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가 태어난 날인가 보다. 그는 1978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인물인데, 나는 여태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의 책에서 딱 한번 마주칠 기회밖에 가지지 못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소개된 '첼름이라는 가상의 마을 출신의 어느 한 숙맥'의 이야기는 내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던지 쉽사리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건 아마도 미국의 쿨리지 대통령 부부가 방문했던 어느 농장의 수탉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얘기를 여러 친구들에게 퍼뜨렸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페이스북 친구인 모 대학 심리학 교수 한테까지 들려줬는데, 아쉽게도 그 분은 '쿨리지 효과'뿐만 아니라 스티븐 핑커의 책조차 낯설어 하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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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쿨리지 효과

새 파트너를 만나면 남성의 성적 욕구가 깨어나는 현상은 유명한 일화 덕분에 쿨리지 효과라고 불린다. 미국의 30대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와 그의 아내가 한 농장을 방문하던 중 따로 시찰을 하게 되었다. 닭장을 둘러보던 쿨리지 여사는 수탉이 하루에 몇 번이나 암탉과 관계를 하는지 물었다. "몇 십 번 합니다"라고 안내원이 대답했다. 이번엔 대통령이 닭장을 보고 수탉에 관해 물었다. "매번 같은 암탉과 합니까?" "아닙니다. 각하. 매번 다른 암탉과 합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영부인에게도 그 말을 해주세요"라고 당부했다. 많은 수컷 포유동물들이 교미를 할 때마다 암컷이 바뀌면 지칠 줄 모르는 정력을 과시한다. 실험자가 이전 파트너에게 가면을 씌우거나 냄새를 없애도 속지 않는다. 바꿔 말하자면 이것은 수컷의 욕망이 '무차별적'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수컷들은 어떤 부류의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신경 쓰지 않지만, 어느 암컷과 짝짓기를 하는가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다. 이것은 내가 2장에서 관념연합론을 비판할 때 중요하다고 주장했던, 개인과 범주 간의 논리적 구별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다.

남자들은 수탉 같은 정력을 갖고 있진 않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그들의 욕망에서도 쿨리지효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의 문화를 포함하여 많은 문화에서 남자들은 아내에 대한 성적 열망이 결혼 후 몇 년 내에 시든다고 보고한다. 남성의 성욕 감퇴를 촉발하는 것은 아내의 외모나 그 밖의 특징이 아니라 개인으로서의 개념이다. 새 파트너에 구미가 당기는 것은, 딸기에 질리면 초콜릿 케이크에 끌리는 경우처럼 다양성이 인생의 양념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예가 아니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의 소설〈불운한 녀석 먼저〉에서, 첼름이라는 가상의 마을 출신인 한 숙맥이 여행을 떠나지만 길을 잘못 들어 뜻하지 않게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우연의 일치로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다른 마을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겹기만 했던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나 매력을 느끼고 황홀해한다.(7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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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23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리지 효과에 관한 이야기는 어느 책에서 읽었어요.

고향 마을과 똑같이 생긴 다른 마을을 만났다?
아내와 똑같이 생긴 여자를 만났다?
사람도 변신하면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는건가요? ^^

oren 2012-11-23 15:10   좋아요 0 | URL
그저께 점심을 함께 먹었던 어떤 친구한테 이 내용을 얘기해 줬더니,
"그래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는 얘기였구나..." 하더군요.. ㅎㅎ
 
<싱거운 후기> ㅇ님의 댓글에 답합니다



페크님께서 두번씩이나 인용해주신 부분(‘헌신적인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랑은 그 속을 벗겨보면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헌신적 사랑은 이기심의 또다른 가면일 뿐이다)에 대해서는 쉽게 긍정할 수도 있겠지만, 좀 더 진지하게 반박할 수도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너무 급작스럽게 범주를 넓히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이타적 사랑이나 숭고한 인류애 등을 생각해 보면 '진정한 사랑'이란 결국 '타인을 자기와 동일시'하는 데까지 승화시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린 문제라고도 여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러한 중차대하고도 심각한(?) 얘기를 여기서 계속 더 밀고 나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아무튼 페크님의 이 글을 읽으면서 제 머리속에 떠올랐던 책 속의 여러 구절들이 있어서 두서없이 모아봤습니다. 한편으로는, 찰스 다윈과 리처드 도킨스를 비롯한 숱한 과학자뿐 아니라 수많은 심리학자와 철학자들까지도 끊임없이 숙고했던 문제를 제가 여기서 이렇게 어줍잖게 마구 인용해도 좋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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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

