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는 그에 앞섰던 모든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교훈이 된다. … 보르헤스에게 셰익스피어는 전부이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문학의 살아 있는 미로다.

 - 헤럴드 블룸

 

 * * *

 

보르헤스의 소설집 한 권을 뚝딱(?) 읽고 나서 그에 대해서 주절주절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게 과연 무엇이고 또 어떤 것일까?

 

어쨌든 그의 소설들을 읽고 나서 뭔가를 어떤 식으로든 얘기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을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그런데 과연 무엇을 얼마나 얘기할 수 있을까? 도무지 손아귀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고 다 빠져나가 버린 듯한 지금에?

 

보르헤스의 작품들을 처음 읽었을 때 마치 경이로운 현관에 서 있는 것 같았는데 둘러보니 집이 없었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내가 보르헤스의 소설을 '뚝딱' 읽고 났을 때만 하더라도 제법 할 이야기가 많은 줄 알았다. 그의 작품 속에서 발견한 '희귀한 아이템'들만 하더라도 제법 수두룩했으니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내가 보르헤스의 작품을 읽는 동안에 자주 마주친 사물들이나 사람들이었다.(난생 처음 들어보는 희귀하고도 기억해 둘 만한 지명이나 장소들도 아주 많았지만, 여기에 펼쳐 놓기엔 너무 많아서 일부러 생략했다.)

 

아주 다양한 책들, 낯선 여러 지역과 도시들, 신비주의 철학자와 다양한 종파의 신학자들.

미로, 거울, 칼, 백과사전, 애매모호한 시간과 공간들.

기억, 불면증, 꿈.

무한함, 우주, 신.

기하학, 숫자, 원, 직선.

문학, 작가, 도서관, 사서, 잡지, 출판사, 보르헤스, 눈 멈.

(자주 카프카를 떠올리게 만드는) 복도들과 계단들…

그 밖에 여러 철학자들, 가령, 쇼펜하우어, 니체, 칸트, 라이프니츠,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데이비드 흄, 존 로크, 헤겔, 스피노자, 제논, 엘레아 학파, 피타고라스, 야콥 뵈메, 비코, 조지 버클리 등등

그 밖에 여러 작가들, 가령,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토머스 칼라일, 아서 코난 도일, 윌키 콜린스, G.K.체스터턴, 조너선 스위프트, 다니엘 디포, 호메로스, 러디어드 키플링, T.S.엘리엇, 리처드 버턴, 폴 발레리, 알퐁스 도데, 랭보,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플로베르, 윌리엄 제임스, 베르길리우스, 제임스 조이스, 루이스 캐럴, 프란츠 카프카, 아가사 크리스티, 사무엘 존슨, 존 던, 오스카 와일드, 아폴로도로스, 헤로도토스, 타키투스, 드 퀸시, 레온 블로이, 클라우제비츠,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로버트 브라우닝, 빅토르 위고, 꽁도르세, 헤시오도스, 슈펭글러, 에드거 엘런 포, 토마스 에드워드 로렌스 등등. 

 

이렇게 많은 아이템들을 양 손에 가득 움켜쥐고 나서도 보르헤스의 작품에 대해서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막막하다. 그래서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를 다시 펼쳐 읽었다. 그런데 세 번째로 읽은 그 소설은 처음 한두 번 억지로(?) 읽을 때와는 너무나 달랐다. 『픽션들』에 담긴 17편의 단편소설들을 다 읽고 난 뒤여서 어느새 내 몸이 보르헤스에게 제법 적응된 때문일까. 틀륀…이 갑자기 너무나 쉽고도 재미있게 읽혔다. 아하, 이게 이래서 이런 이야기로 넘어가고 또 저런 걸 등장시켜서 저렇게 이어가는구나 싶은 느낌이 아주 생생했다. 흡사 어두컴컴한 '미로' 속으로 갑자기 끌려 들어갔던 낯선 여행자가 맨 처음엔 천지간에 아무 것도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극심한 혼동을 겪다가, 나중에야 차츰 어두운 미궁 속에서 서서히 시력을 회복하면서 '미로의 구조'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난 뒤에 느끼는 깊은 안도감을 맛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보르헤스 소설의 특징은 아주 많다. 이른바 사실과 허구를 교묘하게 섞은 가짜 사실주의, 환상적인 허구, 탐정소설 구조, 책과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한 다양한 은유들,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혼돈스런 의식들, 언어 유희 등등

 

