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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은 속삭인다
타티아나 드 로즈네 지음, 권윤진 옮김 / 비채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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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벽을 문이라 생각하고 박차고 나가는 거야 ~!』 출근길에 안 보이던 플랜카드 한 장이 건물 벽에 걸려 있습니다. 야권 M당 모 후보의 이름으로 내걸린 슬로건입니다. 이 벽은 넘어야할 장벽, 부셔야 할 장애물, 제도, 생각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겠습니다. 단지 벽을 박차고 나가는 사람의 발이 염려가 됩니다. 제대로 붙어 있을는지.. 그리고 그냥 내버려둬도 될 벽도 부셔버리지나 않는지..



또 때로는 벽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도 오래 되어서 제목과 저자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단편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 연인들이 있습니다. 전쟁의 상흔으로 폐허가 된 어느 거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는 이 연인들은 사방이 막힌, 아니 한 두 군데라도 막힌 공간을 필요로 하나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부서진 건물의 잔해와 허허 벌판뿐입니다.

 


이 책에서 등장하는 벽의 이미지는 또 다릅니다. “샤르므는 벽이 고통을 느낀다고 믿었다. 그녀는 돌이 인간의 불행을 빨아들이고 그 속에 빠져 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 이사를 오면 돌은 자신의 고통과 슬픔을 벗어서 되돌려주는 것이다.” - 자크 란츠만, 《로지에 거리》

 

이 문장이 책의 내용을 함축시켜줍니다. 여기서 ‘감수성 예민한 사람’이라는 표현에 시선이 머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파스칼린 말롱이라는 여인이 너무 감수성이 예민하군요. 짧은 소설입니다. 책도 핸디합니다. 그래서 진도가 잘 나갑니다. 책을 손에 잡고 단숨에 읽었습니다. 


저자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이 소설을 스스로 누아르 소설이라고 칭합니다. 범죄소설에 이상심리까지 더합니다. 자식 없는 40대 이혼녀인 주인공이 혼자 거처할 집을 찾는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시작은 순조롭습니다. 그 집에 대한 내력을 듣기 전까지는 마음에 쏙 든 집이었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군요. 그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 전에 예민한 주인공에게 벌써 증상이 나타납니다. 회사 동료와 함께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에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운 느낌이 듭니다. 이사 후 첫날밤을 뜬눈으로 지새웁니다. 며칠째 계속 됩니다. 그러나 집을 떠나, 출근을 하면 속이 더부룩하고 귀에서 윙윙 거리는 소리가 사라집니다. 드디어 주인공은 집의 내력을 듣게 됩니다. 한 건물 3층에 사는 이웃입니다.


“잠은 잘 자요?” “무슨 말씀이시죠?” “살인사건 말이에요……댁의 집에서 일어났는데…… 얘기 안 해주던가요?”


주인공 파스칼린의 길고도 험한 정신적, 육체적 여정이 시작됩니다. 살인사건도 단순 살인이 아닌, 연쇄살인 사건입니다. ‘당브르 가 살인사건’ 자그마치 8건의 살인사건 관련 기사가 인터넷 검색에 뜹니다. 피해자들은 7명의 젊은 여성들입니다. 이젠 본격적으로 집에 들어설 때마다 살인사건과 관련된 이야기와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불을 켜면 벽에 영상이 떠오릅나다. 살인의 과정이 그대로 실현됩니다. 물론 파스칼린의 생각속에 나타나는 이미지입니다. 파스칼린의 생각은 확고합니다. “벽은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결국 회사 근처 저렴한 호텔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역시 혼자 살고 있는 엄마를 만납니다. 파스칼린의 아빠가 돌아가시고 난후 엄마는 30년째 혼자 살고 있습니다. 딸의 상태가 염려된 엄마는 대화를 나누다가 파스칼린이 다섯 살 때 일어난 이야기를 꺼냅니다. 일 년을 산 집에서 주인공은 밤마다 악몽에 시달립니다. 다섯 살 때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분노와 고통. 그 집에서도 살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한 남자가 세 아이의 신체를 절단해 죽인 사건이 있었지만, 모르고 이사를 했던 것이지요.