도덕감에도 동일한 종류의 연구를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민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우선 생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서서 그들의 고통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연민이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돕기보다는 그 비참함을 피하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고통은 당연히 우리가 혐오하는 것이니까. 그러한 연민의 원천에 혐오감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는 새로운 요소가 지체하지 않고 거기에 결합한다.
라 로쉬푸꼬처럼38)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공감이 하나의 계산, <닥쳐올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라 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재난이 불러 일으키는 동정(同情) 속에는, 두려움이라는 것이 아마도 어떤 역할을 하기 위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저급한 형태의 연민일 뿐이다.

38) <연민은 자주 타인의 불행에서 보는 우리 스스로의 불행에 대한 감정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에 대한 약삭빠른 예견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은 비슷한 경우에 그들도 우리를 돕게 하기 위함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행하는 봉사는 고유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미리 장만해 놓는 계산이다>

 - 앙리 베르크손,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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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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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이론

이기적 유전자 이론이란 "동물들은 자기 유전자를 퍼뜨리려고 노력한다"는 뜻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그 이론을 정확히 이해한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을 포함하여 동물들은 유전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신경도 쓰지 않는다. 사람들이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어쩔 수 없어서다. 그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자식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한다. 이기적인 것은 개인의 실제 동기가 아니라 그 개인을 구성한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다. 유전자는 동물의 뇌를 배선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퍼뜨리려고 '노력'하고, 그래서 그 동물들은 자신의 친족을 사랑하고, 그들을 따뜻하고 배부르고 안전하게 키우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위와 같은 혼동은 사람들의 유전자를 그들의 진정한 자아로 간주하고, 유전자의 동기를 사람들의 가장 깊고 진실하고 무의식적인 동기로 간주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렇게 오해하게 되면 모든 사랑은 위선이라는 냉소적이고 잘못된 도덕에 이르기 쉽다. 그것은 개인의 실제적 동기와 유전자의 비유적 동기를 혼동한 결과다. 유전자는 꼭두각시를 부리는 주인이 아니다. 유전자는 뇌와 몸을 만들기 위한 조리법으로 작용한 다음 조용히 물러난다. 유전자는 평행우주에 존재하고, 몸 전체에 흩어져 있으며, 그들만의 의제를 갖고 있다.(616쪽)

 - 스티븐 핑커,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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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극 원인과 근인과의 혼동

우리의 모든 동기가 이기적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울함을 느끼는 사람은 엘비와 똑같은 혼란에 빠져 있다. 궁극 원인(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의 이유)과 근인('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사는가?')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두 의미는 아주 비슷해 보이기 때문에 혼동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밝힌 바에 따르면, 자연 선택의 논리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은 유전자가 이기적 동기를 가진 행위자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그의 비유는 완벽하지만 한편으로는 경솔한 사람들을 함정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성을 품고 있다. 유전자는 비유적 동기-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것-를 가지고 있으며, 유전자에 의해 설계된 유기체는 실제적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같은 동기가 아니다. 때로는 유전자의 가장 이기적인 행위가 인간의 뇌에 이타적인 동기-진심에서 우러난, 무조건적인, 뼛속에서 우러나는 헌신성-를 배선한다.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물려줄) 자식에 대한 사랑, (유전적으로 한 배를 탄) 충실한 배우자에 대한 사랑,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와 동지에 대한 사랑은 우리 인간의 경우(근인의 차원)에서는 한계와 비난을 초월하지만, 유전자의 경우(궁극적 차원)에서는 이기적 행동에 비유된다.(339쪽)

 - 스티븐 핑커, 『빈서판』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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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행복 vs 전 세계의 행복

속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그 자신에게는 전 세계일지 몰라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전 세계의 지극히 하찮은 부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비록 그 자신의 행복은 그를 제외한 전 세계의 행복보다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복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이외의 다른 어떤 사람의 행복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비록 모든 개인이 각자의 마음속에서는 자기 자신을 모든 인류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그가 다른 사람들을 정면으로 똑바로 쳐다보면서 자신은 이 원칙에 따라서 행동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해서는 안 된다. 

