었다. "자나깨나 그 집이 제 눈앞에 떠오르지 않은 적이 없어요. 제가 영원히 등을 돌리고 나온 그 모습 그대로의 집! 아, 집, 집! 아, 그립고 그리운 아저씨! 제가 타락한 뒤에도, 저에 대한 아저씨의 사랑 때문에 제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가를 아신다면 아무리 저를 사랑하셨다 해도, 그렇게 끊임없이 당신의 사랑을 제게 표시하시지는 않았을 거예요! 분명 일생에 한번쯤은 제게 화를 내셨겠죠. 그렇게 해주셨더라면 오히려 제게 위안이 되었을 텐데! 아아, 저는 너무 괴로워요. 모두들 저에게 너무 잘해주시기만 하시는 걸요!" 에밀리는 로사 다틀의 옷자락을 잡고 필사적으로 애원하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그 오만한 모습 앞에 울면서 쓰러졌다.

 

로사 다틀은 동상처럼 꼿꼿한 자세로 에밀리를 내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어지간히 감정을 억누르지 않으면 아름다운 에밀리를 짓밟을 수 없다는 듯이 입술을 곽 물고 있었다. ㅡ나는 내가 생각한 대로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얼굴과 성격이 모두 이 표정 하나에 모아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아, 페거티 씨는 끝내 오지 않는 것일까?

 

"이 지렁이같이 천한 것이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너희 집이라고! 내가 네 집 따위를 조금이라도 염두에 두고 있는 줄 아니? 아니면 너 같은 천한 것의 집이 대단한 것이라도 된다는 거야? 그딴 것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그것도 훨씬 더 좋게 만들 수 있는 손해일 뿐이야. 기가 막히는 구나! 넌 너희 집 상품의 일부에 불과한 거야. 그러니까 넌 너희 집 사람들이 취급하는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사고팔리고 한 거야."

 

"아, 그렇지 않아요!" 에밀리는 말했다. "저에 대해서는 무슨 말씀을 하셔도 좋아요. 그러나 당신 못지않게 훌륭한 우리 집 식구들에게 제가 하지도 않은 일로 치욕과 창피를 씌우진 말아주세요! 아무리 제가 미우셔도, 당신도 숙녀라면 조금 더 그 사람들을 존경해주길 바라요."

 

그러나 이러한 애원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에밀리가 붙잡고 있는 치맛자락을 마치 더러운 것에 닿는 것처럼 끌어당기며 말했다.

 

"난 제임스의 집,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집에 대해 말하는 거야. 너는 귀부인인 어머니와 신사인 아들 사이를 갈라놓은 원흉이야. 하녀로도 써주지 않을 그런 집안에 슬픔을 안겨준 장본인이고, 분노와 한탄과 치욕의 원인이야. 물가에서 주워다가 한동안은 소중히 여겨졌겠지만 결국은 다시 본디 장소로 되던져진 이 더러운 계집!"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에밀리는 두 손을 꽉 맞잡고 외쳤다.

 

"그분을 처음 뵀을 때ㅡ아아, 차라리 그날의 태양이 영원히 떠오르지 않고, 내가 무덤으로 끌려가는 날에 뵈었더라면 좋았을걸!ㅡ저도 당신이나 다른 어떤 숙녀와도 다름없이 정숙하게 자랐으며, 당신 같은 숙녀들의 상대로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남성의 아내가 되기로 약속까지 했었습니다. 당신이 그분 댁에 살고 계시고 그분을 잘 아신다면, 연약하고 허영된 소녀에 대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막강한가를 잘 아실 겁니다. 변명은 하고 싶지 않지만, 그분이 그 힘을 이용하여 나를 속였다는 것과, 제가 그분을 믿고 의지하고 사랑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고, 그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모르더라도 돌아가실 때에는 분명 이 일로 괴로워하실 것입니다!"

 

로사 다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분누로 일그러진 험악한 얼굴로 에밀리를 때리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하마터면 나는 그들 사이에 뛰어들 뻔했다. 그러나 따귀를 때리려던 손은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덧없이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그녀는 증오를 드러내고 경멸과 분노로 치를 떨며 그대로 서 있었다. 이런 광경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네가 제임스를 사랑한다고, 네가?"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부들부들 떨면서 소리쳤다. 마치 이 가증스러운 계집을 찌를 흉기가 없는 것이 아쉬운 것처럼.

