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담판으로 불려 왔던 '북미정상회담'이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듯하다. 어쩌면 아직도 불씨가 완전히 다 꺼진 건 아닐 지도 모르겠다. 시시각각 다양한 속보가 아직도 잔불처럼 깜빡거리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 회담 하나를 두고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입방아에 앞다투어 올렸을지를 생각하면 여간 허망한 기분이 드는 게 아니다. 이 회담에 쏠린 사람들의 이목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가 있겠으며, 또한 이 회담을 두고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그 엄청난 텍스트만 하더라도 어떻게 그 길이를 가늠해 볼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은 어찌보면 너무나 한가롭고도 쓸데없는 '심심풀이'에 불과할 뿐이다. 이 회담의 성사 내지는 성공 여부가 초래할 온갖 심대한 변화들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 거대한 변화가 두고두고 숱한 사람들의 삶 자체를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가능성까지 생각하면 못내 두고두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토록 거대한 판'이 산산조각난 결정적 동기가 과연 어디서부터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곰곰 되짚어 보게 되고, 그런 의사 결정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들의 '내면 심리'가 과연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한국 전쟁이라는 끔찍한 참화를 겪은 이후 북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는 단 한 번도 '따스한 기미'조차 없었던 게 사실이다. 어느 시인이 연탄을 보고 노래했던 '너는 언제 한번 뜨거워 본 적이 있느냐'는 물음을 새삼 떠올릴 필요도 없을 만큼, 그들 둘 사이는 도대체 뜨거워지기는 커녕 미지근한 기미조차도 없이 언제나 찬 바람만 쌩쌩 불었고, 여차하면 '불바다' 내지는 '분노의 화염'을 떠올려야 할 정도로 끔찍한 사이였다.

 

이토록 철천지 원수지간이었으니 '세기의 담판'이 성사되기 위한 '맨 처음 고백'이 결코 쉬울 리가 없었다. 또한 북미정상회담은 단지 북미간의 일도 아니다. 한국과 중국과 일본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서로 맞닿아 있는 문제였다. 그러니 요즘 세상에 '북한 비핵화'와 'CVID'만큼 풀기 어려운 '고차 방정식'도 따로 없는 셈이다. 그러니 김정은이 40여일 사이에 중국을 두 번이나 바삐 오가고, 폼페이오가 그 멀리서 평양을 두 번이나 들락거리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니다. 또한 북미 수뇌들의 메신저 역을 떠맡은 온갖 사람들이 때론 거칠게, 때로는 달콤하게 온갖 다양한 언사를 거듭 주고받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다. 이 글을 쓰는 중에도 '깨진 판'을 다시 이어붙일 수 있다는 희망섞인 속보가 연일 날아들 정도로 숨가쁜 롤러코스터의 연속이긴 하지만, 적어도 '판'이 깨어질 때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떠맡은 인간의 심리 가운데 몇 가지는 결국 누군가의 분개, 혹은 누군가의 모욕감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들의 '도덕 감정'에 대한 훌륭한 교사였던 아담 스미스 교수님의 강의 한 대목을 오랜만에 다시 읽어 보게 되고, '굴욕과 모욕 사이'를 절묘하게 간파한 우리의 세르반테스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다시금 펼쳐 보게 되었다.(『돈키호테』 속에 담긴 이런 대목 하나만 다시 꺼내 보더라도 이토록 훌륭한 걸작을 남긴 세르반테스에게 거듭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토록 재미나는 이야기를 쓰면서도 어쩌면 이토록 심오한 인간 심리를 칼날같이 예리하게 파고들 수 있었는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 * *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때 비로소 분개심을 표출하는 우리의 행위가 방관자에게 완전히 유쾌하게 느껴지고 그리고 방관자로 하여금 우리의 분개에 완전히 동감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분개를 격발시킨 원인이, 만약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라도 분개하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이 비열한 인간으로 되어버리고 그리고 두고두고 모욕을 받게 될 그런 것이어야 한다.
사소한 침해에 대해서는 무시해 버리는 편이 오히려 낫다.
사소한 시빗거리가 있을 때마다 흥분하는 심술궂고 남의 말꼬리 잡고 시비하기 좋아하는 성격만큼 비열한 것도 없다. 우리가 분개하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불쾌한 격정으로 화가 나서가 아니라, 분개하는 것이 적절하고 또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분개하기를 기대하고 또 요구하고 있다는 자각 때문이어야 한다.