 -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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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감각

도덕감각에 대해 다윈은 J.S.밀이 말한 '도덕감정이 천성적인 것이 아니라 얻어진 것이라 하여도 그 때문에 본디의 것이 아니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를 주로 인용하면서 동물의 사회적 본능과 결부된 천성의 감각임을 설명하고 있다.

'다음 명제는 고도로 개연적이라고 생각된다. 즉 부모와 자식의 애정을 포함해 현저한 사회적 본능이 풍부한 동물이라면, 어떤 동물도 그 지적인 능력이 인간과 같거나 혹은 그에 가까운 정도까지 발달하면 당장 도덕 감각, 혹은 양심을 획득할 것이다.'

 - 다윈, 『종의 기원』中에서(책의 말미에 실린 '다윈의 생애와 사상'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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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Pieta)

그러므로 선의, 사랑, 의협심이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든지 간에, 그것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게 한다. 이것들을 움직여 착한 일과 자선 사업을 하게 하는 것은 언제나 '남의 고통에 대한 인식'이며, 이것은 자기의 고통으로 이해되고 자기의 고통과 동일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순수한 사람은 그 본성에 따르면 동정이 있는 것이다.

사랑으로 줄어드는 고통이 크든 작든 간에, 채워지지 않은 소망이 어떠한 것이든 간에, 그것은 상관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다. 칸트는 진실한 선과 덕을 추상적인 반성에서, 또 의무의 개념이나 정언 명령의 개념에서 나온 것인 경우에만 참된 선이나 덕이라고 인정하려 하고, 감정으로서 동정은 약점이며 덕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칸트와는 정반대로 아무런 주저함 없이 단순한 개념은 순수한 덕에서는 순수 예술에서와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고, 모든 참되고 순수한 사랑은 동정이며, 동정이 아닌 사랑은 이기심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기심은 에로스(애욕)이고, 동정은 아가페(순수애)다. 이 둘은 빈번하게 혼합이 된다. 순수한 우정에도 언제나 이기심과 동정의 혼합이 있다. 순수한 우정이란 우리의 개성과 잘 맞는 개성을 가진 친구가 있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거의 우정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동정은 그 친구와 진심으로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거나 그 친구를 위해 이기적이 아닌 희생을 바치는 데에서 나타난다. 스피노자도 "호의란 동정에서 생긴 욕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윤리학》제3부, 정리 27) 우리의 이 역설적인 명제를 확증하는 것으로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언어의 음정이나 애무의 언어는, 동정의 음정과 완전히 일치함을 알게 된다. 이탈리아어로 동정과 순수한 사랑이 피에타(Pieta)라는 같은 말로 표시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918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4권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中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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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1-07 1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을 미워하는 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 자신 안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고 있는 것과 같다. 자신안에 들어 있지 않는 것은 결코 당신을 흥분시키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남을 미워하는 일은 결국 자신을 미워하는 것이다. - 쇼펜하우어, 『세상을 보는 지혜』中에서

이 글을 읽으니 제가 읽은 다음과 같은 글이 생각났어요. 책을 읽다 보면 중복되는 내용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타인을 향한 비난은, 많은 경우 비난하고 있는 사람 자신의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비난하는 사람의 불행한 심리 상태가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비난하는 사람이 오히려 애처롭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 혜민 저,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에서.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 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 위기철 저, <아홉살 인생>에서.

꼼꼼하게 정리하신 덕분에 좋은 글을 읽고 갑니다. ^^
좋은 가을 보내세요.

oren 2012-11-07 19:45   좋아요 0 | URL
저도 혜민스님의 저 책 속 구절을 (나중에)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의 말과 똑같다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한편으로는, 까마득히 오래전부터 불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서 이미 '네 안에 나 있다'는 관념이 깊숙하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쇼펜하우어 역시 불교와 고대 인도의 여러 경전에 두루 심취했던 철학자였기 때문에 "탓 트왐 아시(Tat twam asi)", 즉 '그것이 너다'라는 '위대한 말'에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 같구요.
 
