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종문화제를 다녀와서......


어버이날도 그리 멀지 않아,
어느새 홀로 되신 어머님을 찾아 영월로 내려갔다가,
이튿날 어머님을 모시고 영월 법흥사와 김삿갓계곡 등지를 두루 다녀옴.


○ 일시 : 2012. 5. 5(토) 2012-05-05 오전 11:06 ∼ 오후 3:50
○ 장소 : 영월 법수치계곡, 법흥사, 적멸보궁, 김삿갓계곡



1. 영월 법흥사 대웅전




2. 수많은 변태 끝에 마침내 꽃밭위로 사뿐히 내려앉은 나비





3. 낙락장송





4. 싱그러운 봄풀과 함께





5. 법흥사를 감싸고 있는 구봉산 자락





6. 봄햇살 가득~~





7. 풍경조차 고요히 잠든 새봄 새아침





8. 단청이 유난히 화려한





9. 사자산 중턱에 자리잡은 적멸보궁



10. 고즈녁한 봄날





11. 봄햇살이 마당 가득~~





12. 부처님 오신날이 멀지 않은 때......





13. 김삿갓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조선민화박물관'



14. 조선민화박물관 앞 '김삿갓 계곡'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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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8-15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들러 좋은 사진, 잘 보고 갑니다~~
저는 오늘 광릉수목원에 다녀왔어요~ 빗속에 원없이 걸은 전나무숲 길, 참 좋았어요.
비오는 날 숲속 걷기는 아무나 누릴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oren 2012-08-16 00:40   좋아요 0 | URL
오늘 같은 날 광릉수목원엘 다 다녀오시고.... 비가 와서 더더욱 좋았겠어요..

저도 오늘 오전엔 빗속을 뚫고 호수공원으로 나갔었는데 제법 많은 사람들이 비옷 차림으로 무장하거나 우산을 쓰고 나왔고 간혹 우산도 없이 혹은 맨발로 나온 사람들도 더러 있더군요.
저녁무렵엔 '불타는 저녁노을'이 궁금해서 (찐옥수수로 서둘러 끼니를 때우고) 한번 더 나갔다 왔답니다. ㅎㅎ

열매 2013-07-09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사진이 참 좋아요.
특히 6,7,8번 사진이요!
영월에 좋은 곳이 많이 있군요...

oren 2013-07-09 15:34   좋아요 0 | URL
네.. 요즘엔 깊디깊은 오지일수록 더욱 사람들을 이끄는 매력이 많은 듯한데, 영월도 딱 그런 곳이지요.
 


○ 일시 : 2012. 5. 3(목) 2012-05-03 오전 10:47 ∼ 오후 3:47
○ 장소 : 강화도 고려산



1. 또다시 찾아온 새봄, 강화도

Shooting Date/Time 2012-05-03 오전 10:47:48


2.  싱그러운 신록





3. 늙은 고목에 새잎 돋아나듯 노년에게도 봄은 다시 찾아오고......





4. 아뿔싸~~ 만개한 진달래는 '사진 속에서나' 혹은 '내년에나'




5. 고려산에 진달래는 없고, 사람만 잔뜩~~~





6. 꽃보다 사람!





7. 떄이른 하산~





8. 그나마 아쉬움을 조금 달래주는





9. 때는 바야흐로 신록의 계절





10. 눈부신 초록





11. 부처님 오신날이 멀지 않았구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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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2-08-16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보니 저도 강화도에 한번 가보고 싶네용^^

oren 2012-08-17 00:47   좋아요 0 | URL
네.. 카스피님.. 기회가 되면 꼭 한번 가보세요.

저는 아주 오래전에(아마도 1989년쯤) 친구녀석이 자동차를 샀다면서 함꼐 가보자고 해서 처음으로 강화도엘 갔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차가 너무 막혀' 엄청난 고생을 하고 난 이후로 다시는 강화도에 가지 않겠노라 다짐한 적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일산에서 오래 살다 보니 지리적으로 너무 가깝기도 하고, 나름 사시사철 먹거리와 구경거리가 은근히 많은 곳이어서 제법 자주 가게 되는 곳이 강화도랍니다. 특히 동막 해수욕장과 강화도 인삼막걸리를 강추합니다. ㅎㅎ
 


(백혈병이 재발되어 2012년 7월 18일 새벽에 홀연히 떠나간 '친구에게 바치는 글'을 쓰면서......)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

