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동안에 독자가 흔히 겪게 되는 가장 놀랍고도 다채로운 경험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감정이입'이 아닐까 싶다. 숱한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주인공들과 주변 인물들을 만날 때마다 독자들은 자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설 속 상황' 속에 '자신이 겪은 경험'을 대입시킨다. 그럴 경우에 독자들이 저마다 소설 속에 이입시키는 감정들이 얼마나 각양각색일지는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슷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독자들이 저마다 살면서 겪게 되는 유일하고 독특한 경험만큼은 결코 남들과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혹시 '감정이입'이 매우 비슷하게 나타날 만한 드문 예외가 있다면 과연 어떤 경우일까?

 

만약에 어떤 특정한 시기에 몇몇 독자들이 어떤 특정한 작품을 거의 동시에 읽는 경우가 있다면, 그들은 비록 서로 완전히 똑같지는 않을지라도 약간이나마 서로 비슷한 감정이입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어떤 강렬한 충격을 던져 주는 놀라운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와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이 한동안 그런 사건들에 지배당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면? 그럴 경우라면 아마도 몇몇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읽고 있는 어떤 특정한 작품 속에서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는 아주 특이한 경우가 생기지 않을까? 독자들이 저마다 겪은 삶의 경험들이 비록 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이런 희안한 상상을 하게 된 까닭은 바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읽는 도중에 경험한 '다소 기이한 감정이입' 때문이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떤 기묘한 '연애 사건'을 읽으면서 엉뚱하게도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어느 유명한 미투 사건'을 떠올렸는데, 만약에 (그럴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더라도) 나와 똑같이 이 소설을 읽은 독자가 나 말고도 몇 사람쯤 더 있었더라면, 그 사람도 틀림없이 나와 비슷한 '감정이입'을 느끼지 않았을까 하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흥미진진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의 대화를 들어보면 '최근의 미투 사건 당사자들이 내세우는 주장'과 어찌 그리 쏙 빼닮았는지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이왕 얘기가 여기까지 나왔으니 내가 적잖은 놀라움을 가지고 '거듭' 읽었던 그 대목을 여기에 잠깐 소개해 보고 싶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연애 사건'은 예로부터 너무나 자주 다뤄지는 몹시도 전형적인 '연애 사건'이기 때문에 '서로의 속사정'을 이해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사건의 개요는 대략 이렇다.

 

여자 주인공인 에밀리는 청순 가련하면서도 몹시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지만, 어려서부터 고아로 자랐기 때문에 배운 거나 가진 게 거의 없는 시골 처녀이다. 남자 주인공인 스티어포스는 어릴 때부터 홀어머니가 온갖 정성을 다 쏟아 키운 훌륭한 집안의 귀한 자식이다. 옥스퍼드를 졸업했을 정도로 두뇌도 명석할 뿐만 아니라 훌륭한 품성까지 두루 갖추고 있어서 장래가 몹시 촉망되는 젊은이다.

 

어릴 때 같은 학교에서 동창생으로 함께 어울려 지냈던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는 어느 날 스티어포스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2주일쯤 여행을 가게 되고, 거기서 두 사람은 데이비드의 어릴 적 유모였던 페거티 양의 오빠네 식구들과 함께 어울려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선원으로 일하는 페거티 씨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이 없던 에밀리(매형의 딸)와 햄(형의 아들), 그리고 동료 선원의 미망인인 거미지 부인과 함께 넷이서 바닷가에서 '배로 만든 집'에서 함께 살면서 너무나 행복하게 오손도손 지내던 터였다.( ☞ "디킨스 소설속 거미지부인 닮아가지만"…하퍼 리 편지 사후공개)

 

에밀리는 꼬마일 때부터 너무나 예쁜 모습이어서 페거티 씨뿐만 아니라 온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따금씩 페거티 씨네 뱃집으로 여행을 왔던 데이비드 코퍼필드까지도 그녀에게 첫눈에 홀딱 빠질 정도였다. 차츰 나이가 차게 되자 에밀리는 우직하고 믿음직스런 총각인 햄을 사랑하게 된다. 그와 함께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보금자리를 꾸밀 생각만으로 들떠 있던 에밀리의 얼굴에 언제부턴가 알 수 없는 희미한 옅은 그늘이 생기는가 싶더니, 그녀는 어느 날 하루 아침에 홀연히 바닷가 마을에서 사라지고 만다! '편지 한 장'만 딸랑 남긴 채.(☞ 꼬마 에밀리, 잊을 수 없는 첫 사랑 - 데이비드 코퍼필드...)

 

자초지종을 알아본 결과는 더욱 놀라웠다. 런던에서 데이비드 코퍼필드와 함께 시골 바닷가로 놀러 왔던 스티어포스가 런던으로 되돌아간 이후, 아무도 몰래 자신의 충직한 하인을 시켜 바닷가 마을에 몰래 남아 에밀리를 꼬드겼던 행적이 밝혀졌고, 처녀 에밀리가 동네에서 사라진 날 아침에 바로 그 하인과 함께 마차를 타고 바닷가를 급히 떠나는 것을 봤다는 목격자도 있었다. 에밀리와 결혼을 앞두고 있었던 햄의 충격과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친딸처럼 몹시도 아끼고 사랑했던 페거티 씨도 비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는 무작정 조카딸 에밀리를 찾기 위해 길을 나섰고, 이내 데이비드와 함께 런던에 있는 스티어포스네 집까지 직접 찾아가게 된다.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부인?" 페거티 씨는 조용한 투로 천천히 반박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부인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 애가 지금의 백배쯤 더 귀한 자식이라 할지라도 제가 이보다 더 그애를 사랑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식을 빼앗긴다는 것이 어떤 심정인지 부인께선 모르십니다. 이 세상의 온갖 재물도(비록 저한테는 그런 것이 없지만) 그 애를 다시 돌려받을 수만 있다면, 조금도 아깝지 않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 불명예스러운 일에서 그 애를 구해주십시오. 그러면 저희는 다시는 그 애를 욕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애를 고이고이 길러 왔습니다. 십몇 년 동안 함께 살면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애지중지하며 보듬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그 애의 아름다운 얼굴을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것입니다. 이대로 헤어져서, 머나면 다른 하늘 아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습니다. 기꺼이 그 애를 남편에게ㅡ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아이들에게ㅡ맡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언젠가 하느님 앞에서 위아래 구분 없이 살 수 있는 날을 꾹 참고 기다릴 것입니다!"

 

세련됐다고는 할 수 없는 그의 능변이 전혀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인은 여전히 거만한 태도를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에는 한 가닥의 부드러움이 엿보였던 것이다.

 

"나는 둘러댈 이유도 없거니와, 당신의 말을 반박할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나 미안하지만 절대 안 된다고 거듭 말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결혼은 우리 아이의 일생을 다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쳐 놓을 것이며, 그 애의 앞길을 파멸로 이끌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혼은 절대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달리 보상할 방법이 있다면 하겠습니다만ㅡ"

 

"아아, 그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군요." 페거티 씨는 불꽃이 이는 눈으로 뚫어지게 부인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우리 집 난롯가에서, 그리고 내 배에서 곧잘 보았던 그 얼굴과 똑같군요. 끔찍한 배신을 꾸미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미소 지으며 다정하게 나를 바라보던 그 얼굴을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의 집 처녀를 타락시켜 망쳐놓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부끄럽지 않으십니까?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니라 성격도 똑같군요. 아니지, 여자이니만큼 오히려 더 나쁠 수도 있겠군요."

 

부인의 태도는 갑자기 변했다. 그녀의 온 얼굴이 노기로 가득 차면서, 더는 못 참겠다는 듯이 두 손으로 안락의자를 꽉 붙잡으며 말했다.

 

"당신이야말로 나와 내 아들 사이에 이토록 깊은 수렁을 파놓고, 내게 어떻게 보상하실 생각입니까? 당신의 사랑 따위가 내 사랑에 비교나 될 줄 아십니까? 당신이 그 애와 헤어진 것이, 내가 우리 아이와 헤어진 것에 비교해 무엇이 대수라는 겁니까?"