인류가 느낄 수 있는 격정들 중에서 이 분개의 격정만큼 우리로 하여금 그것의 정당성에 대하여 재삼 의문을 가져보게 하고, 우리가 그것을 표출하기 전에 조심스럽게 우리의 본래의 적정성 감각에 비추어 보게 하고, 또한 냉정하고 공정한 방관자가 우리가 표출하는 분개를 보고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될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도록 하는 것도 없을 것이다. 관대함이나 우리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존엄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심만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하는 이 격정의 표현들을 고상한 것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동기이다. 이 동기가 우리의 전체 품격과 태도를 특징짓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의 태도는 반드시 소박·소탈하고, 감추는 것이 없고, 솔직해야만 한다. 과단성이 있되 독단적이 아니어야 하고, 고결하되 오만하지 않아야 하며, 무례하고 상스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상해를 가한 자에 대해서조차 너그럽고 솔직하면서도 모든 적절한 배려를 다해 주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분노의 격정 때문에 인간의 선한 본성이 훼손되지 않았음을, 그리고 만약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복수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마지못해서, 필요에 의해서, 그리고 되풀이되는 엄중한 도발의 결과 때문이라는 것이 우리가 그것을 표현하려고 일부러 노력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저절로 드러나야 한다.

분노가 이런 방식으로 억제되고 진정된다면 그것은 심지어 관대하고 고상하기까지 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65∼66쪽)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 알라딘의 분위기를 떠올리게 하는 '오만과 허영'에 관한 이야기

 

 

* * *

 

 

『돈키호테_2권』에 등장하는 '굴욕과 모욕의 차이'에 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에 충분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서는 상당한(?) '사전 배경 설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걸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1615년에 발표된『돈키호테_2권』은 애시당초엔 세르반테스의 구상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그런데 1605년에 발표된 『돈키호테_1권』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자 사정이 돌변했다. 온갖 정체불명의 속편들이 난무했고, 범람하는 수많은 해적판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도저히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훌륭한(?) 가짜들도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상황과 더불어 독자들의 불같은 성화에 견디지 못한 세르반테스는 결국 속편을 쓸 수밖에 없었다. 죽기 몇 달 전에 가까스로 출간된 그 소설은 세르반테스가 무려 68세에 완성한 역작이었다.

 

어쨌든 세르반테스가 10년 만에 다시 속편으로 쓴 『돈키호테_2권』은 1권에서 이미 모험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편히 쉬고 있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다시 '모험'에 나서도록 만들어야 했다.(그나마 1권에서 돈키호테가 멀쩡히 살아서 모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그런데 세르반테스는 2권에서 (숱한 해적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기가 막힌 설정'을 도입한다. 2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무대에서는 이미 1권의 이야기가 시중에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 있다는 설정 말이다. 바로 그 때문에 돈키호테는 기상천외한 에피소드를 겪게 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돈키호테와 산초'를 빤히 알고도 속이는 공작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공작부인은 사냥터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꾸며 숲속을 헤매던 돈키호테와 산초를 공작의 궁전으로 데려온다. 공작은 궁궐에 있는 하인들을 '사전 교육'까지 시켜 돈키호테를 '진짜 중세의 기사'로 대접하도록 꾸민다. 드디어 꿈꾸던 모험이 정말로 실현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돈키호테와 산초는 '가상 현실'과 '진짜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운 경지에 빠져든다. 공작과 공작부인은 바로 자신들의 꾐에 넘어간 돈키호테와 산초가 벌이는 기가 막힌 행동들을 보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바로 이 와중에 '굴욕과 모욕에 관한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이 등장한다.

 

어느 날, 돈키호테와 산초가 머물고 있는 공작의 궁전 만찬에 성직자가 한 명 초대되는데,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그 자리에 초대된 그 성직자가 '식사에 초대된 사람들의 전후 사정'을 파악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직자는 거인이니 비겁자니 마법이니 하는 말을 듣고서야 저 사람이 바로 돈키호테 데 라만차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공작이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일상 읽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읽는 그 자체가 바로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몇 번이나 공작을 나무란 바 있었으니, 자기가 의심하던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그는 마구 화를 내며 공작에게 말했다.