고인의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음이 현상적으로 더 적합하게 파악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식의 죽은 자와의 더불어 있음은 바로 그 고인의 본래적인 종말에 이르렀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죽음은 분명히 상실로서 드러나지만, 그 상실은 남아 있는 자들이 경험하는 상실 그 이상이다. 어쨌거나 상실의 감수 속에서도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321쪽)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일상적인 '서로 함께'라는 공공성은 죽음을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즉 "사망사건"으로서 "알고" 있다. 가깝거나 먼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죽는다." 모르는 사람들이 매일 매시간 "죽는다." "죽음"은 세계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주지의 사건으로 만나고 있다. 죽음은 그러한 사건으로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의 성격인 눈에 안 띔 속에 남아 있다. '그들'은 또한 이런 사건을 위해서 이미 하나의 해석을 확보해 놓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밖으로 말하거나 대개는 조심스럽게 "재빨리" 하는 이야기는, '사람은 결국 다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남의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죽음이 [내가 아니라] '그들'을 적중시킨다는 의견을 퍼뜨린다. 공공의 현존재 해석은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꾸며댈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의 '그들'이란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다반사적]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분명히 현존재에게 해당은 되지만 고유하게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그런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워낙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서로 함께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죽음을 모면하여]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런 식의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이 심려는 그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존재가능을 완전히 덮어버리도록 도와주어, 그를 현존재 속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준다. 그러나 이 안정감은 근본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마찬가지로 "위로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338쪽∼340쪽)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들이닥침의] '언제'의 무규정성은 같이 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 죽음은 확실히 온다 ; 하지만 아직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이라는 이 말로써 '그들'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부인한다. "당장은 아직 아니다"는 단순한 부정적 발언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그들'의 자기해석이다. '그들'은 이 자기해석으로써 자신에게 우선 현존재에게 접근 가능하고 배려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그것을 지시해준다. 일상성은 배려와 긴급성에 쫓겨서 나른한, "행위 없는 죽음에 대한 상념"의 사슬로부터 도망친다, 죽음은 "언젠가 나중에"로 미루어지는데 그것도 이른바 "일반적 추측"을 끌어들이면서 그렇다. 이렇게 '그들'은 죽음이 어느 순간에건 가능하다라는 이 죽음의 확실성의 고유함을 은폐한다.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들이닥침의] '언제'의 무규정성은 같이 간다.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는 이 뮤규정성에 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무규정성을 피해간다. 그러나 그런 규정이 삶을 다하게 되는 순간을 계산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현존재는 도리어 그런 규정성 앞에서 도망한다. 일상적 배려는 확실한 죽음의 무규정성 앞에 가까운 일상의 내다볼 수 있는 긴급함과 가능성을 끼워넣는 식으로 그 무규정성을 자신을 위해서 규정한다.(345쪽)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 가능성이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단적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가능을 유일하게 그 자신으로부터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죽음은 그저 고유한 현존재에게 무차별하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존재로 하여금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미리 달려가봄에서 이해된 죽음의 무연관성은 현존재를 그 자신에게로 개별화시킨다. 이러한 개별화는 실존을 위해서 "거기에"를 열어밝히는 한 방식이다. 이 개별화는,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 문제가 되면, 모든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있음과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현존재는 오직 그 자신이 스스로 가능하게 만들 때에만 본래적으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52쪽)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실존론적으로 기획투사된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성격규정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게 '그들' - 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속에 있는 자신이다. (355쪽)

 


 

근시안적 시야

"삶"을 문제삼고 그리고 나서 또한 가끔씩 죽음을 고려에 넣는다면, 그 시야는 너무 근시안적이다.(419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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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3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07 14: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음악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았는데, 모든 즐거움 가운데 가장 미묘한 음악을 즐길 것을 권하고 싶다.. 음악은 세계의 참된 본성을 직접적으로 진지하게 드러내 보여주므로 우리에게 이처럼 진지하게 직접적으로 작용하는 것도 없다.

웅장하고 화려한 하모니는 정신의 목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신은 이렇듯 모든 때를 씻어버리고 사악하고 비열한 것들을 모조리 제거하게 된다.
이런 하모니는 인간을 한결 높은 데로 끌어올리고 고귀한 사상과 융합시키므로, 우리는 거기서 자기의 참된 가치와 의의, 자기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가치와 의의를 뚜렷이 느끼게 된다.

나는 음악을 들으면 언제나 인간의 생애와 나 자신의 생애는 어떤 영원의 꿈이고, 선악과 그밖의 여러 가지 꿈이며, 개인의 죽음은 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라 생각된다.

 - 쇼펜하우어, 『문예에 대하여』

 * * *
 

잡담, 호기심 그리고 애매함은 현존재가 일상적으로 자신의 "거기에"를, 즉 세계-내-존재의 열어밝혀져 있음을 존재하고 있는 그 방식을 성격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들은 실존론적 규정으로서 현존재의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현존재의 존재를 함께 구성하고 있다. 그 성격들 안에서 그리고 그것들의 존재적인 연관 안에서 일상성의 존재의 근본양식이 드러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현존재의 빠져 있음이라고 이름한다.* (240쪽)

빠져 있음(Verfallenheit) : 일상의 주체적 현존재는 우선 대개 남들이 존재하듯이 그렇게 존재하고 자신이 관심을 쏟고 있는 사물과 '세계'에 푹 빠져버려 거기에서부터 자기 자신까지도 이해하는데, 이러한 일상적 구체적 존재양태를 하이데거는 빠져 있음이라고 부른다.(옮긴이의 주, 584쪽)