에밀리가 몸을 움츠려서, 내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게 그 따위 말을 지껄여? 그 더러운 입술로? 어째서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매질하지 않는 걸까? 내게 명령만 내릴 권한만 있다면, 이런 계집애는 때려 죽이게 했을 텐데."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 섬뜩한 모습이 이어지는 한 모자걸이 하나도 안심하고 놓아둘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아주 천천히 웃음을 터뜨리더니, 에밀리가 신과 인간들 앞에 놓인 치욕의 구경거리라도 되는 것처럼 한 손으로 그녀를 가리켰다.

 

"이런 계집이, 이 타락한 계집이 사랑이라니! 그리고 제임스에게 사랑받았다니! 하, 하, 하! 얼마나 천한 계집인지 모르지만 그런 뻔뻔한 거짓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이 비웃음은 노골적인 분노보다도 더 질이 나빴다. 나 같으면 차라리 후자 쪽이 더 참기 쉬웠을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으로 분노를 쏟아낸 것은 아주 잠깐 뿐이고, 그 뒤로는 곧바로 화를 억누르며, 속으로는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는 스스로를 억누르고 있었다.

 

"순수한 사랑의 옹달샘 같은 소리를 지껄이지만, 내가 여기 온 것은, 처음에도 말했듯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여자인지 보고 싶어서야. 정말 궁금했거든. 이젠 소원이 풀렸어. 그리고 이제 넌 서둘러, 너를 기다리고 있는, 네가 돈만 들고 가면 기뻐할 식구들 품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돈이 다 없어지면, 또 믿든 사랑을 하든 마음대로 해! 난 너라는 인간을 수명이 다 된 고장난 장난감, 한때는 금박을 둘렀지만 지금은 버려진 장난감이라고만 생각했어. 그런데 네 얘기를 들으니 넌 진짜 금, 진정한 숙녀, 아무것도 모른 채 지독한 꼴을 당했지만 지금도 영원한 사랑과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여자라는 걸 알겠구나. 보고 있으면 그런 면이 없지도 않고, 네 얘기와도 잘 들어맞으니까! 그러니 몇 마디 더 해야겠으니 잘 들어. 나는 한다고 하면 반드시 실천에 옮기니까. 이봐, 아가씨, 듣고 있어? 난 입 밖에 낸 말은 꼭 실천한다고!"

 

그녀의 분노가 한순간 다시 끓어올랐으나 이내 경련처럼 얼굴을 스쳐가고 미소를 되찾았다.

 

"어디로든 몸을 감추도록 해."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집이 아니더라도 어디로든,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아무도 모르게 숨어 살아ㅡ아무도 모르는 새에 죽어버리면 더욱 좋지만. 네 그 사랑의 심장이 이대로 사그라지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럴 수 없다면 스스로 잠재우는 방법을 모르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해. 그런 방법이 있다는 말은 나도 들은 적이 있으니까,ㅡ 아마 쉽게 찾을 수 있을 거야."

 

에밀리의 나지막한 울음소리가 그녀의 말을 가로막았다. 미스 다틀은 말을 멈추고, 음악을 듣는 것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성질이 묘한 탓인지도 모르지만, 난 네가 마시고 있는 공기 속에선 마음껏 숨을 쉴 수가 없어, 병에 걸릴 것 같단 말이야. 그래서 청소를 하려는 거야. 여기서 나가도록 해. 만일 네가 내일도 여기에 살고 있다면, 난 네 이야기와 네 품행을 적어서 이 공동 계단에 붙여놓겠어. 이 공동 주택에도 점잖은 부인네들은 제법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네 얘기를 모른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야. 아니면 여길 나가서 이 런던 어딘가에 숨을 생각이니? 네가 어떤 여자인지 분명히 밝힌다면 나도 방해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숨어 있는 곳을 찾아내는 즉시 또다시 같은 일을 할 거야. 얼마 전까지 네게 관심이 있었다는 한 신사의 도움이 있으니,ㅡ 그런 것쯤은 충분히 해낼 수 있어."

 

아아, 페거티 씨, 끝내 오지 않을 것인가? 나는 얼마나 더 오래 참고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얼마나 더 참고 기다릴 수 있단 말인가!