 

미스 다틀이 뒤에서 부인의 몸에 살며시 손을 대고 머리를 숙여 소곤거렸으나 부인인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로사.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이 사람에게 내 뜻을 알려 줘야 해요! 잘 들어요. 내 아들로 말하자면 내 삶의 전부예요. 나는 그 아이만 바라보고 살아왔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 애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으며, 그 애가 태어난 뒤로는, 말하자면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런데 그 애가 순간이나마 보잘것없는 계집애와 눈이 맞아서 이 어미를 버리다니! 그깟 계집애 때문에 이토록 굳건한 어미의 믿음을 거역하고, 내 곁을 떠나다니! 나는 내 아들에게 어미에 대한 의무와 사랑, 감사하는 마음을 갖길 기대했었어요. 그 아이와는 소원해지기는커녕 날로 돈독해져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끊어지지 않을 끈끈한 유대가 있었다고요! 그런데 그것이 이런 볼썽사나온 연애문제로 단박에 파탄나다니! 그런데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다시금 로사 다틀이 부인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안 돼, 로사. 한 마디도 하지 마! 그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그 애가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자 한다면, 나도 더 큰 목적을 위해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 수 있어. 내가 사랑하므로 물려준 재산을 가지고 그 애가 어디론가 가겠다면 멋대로 해도 좋아!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꺾일 줄 알고? 천만에!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애는 이 어미를 전혀 모르고 있는 거야. 지금이라도 그 애가 마음을 바꾼다면 내 기꺼이 그 애를 맞아주겠어. 그러나 그게 싫다면 그 녀석이 살아서 돌아오든 죽어서 돌아오든 이 집에는 절대로 들이지 않을 거야. 그 천한 계집애와 영원히 헤어져서 머리를 숙이고 용서를 빌지 않는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절대로 못 돌아오는 거야. 이것은 어미의 권리이니 절대 양보할 수 없어. 아무리 부모 자식 사이라도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겠어!" 처음 만났을 때의 거만하고 단호한 태도로 우리를 쏘아보며 덧붙였다. "이래도 내가 피해자가 아니란 말입니까?"

 

부인의 이러한 말을 들으며 그 태도를 바라보고 있자니, 나는 어쩐지 그 어머니에게 대드는 아들의 말과 표정이 선하게 떠오르는 느낌이었다. 스티어포스에게서 보아온 고집 세고 방자한 모습이 부인에게도 그대로 있었다. 이상하게 비뚤어진 그의 정열을, 이제는 모두 이해할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스란히 그의 어머니의 성격이었다. 그 둘이 근본적으로는 하나라는 것도 알았다.

 

부인은 전과 같은 자제력을 되찾아, 더 들어도 소용없고 말해도 소용없으니 이것으로 면담을 끝내자고 말했다. 부인은 방에서 나가려고 위엄 있는 태도로 일어섰다.

 

그때 페거티 씨가 일어설 필요 없다고 말했다.

 

"더 이상 막지 않겠습니다. 저도 더 이야기할 것은 없습니다, 부인." 그는 문께로 걸어가며 말했다. "어차피 희망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으니까, 아무런 희망도 갖지 않고 떠나겠습니다. 다만 저는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이 집은 저나 제 조카딸에게는 몹시 유해하며, 제정신으로 무슨 부탁을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우리는 나왔다. 스티어포스 부인은 안락의자 옆에 서 있었다. 과연 고귀해 보이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리는 돌바닥으로 된 홀을 가로질러 나갔다. 양쪽 벽과 지붕 모두 유리로 되어 있고, 지붕에는 포도송이가 매달려 있었다. 잎도 새싹도 푸르렀고, 마침 아주 맑은 날이었으므로 정원으로 이어진 유리문도 양쪽으로 활짝 젖혀져 있었다. 우리가 문 가까이 갔을 떄 로사 다틀이 소리도 없이 다가와서는 내게 말했다.

 

"저런 사람을 이곳에 잘도 데려왔군요!"

 

그녀의 얼굴빛을 흐리게 하고 그 검은 눈 속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분노와 비웃음으로 인해, 쇠망치에 맞아서 생긴 상처가 더욱 뚜렷하게 보였다. 전에도 보았듯이 상처가 실룩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느닷없이 손을 들어 그곳을 때렸다.

 

"어떻게 저런 사람을 옹호하면서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죠, 네? 정말 친절한 분이시군요!"

 

"미스 다틀," 나는 대꾸했다. "당신이 설마 나를 꾸짖는 건 아니겠죠?"

 

"그렇지만 당신은 어째서 그 광적인 모자 사이를 일부러 갈라놓으려고 하는 거죠? 그들은 둘 다 자기 고집과 자존심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세요?"

 

"그게 내 탓이란 말입니까?"

 

나는 대꾸했다.

 

"그렇고말고요! 왜 저 사람을 이리로 데려오셨습니까?"

 

"저분은 마음의 상처를 심하게 입은 사람입니다. 미스 다틀께서는 모르시겠지만."

 

"물론 알고 있어요. 제임스 스티어포스는," 그녀는 손을 올려 가슴을 눌렀다. 마침 그곳에서 미쳐 날뛰는 폭풍우가 고스란히 목소리로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마음보가 뒤틀린 잔인한 사람이에요. 성실치 못하고 퇴폐한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배신자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저 사람이나 그 조카딸인가를 제가 염려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미스 다틀, 당신은 저분을 또 한 번 모욕하는군요. 상처는 이것만으로도 이미 넉넉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말만은 해야겠습니다. 당신은 저분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런 일은 없어요. 두 사람 모두 타락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인걸요. 그 계집을 흠씬 매질하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페거티 씨는 아무 말도 없이 우리 곁을 지나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미스 다틀! 정말 너무 하십니다! 아무죄도 없이 지독한 일을 당한 저분을 당신은 어찌 그렇게 마구 짓밟을 수 있습니까!"(534∼538쪽)

 

 - 찰스 디킨스, 『데이비드 코퍼필드』

 

 

이런 스토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TV 드라마에서 너무나 자주 봐왔기 때문에 새로울 게 별로 없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런 스토리에서 언제나 발견되는 변치 않는 '익숙한 구도' 하나가 새삼 눈에 밟힌다. 사건의 발단이자 원인 제공자는 언제나 남자 쪽에서 시작되고, 피해자 역할은 대체로 여자가 떠맡는 반면에, 정작 연애 사건이 문제가 되고 나서는 거의 언제나 남자 쪽에서 도리어 '하찮은 계집애 때문에' 피해를 보게 생겼다고 '남 탓'을 한다는 구도 말이다. 물론 가끔씩 여자가 남자를 꼬드기는 경우도 아예 없지는 않지만 그건 예외적인 경우일 뿐이다.

 

이런 구도에 놓인 남녀가 겪게 되는 갈등은 스토리 전개 과정이 너무나 뻔하다. 많은 걸 갖춘 쪽에서는 '남자의 앞길을 망치게 생겼다'느니 '크나큰 손해를 보게 생겼다'면서 길길이 날뛰고, 여자 쪽에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데도 도리어 무슨 '크나큰 죄'라도 저지른 것처럼 이내 수세에 몰리거나 괜한 오해와 함께 턱도 없는 비난을 받기 쉽다.

 