클래식 음악에 이제 겨우 조금 '귀'를 열어 보려고 애쓰는 내가, 이처럼 '음악에 빠지다'라는 제목의 글을 쓸 때에도,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이라는 세기적 명저를 통해 설명했던 바로 그 '빠져 있음'이라는 용어를 이렇게 함부로 갖다붙여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올해부터 유난히 클래식 음악에 좀 더 바짝 다가가게 된 계기는 아무래도 쇼펜하우어의 책으로부터 받은 영향이 컸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나는 이 천재 철학자의 주저인『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담긴 여러 구절들에 너무 매료(?)되었고,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의 책 속에 담겨 있는 주옥같은 구절들을 좀 더 꼭꼭 씹어서  온전히 내 몸 속으로 삼켜 넘길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무모하게 애쓰고 있는 작업(?) 가운데 하나가 아예 그 책의 주요 내용들을 (틈나는대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필사'하다시피 베끼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 작업이 도대체 좀처럼 진척이 되지 않아서 과연 그 일을 언제 끝낼 수 있을지 그저 한숨만 나오고 답답해서 미칠 지경인데, 게으른 와중에도 그럭저럭 대략 25% 이상의 작업 진척도를 넘기고 보니 이제는 어쩌면 이 일을 '끝까지' 완수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부쩍 늘어난 느낌도 든다.

어쨌든 쇼펜하우어의 책은 처음 읽을 때에도 어려운 구절을 만나게 되면 '여러 번씩' 되짚어 가면서 읽었지만, '필사'를 하게 되면서 두 번째로 읽을 때에는 한결 읽기가 수월하다는 걸 느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많은 것이, 아니 모든 것이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보이면서 더 큰 감동을 느껴볼 수 있어서 참 좋은 것 같다. 이 점은 저자 또한 책의 서문에서 미리 밝혀놓은 점이기도 하다.

두 번째 읽게 될 때에는

그런고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책을 처음에 읽을 적에는, 두 번째 읽게 될 때에는 많은 것이, 아니 모든 것이 전연 다른 모습으로 보일 것이리라는 확신과 참을성이 필요하다. 더욱이 극히 어려운 문제를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되고, 되도록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한 나의 정성을 참작하여 너그럽게 봐 주길 바란다.(492쪽)



어쨌든 그의 책은 아주 정밀하고도 견고한 '건축물'을 보는 것처럼 단단하다는 느낌도 들고, 한편으로는 지극히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닮았다는 생각마저 들 때도 있다.

사상체계

사상체계라는 것은 항상 건축학적 관련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즉 거기에서는 언제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을 지탱하는 반면에 다른 부분으로부터는 하등의 지탱을 받지 않고, 마지막으로 초석은 다른 어떤 부분의 지탱을 받지 않으면서 모든 다른 부분을 지탱하며, 꼭대기는 모든 다른 부분의 지탱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른 부분을 떠받고 있지 않는 그러한 관계와 같다.(490쪽)



쇼펜하우어의 이 책에서 특히 매력적인 부분은 '예술'에 대한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이 부분은 전4권으로 이뤄진 그의 책 내용 가운데 [제3권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제2고찰, 충족 이유율에 근거하지 않는 표상, 플라톤의 이데아, 예술의 대상]에 매우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데, 나처럼 '예술'에 대해 거의 문외한에 가까운 독자에게는 '예술, 예술가, 예술작품, 아름다움' 등등을 '깊이있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각'을 활짝 열어주는 것 같은 느낌도 받는다. 어쩌면 철학책을 통해 전혀 뜻밖에도 예술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안목을 키우게 되는 횡재를 얻는 기분도 드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여러 '예술의 대상' 가운데 특히 음악을 가장 특별한 형식으로 인식했는데, 그는 '음악이란 곧 의지의 표상'이라고 주장했으며 플루트를 잘 연주할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동시대를 살았던 작곡가 바그너가 그에게 더욱 심취했다고 한다. 바그너는 악극〈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 얼마 전에 이 철학자의 최대 걸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감동하여 쇼펜하우어의 초상화를 자기 서재에 걸고 날마다 우상처럼 쳐다보면서 무언의 대화를 나눌 만큼 그를 떠받들었다고 한다.


 
W. 베크만 〈반프리드 저택〉 1882
왼쪽이 부인 코지마, 오른쪽 창문 옆이 프란츠 리스트, 그 옆이 한스 폰 볼조겐, 가운데가 바그너다.
 벽 위에 쇼펜하우어의 초상화가 보인다.
 
여기에 이 순수한 불가사이함이 서있습니다. 노철학자가 쇼펜하우어가! 쇼펜하우어의 이념은 이 상()안에 실현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깊고 명료한 사상의 원천인데, 인간으로서 생생하게 우리들 앞에 있습니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우리들의 사상과 인식을 위한 법칙으로 되는 시대의 도래라는 독일 정신문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 법칙이 자신의 고귀한 조화를 발견한 쇼펜하우어의 얼굴을 묘사하면서 우리들에게 그 시대를 예시합니다. 그는 슬픔에 차서 우리를 엄하게 바라봅니다. 그렇지만 그는 미소를 짓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데, 당신은 그것을 포착하여 부각시켰습니다.