가령 『픽션들』에 담긴 첫 번째 단편 소설인「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에 나오는 다음 문장들이야말로 어쩌면 '보르헤스 작품의 특징들'에 대한 자진 신고나 다름없다고 말할 수 있다.(그의 많은 작품에는 일인칭 화자가 등장한다. 그는 마치 작가 '보르헤스'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우리들은 일인칭 화자를 바탕으로 한 소설작법에 관해 긴 시간의 논쟁을 벌였었다. 이 화자는 사실을 생략하거나 흐트러뜨리고, 단지 몇 명의 독자들ㅡ손을 꼽을 정도로 적은 수의 독자들ㅡ에게만 경이로울 수도 있고, 하잘것없기도 한 현실을 간파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다양한 모순 속에 개입한다.(18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보르헤스의 많은 소설들에서 '화자'는 이처럼 독자들을 경이롭게 만들기 위해, 아주 다양한 모순들을 개입시킨다. 또한 그가 소설 속에 등장시키는 많은 이름들은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한 차례 더 읽은 우리는 그 딱딱한 산문의 저변에 깔려 있는 매우 근원적인 애매모호성을 발견했다. 지형에 관한 부분에서 명시하고 있는 열세 개의 이름들 중 우리가 알 수 있는 이름은 단지 셋뿐이었다. 쿠라산, 아르메니아, 에르제륨.(21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이처럼 보르헤스의 소설은 '아주 다층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작품 속에서 '화자'가 말하는 '가상의 작품에 대한 비평' 그 자체가 소설의 내용을 이루면서도,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그 무엇인가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이 혹성(틀뢴)에 있는 나라들은 본질적으로 관념적이다. …… 그들에게 있어 세계란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물체들의 집합이 아니다. 그들에게 있어 세계는 독립적인 행위들의 이질적 연속이다. 그것은 연속적이고, 시간적이지 공간적인 게 아니다.(30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는 실체가 전혀 없는 '가상의 세계'는 아니다. 틀뢴이라는 그 찬란한 역사는 17세기쯤 스위스의 루체른 혹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동을 시작했고, 1814년 테네시 주의 멤피스에서 '혹성을 하나 창조하라'는 제안이 이뤄지고, 1914년에 이르러서는 약 300명에 달하는 공동저자들에게 「틀뢴의 백과사전」제1판이 전달된다. 틀뢴이 현실세계에 침입한 흔적이 최초로 발견되는 건 1942년이다. 이처럼 '틀뢴'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모호한 세계이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이 보이는 태도야말로 작가 보르헤스의 관점에 가깝다.

 

 

틀뢴의 형이상학자들은 진리, 심지어 그럴 듯한 진실성조차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놀라움을 찾는다. 그들은 형이상학을 환상문학의 한 지류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체계란 어떤 한 관점에 온 우주의 모든 관점들을 종속시키는 오류에 다름 아니다.(34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틀뢴은 상상의 세계이지만 끊임없이 현실에 개입한다. 맑시즘과 아르헨티나의 파시즘 모두를 거부했던 보르헤스는 틀뢴에 대한 자신의 환상이 도리어 '현실'보다 더 우위에 있을 가능성을 탐색한다.

 

거의 순식간에 현실은 즉각 항복을 선언했다. 10년 전 그 어떤 대칭도ㅡ변증법적 유물론, 반유태주의, 나치즘ㅡ외형적 질서만 가지고 있으면 쉽게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가 있었다. 그 누가 질서정연한 혹성이라는 정밀하고 방대한 증거를 눈앞에 두고서도 틀뢴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인가? 현실 또한 질서정연하다고 반박하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리라.(48∼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틀뢴은 어쩌면 인간을 그저 골탕먹이려고 만들어 놓은 '미노타우로스가 갇힌 미로'는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욕구가 반영된, 해독할 수 있는 미로다. 그러나 그것을 해독할 만한 독자들이 충분한 것은 아니다. 틀뢴은 방대한 암호처럼 모호하며, 환상으로 가득 찬 문학적 우주 그 자체이다.

 

확실히 틀뢴은 미로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미로, 인간에 의해 해독되도록 운명지어진 그런 미로이다.(49쪽)

 

 -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떼르띠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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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모따심에로의 접근」은 '삶의 순환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멋진 알레고리를 담고 있다.

 

소설의 제목은 <작중인물>인 봄베이의 변호사 미르 바하두르 알리가 1932년 말 봄베이에서 출판한 작품의 이름이다. 그 책 속의 주인공은 봄베이에 살고 있는 한 법과대학생이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이슬람교도들과 힌두교도 사이에 벌어진 소동의 한가운데에 있다가 유혈참극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고, 한 힌두교인을 죽인다. 그리고는 피신과 방황과 구도로 점철되는 수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긴 유랑생활을 이어간다.

