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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시선 1997~2010 ㅣ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룡빙콴 외 지음, 찬찌딱 엮음, 고찬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9월
평점 :
이 도시가 늙기 시작하면 / 우리의 젊음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반환의 밤 / 곳곳에 환상적인 불꽃이 터져 / 도시의 모든 얼굴마다 쏟아져서는
부유하고, 명멸하며 부서져 내린다 / 의젓한 너는 다 늙은 나를 이끌어
기다란, 구불구불하고도 삐딱한 길을 / 자동차 경적소리, 인파로 떠들썩한 길을/ 지난다
찰칵찰칵 소리가 낙하하는 불꽃처럼 / 곁을 스쳐 지난다
이 아름다운 화려함 모두 등 뒤에 드리워진다
(............)
만약 이 도시가 이미 늙었다면 / 우리의 젊음은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오늘 밤 자정을 넘기면 / 또 다른 시대가 시작된다고 한다
길가엔 술병이 나뒹굴고 / 깨진 유리는 어슴푸레한 빛을 굴절시킨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 돌려 / 올 때의 풍경을 찾아본다
돌아가 앉을 곳 없는 머리칼에 텅 빈 바람이 불어 든다
네 곁에 바싹 다가가 / 춥고 어둑한 골목에 흩어지는 술 취한 사람의 노랫소리를 듣는다
골목의 또 다른 구석에서 흥겨움이 울려 난다
우리는 이 세기라는 노정을 어떻게 지나가야 할 것인가?
록퐁의 "도시가 늙으면" 일부
모두가 술에 취해 노래를 부르고, 흥겨움에 젖어 있을 때..시인의 마음엔 찬 바람이 붑니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리 기쁨에 젖어 있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가슴만 답답해옵니다.
홍콩문학 첫 번째 책으로 [홍콩시선]을 읽습니다.
이 시집은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정식 이양된 1997년 이후 2010년에 이르는 십 수 년에 걸친 시기동안 홍콩을 대표하는 여러 시인들이 쓴 시를 엄선해서 한 권으로 엮은 것이라고 합니다.
책에 실린 작품들을 읽다보면 격변의 시기에 홍콩의 현실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시인들의 촉수는 남다릅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되던 날. 중국은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불꽃 축제가 밤하늘을 밝혔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국, 홍콩 사람들이 격앙된 감정에 젖어 있을 때 시인들의 마음에는 혼란과 불안이 고개를 들고 일어섭니다.
반대로 이 흥겨움에 젖어 詩로 그 마음을 그려나가는 시인도 있군요.
보이는가? 저기 세 개의 돛을 단 배가 / 요동치는 파도를 헤쳐 내고, 삼성묘를 우회하고 있다
백일(白日)은 서로 기울고, 욱일(旭日)은 동방에서 은현하는 것이 / 꼭 우리네 상황 같다.
식민 지배자가 더럽힌 해수(海水)를 우리 마침내 건너,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왔잖은가
해 뜨기 전, 우린 등대를 발견할 터이니 / 폭풍우 속에도 희미한 광선이 항로를 안내하리라
용총줄을 바짝 당겨 풍랑 앞에 용맹한 사공이 되리라
- 찬딱감 "칭산호이의 존재하지 않는 대학" 중 일부
이 시인은 중국의 본토를 어머니의 품으로 묘사하고 있는 듯 합니다. 용맹하게 나아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의 생각을 놓고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닙니다. 그러고 싶지도 않습니다. 단지 홍콩이 처한 시대적,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들에게 어떤 마음이 자리잡았을까 궁금했을 따름입니다.
대부분의 詩들이 그리 밝지는 못하군요. 시인들이 들이마시는 공기는 그리 맑은 편이 아닌 듯 싶습니다. 홍콩의 주권은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었지만 실질적인 반환, 즉 홍콩과 중국의 진정한 합일은 그때로부터 '시작'되었고, 아직 그 과도기에 있다고 합니다. 150여 년간의 간극을 좁혀 대륙과 홍콩이 서로를 포용하고 공생하며 동행하는 길은 여전히 요원한 상태라고 합니다.
홍콩이 처한 이러저러한 마음 불편함을 잠시 접어 놓고, 그냥 읽어도 가슴을 터치해주는 참 좋은 詩 한 편을 더 옮겨볼까 합니다.
(1) 고도를 기다려봐야 / 고도는 오지 않는다 / 왜냐 // 고도 역시 / 기다리고 있으니
(2) 고도를 기다리다 보면 / 고도는 끝내 온다 / 왜냐 // 그건 / 올 것은 / 오게 마련이니까//
그는 모두에게 묻는다 / 기다려 뭐하는가
(3) 고도는 왔다 / 다시 간다 / 그를 기다리는 이여 / 더는 기다리지 마라 //
고도는 갔다 / 다시 온다 / 처음엔 갈망 // 갈망은 / 변해서 / 기다림이 된다
(4) 고도의 기다림은 / 이러한 기다림 // 저 올 때를 / 제가 기다리는 것
(5) 고도는 말한다 / "사람아 / 그대가 / 바로 고도이거늘 / 그대 무얼 기다리는가" //
사람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 "나도 / 내가 고도란 걸 안다오 /하지만 난 /
나를 하나 만들어 // 그 내가 나를 기다리게 하고 싶다오"
(6) 고도의 기다림은 / 이러한 기다림 / 기다리다 / 느끼게 되는 것 //
태어난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 존재하는 것은 / 아직 오지 않았으니 / 오는 것은 /
일종의 // 기다림
(7) 고도는 말한다 / "기다림은 좋은 것이다" // 해서 기다리는 곳에는 /
꽃이 피고 풀이 돋고 나무가 자라며 / 강이 흐르고 / 그리고 /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함께한다 // 사람마다 제각각인 / 이런저런 정경은 / 달콤하고도 애닯다
- 인장 "고도의 기다림 (습작 1~7)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