ㅡ 쇼펜하우어 초상화를 받은 감사로 프란츠 폰 렌바흐에게 보낸 서신, 1868


'음악'과 연관이 있긴 하지만 다소 두서없는 얘기는 이쯤에서 접기로 하고 본론인 '음악'으로 되돌아가서,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화려하게 펼쳐놓은 '음악'에 대한 얘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그는 '어떤 시대에도 설명할 수 없었던' 음악과 세계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세계에 대한 음악의 묘사적인 관계는 극히 절실하고, 무한히 진실하며, 핵심을 찌른 관계여야 한다.

음악과 세계에 대한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는 묘사와 묘사되는 것의 관계, 모상과 원상의 관계와 비슷하다는 것을 다른 예술과의 유사성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 밖의 예술은 모두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음악이 우리의 마음에 주는 효과도 이것들의 효과와 대체로 같지만, 단지 음악 쪽이 더 강하고 빠르고 필연적이며 더 확실하다는 차이가 있다. 음악은 누구에게나 곧 이해되고, 그 형식은 숫자로 표시할 수 있는 일정한 규칙으로 바뀐다. 음악은 이 규칙에서 떠날 수 없으며, 만약 떠난다면 음악임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 음악에는 인정되기 때문에, 세계에 대한 음악의 묘사적인 관계는 극히 절실하고, 무한히 진실하며, 핵심을 찌른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음악과 세계의 비교점, 즉 음악이 세계에 대해 모방 또는 재현이라는 관계에 서 있다는 점은 깊이 감추어져 있다. 어떤 시대에도 사람들은 음악을 영위하면서도 이 점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음악을 직접 이해하는 데 만족하여, 이 직접적인 애해를 추상적인 개념으로서 파악하는 것은 단념해 버린다.(788쪽)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의지의 형이상학'에 음악을 다음과 같이 접목시키는데, '음악'은 결코 다른 예술들처럼 이데아의 모상이 아니라 '의지 그 자체의 모상'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 그 자체'와 같다고 말한다.


음악은 '의지 그 자체의 모상'이며, 이데아도 이 의지의 객관성에 불과한 것이다

의지의 적절한 객관화는 (플라톤의) 이데아이다. 개별적인 사물의 묘사를 통하여 이데아의 인식(예술 작품 자체는 결국 언제나 개별적인 사물이기 때문이다)을 작용하게 하는 (이것은 인식 주관 내에 있는 상응하는 변화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것이 다른 모든 예술의 목적이다. 따라서 이 예술들은 모두 의지를 간접적으로만, 즉 이데아를 개입시켜서만 객관화한다. 그리고 우리의 세계는 이데아들이 개별화의 원리(개인이 인식가능한 형식)에 들어감으로써 다원성으로 되어 현상된 것에 불과하지만, 음악은 이데아를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 세계에도 의존하지 않고 세계가 존재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존재할 수 있다. 즉, 음악은 결코 다른 예술들처럼 이데아의 모상이 아니라 '의지' 전체의 '직접적인' 객관화와 모사이며, 그런 점에서 세계 그 자체와 같고, 곧 다양하게 현상하여 개체의 세계가 되는 이데아들과 같다. 따라서 음악은 결코 다른 예술들처럼 이데아의 모상이 아니라 '의지 그 자체의 모상'이며, 이데아도 이 의지의 객관성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음악의 효과는 다른 예술들의 효과보다 훨씬 강하고 감명 깊은 것이다. 다른 예술은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음악은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기 때문이다.(789쪽)


그가 '선율'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음악'을 어느 정도라도 감상해본 이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나는 이 선율에서 인간의 사려 깊은 생활과 노력인 의지의 객관화에 있어 최고 단계를 인식한다

마지막으로 '선율(Melodie)'은 노래하고 전체를 인도하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 의지로 '하나의 사상'에 대해 끊임없이 의미 있는 연관을 유지하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의 전체를 나타내는 주성음(主聲音)이다. 나는 이 선율에서 인간의 사려 깊은 생활과 노력인 의지의 객관화에 있어 최고 단계를 인식한다. 인간은 타고난 이성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앞뒤를 보면서 그 현실과 무수한 가능성의 길을 가고, 그리하여 사려가 깊어서 전체로서 연관이 있는 생애를 완성한다. 이에 상응하여, '선율'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의미와 목적이 있는 연관을 갖고 있다. 따라서 선율은 깊은 생각에 비친 의지의 역사를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 의지의 모상은 그 행위의 계열이다. 그러나 선율은 그 이상을 표현한다. 선율은 의지의 가장 비밀스런 역사도 이야기하며, 의지의 어떠한 감동도, 노력도, 동작도, 그리고 이성이 감정이라는 넓고 소극적인 개념 아래서 총괄하여 그 이상은 추상 작용에 취할 수 없는 모든 것을 그린다. 그러므로 음악은 언제나 감정과 격정의 언어며, 언어는 이성의 언어라고들 말했다. 이미 플라톤은 음악을 "영혼이 격정에 사로잡히는 경우, 그것을 모방하여 만들어 낸 선율의 운동"이라고 설명했고, 아리스토텔레스도 "리듬과 선율은 소리에 불과한데, 왜 마음 상태와 비슷한가?"라고 말하고 있다.(791쪽)