 

그는 갑자기ㅡ'마치 로빈슨 크루소가 모래사장에 박혀 있는 한쪽 발뿐인 사람의 발자국 앞에서 경험했던 그런 신비스러운 공포감과 함께'ㅡ어떤 신비스러운 인식에 도달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로부터 이러한 깨달음이 유래한다. 지구의 어떤 지점에 이 깨달음 자체인 어떤 사람이 있다.> 

 

그 대학생은 그를 찾는 데 자신의 삶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알모따심이라 불리는> 그 인물과의 만남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법과대학생이 <안쪽에 문과 수많은 구슬들이 달린 돗자리와 후광이 어른거리고 있는> 한 낭하에 도달하지만, 커튼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소설이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알모따심(여덟 번의 전쟁에서 이기고, 여덟 아들과 여덟 딸을 낳았고, 8천 명의 노예들을 남겼고, 왕국을 8년, 8일 밤낮의 기간 동안 통치했던 아바시다 왕국의 여덟 번째 왕의 이름)은 어원학적으로 볼 때 <피난처를 찾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32년판에서 주인공이 수행한 순례의 대상이 순례자였다는 사실은 비유로 따져볼 때 그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희백했음을 설득력 있게 말해 준다.(61∼62쪽)

 

 

이 소설은 작중 가상의 인물이 쓴 가상의 작품인 「알모따심에로의 접근」에 대해 소설 속 화자인 '내가' 그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알모따심에 대한 비밀은 엉뚱하게도 보르헤스의 소설이 다 끝나고 난 뒤에 작가 자신이 덧붙인 '기나긴 주석' 끄트머리에서 발견된다.

 

이 시와 미르 바하두르 알리의 소설과의 접촉이 아주 과대한 것은 아니다. 제20장에서 한 페르시아 서적상이 알모따심이 했던 말이라고 한 그 말은 알모따심이 했던 다른 말들의 과장 해석인 듯싶다. 이러저러한 유사성들은 <찾음을 당하고 있는 자>와 <찾는 자>가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찾는 자>가 <찾음을 당하는 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 수 있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책의 다른 장은 알모따심이 바로 그 법대생이 죽였다고 믿었던 <힌두인>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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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책 속의 책 이야기'로서는 더할나위없이 매혹적인 작품이다. 실제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야말로 '액자 소설'의 진정한 창조주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소설 속의 화자인 '나'는 프랑스어로 『돈키호테』를 쓴 작가 삐에르 메나르와 아는 사이이다. 화자인 '나'는 그의 작품 목록을 무려 4쪽에 걸쳐서 19개나 길게 나열한다. 물론 그 작품 목록들은 '사실'과 교묘하게 비틀어 놓은 허구적인 작품들이다. 목록 나열을 끝낸 화자의 다음 말이야말로 또다른 『돈키호테』로 들어가는 입구다.

 

이제 다른 작품에 눈을 돌려보기로 하자. 지하에 묻혀 있고, 진정으로 위대하고, 탁월한 작품 말이다. 아 인간이 가진 가능성이란 게 얼마나 무한한 것인가! 미완성 작품. 이 작품, 아마 우리들 시대에 있어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일지도 모를 이 작품은 『돈키호테』1부의 9장과 38장, 그리고 22장의 한 부분으로 되어 있다. 나는 이러한 주장이 넌센스처럼 들리리라는 것을 안다. 이러한 넌센스를 정당한 것으로 논증해 보이기 위한 것이 바로 이 글의 일차적인 목표이다.(74쪽)

 

 

보르헤스의 이런 시도야말로 어쩌면 가장 돈키호테적인 태도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돈키호테야말로 '기사도 책 속에 푹 빠져 지내다가' 책 속의 내용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험을 시작한 인물이었으니까. 게다가 더욱 흥미로운 사실이 여기에 하나 더 추가된다.

 

사실 『돈키호테』의 원저자는 (세르반테스에 따르면) 아랍 사람인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였다. 세르반테스는 그가 쓴 소설을 독자들에게 다시 전달하는 '전달자'일 뿐이었다. 작품의 원저자가 따로 있고, 그 사람이 쓴 이야기를 다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이야기 구조는 놀랍도록 매혹적인 서사 구조를 단숨에 획득한다. 그런데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속에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등장하는 부분이 바로 '1부의 9장과 22장'에 들어 있다.