 

"아, 저는 어떻게 하면 좋아요?" 에밀리는 아무리 매정한 마음이라도 감동시킬 것 같은 구슬픈 투로 소리쳤지만,ㅡ 로사 다틀의 미소에는 아무런 용서의 빛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하느냐고?" 다틀은 말했다. "넌 옛일이나 떠올리면서 즐겁게 살면 되는 거야! 제임스 스티어포스의 상냥함을 추억하며 깨끗하게 살아. 그는 너를 자기 하인(리티머를 말함)의 아내로 삼으려 했잖니? 아니면 너를 기꺼이 받아들이려고 했던 그 정직한 하인에게 감사하면서 사는 것도 좋겠지! 너한테는 딱맞는 사내니까. 그런 자랑스러운 기억이나 네가 말하는 그 여자의 미덕인가 하는 것 덕분에 너도 세상의, 쓰레기 같은 사람들 눈으로 보면 제법 출세한 셈이야.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면 역시 리티머와 결혼하도록 해.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거야. 만일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죽는 게 나아! 절망하여 죽은 사람에게는 나갈 문과 쓰레기장이 있으니,ㅡ 그중 하나를 찾아 어서 빨리 하늘나라로 날아가버려!"

 

그때 계단을 올라오는 먼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틀림없었다. 그것은 그의 발자국 소리였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미스 다틀은 이렇게 말하고, 내가 엿보고 있는 문 앞에서 움직여 사라졌다. "하지만 명심해 둬." 그녀는 방에서 나가려고 다른 문을 열면서, 천천히 그리고 준엄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나는 여러 가지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네가 미워. 그러니 내 손이 전혀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버리든지, 아니면 그 위선적인 가면을 벗어버리지 않는 한 나는 반드시 널 내동댕이치기로 결심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다야. 하지만 나는 말한 것은 꼭 실천한다는 것을 알아둬!"(824∼830쪽)

 

 

이만하면 다른 어떤 문학작품에서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폭언의 홍수'가 아닌가? 어떻게 이런 정도로까지 심한 말을 끝도 없이 잘도 꾸며서 쏟아낼 수 있는지, 디킨스의 놀라운 입담에 그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온갖 추악한 미투 폭로 사례'를 다시금 떠올릴 수밖에 없는 건 나만의 지나친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도대체 에밀리가 무슨 크나큰 죄를 저질렀다고 이토록 끔찍한 비난을 받아야만 하는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피폐해진 자신의 삶만 해도 이미 추스리기 어려운데 여기에 더해 또다시 저토록 가혹한 '2차 피해'를 입어야만 한단 말인가. 아무리 자란 환경이 다르고, 신분이 다르고, 배운 지식이나 가진 재산이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어울리지 않는 남녀 사이에서 일어난 연애사건'이 문제가 될 때마다 왜 이토록 여자 쪽에서만 일방적으로 온갖 심한 모욕과 가혹한 비난을 모조리 뒤집어써야만 할까.

 

최근에 폭로된 온갖 추악한 성추문 사건들에서도 '미스 다틀의 그림자'가 너무나 자주 얼씬거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피해자의 처절한 절규'조차도 따스한 손길로 보듬을 줄은 모르고, 도리어 야만스럽기 그지 없는 온갖 폭언과 비난을 쏟아부을까. 전쟁과 맞먹을 만큼의 엄청난 트라우마를 겪은 피해자의 삶은 어찌 되든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숱한 '폭언들'이 얼마나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쓰라린 상처를 또다시 고통스럽게 헤집는지를 왜 헤아리지 못하는 걸까. 그들도 미스 다틀처럼 '끊임없이 자신을 숫돌에 갈아서' 기어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악다구니처럼 야만스럽게 피해자에게 달려들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다들 숫돌에 갈아서 자신이 뾰족해 질수록 이 세상이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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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내가 이 글에서 로사 다틀의 폭언을 너무나 길게 인용했는지도 모르겠다. 장장 7쪽이나 되는 분량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그대로 가져왔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녀의 폭언은 내용 못지 않게 분량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에 쏟아져 나온 미투 폭로 사례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의 죄악도 고려해서 말이다. 그들의 죄악이 분량이 너무 많다고 해서 일부러 사소한 부분들을 생략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거듭 느끼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설이다. 분량이 많은 게 좀 흠이긴 하지만...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양적으로 어마어마하게 긴 장편소설이다. 아무리 세계 걸작으로 이름 높은 작품이라도 이 정도로 길면 두세 군데는 이야기가 느슨해지기 때문에, 독자는 지루해도 다음에 올 절정을 기대하며 꾹 참고 책장을 넘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그러한 곳이 전혀 없다. 어느 부분을 골라 읽어도 독특한 재미가 있고, 계속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 책을 놓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에 이끌려가는 게 아니라 뒤쫓아 가는 것이다. 늘어지는 곳 없이 팽팽하게 조여진 소설, 이것이 이 작품이 많은 독자를 사로잡은 까닭이다. 인생의 고뇌와 비통을 날실로 삼고, 오락성과 환희를 씨실로 삼아 작품 전체를 옹골지게 엮어냈기 때문이며, 눈물과 더불어 웃음이 절묘하게 얽혀서 혼연하고 아름다운 예술품을 만들었기 때문이다.(1109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찰스 디킨스 생애와 문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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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3-23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쟝 크리스토프」를 읽었을 때 길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데이비드 코퍼필드」역시 이에 못지 않은 장편인 것 같습니다. 배우가 영화에서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몇 달씩 고민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와 같은 작품을 쓰는 작가는 대체 얼마나 변신을 거듭해야할지 상상이 안가네요... 더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치밀하지 않으면 캐릭터가 붕괴된다는 점을 생각하면 디킨스라는 작가는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oren 2018-03-23 21:22   좋아요 2 | URL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쟝 크리스토프」를 살펴보니 1,2권 합해서 1,725쪽이나 되는군요.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다행히(?) 그 정도로 길진 않네요.