나는 평소에 늘 '창조'의 극치를 달리는 '작곡가의 머릿속'을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는데, 쇼펜하우어의 설명을 들으면서 조금은 이상한 '그들의 세계'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작곡가는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을 구현하고, 가장 깊은 지혜를 표출한다

작곡가는 그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로 세계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을 구현하고, 가장 깊은 지혜를 표출한다. 그것은 마치 최면술에 걸린 몽유병자가, 깨어 있을 때에는 아무런 지식도 갖고 있지 않던 사물을 해명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작곡가에게는 다른 어떤 예술가보다 뚜렷하게 인간으로서의 그와 예술가로서의 그는 별개다. 이러한 이상한 예술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도 개념은 그 빈곤과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유추를 진행해 보려고 한다. 소원에서 충족으로, 또 그 충족에서 새로운 소원으로 빨리 옮겨 가는 것이 행복이고 안녕인 것처럼, 으뜸음에서 심하게 벗어나지 않는 빠른 선율은 즐겁다. 답답한 불협화음이 되고 다시 완만한 소절을 많이 거친 후 비로소 으뜸음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충족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거나 곤란해진 것과 같아 슬프다. 새로운 의지 활동의 멈춤, 즉 권태는 음뜸음이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과 같은 표현이며, 그 효과는 곧 견딜 수 없어질 것이다. 아주 단로롭고 의미가 없는 선율도 이와 비슷하다. 속도가 빠른 무용 음악의 짧고 알기 쉬운 주제는 쉽게 얻을 수 있는 평범한 행복을 말해 주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반대로 주제가 크고, 진행이 길고, 주제에서 크게 벗어난 알레그로 마에스토소(위엄이 있는 쾌속조)는 먼 목표를 향해 크고 귀중한 노력을 하여, 결국 이것을 달성하는 것을 나타낸다. 아다지오(느리게)는 사소한 행복들은 모두 무시하고 지나가 버리는 크고 귀중한 노력의 괴로움을 말해 준다.(792쪽)


쇼펜하우어가 '음악'에 대해 좀 더 '이론적으로' 깊숙하게 설명하는 부분들은 음악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로서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나마 다음과 같은 대목들은 음악에 다소 문외한인 나와 같은 평범한 독자 수준에서라도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의 내용이지 않을까 싶고, 평소에 음악을 들으면서 느꼈던 감상을 매우 잘 표현해 놓았다 싶어서 반가운 대목이다.

 
단조나 장조의 효과는 얼마나 놀랄 만한 것인가!

그러나 단조나 장조의 효과는 얼마나 놀랄 만한 것인가! 반음의 교체, 장3도를 대신한 단3도의 출현은 우리에게 곧 괴롭고 아픈 감정을 갖게 하지만, 아다지오는 단조에서 가장 높은 고통의 표현을 얻어 사람의 마음을 가장 감동시키는 비탄으로 바뀐다. 단조의 무도곡은 무시할 만한 사소한 행복을 찾다가 실패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같이 생각되며, 여러 가지 고생이나 고초를 겪고 저급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을 말해 주는 것같이 생각된다. 가능한 선율이 끝없이 많은 것은 자연 속에 여러 개인, 용모, 경력의 차이가 무한히 많은 것에 해당된다. 어떤 음조에서 이것과의 연관을 끝내 버린 다른 음조로 옮기는 것은 개체가 끝나는 죽음과 같다. 그러나 그 개체에 나타났던 의지는 의식적으로는 그 개체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다른 개체들에 나타나 여전히 살고 있다.(793쪽)


음악은 '최고도로 보편적인 말'이며, '외국어'처럼 별도의 번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또 얼마나 다행인가.