 

내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읽으면서 가장 큰 경이로움과 흥미를 느꼈던 부분도 바로 이러한 '세르반테스의 놀라운 이야기 솜씨'였다, 여기서 잠시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로 되돌아가, 세르반테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어떤 인물인지도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겸.

 

한편으로는 돈키호테가 읽은 책 가운데 「질투의 환멸」이니, 『에나레스의 요정과 목동』과 같은 최신작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돈키호테에 대한 이야기도 최근에 일어난 일이며, 따라서 아직 글로 옮겨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마을 사람이나 이웃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는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니 우리의 유명한 에스파냐의 용사이자 라만차 기사의 빛이요 거울인 돈키호테 데 라만차의 전 생애와 기적들을 반드시 알아내고자 하는 욕망이 나를 어지럽혔다. 돈키호테야말로 이 재난 많은 시대에 편력 기사의 임무와 그 수행을 위해 분연히 일어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불의를 바로잡고, 과부를 돕고, 채찍을 휘두르고, 말을 타고 산에서 산으로 계곡에서 계곡으로 다니던 처자들이 어느 비열한 놈이나 촌놈이나 가공할 만한 거인들에게 순결을 잃지 않도록 보호해 주었다. 지난날에는 그런 놈들에게 당하는 처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80년 동안 단 하루도 남의 지붕 밑에서 자지 않고 어머니가 낳아 준 그 상태 그대로 무덤으로 간 처자도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우리의 멋진 돈키호테는 이런저런 이유로 기억되고 찬양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고, 나 역시 여기에 들인 노력과 열성을 생각해서라도 이 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이야기의 결말을 찾아내야 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하늘과 우연과 행운이 나를 돕지 않는다면 세상은 부족한 상태로 남을 것이며, 이 이야기를 주의 깊게 읽을 사람은 두 시간 남짓이나마 누릴 수 있었던 재미와 즐거움을 영원히 잃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여하튼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책을 찾아나서게 되었다.

 

어느 날 톨레도의 알카나 시장에 나갔더니 한 소년이 비단 장수에게 잡기장이며 낡은 서류뭉치들을 팔기 위해 나와 있었다. 나라는 사람은 길바닥에 찢어진 종이라도 읽는 천성을 지닌 인간인지라 그 소년이 팔겠다고 하는 잡기장 한 권을 집어 들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아랍 글자가 쓰여 있었다. 아랍 글자인 것은 알겠는데 읽을 수는 없어서 근처에 에스파냐어를 아는 무어인이 없을까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번역가를 발견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더 훌륭하고 더 오래된 다른 언어를 해독해 줄 사람이라 해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운좋게도 한 사나이를 찾아내 그에게 내가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고 잡기장을 넘겨주었다. 그는 책 중간을 펼쳐 보더니 잠깐 읽다가 웃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리 우스운지 물었더니 이 책의 여백에 쓴 주석이 그렇다고 했다. 내가 그것을 좀 읽어 달라고 하자 그는 여전히 웃으면서 읽어 주었다.

 

「내가 말한 주석은 이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고 있는 이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여자는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솜씨만큼은 라만차를 통틀어 어느 여자보다도 뛰어났다고 한다.>」

 