길따라 단풍따라 555km



해마다 가을이면 오색창연한 단풍을 찾아 '가을산행'을 다녀오곤 하는데, 작년과 올해엔 연거푸 예상치 못한 '가을비' 때문에 산행 목적지가  바뀌었다. 작년엔 영암 월출산을 가기로 했다가 남부지방에 비가 많이 온다는 소식 때문에 결국 강원도 방태산으로 방향을 틀었다가, 방태산 등산로 초입에서 '그치지 않는 가을비' 때문에 또다시 발길을 돌려 춘천의 오봉산을 다녀 왔었다.

올해도 애시당초엔 영암의 월출산을 오를 참이었으나, 토요일(10/27)엔 전국에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다시 한번 강원도 '방태산'을 가기로 했다. 아무래도 때는 단풍나들이가 마지막 절정을 이룰 때여서 토요일 새벽 일찍 서둘러서 일산에서 출발하기로 했다. 토요일엔 어차피 산행이 어려운 줄 뻔히 알면서도 일산에서 무려 새벽 6시에 모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 밤까지 멀쩡하던 날씨가 토요일 새벽부터 심술궂게 바뀌어 가을비가 제법 내린다. 일행 다섯이 새벽 어둠과 비를 헤치고 기분좋게 차를 달려 서울을 훌훌 벗어나 강원도에 들어서니 어느새 슬슬 배가 고파왔다. 이른 아침부터 우릴 반길만한 '마땅한 음식점'을 쉽게 찾을 길이 없어서, 내친 김에 아예 미시령을 지나 대포항쪽으로 방향을 틀기로 의기투합하였다. 다들 속셈은 뻔했다. 아침겸 점심으로 싱싱한 회와 매운탕에 쏘주를 곁들이고 나서 적당한 숙소를 잡아놓고 마음껏 '새잡기' 놀이를 만끽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푸른 동해바다도 볼겸.

아침 10시도 채 지나지 않을 무렵에 우리는 이미 대포항 바로 윗쪽에 위치한 다소 한가한 외옹치항에 도착했다. 예전에도 가본 적이 있는 '미영이네' 횟집에 들러 참가자미회와 매운탕을 주문해서 맛있게 먹고, 서둘러 길을 떠나 방태산 가는 길목인 '오색 약수터'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마침 일행중 한명이 설악산 산행을 올 때마다 자주 들르는 '깨끗하고 저렴한 온천장'을 알고 있어서 우리 일행은 금새 숙소를 잡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긴 했지만 어쨌든 훤한 대낮부터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전투대형(?)으로 둘러 앉아 흥미진진한 고스톱 열전에 돌입했다. 

저녁나절엔 산채정식에 감자전과 더덕구이를 안주삼아 동동주를 나눠 마시고, 식사후엔 숙소에 딸린 '온천장'에서 공짜로 느긋하게 온천욕도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목욕까지 다 끝낸 후부타 다시 제2라운드에 돌입하여 밤이 늦도록 '삼매경'에 빠질만큼 새잡기 놀이에 몰두하다가 새벽1시쯤 '내일을 위해' 게임을 종료하였다. 바깥 날씨를 살펴보니 그 시각까지도 비바람이 그치지 않아서 내일 산행은 '일단 자고 일어나서' 결정하기로 했다. 다들 내심으로는 내일 아침까지도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를 바랬는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힘든 산행보다야 따뜻한 방안에 마주 둘러앉아서 게임을 즐기는 게 당장은 훨씬 나을 듯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튿날 아침 일어나 보니 정작 날씨는 거짓말처럼 화창하게 개어 있었다. 다들 서둘러 채비를 갖추고 인근 식당에 들러 황태해장국과 된장찌게 등으로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점심 식사를 위해 '주먹밥'까지 준비해서 약 45km 떨어진 '방태산 입구'을 향해 '한계령'을 따라 서울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날씨는 화창하고 단풍은 그야말로 절정이었다. 더군다나 한계령에서 내린천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필례약수터'에서의 가을단풍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6시간 반에 걸친 고된 산행과 서울로 되돌아오는 길에서의 교통체증 덕분에 몸은 피곤하였지만, 올해도 역시 '잊지못할 가을산행'을 다녀온 것 같아서 마음은 마냥 흡족하다. 내년엔 우리 일행 모두가 기필코 영암의 월출산을 다녀올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 가을 산행은 아무래도 길이 너무 멀어서 '2박3일'은 걸리지 싶다. 가는 데 하루, 이튿날은 월출산, 사흘째는 해남의 두륜산과 대흥사까지 들러보고 올 작정인데 과연 뜻대로 될 지는 그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때 가봐야 알겠지...... 날씨도 도와줘야 되겠고......