음악은 세계의 현상으로는 최고도로 보편적인 말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현상계 또는 자연과 음악을 동일한 사물에 대한 두 가지의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 사물 자체는 이 둘의 유사점을 매개하는 유일한 것이며, 그 유사점을 통찰하려면 이 매개가 되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음악은 세계의 현상으로는 최고도로 보편적인 말이며, 그것과 개념의 보편성에 대한 관계는 개념의 개체에 대한 관계와 비슷하다. 그러나 음악의 보편성은 결코 추상적이고 공허한 보편성이 아니고, 철저하게 명확한 규정성과 결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음악은 기하학적인 도형이나 숫자와 비슷하며, 경험으로 가능한 객관의 보편적인 형식으로서, 그리고 모든 객관에 대하여 선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이지만 추상적인 것이 아니고, 직관적이고 철저하게 규정된 것이다. 의지의 가능한 노력, 흥분, 표출, 이성에 의해 감정이라는 넓고 소극적인 개념 속에 던져져 버리는 인간 마음속의 사건, 이것들은 한없이 많은 가능한 선율로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는 언제나 실질은 없고 형식의 보편성만 있으며, 언제나 현상이 아니라 그저 의지 자체가 표시된다. 말하자면 육체없이 그 가장 내면적인 영혼이 표시되는 것이다.(794쪽)


다음의 설명은 '왜' 우리가 평소에 영화나 드라마 혹은 광고 등을 통해 '어떤 장면과 함께 듣는 음악'이 '가장 옳고 명백한 해설'로 생각되는지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특히 '교향악'을 들을 때의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들을 참으로 간단하게 설명해 주는 대목이다.


음악은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

음악이 모든 사물의 참된 본질에 대해 갖는 이러한 긴밀한 관계에서 다음의 것도 설명할 수 있다. 즉 어떤 장면, 행위, 사건, 환경에서 적절한 음악이 울리면, 그로 인해 우리는 이것들의 가장 심오한 의미가 명백해진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음악을 가장 옳고 명백한 해설로 생각한다. 또 교향악의 인상에 젖어 있는 사람은 자기 앞의 인생과 세계의 모든 가능한 사상이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는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음악과 자기 눈앞에 떠오른 사상 사이의 유사성은 무엇 하나 열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음악은 현상,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의지의 적절한 객관성의 모사가 아니라 의지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모사이며, 세계의 모든 형이하학적인 것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것을 나타내고, 현상에 대해 물자체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다른 예술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는 의지를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음악을 구체화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음악이 어떻게 실제 생활과 세계의 모든 양상과 장면을 의미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을까 하는 것도 이것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음악의 선율이 주어진 현상의 내적인 정신과 유사하면 할수록 그러한 작용은 증가된다. 시를 노래로, 또는 직관적인 모사를 무언극으로, 또는 이 양자를 가극으로 음악에 맞추어 만들 수 있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795쪽)


그러면 '음악'이 왜 그토록 그윽함과 진지함을 지니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을 (쇼펜하우어로부터) 마지막으로 듣고 난 후네 (마침내) 그의 책에서 벗어나 '음악공연'과 '음악' 그 자체로 옮겨가 보자.


음악의 그윽함과 진지함

음악의 형언할 수 없는 그윽함,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음악은 우리에게 친근하고 또 영원히 먼 천국으로서 우리의 곁을 지나가고, 알기 쉬운 것이면서도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 된다. 하지만 음악이 그윽한 것은 우리의 가장 내면적인 본질의 모든 움직임을 재현하면서, 완전히 현실을 포함하지 않고 현실의 고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음악의 본질적인 진지함은 직접적으로 고유한 영역으로부터 우스운 것을 완전히 배제해 버리는 것이다. 이 진지함은 음악의 객관이 오로지 착각과 우스움이 생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표상이 아니라 직접적인 의지이며, 의지야말로 본질적으로 모든 것이 의존하는 가장 진지한 것이라는 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음악의 언어가 얼마나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심장한 것인가는 반복 기호들이나 다 카포(처음부터)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만일 이것이 언어적 표현에 의한 작품이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이지만, 음악에서는 이들 반복이 합목적적이고 즐거운 것이다. 왜냐하면 음악이 말하려 하는 것을 완전히 파악하려면 이것을 두 번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796쪽)



쇼펜하우어를 통해 내가 음악에 대해 '이론적으로' 새롭게 인식하게 된 내용들은 결국 음악을 '좀 더 진지하게, 그리고 좀 더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도록 나를 잡아 끌었다. 내가 가장 확실하게 음악에 다가간 방법은 다름아닌 '음악 공연'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가급적이면 세계적인 교향악단이나 지휘자 또는 연주자를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그리고 훌륭한 음악과 연주를 음악당에 모인 수많은 청중들과 함께 생생한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경험은 '더할 나위없이 감동적인' 경험임을 점점 더 확실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올해들어 찾아가본 공연은 대략 다음과 같은데, 이쯤에 이르러 내가 가장 아쉽게 느끼는 대목은 '음악 감상평'을 제대로 쓸 '능력'이 내겐 아직까지 도대체 없다는 점이다. 내가 음악 감상평을 어설프게나마 조금 끄적거릴 능력이라도 있었더라면 평소에라도 가끔씩 알라딘에 페이퍼라도 쓸 수 있었을텐데, 그러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결국 이 페이퍼를 쓰게 만들었다. 음악은 내 귀를 통해 내 마음 속으로 깊숙히 들어왔지만, 그리고 그걸 (대략이나마 어렴풋이라도) 글로 표현하고 전달할 방법은 도대체 없지만, 그래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어쨌든 '글과 이미지'로 끄적거리면서 표현을 '시도'해 보자는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결국 '음악 감상평'은 온전히 생략되고, 단순한 프로그램의 목록과 이미지의 나열 뿐이다(핑계 같지만 어쨌거나 이 글의 분량 상으로도 이미 한계를 넘었는데, 여기에 일일이 감상평까지 덧붙이는 건 정말 아니다 싶다.) 각각의 연주회마다 대략적이나마 음악감상평을 굳이 쓰라면 쓸 수도 있겠지먄 아직까지는(?) 그건 내게 너무 벅차기도 하고 여러모로 가당치도 않는 일일 것도 같다.