동서문화사 월드북 판은 판형도 같고, 글자 크기도 같고, 1페이지에 30줄씩 인쇄되어 있어서 작품의 ‘분량‘을 서로 비교하기 좋은 듯합니다.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까라마조프 형제들』이나 『돈키호테』와 분량이 엇비슷한 분량의 소설로 판단하면 좋을 듯합니다. 궁금하기도 해서 ‘동서문화사 판형‘으로 나온 몇몇 책들의 쪽수를 상호 비교해 봤더니 대략 다음과 같네요.
* * *
『데이비드 코퍼필드』 1,010쪽
『까라마조프 형제들』 1,158쪽
『돈키호테』 1,263쪽
『몽테뉴 수상록』 1,260쪽
『전쟁과 평화』 1,656쪽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1,924쪽

겨울호랑이 2018-03-23 21:33   좋아요 0 | URL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이 역시 분량면에서 압도하는군요! ^^:) 그래도 이 책은 옴니버스식 구성이라 장편이라 보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런 면에서 「전쟁과 평화」도 분량은 만만치 않네요. 분량도 그렇지만, 유기적인 작품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가들의 작품은 역시 다르다고 느껴집니다!^^:)

oren 2018-03-23 22:42   좋아요 1 | URL
동서문화사 월드북 시리즈로 나온 책들을 기준으로 다른 작품들을 조금 더 추가해 봤습니다.
물론 해설을 제외한 ‘순수한 작품의 분량‘만을 기준으로 삼은 것입니다.
일부러 비소설 분야도 추가해 봤습니다. 두껍기로 소문난 책들 중심으로요.
저는 이 가운데 딱 13권 읽었네요.. 완역본 기준으로요.
안 읽은 책들을 보니 하나같이 이름난 명작들뿐이네요..
02, 07, 09, 15, 16, 18, 20, 21, 22.... ㅠㅠ

* * *

01. 찰스 디킨스, 『위대한 유산』______________560쪽
02. 도스토예프스키, 『죄와 벌』_______________ 648쪽
03. 허먼 멜빌,『모비딕』_______________________738쪽
04. 헤로도토스, 『역사』_______________________764쪽
05. 토마스 만, 『마의 산』________________________898쪽
06. 단테, 『신곡』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980쪽
07. 찰스 디킨스, 『황폐한 집』_____________________985쪽
08. 아담 스미스, 『국부론』_______________________996쪽
09.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___________________1,006쪽
10. 찰스 디킨스,『데이비드 코퍼필드』____________ 1,010쪽
11. 도스토예프스키,『까라마조프 형제들』___________ 1,158쪽
12.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_____________________1,200쪽
13. 세르반테스,『돈키호테』________________________ 1,263쪽
14. 몽테뉴, 『몽테뉴 수상록』_______________________ 1,260쪽
15. 무라사키 시키부, 『겐지 이야기』___________________1,405쪽
16. 알렉상드르 뒤마,『몬테크리스토 백작』_______________1,533쪽
17. 톨스토이, 『전쟁과 평화』_____________________ _______1,656쪽
18. 로맹 롤랑, 『장 크리스토프』___________________________1,725쪽
19.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_____________________ 1,924쪽
20. 미하일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____________________________1,964쪽
21. 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036쪽
22.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3,272쪽

겨울호랑이 2018-03-23 22:24   좋아요 0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분량면에서 단연 많군요... 에고 저는 말씀하신 책중에서 1/4정도만 읽어본 듯 합니다...ㅜㅜ 저야말로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oren 2018-03-23 22:46   좋아요 1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웬만한 책 열 권 내지 스무 권과도 맞먹는 분량이니,
단번에 깔끔하게 해치우자면 ‘상당한 준비 운동‘ 혹은 ‘단단한 중무장‘이 필요하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