 

“두려웠다. 이제는 장소마다 사연이, 자기만의 사연이, 고통과 아픔이 있었다. 나는 두려웠다. 전신이 옥죄어오는 공포를 느꼈다. 나는 삶의 공간에 스며들어 있는 감정들이 두려웠다. 벽의 속삭임이 두려웠다. 갑자기 내 몸이 일종의 스펀지나 압지(押紙)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집에서 일어난 일들을 초자연적인 힘으로 포착하는 안테나를 몸에 단 기분이었다. 나는 낯선 집을 방문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코가 예민해진 것이었다.” (p.60~61)

 

파스칼린의 이상 행동은 멈추지 않습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아낸 연쇄 살인 희생자들이 살던 집을 찾아가서 문 앞이나, 계단에 장미 놓아두기, 살인자가 수감되어 있는 교도소를 찾아가 살인범을 영원히 가둬놓기 위한 담벼락 돌기. 직장 업무와 동료들과의 교통이 두절되기 시작합니다. 반복되는 업무 실수, 동료들과의 갈등. 이를 바라보는 독자의 마음은 안타깝습니다. 혼자 못하면 누군가가 도와주어야 할 텐데, 대부분의 이런 경우처럼 도움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 합니다. 바로 이런 점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직장 동료의 소개로 남자도 만나지만, 오히려 문제만 발생시킵니다. 더욱 비정상적인 사람으로만 그려집니다.

 

파스칼린에겐 직접적인 상처가 있습니다. 육 개월밖에 못살고 세상을 떠난 딸아이의 죽음을 아직도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진실여부는 확인할 길 없지만, 심지어 이혼한 전 남편이 딸을 죽였을 것이라는 강한 의심을 품고 있습니다. 급기야 본인의 사정을 잘 모르는 주위사람들에게 딸아이가 열다섯 살이라는 이야기까지 합니다. 지금 같이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의사를 찾아가긴 합니다. 동네 의사에게 악몽과 불면에 대한 상담을 하면서 그간의 마음 상태를 털어 놓습니다. 범죄 현장에 가보고 싶은 욕구까지 이야기 합니다. 의사는 파스칼린에게 왜 범죄 현장에 가보고 싶은지 물으나 대답을 못합니다. 역시 정신과 상담을 받아보라는 충고를 받으나, 파스칼린은 스스로 ‘나는 아무 문제도 없어.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하고 그냥 넘깁니다.

 


보통은 어렸을 때 받은 심각한 심리적, 육체적 외상이 성인이 되어서도 치유되지 않은 상태라면 일상생활에 많은 지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즉, 내적 치유 과정을 거쳐야하는데 대부분 소홀히 넘기기 쉬운 부분입니다. 몰라서 못할 수가 있고, 치료시기를 놓치고 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가가 그려낸 파스칼린의 경우는 좀 독특합니다. 어렸을 때의 외상의 이야기는 없습니다. 단지, 어려서부터 예민한 성격입니다. 특히 장소와 냄새 등에서 연상하는 범위가 다른 사람에 비해서 넓고 깊습니다. 그러다보니, 벽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해도 안 들을 수가 없습니다. 파스칼린의 불행이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딸아이를 일찍 잃게 된 충격과 연쇄살인범에 의해 처참하게 살해된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서로 내색을 하지 않고 살뿐 누구나 아주 성격이 무딘 사람이 아니라면 있을 수 있는 일일 것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장소임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그곳을 향하는 경우가 있다거나, 사소한 단서에서 장편의 소설을 쓰듯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이라든가 말입니다.

 


소설의 결말이 궁금 하시다구요?

추리 소설, 범죄 소설에서 범인을 미리 알려주거나, 결말을 알려주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요. 

 끝 이야기는 아끼겠습니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보시게 될 분들을 위해 참겠습니다.

 

 