따지고 보면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 만큼 인간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는 경우도 드물다. 저 까마득한 옛날에 벌어졌던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도 따지고 보면 트로이의 얼빠진 총각이 헬라스의 아름답기로 소문난 유부녀였던 헬레네를 납치했기 때문에 벌어진 대소동이었고,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상세히 다룬 '악티움 해전' 또한 로마의 유부남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돌싱녀 클레오파트라와의 '잘못된 만남' 때문이었다. 비록 남녀의 입장이 뒤바뀐 경우이긴 하지만 『오셀로』의 비극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나이도 많고 피부까지 검었던 용병대장 오셀로 보다는 베네치아에서 손꼽힐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던 데스데모나가 훨씬 더 갖춘 게 많았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때 무척이나 인기를 끌었던 불륜 소재 드라마인 《사랑과 전쟁》은 제목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자연스레 싹트는 진실된 사랑이 아닌, 언제나 전쟁과 같은 거대한 문제를 일으키는 건 불륜이거나 가짜 사랑일 테니 말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의 '잘못된 만남'이 세상을 얼마나 어지럽히는가를 이번 미투 사례만큼 적나라하게 보여준 경우도 드물지 싶다. 미투 덕분에 하루 아침에 흉칙한 괴물로 둔갑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을 두고 시비곡직을 가려줄 사람들은 도처에 널려 있다. 다만 '가짜 사랑'임이 이미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한사코 거기에 일말의 진실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온갖 가식과 허위를 거듭 덧보태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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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녁에 아내와 함께 TV 뉴스를 보다가 '참으로 이상한 대화'를 나눴다. 대화의 발단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시작됐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TV 앞에서 잠깐 나눈 대화의 촛점만은 아주 간단했다.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면서 이런 얄궂은 질문을 떠올린 건 물론 '미투 열기' 때문이었다. 뉴스에 등장하는 '사건들의 양상'이 너무나 비슷했다. 미투에 엮인 사건들마다 '가해자의 주장'과 '피해자의 주장'이 정반대로 달랐다. 심지어는 미투와 아무런 관련조차 없는 '미투 가해자의 절친'마저 엉뚱한 문제로 뉴스에 뒤섞여 등장했다. 그 사람이 하필이면 미투 가해자가 오랫동안 도지사로 근무했던 바로 그 지역의 '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는 바람에, 애먼 가해자(?) 측과 엉뚱한 문제로 연일 '진실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피해자의 주장과 가해자의 주장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 중인 사건은 물론 2011년 12월 '어느 날' 여의도의 모 호텔에서 벌어졌다고 주장하는 '성추행 피해 사건'이었다. 마침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서울시장 예비 후보 출마 선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사건'이 폭로됐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느닷없이 터져나온 '7년 전 성추행 사건'을 두고 양 쪽은 연일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심지어 오늘 낮에 발표된 가해자의 '최신판 반박 회견'에는 사건 당일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데 충분해 보일 만한 '사진 증거물'까지 제시했다. 그 바람에 이제는 '둘 중 하나'는 틀림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훨씬 더 명백해졌다. 어쨌든 가해자는 23일이든 24일이든 '여의도의 모 호텔'엔 아예 가지도 않았다고 딱 잡아떼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녁 뉴스를 보는 와중에도 어느새 '새로운 증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이 '자막'으로 지나갔다. 자신이 직접 가해자와 함께 23일 오후에 그 호텔에 갔었다는 내용이었다. 새로 등장한 증인의 주장도 꽤나 놀라웠지만 저녁 늦게 등장한 '피해자의 새로운 반박문'은 더욱 놀라웠다. 그 두 사람의 주장만 들어보면 가해자가 주장하는 '피해자가 꾸민 대국민 사기극'이야말로 진짜로 '대국민 사기극'이 틀림없어 보일 정도였다.

 

어쨌든 '진실은 하나'일 수밖에 없고, 결국 저 '위대한 판관'인 시간이 다 해결해 줄 테니, 관전하는 사람들로서는 그저 조금 더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겠다 싶다.(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도대체 이 사안을 어떻게 판단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히 처음부터 오늘까지 한시도 '피해자의 주장'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나의 확신은 오늘 가해자가 내세운 '이상하리만치 정확한 사진 증거물' 때문에 도리어 더 단단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가해자가 피해자를 '가해'한 사실이 아예 없었다면 굳이 저런 구차한 증거물까지 내세울 필요는 아예 처음부터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겠는가. 아무도 예상치 못한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튼 두고 볼 일이다.)

 

어쨌든 좋다. 여기서 다시 내가 내세운 나의 화두로 얼른 되돌아 오자.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TV 뉴스를 보다가 이 화두를 맨 처음 던진 사람이 나였는지 아내였는지조차 어느새 헷갈린다. 최근 며칠 동안에 보도된 여러 사건들이 우리 두 사람의 머리를 너무 뒤죽박죽으로 만든 탓일까. 아무튼 이런 화두가 아내와 나, 두 사람 가운데 한 쪽의 입에서 틀림없이 나왔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하다.

 

내가 '피해자의 주장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다음과 같은 가해자의 이상한 해명 때문이었다. 이런 해명이야말로 나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날은 7년 전이고, 이 기억을 다 찾아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가해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사건 당일을 전후한 여러가지 다른 일들은 아주 상세히 알고 있으면서도 굳이 '피해자와의 만남 여부'에 대해서만은 한사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투였다. 나에겐 이보다 더 강한 '거부 신호'를 보내는 해명도 없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토록 중요한 사건들을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일까.

 

과연 그럴까. 아무리 7년 전의 일이라고 하더라도 '아주 중요한 사건들'이 하루 온종일 연속해서 일어났다면 그 기억이 결코 흐릿해질 리는 없지 않을까. 이 대목에서 나는 무심코 나의 옛 추억들을 무수히 다시 떠올리게 만든 '어느 소설가의 경우'가 생각이 나서, 그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아내에게 불쑥 꺼내고 말았다.(마침 그 사람이 쓴 자서전 같은 소설인 『데이비드 코퍼필드』도 열심히 읽는 중이었고, '기억의 메카니즘'이 사람마다 다른지 어떤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영국의 어느 필담 좋은 소설가의 경우는 말이지...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서, 자신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겪은 온갖 일들을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내는지, 까마득한 옛날 일들도 마치 엊그제 일어난 일처럼 너무나 잘 그려놓았더라구. 표현들도 어찌나 놀랍던지, 읽는 내내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더라구..."

 

"그래?"

 

"그 작품을 읽는 동안에 나도 덩달아 무수히 많은 까마득한 옛날 일들을 아주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지.. 어느 겨울날, 양지 바른 햇살이 내리 쬐는 창고 같은 건물 벽면에 잔뜩 쌓아 놓은 짚더미 사이에 몸을 눕히고 볕을 쬐다가, 그만 꼬박꼬박 졸던 추억들 까지도.. 아무튼.. 온갖 등장인물들이 다들 어찌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문장들은 또 어찌나 기가 막히고 물 흐르듯 청산유수인지, 셰익스피어를 쏙 빼닮은 느낌이더라구......"

 

"그래? 그게 누군데?"

 

"혹시... 알랑가 모르겠는데... 찰스 디킨스라고 들어 봤어?"

 

"그 사람 알지.. 들어는 봤어.. 마침 어제 TV에도 나오던데? <서프라이즈>에서 말이야..."

 

"아니, 그 사람이 <서프라이즈>에 나왔단 말이야? 어떻게?"

 

"그렇다니까.. 무슨 무슨 드루드의 미스테리인가 하는 소설을 썼다고 하던데, 아직까지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고 하더라구... 그게 아마도 미완성인 추리소설이었다나 뭐라나... 작가가 심장마비로 갑자기 죽는 통에 그랬다나 봐..."

 

햐~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내가 요즘 한창 빠져서 읽고 있는 책이 바로 찰스 디킨스의 작품이었고, 그 작가의 생애와 작품에 대해서까지 '해설'까지 찾아 읽다 보니 어느새 그 작품의 '이름'을 나도 들어봤던 것이다. 아니다. 『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어느새 실제로 구경했던 것이다. 그것도 바로 어제 말이다. 결국 어제 하루 동안에 아내는 집에서 TV를 통해 그 작품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보았고, 나는 같은 날 동네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의 '실물'을 뒤적거리며 구경했던 것이다. 세상에 이런 기막힌 우연도 있구나 싶었다.

 

"나도 사실은『에드윈 드루드의 비밀』이라는 책을 알고는 있지... 그런데 그게 미완성인 추리소설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그 책이 국내에서 이미 번역까지 되어 나와 있을 줄은 새까맣게 모르고 있었지. 마침 어제 도서관에 갔다가 그 책을 한참이나 '구경'하다가 왔었는데, 바로 그 책이 TV에 소개되었다니 정말 놀랍군...."

 

"그랬구나.."

 

아무튼 찰스 디킨스가 미완성으로 남긴 그 작품이 아직도 그토록 화제일 줄은 몰랐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 작품을 두고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아직도 무슨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범인이 누군지만큼 사람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일도 드문데, 천재 작가인 찰스 디킨스가 바로 그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으니, 어찌 사람들이 스스로 '작가'가 되는 일조차 마다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쨌든 '범인'은 기어코 찾아내야 할 테니.

 

"도대체 범인이 누구지?"

 

[시선강탈] ‘서프라이즈’ 지금까지 논란 중인 찰스 디킨스의 애드윈 드루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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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8-03-13 0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도 처음 들어보는 책인데요, 일단 제목에 미스테리라는 말이 들어가면 관심이 증폭되어요. 더구나 oren님께서 이렇게 호기심이 가게 페이퍼를 올리셨으니...^^
저도 오늘 뉴스 기사 보면서, 고개를 갸웃갸웃했어요.

oren 2018-03-13 09:37   좋아요 0 | URL
최초에 폭로가 나올 때만 해도 ‘사건의 양상‘이 이렇게 이상한 방향으로 크게 변할 줄은 몰랐어요.