 * * *

○ 일시 : 2012. 10. 27(토) 06:00 ∼ 10. 28(일) 23:30
○ 이동 경로 : 일산 → 서울춘천고속도로 → 미시령 → 외옹치항 → 오색온천(1박) → 한계령 →
                            필례약수 → 방태산 자연휴양림 → 이단폭포 → 주억봉 정상 → 인제 → 홍천 →양평 → 일산


1. 화창하게 갠 일요일(10/28) 아침




2. 필례약수터 가는 길 





3.  어젯밤 내린 비 덕분에 더욱 빛나는 가을단풍




4. 초록의 단풍잎조차 물든 느낌  





5. '이대로 멈췄으면' 싶은 풍경 




6. 때는 바야흐로 가을의 절정




7. 워낙 외진 곳이어서 사람들의 발길조차 뜸한 곳




8. 파란 하늘빛이 아름다운 날





9. 밤새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방태산의 '이단폭포'




10. 주억봉 정상까지는 아직도 2.4km




11. 대청봉, 귀떼기청봉, 화채봉, 점봉산 등등이 한 눈에......




12. '살아서 천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




13. 해발 1,444m의 방태산 주억봉 정상




14. 오대산 능선이 끝없이 펼쳐진 모습(정상에서 남쪽 방향으로)




15. 하늘을 향해 힘차게~




16. '빛'을 찾아 엄청난 높이로 곧게 자란 또다른 나무들




17. 산에 올라 주먹밥에 막걸리 몇잔 마시고 내려왔더니 그 사이에도 세월이 '성큼성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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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디로든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 이래서 가을이 좋다
    from Value Investing 2015-11-02 19:41 
    청춘이 정열을 추구하는 것은 용서하고, 노년이 쾌락을 찾는 일은 금지하는 것은 잘못이다. 나는 젊었을 때는 불타는 정열을 조심성으로 은폐했다. 이제 늙어서는 음산한 심정을 방종으로 풀어 준다. 그 때문에 플라톤의 법칙은 편력을 더 유익하고 교양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40이나 50세 전에 돌아다니는 것을 금지한다. 나는 바로 이 규칙의 제2항으로 60세가 넘어서는 편력을 금지하는 데 기꺼이 동의할 것이다."그런데 이런 나이에 길을 떠나다가는 그 먼
 
 
순오기 2012-11-0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기막힌 풍경, 기막힌 사진~ 무한 감동입니다!

oren 2012-11-04 15:46   좋아요 0 | URL
필례약수터는 저도 처음 가 봤는데 단풍이 정말 환상적이더라구요. 사진 속에 담긴 저 '외국인 처자'도 연신 감탄하면서 단풍숲길을 한참이나 거닐던데, '여길' 어떻게 알고 '어디서' 왔는지 그게 참 궁금하더라는...
 


 



빛은 사물에서 가장 즐거운 요소다. 그것은 모든 선한 것, 모든 구원을 가져오는 상징으로 되어 있다. 어떠한 종교에 있어서도 빛은 영원한 구원을 나타내며 암흑은 영원한 벌을 의미한다. 오르무즈드는 가장 순결한 빛 속에 살고, 아리만은 영원한 밤의 어둠 속에 산다. 단테의 천국에서는 축복을 받은 모든 영혼이 빛의 초점으로서 나타나고, 그것들이 모여서 규칙을 바른 형태로 이룩한다고 하기 때문에, 대체로 런던의 복스홀 공원과 흡사한 모양이라고 생각된다. 빛이 없어지면 우리는 곧 슬퍼하고 빛이 다시 돌아오면 기뻐한다. 색채는 곧 생생한 기쁨을 느끼게 되고 그 색채가 선명해지면 기쁨은 최고도에 달한다. 이것은 모두 빛이 가장 완전한 직관적 인식의 상관자고 조건이기 때문이며, 이러한 인식 방식이야말로 직접적으로 의지를 촉발하지 않는 유일한 방식이다. 왜냐하면 시각은 그 밖의 감각과는 달리 그 자신으로서 직접, 그리고 자신의 감각적 작용으로 기관에서 감각의 쾌감 또는 불쾌감을 느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의지와 직접 결합되지 않는다.(725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에서