사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이 소설이 모티브가 되어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사라의 열쇠》가 탄생하게 됩니다. 밸디브(동계경륜장, 벨로드롬 디베르의 약칭)유대인 검거사건. 1942년 7월 16일. 나치 치하의 프랑스입니다. 프랑스 정부가 유대계 프랑스인 만 여명(13,000명이라는 통계도 있습니다)을 기습 검거해 밸디브에 가둬두었다가, 아유슈비츠 수용소로 보낸 일을 말합니다. 이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4천명이 넘는 어린아이들도 검거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의 작가 타티아나 드 로즈네는 프랑스인들이 언급조차 꺼려하는 이 사건에 주목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은 2010년 프랑스에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파스칼린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분신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사람이 죽었건, 살았건 상관없이 무딘 감각으로 지내는 사람이 있지만, 기억해야 할 일은 누군가 기억하고, 그 순간의 고통을 함께 나누길 바란다는 작가의 마음을 또한 느낍니다. 어쩌면 평범한 이웃 사람의 이미지를 지닌 연쇄살인범이나 수치스러운 역사의 현장에 서있었던 프랑스인들의 내면은 우리의 마음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단지 우리 살아가며 그 거칠고 냉혹한 면모들을 다독여가며 유순함으로 길들여가고 있겠지요.  그런 부드러운 면들만 서로 대하며 살아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밸디브의 유대인 - LIFE 기록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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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다 - 환자의 마음을 공유하는 의사들 이야기
셔윈 B. 눌랜드 지음, 조현욱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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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들에겐 자기 성찰의 계기, 비의료인들에겐 임상의 에피소드를 접할수 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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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 예술가의 육필 편지 49편, 노천명 시인에서 백남준 아티스트까지
강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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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작품세계까지도 이해해볼수 있는 편지글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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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로 읽는 슬픔과 기쁨 - 예술가의 육필 편지 49편, 노천명 시인에서 백남준 아티스트까지
강인숙 지음 / 마음산책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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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군에 입대한 친구의 아들이 훈련 중 특별히 허락을 받고 부모에게 전화를 했다. 

“집에 편지를 쓰라고 하는데 비효율적이야. E-mail로 하면 간단한데..”

이 녀석 막상 편지를 쓰라고 하니까..막막했을 것이 틀림없다. 손 편지와 E-mail은 편지라는 성격은 같을지라도 그 과정 중에 벌써 분위기가 달라진다. E-mail 뿐이랴, SNS는 분, 초단위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누구와 같이 있는지, 현재 기분 상태가 어떤지 서로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기록이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진다. 계속 새로운 정보와 소식이 그 자리를 메운다.  


손 편지를 마지막으로 써본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우편함에는 각종 청구서와 DM만이 쌓여간다. 달포 전 딸을 시집보내고 난후 다녀가신 하객들에게 손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역시 마음뿐이었다. 딸 내외가 아예 인쇄물로 감사 편지를 뽑아왔다. 하객들에겐 너무 사무적이고 의식적인 느낌이 들겠지만, 시간 없다는 핑계로 그냥 보내 드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본다는 것은 흥미롭다. 아마도 인간의 마음속 자리 잡고 있는 내밀한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싶어 하는 궁금증이 한 몫 하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총 49편의 예술가들의 편지글이 편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편저자인 강인숙님은 “편지는 수신인이 혼자서만 읽는 호사스런 문학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혼자서 듣는 오케스트라의 공연과 같다. 이 책의 독자들도 모두 수신인이 된 기분으로, 그런 호사를 누려보기를 권하고 싶다.” 라고 쓰고 있다. 


많은 편지글 중 특히 마음이 머무는 것은, 고인이 되신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이 이해인 수녀님께 보낸 편지이다. 두 분 모두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탓도 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1931년 경기도 개풍 출신이다.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으로 중퇴했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여류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2011년 작고 했다. 저서로 『엄마의 말뚝』『아주 오래된 농담』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등이 있다. 

이해인 수녀님은 1945년 강원도 양구 출생이다. 1964년 수녀원에 입회했으며 필리핀 성루이스대학 영문과,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새싹문화상, 여성동아대상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 『민들레의 영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사랑할 땐 별이 되고』『기쁨이 열리는 창』『희망은 깨어 있네』등이 있다.  2008년에 직장암 판정을 받아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고 2009년 4월부터 부산에서 장기휴양을 하고 있다.


책에 실린 편지는 2005년 11월에 이 해인 수녀님에게 보낸 글이다. 해인 수녀님은 완서 성생님이 가시고 난후 모두 그분을 잃은 애통 속에 잠겨 있을 때 이 편지를 공개하셨다고 한다. 

“......『민들레의 영토』가 출간된 지 30년이 됐다는 소식에 접하면서 제가 수녀님을 알고 지낸지 몇 년이나 되었나 새삼스럽게 꼽아보니 어쩔 수 없이 그 힘들었던 88년이 기점이 되는군요.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

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은 과연 계실까, 죽은 후에 영혼이 갈 곳이 있기나 있나. 죽으면 먼저 간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온통 사후세계 저 하늘나라 가는 일에만 가 있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수녀님의 존재, 수녀님의 문학은 제가 이 지상에 속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셨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될지는 죽어보면 알게 아니냐, 땅을 보아라, 땅에서 가장 작은 것부터 민들레를, 제비꽃을, 봄까치꽃을…….  마치 걸음마를 배우듯이 가장 미소한 것의 아름다움에서 기쁨을 느끼는 법을 배웠습니다. 제가 지상에 속했고, 여러 착하고 아름다운 분들과 동행할 수 있는 기쁨을 저에게 가르쳐준 수녀님 감사합니다!!”