 

「공작 나리, 나리께서는 이 알량한 자의 행동을 우리 주님께 보고드려야 합니다. 이 돈키호테인지, 돈 바보인지, 아니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작자는 나리가 바라는 만큼 그렇게 우둔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리께서는 이 작자에게 앞으로도 계속 그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짓을 하도록 쉽사리 기회를 베풀어 주고 계시는군요.」

 

그러더니 이번에는 설교를 돈키호테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당신, 머리가 텅 빈 자여, 스스로 편력 기사이고 거인들을 이기고 악당들을 사로잡았다는 생각을 그 뇌 속에 집어넣은 자는 대체 누구란 말이오? 좋게 말할 때 잘 가시오. 집으로 돌아가서 자식이 있으면 자식이나 키우고, 재산이나 살피시오. 바보 짓거리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당신을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의 웃음거리가 되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는 일은 그만두시오. 재수 없게 그런 편력 기사가 있었다느니, 오늘날도 있다느니 하는 것들을 대체 어디서 들은 거요? 에스파냐 어디에 거인이 있으며, 라만차의 어디에 악당이 있단 말이오? 마법에 걸린 둘시네아니 뭐니, 당신과 관련되어 이야기되고 있는 그 모든 잡동사니 같은 바보 짓거리들이 세상 어디에 있단 말이오?」

 

돈키호테는 존경받는 그 남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이제 그가 입을 다물자, 공작 부부에 대한 존경이고 나발이고 다 팽개친 채 당황한 얼굴에 잔뜩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서는 말했다.이 말만으로도 한 장을 이룰 만하다.(402∼403쪽)

 

 - 세르반테스, 『돈키호테_2권』, <31장, 수많은 큰 사건들에 대하여>

 

 

이렇게 해서 31장이 끝난다. 곧바로 이어지는 32장에 '굴욕모욕의 차이'가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돈키호테의 일장 연설과 산초 판사 특유의 입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이 대목을 (다소 길게 느껴지는 감이 없지 않지만) 5쪽 분량으로 충분히 인용해 볼까 싶다. 핵심적인 부분만 덜렁 떼어 옮기면 아무래도 이러저러한 전후 사정들이 모조리 생략될 테고, 돈키호테가 느낀 '인간 심리의 복잡미묘한 차이'를 두루 온전히 파악할 수 없을 듯하기 때문이다. 

 

 