정의원의 주장대로, 애초에 ‘그 날‘ 여의도의 호텔에 가지도 않았다면, 왜 굳이 여러 사람들을 불러 놓은 ‘서울시장 예비 후보 출마 기자회견‘까지 부랴부랴 취소했을까 싶은 의문도 드네요.
 

 

TV 뉴스 보기가 겁난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다. 꽤나 믿음직해 보이던 정치인이 하루 아침에 미투라는 거센 폭풍에 휩쓸려 걸레처럼 찢겨나갔다. 건실해 보이던 미소 이면에 감춰진 추악한 몰골이 만천하에 다 드러나고 말았다. 자신이 당한 피해를 간신히 세상 밖으로 힘겹게 밀어내는 듯한 가련한 피해자의 인터뷰를 보고 있자니 유력 정치인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다시금 치가 떨릴 지경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가해자들이 미투 폭풍에 계속 까발려질지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다. 아직도 수면 아래에서 괴물처럼 몸을 숨긴 채 갖은 방법으로 피해자를 억누르고 협박하면서, 자신들의 악행이 드러날까봐 노심초사 전전긍긍하는 인간들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아 있을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나라 속담 가운데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은 때로는 너무 나약하게 들릴 때도 있다. 성폭행을 당해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파괴된 여자가 자신이 당한 끔찍한 폭행조차 세상에 알릴 수 없다면 얼마나 억울할까. 그 원통함이 얼마나 뼈에 사무칠까. 나로선 감히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오늘 저녁 뉴스를 보면서 가장 마음이 아팠던 대목도 바로 피해자가 TV 인터뷰에 나온 이유을 밝히는 대목에서였다. 그녀는 절규하고 있었다. 이렇게라도 세상에 밝히지 않으면 도저히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고, 오늘이라도 당장 자신이 죽을 것만 같았다고 말이다. 그런 가슴아픈 절규가 어찌 이 땅에 그녀뿐이랴. 소리없는 수많은 아우성이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 뒤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아직도 숨을 죽인 채 '사무친 원한'을 그저 가슴 속에 파묻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야 할 피해자들이 얼마나 더 많이 남아 있을까.

 

아주 오래된 서양 신화에서조차 '성폭력 사건'은 빠지지 않았다. 한 번만 읽으면 결코 잊을 수 없는 '성폭행 사건의 끔찍한 전말'이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의 복수'에 모두 담겨 있다. 이 이야기를 맨 처음 읽은 이후로 좀처럼 잊을 수 없어서 베껴놓은 싯구절들이 적지 않았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의 복수  그 이야기를 이번 기회에 교훈 삼아 다시금 재정리해 보고 싶다.

 

 * * *

 

 

필로멜레와 프로크네,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 1861, 퐁텐블로 성

 

 

까마득한 옛날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 판디온이라는 왕이 살고 있었다. 야만족의 무리가 바다를 건너와 이 나라를 어지럽힐 때 이웃 나라 트라키아에 살던 테레우스 왕이 원군을 이끌고 와서 적들을 패퇴시켰다. 그가 재산도 많고 군사도 많았던 터라 판디온은 그를 프로크네와 결혼시켜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결혼한 지 다섯 해가 지나자 프로크네가 남편에게 아양을 떨며 말했다. "그대가 아우를 조금이라도 사랑하신다면 내가 아우를 방문하는 것을 허락해주시든지 아니면 아우가 이리 오게 해주세요." 라고. 그래서 테레우스는 곧 함선들을 바닷물에 띄우고 직접 아테네로 향했고, 이내 장인에게 '용건'을 말한 뒤 처제를 자기와 함께 가게 해주면 빠른 시일 안에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보라, 필로멜라가 화려하게 성장하고 들어왔다.

하나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 화려했다. 물의 요정들과 나무의 요정들이

숲 속을 거닐 때의 모습이라고 우리가 들었던 그런 모습이었다.

그들도 그녀처럼 세련되고 우아할 수 있다면 말이다.

소녀를 보자 테레우스는 순식간에 활활 타올랐으니,

그 모습은 마치 누군가가 익은 곡식이나 마른 풀이나

축사에 쌓아놓은 건초 더미에 불을 지를 때와 다르지 않았다.

그녀의 미모는 실제로 그럴 만도 했다. 하나 그의 경우 타고난

욕정에 더욱 자극 받은 데다, 원래 그 지방 사람들이 애욕에 약했다.

그렇듯 그는 자신의 부족과 자신의 악덕 탓에 타올랐던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447∼460

 

 

정욕에 눈이 멀게 된 테레우스에게 무슨 일이 더 남았겠는가. 어서 빨리 처제를 배에 태우고 떠나는 일 말고. 그가 장인에게 드리는 간청 때문에 도리어 칭찬까지 듣게 된 건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었다.

 

미친 사랑의 포로가 된 만큼 감행하지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었고,

그의 가슴은 그 안에서 타고 있는 불길을 억제할 수 없었다.

이제 그는 지체되는 것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프로크네의 부탁을

열심히 되풀이하며 그녀의 이름을 빌어 자신의 소원을 이루려 했다.

사랑은 그를 달변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요구가 지나치다 싶으면

그때마다 그것은 프로크네의 뜻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것도 그녀가 그렇게 시킨 양 그는 간청에 눈물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하늘의 신들이시여, 얼마나 많은 눈먼 밤이 인간의 가슴속을 지배하는

것입니까? 테레우스는 자신의 범죄 계획 자체에 의해 경건하다는

평을 들었고 자신의 범행으로 칭찬까지 들었던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465∼474

 

장인은 마침내 자신의 딸에게 그녀의 언니를 방문하도록 허락했고, 먼 길을 찾아온 사위를 대접하기 위해 푸짐한 잔치를 베풀고 나서 이튿날 사랑하는 딸과 눈물의 작별을 나누었다.

 

일단 필로멜라가 색칠한 배에 오르고 노를 저어

육지가 멀어지자 그는 "내가 이겼다! 내가 바라고

바라던 것이 나와 함께 실려가고 있다!"고 외쳤다.

야만인은 기뻐 날뛰며 마음속으로 자신의 욕망을 간신히

뒤로 미루었고, 그녀에게서 결코 눈을 떼지 않았으니,

그 모습은 마치 윱피테르의 맹금류인 독수리가 구부정한 발톱으로

산토끼를 낚아채어 높다란 곳에 있는 제 둥지를 내려놓으면

포로는 도망갈 데 없고 포획자는 제 먹이를 노려볼 때와

다르지 않았다. 어느새 여행이 끝나자, 그들은 여행에 지친

삼선들에서 내려 자신들의 해안에 상륙했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511∼519

 

그 이후에 테레우스는 판디온의 딸을 태고의 숲으로 가려져 있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외양간으로 끌고 가서 그곳에 가두었고, 마침내 흑심을 드러낸 왕은 한낱 소녀에 불과한 그녀를 힘으로 제압했다. 이 끔찍한 성폭행 직후의 피해자의 절규와 가해자의 끔찍한 만행을 오비디우스보다 더 절절하게 묘사할 시인은 찾기 어려우리라.

 

그녀가 떨고 있는 모습은 부상당한 채 잿빛 늑대의 입에서 벗어났지만

아직 자신의 안전을 믿지 못하는 겁먹은 새끼 양이나, 또는 제 피에

깃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아직도 겁에 질려 자기를 꼭 붙잡고 있던

그 탐욕스런 발톱을 무서워하는 비둘기와 같았다.

곧 정신이 돌아오자 그녀는 자신의 헝클어진 머리를 쥐어뜯고

애도하는 사람처럼 두 팔에 타박상을 입히다가 두 손을 내밀며 말했다.

"오오, 야만인이여, 이 무슨 끔찍한 짓이오!