완서 선생에게 1988년은 참으로 힘든 시간이었다는 것을 지은이 강은숙 교수에게서 듣게 된다. 88올림픽으로 전국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자세한 내막은 모르겠으나 완서 선생은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 그래서 “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이라고 적고 있다. 이때 이해인 시인이 다가와 박완서 선생의 손을 잡아 주었다. 분도수녀원에 데리고 가서 해인 수녀님은 자식을 잃고 쓰러져 가는 니오베(Niobe.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테베 왕 암피온의 왕비. 자식을 잃고 상심하여 슬픔으로 날을 보내다가 돌이 되었는데, 돌에서도 계속하여 눈물이 흘렀다고 한다.)를 붙잡아 일으킨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한다. 의지할 수 있고, 붙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강교수는 문화부장관을 역임하신 이어령 교수의 아내이다. 이 책에는 편지마다 필자 강은숙이 「편지를 말하다」라는 글이 첨부되어 있다. 필자는 “해설이라기에는 일관성이 없고 감상문이라고 하기에도 적합하지 않은 글이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작가를 알리고 그가 살던 시대를 젊은 독자들이 헤아리게 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편지를 말하다」를 읽는 재미가 솔솔찮다. 수,발신인의 관계는 물론 편지의 상황적 배경까지도 짐작이 가게끔 하는 부분이다. 물론 사생활이 지나치게 노출되는 편지글은 볼 수 가 없다. 이미 작고하신 분들의 편지도 있지만, 현재도 대학 강단에서, 창작생활이나 다른 예술 활동을 하시는 분들의 육필 편지를 볼 수 있다.  


글을 읽다가 서늘한 깨우침을 주는 구절이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이곳저곳에서 새해 인사 주고받느라 바쁜 요즈음이다.

소설가 정연희가 시인 김영태에게 보내는 편지다. 

“...새해가 따로 있겠습니까마는 지니고 계신 모든 것이 새롭게 비춰지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렇다. 새해라는 것은 그저 사람세계에서 편하자고 만든 시간개념이다. 해는 떠오른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한결같이 떠오른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문득 손 편지가 쓰고 싶어졌다. 문구점에 들러서 맘에 드는 편지지를 골라봐야겠다. 누구에게 쓸지는 아직 못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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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의사다 - 환자의 마음을 공유하는 의사들 이야기
셔윈 B. 눌랜드 지음, 조현욱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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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유머 한 꼭지가 생각납니다. 어느 환자가 수술을 앞두고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담당의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저 태어나서 수술이 처음이에요. 겁이나 죽겠어요.” 의사가 하는 말 “너무 걱정 마세요. 저도 처음이니까요”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 실제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의사가 있다면, 천하의 멍청이 같은 의사가 될 것입니다. 어느 누가 처음 집도를 하는 의사에게 자기 몸을 맡기겠습니까? 그러나 어느 의사에게나 첫 수술환자는 있게 마련입니다. 환자는 모릅니다. 모르는 것이 약이지요 . 단지 의사와 그 주변 동료 몇몇만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의료 임상의 현장은 좋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밖으로 잘 알려지지 않습니다. 진료를 통해 얻어진 환자에 대한 정보를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는다는 의료윤리와도 관계있지만, 굳이 밖으로 이야기가 나돌아서 좋을 것은 무엇이냐는 담합적(?) 분위기 탓도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내용은 우리네 실정과 비교하면 예외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국내에 몇 권의 메디컬 에세이집이 소개된 저자 셔윈 B. 눌랜드 교수는 이 책을 일종의 의학판 『캔터베리 이야기』라고 부릅니다. 캔터베리 이야기. 잘 아시지요? 영국의 이야기 문학으로, 제프리 초서의 걸작입니다. 총 30명 내외의 사람들이 런던의 어느 여관에 모여, 순교자 토머스 베켓을 모시는 캔터베리의 유명한 사원으로 순례를 떠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여관집 주인이 자진하여 안내자가 되어 왕복길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는 순례길이 되기 위해 한 사람이 두 가지씩 이야기를 할 것을 제안합니다. 이리하여 순례자들은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중세에 한창 성행되었던 말하자면 이야기집(集)입니다.