<둘시네아 델 토보소>라는 이름을 듣자 나는 멍해지고 말았다. 이 잡기장에 돈키호테 이야기가 적혀 있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빨리 첫 부분을 읽어 보라고 독촉했다. 그는 시키는 대로 즉석에서 아랍 말을 에스파냐 말로 번역해 읽어 주었다. <아라비아의 역사가 시데 아메테 베넹헬리가 쓴 돈키호테 데 라만타의 이야기.> 이 책의 제목이 내 귀에 와 닿았을 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감추느라고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리고 비단 장수를 제치고 그 소년에게 돈 반 레알을 줘 종이 뭉치와 잡기장을 모조리 사들였다. 만일 소년이 빈틈없는 아이라 내가 얼마나 그 물건들을 원했는지 알았더라면 6레알 이상은 확실히 받아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어인과 함께 성당의 본당 회랑으로 가서 돈키호테를 다루고 있는 이야기를 모조리, 더하거나 빼는 것 하나 없이 에스파냐 말로 고쳐 주면 원하는 대로 돈을 지불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건포도 2아로바와 밀 2파네가로 만족하며 짧은 시일 내에 충실하게 잘 번역해 주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일을 더 쉽게 처리하기 위해, 그리고 이 훌륭한 물건을 손에서 떼어 놓고 싶지 않아서 그를 내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우리 집에서 한 달 보름 조금 더 걸려 전부 번역했다. 다음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140∼142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이 이야기의 진실성에 대해 약간 의심이 가는 구석이 있다면, 작가가 아랍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 민족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로 정평이 나 있다. 또한 그들은 우리의 불구대천 원수이기 때문에 마땅히 써야 할 것들을 쓰지 않은 경우도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그토록 훌륭한 기사를 칭찬하는 데 펜을 더 놀릴 수 있었을 텐데 일부러 그 칭찬거리들을 빠트리고 간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일은 나쁜 행동에 나쁜 생각이다. 역사가란 사실을 정확하게 그대로 기록해야지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개인의 욕심이나 두려움이나 한이나 편애와 같은 감정으로 진실을 왜곡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역사는 진리의 어머니요 시간의 경쟁자이자 모든 행위의 창고이며 과거의 증언이고 현재의 본보기이자 깨우침이며 미래를 위한 경고이기 때문이다. 가장 온건한 책에서 기대할 수 있는 그 모든 것을 이 이야기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만일 이 이야기에 무엇인가 좋은 점이 부족하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물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이 이야기의 작가인 개 같은 무어인의 책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아무튼 이 이야기의 제2부는 번역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시작되고 있다.(143∼144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1부』, <제9장> 

 

 

여기서 다시 보르헤스의 『픽션들』로 되돌아 오자. 보르헤스의 소설 속 가상의 작가인 삐에르 메나르는 과연 어떤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일까.

 

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집필하려는 게 아니었다ㅡ그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가 집필하려고 했던 것은 『돈키호테』그 자체였다. 물론 그가 절대로 원작을 문자 그대로 옮겨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의 경탄할 만한 야심은 미겔 데 세르반테스의 작품과 일치하는ㅡ단어와 단어, 그리고 행과 행ㅡ그런 몇 페이지를 쓰는 것이었다.

 

「나의 의도는 단지 놀랍게 만들려는 것뿐이지.」(7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는 20세기에 살고 있는 프랑스 사람이었지만 17세기의 스페인어를 훌륭하게 구사할 정도로 노력한다. 가톨릭 신앙을 회복하는 일, 무어인 또는 터키인들과 전쟁을 벌이는 것도 그의 목표에 포함되었다.(세르반테스는 '레판토 해전'에 직접 뛰어들어 용감하게 적과 싸우다가 왼 팔을 잃은 '참전 용사'였다.) 1602년부터 1918년까지의 유럽 역사에 대해 잊어버리는 일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표는 일단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곧 그런 방식을 포기한다. '설사 어떻게 해서든 세르반테스가 되어 『돈키호테』라는 목표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그에게 삐에르 메나르이면서, 삐에르 메나르의 경험들을 통해 『돈키호테』에 도달하는 것보다 덜 야심적인 작업'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야말로 문학이 추구하는 '아이러니의 극치'가 아닌가.

 

삐에르 메나르가 추구하려는 목표에는 이보다 훨씬 원초적인 장벽이 하나 더 있었다.

 

17세기 초에 『돈키호테』를 쓴다는 것은 근거가 있었고, 불가피했고, 그리고 거의 운명적인 일이었다고 말할 수가 있겠지. 그러나 20세기 초에는 사정이 다르지. 극단적이리만치 아주 복잡한 사건들로 가득 찬 300년이란 세월이 그냥 헛되이 흘러간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말이네. 그러니까 그 사건들 중 하나만 언급한다 해도 그것은 곧바로 『돈키호테』 그 자체가 돼버리니까 말이네.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에르 메나르는 소설을 완성한다. 글자 하나 틀리지 않는 그 자신만의 『돈키호테』를. 그 작품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전혀 통찰력이 없는 사람들은 『돈키호테』가 <문자 그대로 베껴져 있는 것>을 보았고, 바꾸르 남작 부인은 니체의 영향을 보았다는 식이었다. 이런 독자들의 다양한 반응이야말로 '책 읽기'의 특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문학의 본질적인 특성'에 다름 아니다.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세르반테스의 텍스트와 삐에르 메나르의 텍스트는 언어상으로는 단 한 글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삐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그의 반박론자들은 전자에 비해 보다 애매모호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애매모호성은 하나의 풍요로움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84∼85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결국 그 어떤 텍스트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가치가 쓸모없게 혹은 더욱 훌륭하게 바뀐다는 얘기는 어떤 작품이나 작가에게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20세기에 프랑스 사람이 쓴 메나르의 작품이 아무리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고 하더라도, 스페인 고어체ㅡ무엇보다 외국어 문체적인ㅡ라는 '작위적인 흔적'은 결코 벗어나지 못할 테고, 세르반테스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지적인 활동도 종국에 가서는 쓸모없게 되기 마련이다. 하나의 철학적 원리는 시초에 세계에 대해 그럴 듯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것은 철학사 속에서 단순히 한 장(章)ㅡ만일 한 단락이나 명사로 되어버리지 않는다면ㅡ으로 남게 된다. 문학에 있어서 이러한 시간에 따른 쇠락 현상은 더욱 치명적이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 우선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재에 있어 그것은 애국주의적 취향, 문법적으로 오만함, 호화로운 장정으로 꾸민 각종 난잡한 판본들이 난무하도록 만드는 요인이 될 뿐이다. 영광이란 일종의 몰이해에 불과하며, 아마 최악의 몰이해일는지도 모른다.(86쪽)