오오, 잔혹한 자여! 내 아버지의 지시도, 내 아버지의 경건한 눈물도,

내 언니의 사랑도, 내 처녀성도, 그대의 혼인 서약도

그대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던가요? 그대는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놓았어요. 나는 언니의 시앗이 되고,

그대는 이중의 남편이 되었어요! 나는 그런 벌을 맏을 만한 짓을

하지 않았어요. 배신자여, 더 저지르지 않은 범죄가 없도록

왜 내 목숨은 빼앗지 않는 거죠? 그대가 나를

난행(亂行) 하기 전에 그렇게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랬더라면 내 혼백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으련만! 하지만 만약

하늘의 신들께서 이 일을 보고 계시다면, 신성이란 것이 있다면,

만약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모든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그대는 이 죗값을 치러야 할 거예요. 나 자신이 부끄러움을

벗어던지고 그대가 행한 짓을 폭로할 거예요. 그럴 기회가 주어지면

백성들에게 다가가 알릴 거예요. 만약 이 숲 속에 갇혀

지내게 된다면 나는 숲을 내 비탄으로 가득 채우고

내 치욕의 증인인 바위들을 감동시킬 거예요. 그러면 그것을

하늘이 듣고, 하늘에 신이 계시다면 신도 들으시겠지요."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527∼548

 

사나운 폭군은 이 말에 화가 나기도 하고 또 두렵기도 했기 때문에 칼집에서 칼을 빼어 든 다음 그녀의 머리채를 잡더니 두 팔을 등 뒤로 비틀고 그 팔들을 꼭꼭 묶었다. 그녀가 계속 항의하고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용을 쓰자 그는 집게로 그녀의 혀를 잡고는 무자비한 칼로 잘라버렸다.

 

…… 남은 혀뿌리는 떨고 있었고,

잘린 혀는 꿈틀거리며 검은 대지에게 무엇인지 중얼거리고 있었다.

마치 토막난 뱀의 꼬리가 뛰어오르듯 팔딱팔딱 뛰는 혀는 죽어가면서

안주인의 발을 찾고 있었다. 이런 악행을 저지른 뒤에도

(나로서는 믿어지지 않지만) 테레우스는 욕정을 채우기 위해

성치 않은 소녀의 몸을 몇 번씩이나 더럽혔다고 한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557∼562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나서 테레우스가 뻔뻔스럽게도 프로크네에게 돌아갔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아우의 행방부터 물었다. 그는 괴로운 듯 신음하면서 '그녀의 죽음'에 대해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주며 믿게 하려고 눈물까지 흘렸다. 그러나 그들의 가혹한 운명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태양신이 이륙 십이, 12궁을 모두 통과하자 일 년이 지나갔다.

필로멜라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감시자가 그녀의 도주를

막고 있고, 단단한 돌로 쌓은 외양간의 담들은 튼튼했으며,

말 못하는 입은 당한 일을 알릴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고통은

사람을 매우 창조적이게 하고, 역경은 약삭빠르게 하는 법이다.

그녀는 야만족의 조잡한 베틀에다 날실을 걸고는 흰 바탕에

자줏빛 글자를 짜 넣어 자신이 당한 범행을 새기고 있었다.

그것이 완성되자 그녀는 그것을 한 시녀에게 건네주며 왕비에게

갖다 주라고 손짓으로 부탁했다. 부탁 받은 여인은 자기가

전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프로크네에게 갖다 주었다.

야만적인 폭군의 아내는 그 천을 펼친 후 자신의 아우의

비참한 운명을 읽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기적이었다.) 고통이 그녀의 말문을 닫았고,

혀는 분한 마음을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릴 겨를도 없었다. 그녀는 정의와 불의를

가리지 않고 앞으로 내달았고, 마음속은 온통 복수의 일념뿐이었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571∼586

 

그 무렵은 마침 삼 년에 한 번씩 열리는 박쿠스 축제가 열리던 때였다. 프로크네는 축제의 밤을 틈타 포도덩굴 관을 쓰고 무구를 갖춘 채 하녀들과 급히 숲 속을 찾아가 아우를 찾아냈고, 얼떨떨해하는 아우도 박쿠스 여신도처럼 변장을 시켜서 성벽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눈물을 흘리는 아우를 보며 언니는 말을 이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릴 때가 아니다. 칼을 쓰거나,

칼보다 더 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쓸 때란다.

아우야, 나는 어떤 범행이든 저지를 각오가 되어 있어.

나는 횃불로 이 왕궁을 불지르고 간악한 테레우스를

불속에 던져 넣거나, 칼로 그자의 혀를 자르고

눈을 뽑고 너에게 치욕을 안긴 사지를 절단하거나,

수천의 상처로 그자의 죄 많은 영혼을 몸에서 내쫓을 것이다!

어떤 큰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어. 하지만 그게 무엇이 될지

나는 아직 확실히 모르겠어." 프로크네가 말하고 있는 동안

이튀스가 다가왔다. 아들을 보자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난 그녀는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며 "아아, 너는 아버지를

얼마나 닮았는가!" 라고 말했다. 그녀는 여러 말 않고

속으로 조용히 분을 끓이며 끔찍한 범행을 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들이 다가와 어머니에게 인사하며

작은 팔로 목을 껴안고 소년답게 응석을 부리며

입맞추자 어머니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녀는 분노가 한풀 꺾였고, 그녀의 두 눈은

그녀의 의사와는 달리 본의 아니게 흘러내린 눈물로 젖어 있었다.

하나 일단 지나친 모정으로 자신의 결심이 흔들린다고 느끼자

그녀는 다시 아들에게서 아우의 얼굴 쪽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왜 한 명은 사랑스런 말을

건넬 수 있는데, 다른 한 명은 혀를 잘리고 아무 말도 못하는 거지?

왜 그는 어머니라고 부르는데, 그녀는 언니라고 부르지 못하지?

판디온의 딸이여, 대체 어떤 남편과 결혼했는가? 너는 못난 자식이야!

테레우스 같은 남편에게 성실하다는 것은 범죄야!"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611∼635

 

복수심에 불타는 프로크네는 이튀스를 높다란 궁전의 외딴 곳으로 끌고 갔다. 이내 "어머니! 어머니" 라고 비명을 지르며 애원하고 매달리는 아들을 그녀는 칼로 쳤다. 

 

 

그러고도 그녀는 얼굴조차 돌리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이 한 번의

가격으로도 충분했을 터인데 필로멜라가 칼로 그의 목을 잘랐다.

그리고 그들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는 그의 사지를 해체했다.

이어서 그 중 일부는 청동 솥에서 부글부글 끓었고,

일부는 꼬챙이에 꿰여 지글지글 소리를 냈다.

방 안에는 피가 냇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이어서 아내가 아무 영문도 모르는 테레우스를 이 잔치에 초대하며,

자기 고국의 풍속에 따른 신성한 잔치로 남편만이 참석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시종들과 하인들을 따돌렸던 것이다.

테레우스는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왕좌 위에 높다랗게 앉아

혼자 식사를 하며 제 살로 제 뱃속을 채웠다. 그리고 그는 완전히

마음이 눈멀어 "이튀스를 이리 불러주시오!" 라고 말했다.

그러자 프로크네는 자신의 잔인한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안겨준 파국을 맨 먼저 알리고 싶어서

"그대가 찾는 사람은 안에 있잖아요!" 라고 말했다.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가 재차 묻고 부르자 필로멜라가 자신이 미쳐서

살해한 소년의 피를 머리에 뒤집어쓴 그대로 튀어나오더니

핏방울이 뚝뚝 듣는 이튀스의 머리를 그의 아버지의 얼굴에다

내던졌다. 그녀는 이때처럼 자신의 혀가 말할 수 있기를, 알맞은 말로

자신의 희열을 표현할 수 있기를 더 바란 적은 없었을 것이다.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6권 642∼660

 

이 끔찍한 '피의 복수극'을 그린 그림이 스페인의 어느 미술관에 걸려 있다. 문득 올 초에 스페인으로 훌쩍 여행을 떠났던 아내와 딸이 이 그림까지 돌아봤는지 자못 궁금하다. 스페인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가 이름난 미술관과 박물관을 실컷 둘러보는 일이었다고 하니 말이다.(특히 '프라도 미술관'에 대해서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책까지 빌려봤던 걸로 알고 있다. 언젠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가실 분들은 이 그림을 놓치지 마시길!)