2012. 2.21 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 지휘 정명훈, 협연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
                코다이, 갈란타의 춤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마단조 작품번호 64
                바르톡, 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1. 지휘자 정명훈




2. 연주 프로그램




3. 프로그램북 이미지




2012. 2.24 임동혁 피아노 리사이틀

                쇼팽, 피아노 소나타 3번 b단조, 작품 58
                김정권, 봄의 눈빛들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2번 c샤프 단조, 작품 3
                라흐마니노프, 전주곡 5번 g샤프 단조, 작품 23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2번 b플랫 단조, 작품 36


4. 프로그램북 표지




5. 연주 프로그램




6. 피아니스트 임동혁




2012. 2.28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지휘 발레리 게르기예프, 협연 바이올린 사라 장
                브리튼, '네 개의 바다' 간주곡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6번 '비창'


7. 프로그램북 일부




8. 연주 프로그램




9. 게르기예프는 누구인가?





2012. 4. 8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지휘 로린 마젤, 바이올린 에스더 유
                모짜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3번
                말러, 교향곡 1번(거인)


10. 로린 마젤 &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11. 연주 프로그램




12. `가장 위대한 말러주의자`로 불리우는 로린 마젤





2012. 5.27,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지휘 조나선 코헨, 피아노 손열음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 신포니아 D장조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모짜르트, 교향곡 39번


<모짜르트, 피아노 협주곡 21번>




13.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





그러고 보니 어느새 금년도 이제 다섯달이 훌쩍 지났다. 짧은 세월 동안 이런저런 많은 일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내게 가장 의미있는 시간들 가운데 하나는 저 놀랍도록 아름답고 깊이있는 '불후의 명곡들'과 함께 한 시간들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고 보니 올해 예약해둔 공연도 딸랑 둘 밖에 안 남았다. 그 중 하나는 6월에 있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의 '말러 교향곡 5번'과 힐러리 한의 '멘델스존 바이올린 협주곡' 연주이고, 남은 하나는 금년 11월에나 만나보게 될 (올해 가장 기대가 큰)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하는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베토벤 교향곡 2번과 3번(첫날), 6번과 7번(둘째날)이다.


14. 파보 예르비가 꺼내든 특별한 말러




15. 빈 필하모닉의 2012 신년음악회를 지휘했던 '마리스 얀손스'








 

개인적으로는 이처럼 세계적인 교향악단과 지휘자의 연주를 한꺼번에 몰아서 많이 들어보는 것도 드문 일이고, 음악 공연에 이처럼 돈을 물쓰듯이(?) 써 본 것도 처음이다(훌륭한 공연일수록 티켓 또한 책값과는 비교하기 어려울만큼 비싼 것도 사실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연주자의 음악을 직접 듣는 것은 여러모로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우리가 일평생을 살면서 어느 분야가 되었건 그 분야의 '세계 최고의 경지'를 현장에서 직접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군다나 그 분야가 '예술의 대상' 가운데에서도 가장 특별한 분야인 '음악'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다. 그리고 '특별한 연주'를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경험은 또한 나중에 두고 두고 그 느낌을 생생하게 되살릴 수도 있어서 좋은 것 같다. 평소에 라디오를 통해 다소 가볍게 스치듯 지나치며 가볍게 듣던 음악들도 '연주회에서 직접 보고 들으면서 느꼈던 강렬한 체험'을 거치고 나면 그 후로는 그 음악들이 오래도록 '특별하고도 생생한 그때의 느낌들'로 아주 빠르고 쉽게 되살아 나온다는 점이다.

올해 유난히 자주 접했던 멋진 음악 연주를 들으면서 나는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거리는 감동'도 느낄 수 있었고, 마침내 무아지경 속에 빠져드는 듯한 환상적인 연주가 클라이막스를 치닫는 부분에서는 밀려드는 감동 때문에 목이 꽉 메이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폭풍처럼 휘몰아치던 연주가 다 끝나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목이 메인 환호성'을 터트리면서  손바닥이 뜨겁도록 기립박수를 칠 때의 느낌 또한 너무나 좋다.