 

책은 의학 에세이집입니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수집된 이야기입니다. 여러 에피소드 중에서 평균 연령과 기대수명이 높아지는 요즈음에 관심이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노인의학 전문의의 이야기입니다. 저자가 ‘노인의학은 의학의 역사상 가장 오래 되었지만, 또한 가장 새로운 것’이라고 표현한 것에 공감합니다. 노인병 전문의를 노인을 위한 가정의라고 표현하고 싶다는군요. 소아과 의사가 어린이들을 위한 가정의 기능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로 해석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노인의학전문의가 환자를 진찰하는 과정이 의학의 선배들이 주로 해왔던 진찰 과정입니다. 조심스럽게 살피는 신체검사는 히포크라테스 시대 의사들 이후로 시행한 검사와 촉진이 주가 됩니다. 문헌에 의하면 이들은 맥박의 질과 횟수를 적는 것에 더해서 피부의 탄력과 색, 모발의 특징과 분포도, 혀와 구강 점막의 외관을 비롯한 유사 요소들, 그리고 간과 비장의 크기를 기록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다소 아날로그 시대로 넘어간 감이 들지만,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진찰과정입니다. 시진(視診),촉진(觸診), 문진(問診), 청진(聽診)등의 과정이 환자와 의사간의 신뢰감을 형성하고, 의사에겐 보다 정확한 환자의 상태를 확인 할 수 있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없다는 핑계와 첨단의 진단 기구를 활용해야 한다는 부담감 사이에서 의사는 갈등을 느낍니다. 물론 현대식 진단장비, 첨단화로 무장한 검사 장비가 환자들에게 큰 혜택이 주어지는 것이 사실이긴 합니다만 기계의 역할이 사람이 할 일을 모두 처리 할 수는 없지요.

 

“신체검사는 진단 방법이지만, 좀 더 미묘한 작용도 한다. 특히 의사와 환자가 접촉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이 그러하다. 손을 올려놓는 행위는 서로를 위협하지 않으면서 발견을 위해 서로 매개하는 두 사람이 접촉하게 해준다. 이 행위에 의해 관계의 양상이 바뀌는데, 그 방향은 친밀감과 신뢰가 커지는 쪽인 경우가 흔하다. (………) 그리고 신체검사를 세심하게 수행하면 많은 것을 알 수 있음은 물론이다. 외모, 유연성, 감촉, 내장기관의 크기와 형태, 경련, 그리고 청진기 검사로 드러난 사실은 진단으로 이어 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좀 더 복잡한 어떤 검사가 적절한지에 관한 단서를 제공하는 경우가 흔하다. 후자는 광범위한 마구잡이식 추측에 의존하는, 오늘날 그토록 널리 퍼져 있는 행태와 비교된다. 예컨대 전형적인 복부 CT 촬영을 보자. 이를 통해 분명한 정보들이 이것저것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상 이들 중 많은 부분은 신중한 복부 검사를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 것들이다. 단순한 복부 엑스선 촬영을 병행하는 경우에 특히 그렇다.” (p.170,171)

 

 

‘금지된 약물의 재발견’이라는 글에서 위험하다고 폐기되었던 약품이 재발견 된 것에 대해 저자 스스로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적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이라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은 1937년 터키의 피부과 의사인 훌루시 베체트가 발견,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습니다. 국내에는 1961년에 첫 환자가 문헌 보고된 이래 현재 약 5,000∼1만명의 환자가 투병중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베체트병은 입안과 성기가 자주 헐고, 심한 경우 눈의 포도막이나 장에 염증을 일으켜 시각 및 소화기 장애, 말기엔 신경장애까지 일으키는 희귀성 난치병입니다. 보통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발생하며 병의 진행이 심하고 빠른 경우 1∼5 년 내에 실명, 혹은 내부 장기 손상으로 생명을 잃게 되거나 심한 후유증을 앓을 수도 있습니다. 아직 병의 원인과 발생과정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유전병은 아닌 것으로 지적됩니다. 저의 가족 중에도 이 환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증상은 혈액 내 염증수치가 상승되는 것과 입 주변과 입속에 궤양이 자주,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것, 피로감이 빨리 오는 것 등입니다. 이러한 베체트병 환자(남)가 저자를 찾아옵니다. 이런 약, 저런 약을 다 써봤지만, 효과를 못보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베체트병 관련 웹사이트에서 찾아낸 제안을 가지고 진료실에 들어와 그를 놀라게 합니다. 그의 상태에 ‘탈리도마이드’가 효과가 있다는 내용 이었습니다.