 

 

아들 이튀스의 머리를 마주한 테레우스, 루벤스, 1636~1638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

 

'제 자식의 고기'를 심킨 트라키아의 왕이 그 이후로 어떤 '광란의 몸짓'을 보여줬는지, 그가 분노에 휩싸여 칼을 빼든 채 얼마나 빠른 걸음으로 판디온의 두 딸을 뒤쫓았는지에 대해서도 오비디우스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간다. 시인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 가운데 한 명은 숲으로 향했고, 다른 한 명은 지붕 밑으로 날아들었는데, 그들에겐 어느새 날개가 돋아 났다고 한다. 오늘날까지도 그들의 가슴에서는 살인 행위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고, 그들의 깃털은 피로 얼룩져 있다고 한다.(그리스 시인들에 따르면 프로크네는 나이팅게일이 되었고 필로멜라는 제비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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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멜라 이야기'는 T. S. 엘리엇의 시 『황무지』 에도 등장한다. 그 대목만 소개하면 이렇다.

 

그 고풍의 벽난로 위에는

마치 숲 풍경이 내다보이는 창처럼

저 무지한 왕에게 그처럼 무참히 능욕당한

필로멜라의 변신 그림이 걸려 있다.

나이팅게일은 맑은 목청으로

온 황야를 채우지만,

세상 사람들은 여전히 그 짓을 계속한다.

그 울음은 더러운 귀에 "젹 젹" 소리로 들릴 뿐.

 

고대에 실제로 있었던 '성폭행 사건' 가운데에는 '루크리스의 강간'도 한번쯤 살펴볼 만하다. 이 사건 때문에 '로마의 역사'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으니 말이다. 이 유명한 역사적 사건은 로마 최대의 역사가였던 리비우스의 『로마사』에도 기록되어 있고, 『변신』을 쓴 시인인 오비디우스의 작품 『로마 달력』제2권에도 실려 있는데,  아무래도 그보다는 영국의 시인 셰익스피어가 새롭게 설화시로 창작한 『루크리스의 강간』이 더 유명하지 싶다.

 

로마의 역사를 뒤바꾼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내밀한 심리 묘사가 압권인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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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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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8-03-06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단에는 고작 한두 사람쯤만 이름이 나왔을 뿐입니다..

oren 2018-03-06 09:48   좋아요 0 | URL
정말 그런 듯싶어요. 문단을 비롯한 문화계뿐 아니라 교육계와 종교계 등 수많은 분야에서 숱한 악행들이 저질러진 게 아닌가 싶어요. 어떻게 그런 몹쓸 사람들이 그토록 고상한 분야에서 버젓이 고개를 들고 남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건지, 그게 더 끔찍합니다.

겨울호랑이 2018-03-06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부모에게 먹이는 잔혹한 복수는 ‘아트레우스-티에스테스‘ 이야기 속에서도 확인되는 것 같습니다. 동생에게 아내를 빼앗긴 아트레우스의 복수가 끔찍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 같네요. 매우 잔혹한 복수이지만, 복수자들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면 이들을 잔인하다고만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사회에 미치는 충격이 매우 크네요. 사회에 던진 큰 파장만큼 우리 모두의 생활 여러 곳에서 작은 변화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보게 됩니다.

oren 2018-03-07 00:12   좋아요 1 | URL
일명 ‘펠롭스家의 저주‘라고도 불리는 아트레우스 가문의 이야기는 수많은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에서 너무나 자주 나와서,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그리 낯설지 않은 것 같습니다.

펠롭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가서 힙포다메이아와 결혼하는데,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아버지인 엘리스 왕 오이노마오스와 ‘전차 경주‘를 해서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펠롭스는 오이노마오스의 마부를 매수해서 경주 때 바퀴가 빠져 왕이 전차에서 떨어져 죽게 만들지요. 그런데 펠롭스는 마부에게 약속한 보수를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를 바다에 던져 죽이고 말지요. 그리하여 이 유명한 ‘펠롭스 가문의 저주‘가 시작되더군요.

펠롭스의 두 아들 가운데 아트레우스가 뮈케네의 왕으로 있을 때 아우인 튀에스테스가 아트레우스의 아내 아에로페를 유혹하다 발각되어 추방되고, 나중에 아트레우스는 서로 화해하자면서 튀에스테스를 불러놓고는 그의 두 아들을 죽여 그 고기로 음식을 장만하고 잔치를 벌이지요. 그 내막을 알게 된 튀에스테스는 아트레우스 가문을 ‘저주‘하고요.

튀에스테스가 모르고 자신의 친딸과 교합하여 태어난 자식이 아이기스토스인데, 그는 나중에 ‘트로이아 전쟁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의 情夫가 되어 아가멤논 왕을 살해하고 왕위를 차지하게 되지요.(아가멤논은 아트레우스의 아들이니 아이기스토스와는 서로 ‘4촌‘ 사이였던 셈이죠.)

훗날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가 결국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다시 뮈케네로 돌아 오고, 부정을 저지른 어머니인 클뤼타임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죄를 씻기 위해‘ 아폴론의 명령에 따라 머나먼 타우로이 족의 나라(지금의 크림 반도)로 아르테미스 여신상을 가지러 가지요. 거기서 죽은 줄만 알았던 이피게네이아를 만나고요.

이 ‘펠롭스家의 저주‘ 이야기는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스』 3부작, 에우리피데스의 『오레스테스』,『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엘렉트라』, 소포클레스의 『엘렉트라』에서 계속 등장하고, 오비디우스의 『변신』과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도 끊임없이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여서 나중엔 저절로 익숙해지더군요.
 
아첨과 우정 사이

 

 

그래서 내가 말했네. "누가 무엇을 사랑한다고 제대로 말하려면, 그는 그것의 일부는 사랑하고 다른 일부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자네에게 상기시켜줘야 하나, 아니면 자네도 기억하고 있는가?"

 

"선생님께서 상기시켜주셔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기억나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내가 말했네. "글라우콘, 자네가 그런 대답을 하다니 정말 뜻밖일세. 소년을 사랑하는 사람은 한창때의 소년들을 보면 언제나 뜨거운 열정을 느끼며 그들 모두가 자신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되기에 손색없다고 여긴다는 점을 자네처럼 사랑에 민감한 사람이 잊는다는 것은 부적절하네. 아니면 자네들 같은 사람들은 미소년들을 다음과 같이 대하지 않는단 말인가? 자네들은 사자코를 가진 소년은 귀엽다고, 매부리코는 제왕답다고, 이들 양극단 사이의 중간은 균형이 잘 잡혔다고 칭찬한다네. 자네들은 또한 피부색이 검은 소년들은 남자답다고, 피부색이 흰 소년들은 '신들의 자식들'이라고 부른다네. 벌꿀색이라는 말 또한 한창때의 소년이 안색이 파리해도 싫지 않아서 듣기 좋으라고 연인이 지어낸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마디로, 자네들은 온갖 핑계를 대고 온갖 말을 하며 한창때의 젊은이를 단 한 명도 퇴짜 놓으려 하지 않는다네.(474c∼474e)

 

 - 플라톤, 『국가』, <제5권>


 

 * * *

 

 

어쨌든 모든 사람은 한창 청춘일 때 어떻게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플라톤이 말하듯이 동성애의 상대자로서 사랑하고픈 남자를 충동질하여 호감을 사려는 행동을 함을 우리는 알고 있네. 그런 자는 피부색이 흰 소년들을 '신들의 아이들'이라고 부르고 피부색이 검으면 '남자답다'고 부르는가 하면, 매부리코를 애칭으로 '왕답다'고 하고, 들창코를 '매혹적'으로, 혈색이 누런 소년을 '꿀 색깔'로 부르며 모든 상대를 환영하고 좋아하지. 사랑은 담쟁이덩굴과 같아서 어떤 버팀목에라도 찰싹 달라 붙는 데 재빠르기 때문이네.(229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철학자들의 강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파당 싸움과 전쟁 중에 투퀴디데스는 이렇게 말했네.