 

 - 보르헤스, 「삐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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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책들 가운데 '보르헤스'가 직접 쓴 책은 유감스럽게도 『픽션들』뿐이다. 지금에서야 그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 그가 등장할 만한 '책에 대한 책'을 몇 권 끄집어 냈다. 그 책들은 알베르토 망겔의 『독서의 역사』, 헤럴드 블룸의 『교양인의 책읽기』, 매튜 배틀스의 『도서관, 그 소란스러운 역사』, 클리프턴 패디먼의 『평생독서계획』,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등이었다. 그 가운데 마음에 가장 와 닿는 글들은 이탈로 칼비노가 (보르헤스가 살아 있던) 1984년에 쓴 다음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아마도 보르헤스라는 한 작가가 우리 모두에게 불러일으키는 공통된 느낌을 설명하려면, 그것의 범주를 구분하기보다는 글쓰기의 기술과 보다 정확히 직결된 어떤 동기로부터 출발해야만 할 것이다. 나는 그 첫 번째로 작문을 경제적으로 표현하는 기술을 들고 싶다. 보르헤스는 간결함의 대가다. 그는 단 편 페이지에 극도로 풍부한 개념과 시적인 요소들을 응축시키고자 했다. 그러한 텍스트 안에서 사건들은 서술되거나 암시되며, 무한성, 그리고 이어지는 개념들은 어지러울 정도로 빛을 발한다. 이러한 밀도 높은 서술은 그럼에도 지나치게 무겁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그의 문장은 투명하다 할 정도로 명확하며, 장식이 없으며,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암시적이면서도 짧은 문체가 다양한 리듬, 문장의 운동감, 언제나 예상치 못했던 놀라운 형용사들을 사용함으로써 정확하고 구체적인 보르헤스 특유의 언어에 이르게 되는 것은 스페인 언어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뛰어난 문체가 이룬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보르헤스만이 이러한 문체의 비밀을 알고 있다.

 

(중략)

 

간결하게 쓰기 위해 보르헤스가 결정적으로 착안한 방법은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소 간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착안한 이 결정적 방법은 보르헤스 자신을 작가로 거듭나게 해 주었다. 거의 마흔에 가깝도록 그가 에세이가 아닌 허구적인 산문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을 가로막았던 장애물을 극복하게 해 준 그 방법은, 쓰고 싶었던 책을 이미 누군가가 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었다. 보르헤스가 꾸며 낸 다른 언어, 다른 문화 속에서 나온 미지의 작가가 쓴 책, 그러고 나서 그러한 상상 속의 책을 다시 묘사하거나 요약, 비평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처음으로 사용하여 썼던 기이한 이야기인 「알모타심으로의 접근」은 보르헤스와 관련된 신화를 남겼다. 그것은, 이 작품이 《수르(Sur)》에 발표되었을 때 독자들이 모두 이 작품이 한 인디언 출신의 작가가 쓴 책을 보르헤스가 훌륭하게 비평한 글로 알았다는 일화다. 이와 유사하게 매번 그가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모든 보르헤스의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한 겹 혹은 여러 겹으로 텍스트의 공간을 확장하고 있음을 지적해 왔다. 즉 가상의 도서관이나 현실 속의 도서관에서 꺼내어 인용한 다른 책을 통해, 고전 작품이나 혹은 박식한 지식이 나오는 작품, 아니면 단순히 꾸며 낸 작품들을 통해 확장한다는 것이다.(346∼348쪽)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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