 

탈리도마이드(Thalidomide)는 1957년 독일에서 처음 시판, 의사의 처방 없이도 구입할 수 있는 일명 "무독성" 진정 수면제로 판매된 약이었습니다. 그러나 곧 본래 목적보다 임산부의 입덧을 완화하는데 효과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유럽 전역의 의사들은 임산부 입덧 완화용으로 탈리도마이드를 처방하고 전 세계 48개국의 임산부들이 이 약을 복용했습니다.

 


탈리도 마이드 베이비로 사지결손증을 갖고 태어난 

영국의 구족화가 앨리슨 래퍼가 모델로 선 

「장애엄마의 모성애」를 주제로 한 포스터 

(사진 출처 : 엘리슨 래퍼 홈페이지.  www.alisonlapper.com )



그러나 이 일은 재앙에 가까운 사상 최악의 약화사고를 낳게 됩니다. 임산부의 입덧 완화에는 효과적이었으나 태아에게는 참담한 결과를 불러온 것입니다. 이 약을 임신 3~8주에 복용한 임산부들은 예외 없이 일명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 불리는 사지가 짧거나 없는 기형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임신 중 복용한 탈리도마이드가 태아의 혈관 생성을 억제, 사지결손 기형아라는 운명을 쥐어준 것입니다. 1961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 그리고 1962년 일본에서 서둘러 판매금지 조치를 내리면서 탈리도마이드는 세상 밖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이 약이 무방비로 노출된 5년 동안 출생한 아기가 유럽에서만 8,000명, 전 세계 46개국에서 1만2,000여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이 약을 환자가 써 보고 싶다고 합니다. 약을 좀 구해서 시험 해봐달라는 이야기지요. 그러면서 (남)환자가 하는 말..“어쨌든 아시다시피 내가 임신 중인 건 아니잖소.” 이 대목에서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노인의학전문의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선 요즘도 약이 계속 개발되어 나오니까 다른 약을 써 봅시다. 하고 넘길 내용입니다. 그러나 의사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숙제를 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1960년대 초반의 비극이후 관련된 모든 용법이 모두 폐기된 상태입니다.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프랭클린과 담당의사는 약 6개월에 걸쳐 인간 연구 윤리 위원회(HIC,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임상연구가 이루어질 때 피 실험자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위원회) 와 FDA의 허가를 받기 위해 복잡한 서류작업을 계속하게 됩니다. 결국 약을 사용하게 되었고, 흥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새 요법을 시작한 지 여러 주가 지난 뒤 프랭클린의 궤양이 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그리 머지않아 나는 끔찍한 스테로이드 약물과 그로 인해 자주 일어나는 합병증으로부터 그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 나는 이 약을 다른 환자 몇 명에게도 시도해봤는데, 모두 증상이 호전되었다. 그의 경우가 가장 효과가 좋았지만 말이다. 10년이 지난 현재 프랭클린은 스테로이드를 비롯한 모든 약물들을 끊고 잘 해나가고 있다. 그리고 다른 의료 센터에서 이루어진 여러 연구들의 결과 이 약이 다수의 소집단 환자들에게 잠재적인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p.166)

 

 

이 책은 저자가 수집한 이야기를 1인칭 화법으로 썼습니다. 그래서 읽다보면 마치 저자 본인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여집니다. 임상에 있는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고 다른 독자들에겐 의료 현장의 안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됩니다. 단지 대부분의 이야기가 미국의 1970년대가 무대입니다. 저자는 이 시기가 전통적인 직접 해보는 방식에서 초현대의학의 생체공학적 기적으로 점차 대체되기 시작하는 시기라고 표현 합니다.

 

첨단 의료장비가 병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환자의 마음까지 잡지는 못할 것입니다.

임상에서 환자를 돌볼 수 있는 한, 아날로그 마인드를 잊고 싶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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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연금, 보험, 저축을 능가하는 노후대비'책'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2-10-24 17:57 
    '두통에는 진통제', '우울증엔 항우울제', '불면증엔 수면제'라는 것이 공식처럼 각인되고 있다. 그러나 시댁과 갈등을 겪는 전업주부의 두통과 학습우울증에 걸린 청소년의 두통이 과연 같은 질병일까. 또 시댁과 갈등을 겪는 주부에게 어깨 결림, 두통, 불면증, 소화불량, 생리통이 동시에 나타났다면, 이는 각각 정형외과, 신경과, 정신과, 내과, 산부인과에서 따로 해결해야 할 병일까. ─강용혁, 『닥터K의 마음문제 상담소』, 12쪽 예전에 손발이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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