 

그들은 보통 받아들여지고 있는 단어들의 의미를 자신들이 행한 행동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의미로 바꿔 버렸다. 그래서 무모한 만용은 진정한 용기로, 신중한 기다림은 그럴듯한 비겁으로, 온건함은 겁쟁이의 구실로, 만사에 대한 명민한 이해는 어떤 일을 맡기에는 행동력이 부족한 것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고. 그래서 하는 말인데, 누가 아첨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주의 깊게 관찰하여 감시의 고삐를 늦추어서는 안 되네. 낭비가 '베풂'으로, 비겁이 '자기 보전'으로, 충동이 '기민함'으로, 인색이 '검약'으로, 호색한이 '사교적이고 호감을 주는 사람'으로, 성 잘 내고 오만방자한 사람이 '기백이 있는 사람'으로, 미천하고 온순한 사람이 '친절한 사람'으로 불리는 것들이지. 플라톤도 어디선가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애인의 아첨꾼이 되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부른다고 말했네. 사자코의 애인은 '매혹적'인 사람, 메부리코의 애인은 '왕과 같은' 사람, 피부색이 검은 사람은 '사내다운' 사람, 살갗이 희고 금발인 사람들은 '신들의 아이들'로 말이지. 반면에 '벌꿀 색조'의 사람은 순전히 혈색이 나빠 누르스름해진 애인을 애칭으로 기분 좋게 만든 말이네. 하지만 못 생긴 남자를 미남이라고 믿게 하고, 키 작은 사람이 키 크다고 믿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속이는 것도 아니고, 그가 앓는 상처는 가벼워 불치의 것도 아니네.

 

그러나 악을 덕으로 취급해 칭찬하는 사람의 경우는 다르네. 그는 악에 분개하지 않고 오히려 악을 기뻐하지. 그래서 자기 잘못에 대한 온갖 수치심을 못 느낀다네. 이것이 일종의 큰 재앙을 초래했는데, 시켈리아 주민으로 하여금 디오뉘시오스와 팔라리스의 야만적인 잔학 행위를 '불의와 부정에 대한 증오심의 발로'로 부르게 함으로써 큰 고통을 당하게 했네. 아이귑토스를 파멸시킨 것 역시 이것이었네.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유부단, 그의 종교적 심취, 그의 찬가, 그가 두드리는 북소리에다가 '경건심'과 '신들에 대한 헌신'의 이름을 갖다 붙였기 때문이지. 이것이 바로 공화정 말기 당시에 로마인들의 성격을 비뚤어지게 하고 훼손시킨 것이었네. 안토니우스의 사치, 그의 무절제한 행위, 화려한 전시를 "권력의 신과 행운의 여신의 손을 적절히 이용하는 그의 유쾌하고 친절하고 고상한 행동들"로 두둔하려 했기 때문이지. 프톨레마이오스로 하여금 주색잡기에 빠지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네로에게 비극의 무대를 설치해 주고 그에게 탈을 쓰게 하고 편상(編上) 반장화를 신게 했던 것은 이것 말고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것이 그의 아첨꾼들의 칭찬이 아니었는가?

 

어떤 왕이라도 노래 한 곡조 웅얼거리면 아폴론 신, 술 한 잔 하면 디오뉘소스 신, 레슬링을 하면 헤라클레스 신이라 부르지 않는가? 그렇지 않으면 왕은 기쁨을 누리지 못하지. 그래서 왕은 아첨에 의해 기쁨을 얻고 온갖 종류의 불명예스런 일에 빠져 들지 않았는가?(277∼281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아첨꾼과 친구는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선인(善人)을 아주 사랑하게 될 때매다 우리가, 플라톤이 말한 대로, 자제력을 갖춘 사람 자신을 축복받은 인간으로, "그리고 이러한 사람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들을 듣는 동석인도 역시 축복받은 인간"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그의 습관, 걸음걸이, 얼굴 표정, 그리고 미소에 탄복하여 정을 느껴, 열심히 그와 동참하려 하고, 말하자면 그 관계를 굳건히 하려 하게 된다면, 그때는 우리가 정말 덕 쌓기에서 진전을 보았다고 밍어야 한다네. 더욱이 다음 경우도 마찬가지라네. 우리가 선인들을 찬미하기를 그들의 밝은 행운의 시절에만 국한하지 않는다면, 게다가 또 연인들이 서로 좋아해 상대가 말더듬이거나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라도 상관치 않으며, 또 슬픔과 비참이 가득한 속에서 실의에 차 눈물을 흘린 판테이아가 아라스페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처럼, 아리스테이데스의 [도편] 추방, 아낙사고라스의 투옥, 또는 소크라테스의 빈곤, 또는 포키온에게 언도된 [사형] 판결 등등을 생각해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심지어 이런 역경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덕은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덕에 가까이 가려고 애쓰고 있다는 연유이므로, 덕 쌓기의 진전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네. 이런 뷰류의 각 경험에 대해 에우리피데스는 이렇게 감정을 토로하고 있지.

 

훌륭한 사람들은 어떤 것에서나 영예를 찾느니.

 

왜냐하면 무서운 것에 대해서 아무런 불안 공포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그것에 감복하여 본뜨려는 열정을 지닌 자는, 명예로운 것을 그냥 수수방관하고만 있을 수 없기 때문이네. 이런 뷰류의 사람들에게는 이미 어떤 사업을 하거나, 관직에 취임하거나, 행운을 잡거나 할 때 자기들 눈앞에 현재 또는 과거의 선인들을 놓고 깊이 성찰하는 것이 한결같은 습관이 되었지. "이 경우 플라톤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에파메이논다스는 뭐라고 말했을까? 뤼쿠르고스 자신이나 아게실라오스는 어떻게 생동했을까?" 이와 같은 거울들 앞에서,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들은 치장하고 습관을 고치며 천한 말을 자제하거나 정념의 발동을 끈다네.(404∼407쪽)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 <덕을 쌓는 사람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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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06 14: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oren님께서 인용해 주신 글 속에서 플라톤의「파이돈」의 ‘상기‘, 「향연」에서의 ‘에로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중용‘ 내용을 발견할 수 있으니 플루타르코스가 여러 차례 언급한 이유도 납득이 갑니다^^:

oren 2018-01-06 15:20   좋아요 1 | URL
아하.. 제가 인용한 글이 플라톤의 『파이돈』과 『향연』에서도 ‘다시‘ 나오는군요. 그 책들도 『국가』를 다 읽고 나면 읽어볼 참입니다.(『향연』은 예전에 읽어봤지만 제 기억에 남아 있는 문장이 거의 없어요.)

플라톤의『국가』를 읽는 동안 곁에 함께 펼쳐 놓으면서 읽는 책들이 자꾸만 쌓여 갑니다. 플라톤은 호메로스와 비극 작가들의 작품을 너무나 자주 인용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루타르코스 등은 플라톤의 『국가』를 자꾸만 거듭 인용하니까 말이지요.(예전에 <플루타르코스의 모랄리아>를 읽을 때, <플라톤의 국가>가 인용된 부분을 여러차례 표시해 둔 게 큰 도움이 되네요...)

cyrus 2018-01-06 1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의 책을 읽게 되면 oren님의 글을 많이 참고해야겠어요. 글 속에 포함된 oren님이 읽은 책을 읽어보고 싶어요. ^^

oren 2018-01-06 16:09   좋아요 0 | URL
플라톤의 『국가』를 뒤늦게(?) 새로 읽다 보니 이 책 속의 문장들을 여러차례 인용했던 다른 책들도 다시 생각나더군요. 아마도 이 책을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은 제 짐작으로는 그의 직계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였지 싶은데(『시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만 봐도 그렇더라고요.), 그 이외에도 플루타르코스를 비롯해서, 몽테뉴, 아담 스미스, 쇼펜하우어, 니체, 하이데거 등등이 인용했던 유명한 문장들을 직접 만나는 재미가 여간 쏠쏠하지 않네요.
 

 

그의 대화들을 교리의 일관된 시스템으로 읽지 말고, 유머, 재치, 정신작용, 신화라는 멋진 비유들로 가득한 지적 드라마로 읽으면 좋다. 대화들은,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인물 중 하나인, 못 생겼지만 매력적이고 짐짓 겸손한 척하는 소크라테스를 지적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 클리프턴 패디먼

 

 * * *

 

고전을 재미있게 읽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책 속에 담긴 내용을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직접 비춰보면서 읽는 것이다. 고전이 현실과 아예 동떨어져 있다면 도대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보자면 때때로 고전을 읽는 '타이밍'을 잘 맞출 필요도 있을 듯하다. 그걸 일부러 겨냥하기가 무척 힘든 줄은 알지만 말이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인 고전 속에 담긴 문장들이 내게 가장 재미있게 읽힐 때는 바로 다음과 같은 느낌이 찾아들 때다.

 

어? 이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내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어쩌면 이토록 자세히도 알고 있지?