우리가 음악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놀라운 감동들은 정말 특별하게 우리의 삶을 순화시키고 고양시키는 측면이 있는 듯싶다. 그런 기쁨들은 어떨 땐 마치 드높은 푸른 창공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자유로운 새들의 비상과도 닮은 것 같고, 또 어떨 땐 맑은 숲 속의 옹달샘에서 끊임없이 콸콸 솟아오르는 맑은 샘물과도 닮은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음악에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던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에 비춰보면 그것은 어쩌면 '삶의 근원에 가장 깊숙히 내재해 있는 생의 의지' 그 자체를 건드리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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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연후기] 마리스 얀손스 &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
    from Value Investing 2012-11-22 17:32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공연이었다.평소에 실황 연주를 자주 찾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올해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당을 자주 찾았다. 이 시대의 거장 지휘자들이 음악을 통해 공감하려고 하는 게 진정 어떤 것일까 하는 탐구심이 과도하게 작용한 탓도 있었으리라.따스한 봄이 채 오기도 전인 금년 2월부터 로열 콘세르트 헤보우(RCO)를 찾았고, 봄과 여름을 거치며 발레리 게르기예프, 로린 마젤, 파보 예르비 등등이 지휘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
 
 
 


"한 사람을 만들려면 아홉 달이 필요하지만 죽이는 데는 단 하루로 족해. 우리는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셈이지. 그러나 메이, 한 인간을 완성하는 데는 아홉 달이 아니라 6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해. 그런데 그 인간이 다 만들어졌을 때, 이미 유년기도 청년기도 다 지난 한 인간이 되었을 때, 그때는 이미 죽는 것밖에 남지 않은 거란다."
 - 앙드레 말로, 『인간의 조건』 中에서


살 때는 삶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살아야 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여 그 전부를 죽어야 한다.
 - 12세기의 선승 원오 극근


"이 세계는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우며 크고 깊은 사랑으로 가득찬 곳이기 때문에 증거도 없이 포장된 사후세계 이야기로 내 자신을 속일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약자 편에 서서 죽음을 똑바로 보고 생이 제공하는 짧지만 강렬한 기회에 매일 감사하는 게 낫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中에서


우리는 우주에 흔적을 남기기 위해 여기에 있다. 그게 아니라면 왜 여기에 있겠는가?
 - 스티브 잡스


우리의 모든 존업성은 사유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스스로를 높여야 하는 것은 여기서부터이지,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과 시간에서가 아니다, 그러니 올바로 사유하도록 힘쓰자. 이것이 곧 도덕의 원리다.
 - 파스칼, 『팡세』 中에서


이 한 줄이 너의 해석을 천년 동안 기다려 왔다, 라는 마음가짐이 없다면 학문을 하지 말라
 - 막스 베버



 * * *

(밑줄긋기)

그로부터 2000년

그로부터 2000년 후에야 나온 칸트의 학설은 유럽 여러 나라의 모든 지식과 사유와 행동에 커다란 변혁을 일으킬 만큼 영향을 미쳤고, 수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이 위대한 철학자로부터 공간과 시간의 직관이 경험적인 직관과는 전혀 다르며, 감관에 대한 인상과는 관계없이 이 인상에 제약받는 것이 아니고 이 인상을 제약한다는 것, 즉 선험적이어서 착각에 빠지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난 후에 비로소 유클리드가 하는 것과 같은 수학의 논리적 취급 방법이 쓸데없는 조심이며, 건강한 다리를 위한 지팡이며, 마치 여행자가 밤중에 밝게 보이는 견고한 도로를 강이라고 생각하고, 그 도로를 걸어가지 않도록 조심하고는 쉴 새 없이 그 옆의 울퉁불퉁한 땅을 걸어가면서 강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만족해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89쪽)

 - 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中에서



이 문제가 2,000년 이상이나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연인가?

일치관계는 관념적 판단내용과, 그것에 대해서 판단되고 있는 것으로서의 실제의 사물 사이의 연관에 해당하는 것이다. 일치는 그 존재양식상 실제적인가, 관념적인가, 아니면 그중 어느 것도 아닌가? 관념적 존재자와 실제적으로 눈앞에 있는 것 사이의 관련이 존재론적으로 어떻게 파악되어야 하는가? 그런 관련은 성립되고 있으며 그것도 현사실적인 판단행위에서 판단내용과 실재의 객체 사이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관념적 내용과 실재의 판단수행 사이에도 성립하고 있다. 오히려 여기에서는 [관념적 내용과 실재의 판단수행 사이에] "더 밀접하게" 성립하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면 실제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 사이의 관련(분유, 참여)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해서는 물음을 제기해서는 안 되는가? 그 관련은 분명히 성립되어야 한다. 성립이란 존재론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의 적법성을 무엇이 거부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문제가 2,000년 이상이나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우연인가? 물음의 뒤바뀜이 이미 단초에, 즉 실제적인 것과 관념적인 것을 존재론적 설명 없이 분리한 데에 있는 것은 아닌가?(293쪽)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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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2-05-30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가슴 깊이 남는 명언들입니다. 늘 넓은 관심과 열정 담긴 수고에 감사 ^^

oren 2012-06-01 16:06   좋아요 0 | URL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