벌떡 일어난 돈키호테는 마치 수은 중독에 걸린 사람처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들부들 떨며 더듬대는 목소리로 다급하게 말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와 지금 내 앞에 계신 분, 그리고 당신의 직분에 대해 내가 늘 가져 왔고 여전히 가지고 있는 존경심이 당연히 터뜨려야 할 내 분노의 손을 막으며 붙들어 매고 있소이다. 내가 방금 말씀드린 이유와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겠지만 가운을 입은 사람들의 무기는 여인들의 무기와 마찬가지로 혀이기에, 나 또한 혀로 나리와 똑같이 싸움을 벌일 작정이오. 나리에게는 그런 모욕적인 비난보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를 기대하고 있었소. 좋은 의도로 하는 성스러운 비난은 이와 다른 정황을 필요로 하며 다른 기회를 요구하오. 그러니까 적어도 공공연하게, 그것도 그토록 신랄하게 나를 비난한 것은 좋은 의도로 하는 비난의 한계를 죄다 넘는 일이오. 훌륭한 비난은 신랄함보다 부드러움 위에 훨씬 더 잘 안착하기 때문이오. 비난의 대상이 되는 죄에 대해 알지도 못하면서 다짜고짜로 죄인을 얼간이니 바보니 말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오. 아니라면 말씀해 보시오. 나한테서 어떤 어리석은 짓을 보았기에 나를 지탄하며 모욕을 가하는 것이오? 게다가 내게 아내가 있는지 자식들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집으로 돌아가 집과 처자식 돌보는 일에나 신경 쓰라고 하다니. 덮어놓고 남의 집에 불법으로 들어가 그 집의 주인들에게 이래라저래라 해도 되는 거요? 어느 기숙사에서 궁핍하게 자라 고작해야 그 지역에서 20레과나 30레과 안에 있는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본 적이 없는 자가 갑자기 기사도 규정을 들먹이고 편력기사들을 판단하겠다고 끼어들어도 된단 말이오? 세상이 주는 안락함을 찾는 대신 혹독한 시련을 통해 불멸의 자리에 오른 훌륭한 분들이 간 길을 따르는 것을 설마 헛된 일이거나 쓸데없는 시간 낭비로 보는 건 아니시겠지? 만일 기사나 뛰어나신 분이나 관대하신 분이나 태생이 높으신 분이 나를 바보 취급한다면 회복할 수 없는 모욕으로 받아들일 것이오. 하지만 기사의 길에 들어온 적도 없고, 그 길을 밟은 적도 없는 학생이 나를 멍청이로 본다면 난 콧방귀도 안 뀔 테요. 나는 기사이며, 만일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면 기사로 죽을 것이오. 어떤 사람은 오만한 야심의 광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천하고 비굴한 아부의 광야로 가며, 또 어떤 이는 속임수 많은 위선의 광야로, 어떤 이는 참된 종교의 광야로 가지만 나는 나의 숙명에 따라 편력 기사도의 좁은 길로 가오. 그 길을 따르고자 나는 재산을 경멸하지만 명예는 아니오. 나는 지금까지 모욕을 갚고 굽은 것을 바로잡으며 무례함을 벌했고 거인을 이기고 괴물들을 짓밟았소이다. …… 나는 나의 의도를 늘 훌륭한 목적에 두고 있소이다. 모든 사람에게 선을 베풀며 어느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것이 그 목적이오. 이러한 일을 이해하고 이러한 일을 행동으로 옮기며 이러한 일을 떠받드는 자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도 되는지, 위대하신 공작 각하 내외께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와우, 정말 잘하십니다요!」 산초가 말했다. 「나리, 더 이상 말씀하실 것도 없습니다요. 우리 나리, 우리 주인님, 설명도 필요없습니다요. 더 이상 말할 것도, 더 이상 생각할 것도, 더 이상 세상에 참고 버틸 것도 없으니까 말입니다요. 더군다나 이분이 편력 기사들은 세상에 없었고 지금도 없다고 부정하고 계시지만, 말씀하신 것에 대하여 스스로 아는 것은 전혀 없으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요?」

 

「혹시, 형제여 …….」 성직자가 말했다. 「자네가 주인으로부터 섬을 준다는 약속을 받았다는 그 산초 판사인가?」

 

「예, 그렇습니다요.」 산초가 대답했다. 「어느 누구나처럼 저도 섬을 가질 만한 사람입니다요. 그리고 저는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라. 그러면 너도 좋은 사람이 되리라>라고 주장하는 사람이고, <함께 태어난 사람이 아니라 함께 풀을 뜯는 사람>들 중 하나이며, <좋은 나무에 기대는 자는 좋은 그늘을 쓴다>라는 걸 아는 사람들 중 하나입니다요. 저는 좋은 주인에게 기대어 그분을 모시고 다닌 지 몇 달이 되었습니다요. 하느님이 원하신다면 저도 그분처럼 다른 인간이 될 겁니다요. 그분이 사시면 저도 사는 것이니, 주인 나리께서 통치하실 나라가 있을 것이므로 제가 다스릴 섬도 있을 겁니다요.」

 

「분명 있고말고, 산초 친구여.」 이때 공작이 말했다. 「내가 돈키호테 나리의 대리자로서, 내게 남아도는 꽤 괜찮은 섬을 하나 자네에게 통치하도록 하겠네.」

 

「무릎을 꿇게, 산초.」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리고 자네에게 베풀어 주시는 이 은혜에 감사하는 의미로 각하의 발에 입을 맞추게.」

 

산초는 시키는 대로 했다. 이것을 보고 있던 성직자는 식탁에서 일어나더니 불쾌한 듯 말했다.