 * * *


○ 일시 : 2012.10.25(목) ∼10/26(금)


1. 저녁햇살이 찾아드는 산책길


Shooting Date/Time 2012-10-25 오후 5:05:32


2. 호수에 물든 단풍


Shooting Date/Time 2012-10-26 오후 4:31:53


3. 가을을 찾는 사람들


Shooting Date/Time 2012-10-26 오후 4:38:40


4. 낙엽이 깔리는 저녁


Shooting Date/Time 2012-10-26 오후 5:04:47


5. 화려한 가을





6. 빛이 소멸하는 시간


Shooting Date/Time 2012-10-26 오후 5:27:23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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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빛도 좋지만 소멸하는 시간도 참 좋으네요. 시월을 이렇게 화려하고도 차분하게 잡아두셨군요. 특히 마지막사진에 취합니다. ^^

oren 2012-11-03 21:44   좋아요 0 | URL
어느덧 11월인 데다가 날씨마저 따스함이 점점 소멸해 가는 듯하여 많이 아쉬워요.
저맘때만 하더라도 참 포근한 날씨였는데 말이지요.

사마천 2012-11-04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글플러스에 꼭 모셔야하는데.. 다시 같은 생각이 납니다 ^^

oren 2012-11-06 16:33   좋아요 0 | URL
네.. 사마천님께서 이리 자주 말씀해 주시는데 여태 못가봤네요..
언젠가 구글플러스에 꼭 가보겠습니다.. ㅎㅎ
 

 

 

 

마술적인 영향

좋은 사람들과의 접촉은 반드시 좋은 영향을 미치며 축복을 가져온다. 마치 여행자의 의복에 그가 스쳐온 꽃과 관목의 향기가 배어 있듯이 말이다. 존 스털링을 개인적으로 알고 지낸 사람들은 그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발휘하는 유익한 영향력을 언급한다. 많은 이들이 그 덕분에 고결한 삶에 대한 최초의 자각을 얻고 자신들이 과거 어떤 사람이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달았다. 트렌치(Richard Chenevix Trench)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의 고귀한 성품과 접촉하노라면 고상해지고 고양되는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그와 만나고 헤어질 때는 기존에 습관적으로 생각하던 것보다 더 고차원적인 목표와 목적들을 생각하게 된다."

고귀한 인격은 늘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그런 인물로 인해 고양되고, 그처럼 느끼며, 그와 같은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게 된다. 우리의 마음은 서로 이렇게 작용과 반작용의 마술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344쪽)



 

 * * *

 

 

진동하는 민감한 현

삼백여 년 전에 프랑스의 철학자 디드로는 인간의 감각 소질을 '진동하는 민감한 현'에 비유했다. 그리고 진동하는 현은 다른 현을 진동시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도 두 번째 생각을 호출할 수 있으며, 둘이 모여 세 번째 생각을 불러내고, 이 셋이 네 번째를 다시 끌어내는 등 계속 이어지게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생각의 범위나 수에는 어떤 제한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마음의 악기는 놀라운 도약을 가능하게 하며, 불려나온 하나의 생각은 때때로 불가해한 간격으로 '배음'을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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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10-19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선 좋은 사람들을 만나야겠군요.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생각해요.
좋은 인생을 살려면 좋은 사람들을 가까이에 배치할 것, 이군요.^^

oren 2012-10-23 00:25   좋아요 0 | URL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해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는 당위성과 그럴 수 있는 개연성 사이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을 빨리 깨닫는 일도 무척 중요하다 싶어요. 세상엔 그럭저럭 살아가는 어중이 떠중이들이 너무나 많고, 시간 또한 무한정 있을 줄 알고 그렇게 어영부영 하다보면 세월 다 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싶은 그 때마다 늘 어떤 새로운 결심이 필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