 

이런 느낌이 들기 시작하면 그 고전을 갑자기 놀라운 흡인력을 발휘한다. 고전 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인물들이 갑자기 현실 속의 인물들과 급속히 가까워지거나 혹은 대체된다.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예외일까? 아니다. 대학에 다닐 때 뭣도 모르고『국가』를 처음 읽었을 때는 이런 경험을 전혀 하지 못했던 듯하다. 책을 읽는 사람도 바뀌고 세월도 많이 흐르다 보니 플라톤의『국가』도 아주 흥미로운 책으로 돌변한 듯하다.

 

 

 * * *


 

"갈라져서 여러 개로 분열되는 것보다 국가에 더 큰 악이 있을까? 또는 결속과 통일보다 국가에 더 큰 선이 있을까?"

 

"없어요."

 

"그런데 국가를 결속시켜주는 것은, 가능한 한 모든 시민이 같은 성공과 실패를 기뻐하고 괴로워할 때의 그 기쁨과 고통의 공유겠지?"

 

"물론이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러나 국가와 그 주민들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났는데 어떤 사람들은 크게 괴로워하고 어떤 사람들은 크게 기뻐한다면, 개인 간의 이러한 감정 차이는 결속을 저해하겠지?"

 

"당연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또는 '남의 것'과 '남의 것이 아닌 것' 같은 표현을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할 때겠지?"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가장 훌륭하게 경영되는 국가는 최대 다수가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표현을 같은 사물들에 대해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국가이겠지?"

 

"물론이지요."

 

"또한 가장 개인을 닮은 국가이겠지? 예컨대 우리 가운데 누가 손가락을 다치면, 지배적인 부분의 휘하에서 몸과 혼을 하나의 체계로 결합시키는 유기체 전체가 그것을 감지하고는 몸의 한 부분이 당하는 고통을 전체로서 함께 느낀다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은 손가락이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라네. 또한 고통을 느끼든 안도의 쾌감을 느끼든 인간의 다른 부분에도 같은 원칙이 적용되겠지?"

 

"네, 같은 원칙이 적용돼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리고 선생님의 질문에 답변하자면, 가장 잘 다스려지는 국가가 그런 상태를 가장 닮았어요."

 

"그러니 개별 시민에게 좋은 일이나 궂은 일이 일어나면, 그런 국가는 그 개별 시민이 자신의 일부라고 강조하며 전체로서 함께 기뻐하거나 함께 슬퍼할 것이네."

 

"훌륭한 법을 갖춘 국가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288∼289쪽)

 

 - 플라톤, 『국가』, <제5권>

 

 * * *

 

"어떤가?" 하고 내가 말했네. "전투에서 이겼을 때 전사자들에게서 무구(武具) 외에 다른 것을 벗겨가는 것은 좋은 관행일까? 아니면 그런 관행은 겁쟁이들에게 적군과 맞서지 않을 핑계만 대주는 것이 아닐까? 그들이 시신 주위로 어슬렁거리는 것이 아주 중대한 일인 것처럼 말일세. 아닌 게 아니라 이런 약탈 관행 때문에 이미 많은 군대가 파멸을 맞았다네."

 

"물론이지요."

 

"시신을 벗기는 것은 돈을 밝히는 노예다운 짓이라고 생각되지 않는가? 적군은 갖고 싸우던 무구들만 남겨두고 생명은 이미 날아가버렸는데 죽은 시신을 적군 취급한다는 것은 여자답고 속 좁은 짓이 아닌가? 자네는 그것이 던져진 돌멩이들에는 화를 내면서도 돌멩이들을 던져대는 사람은 내버려두는 암캐들의 태도와 뭐가 다르다고 생각하는가?"

 

"전혀 다르지 않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 전사들이 시신을 벗기는 것을 허용해서도 안 되고, 적군이 장례를 위해 자기편 전사자를 들고 가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될 것이네."

 

"제우스에 맹세코, 절대 그래서는 안 돼요."

 

"또한 우리는 적군의 무구, 특히 헬라스인들의 무구를 신전에 봉헌하는 일이 없을 것이네. 만약 우리가 다른 헬라스인들과의 선린관계에 관심이 있다면 말일세. 오히려 우리는 동족의 무구를 봉헌함으로써 신전들을 더럽힐까 봐 두려워할 것이네. 아폴론 신께서 다른 말씀을 하시지 않는 한 말일세."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하고 그가 말했네.

 

"헬라스 땅을 황폐화하고 집들을 불사르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의 전사들은 적군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내 생각에, 그들은 그중 어떤 짓도 해서는 안 되고 그해 농작물만 실어가야 하네. 내가 자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해주기를 바라는가?"

 

"물론이지요."

 

"내가 보기에, '전쟁'과 '내분'은 이름도 서로 다르지만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에 관련됨으로써 실제로도 서로 다른 것을 뜻하는 것 같네. 내가 말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분쟁 가운데 하나는 동족 또는 친족끼리의 분쟁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과의 또는 남남끼리의 분쟁일세. 우리는 그중 동족끼리의 분쟁은 '내분'이라 부르고, 외국과의 분쟁은 '전쟁'이라고 부르네."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전혀 사리에 어긋나지 않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다음의 내 주장도 사리에 어긋나지 않는지 살펴봐주게나. 내 주장인즉, 헬라스인들은 저들끼리는 동족이고 친족이지만 비헬라스인들에게는 남남이고 외국인들일세."

 

"네, 맞아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렇다면 헬라스인들이 비헬라스인들과 싸우거나 비헬라스인들이 헬라스인들과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이 전쟁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타고난 적이라고, 그래서 그러한 적대행위는 '전쟁'이라 불리어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네. 그러나 헬라스인들이 헬라스인들과 싸운다면, 우리는 그들이 타고난 친구들이지만, 그런 경우에는 헬라스가 병들어 분쟁에 휘말려 있다고, 그래서 그런 적대행위는 '내분'이라 불리어 마땅하다고 말할 것이네."

 

"나도 선생님의 견해에 동의해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래서 내가 말했네. "방금 우리가 내분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한 사태가 어디에선가 발생해 나라가 내분에 휘말렸다고 가정해보게. 만약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농토를 황폐화하고 집들을 불사른다면 내분은 가증스러운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양쪽 모두 애국심이 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이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자신들의 유모와 어머니를 황폐화하지 않을 테니 말일세. 그러나 이긴 쪽이 진 쪽의 농작물만 약탈해가고 진 쪽을 언제까지나 전쟁을 할 상대가 아니라 언젠가는 화해하게 될 상대로 대한다면, 절제 있는 태도로 간주될 것이네."

 

"그래요. 후자의 태도가 훨씬 인간적이니까요" 하고 그가 말했네.

 

"어떤가?" 하고 내가 물었네. "자네가 세우고 있는 나라는 헬라스 국가가 될 것 아닌가?"

 

"그야 당연하지요" 하고 그가 대답했네.

 

"그렇다면 그 나라의 시민들은 훌륭하고 인간적인 사람들이 되겠지?"

 

"물론이지요."

 

"그들은 헬라스인들을 사랑하고, 헬라스를 조국으로 여기고, 다른 헬라스인들과 같은 종교 축제에 참가하게 되지 않을까?"

 

"물론이지요."

 

"그렇다면 그들은 동족인 헬라스인들과의 분쟁을 '내분'이라 여기고 '전쟁'이라고 부르지는 않겠지?"

 

"전쟁이라고 부르지 않겠지요."

 

"그들은 언젠가는 화해하게 될 사람들처럼 싸우게 되겠지?"

 

"물론이지요."

 

"그들은 선의에서 상대방이 절제를 지키게 해주려는 것이지, 상대방을 처벌하려고 예속시키거나 파괴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네. 그들은 정신 차리게 해주려는 것이지, 적군은 아니니까 말일세."

 

"그렇겠지요" 하고 그가 말했네.

 

"그들은 헬라스인들이기에 헬라스 땅을 황폐화하지도 않고 집들을 불사르지도 않을 것이네. 그들은 또한 남자건 여자건 아이들이건 한 나라의 주민 전체가 자신들의 적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분쟁에 책임이 있는 적대적인 소수만을 자신들의 적으로 간주할 것이네. 따라서 그들은 우호적인 다수의 농토를 황폐화하거나 집을 파괴하지 않을 것이며, 이들 분쟁에 책임이 있는 자들이 죄 없이 고통받는 사람들에 의해 죗값을 치르도록 강요받을 때까지만 적대행위를 계속할 것이네."(304∼307쪽)

 

 - 플라톤, 『국가』, <제5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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