 

「제가 입고 있는 이 사제복을 두고 말하고자 합니다. 각하도 이 죄인들만큼이나 멍청하십니다. 이들이 미친 사람들인지 아닌지 제대로 좀 보시지요! 제정신인 사람들이 모두 이 사람들을 미쳤다고 인정하는 마당이란 말입니다. 각하께서는 이 사람들과 계십시오. 이 사람들이 여기 있는 동안 저는 저의 집에 있을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고는 더 이상 말을 않았고, 공작 부부의 간청과 만류도 소용없이 먹지도 않은 채 가버렸다. 비록 공작은 그가 당치 않을 정도로 화를 낸 것이 어찌나 우스운지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말도 많이 못했지만 말이다. 그는 겨우 웃음을 진정시키고 돈키호테에게 말했다.

 

「<사자의 기사> 나리, 나리께서는 나름대로 아주 당당하게 말씀하셨소. 그러니 그 굴욕에 대해 더 이상 유감은 없을 것이오. 사실 그것이 굴욕으로 보일지 모르나 알고 보면 결코 그렇지 않소. 나리도 잘 알다시피, 여자의 말로 굴욕을 당할 수 없듯이 성직자의 말로도 굴욕을 당할 수 없으니 말이오.」

 

「그렇습니다.」 돈키호테가 대답했다. 굴욕을 당할 수 없는 자는 아무도 모욕할 수 없지요. 여자들이나 어린애들이나 성직자들은 모욕을 당해도 방어할 수 없기 때문에 굴욕당할 수가 없습니다. 각하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 굴욕모욕 사이에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모욕모욕을 줄 수 있고 모욕을 주며 모욕을 견딜 수 있는 자로부터 옵니다. 반면 굴욕모욕을 주는 일 없이 어디서나 올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한 사람이 길에서 딴 데 정신이 팔려 서 있는데, 무기를 든 사람 열 명이 와서 그를 두들겨 팼다고 합시다. 그러자 그 사람이 칼을 뽑아 들어 자기의 의무를 다했다고 합시다. 하지만 상대방의 수가 많아서 복수하겠다는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을 때, 이런 경우 그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랍니다. 다른 예를 들어 보면 더 확실시될 것입니다. 한 남자가 등을 돌리고 서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때렸다고 합시다. 그러고는 기다리지 않고 도망을 가고 맞은 사람이 그 사람을 쫓아가지만 붙들지 못할 때, 이 맞은 사람은 굴욕스럽기는 해도 모욕을 당한 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욕은 그에 맞서는 것이 있을 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때린 사람이 불시에 때렸더라도 그 후에 멈춰 서서 칼을 뽑아 들고 상대와 맞서려고 했다면, 맞은 사람은 모욕굴욕을 함께 당한 겁니다. 굴욕스러운 건 기습적으로 맞은 것 때문이며 모욕적인 건 자기를 때린 사람이 등을 돌려 달아나는 대신 스스로의 행동을 지지하며 그대로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 저주스러운 결투의 법칙에 따르면, 나는 굴욕은 당했을 수 있지만 모욕을 당한 것은 아닙니다. 아이나 여자들은 도망갈 필요도 느끼지 않고, 도망갈 수도 없으며, 버티고 서서 기다릴 이유도 없지요. 성스러운 교회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도 이들과 같으니, 이 세 부류의 인간들은 공격을 위한 무기나 방어를 위한 무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는 경우라 해도 누구를 모욕하는 일은 의무화되어 있지 않지요. 아까 전에 내가 굴욕을 당했을 수는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지금 다시 어떤 의미에서든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모욕을 당할 수 없는 자야말로 어떤 모욕도 줄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그 훌륭하신 분이 내게 하신 말씀을 유감스럽게 여겨서는 안 되며 그렇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단지 그 분이 이 자리에 좀 더 계셨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뿐입니다. 그분이 잘못 알고 있던 것들을 깨우치게 해드릴 수 있도록 말이지요. ……

 

 - 『돈키호테_2권』, <32장, 자기를 비난한 자에게 돈키호테가 한 대답과 다른 심각하면서도 재미있는 사건들에 대하여 

 

 

 

☞ 그림과 함께 읽는 돈키호테

 

 

 

 * *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