낱말의 우주 - 말에 숨은 그림, 오늘을 되묻는 철학
우석영 지음 / 궁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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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자 한 글자 속에 담긴 사색의 징검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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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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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가상 인터뷰로 리뷰를 작성해봅니다)

 

Q (나) : 선생은 공대를 졸업하시고, 제련소에서 근무를 하다 얼마 후 그만두고 국어국문학과에 편입, 졸업하시고 난 후 교수, 시인으로, 독서법에 대한 저술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시고 계시군요. 그렇게 삶의 중간에 노선을 바꾸시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A(저자) : 흔히들 이야기하는 ‘문학에 대한 열병’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숙명인 것 같습니다. 가을로 기억됩니다. 아니 꼭 가을이 아니라도 ‘가을’이 상징하는 그런 계절이었을 것입니다. 남들보다 비교적 늦게 2차 성징이 시작 될 무렵 어느 날, 화동 정독 도서관에서 영어 단어를 외우고, 수학 문제를 풀다 지쳤지요. 버스 대신 두 발을 땅에 딛고 집으로 가고 싶었습니다. 창경궁 돌담길을 돌아서 혜화동쪽으로 접어들었지요. 비는 내리고, 몸과 마음에서, 생애 처음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은밀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지요. 그 순간, 안톤 슈낙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머릿속을 흔들었습니다. 그 땐 몰랐지요. 가까스로 기억해내며 중얼거리던 그 한 편의 수필이 내 인생을 통째로 바꾸게 될, 아! 문학이라는 이름의 불멸의 경전이었음을요.. 공대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다 뒤늦게나마 다시 깨달은 셈이지요.

 

Q : 선생의 프로필 중 ‘돈키호테처럼 현실에 어긋장 놓기, 에리히 프롬처럼 제자들에게 따뜻한 사람 되기, 신영복 교수님처럼 겸손하게 글쓰기를 희망하고 있다고 쓰여 있던데, 더 하실 말씀은?

 

A : 현실은 때로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던가, 아주 지저분하든가 둘 중에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지향하는 방향은 아무래도 제 맘에 안 듭니다. 이미 방향감각을 상실한 우주 폐기물 같다는 생각을 가끔 해봅니다. 언제 어디로 떨어질지 모르는 그 쇳덩어리 말입니다. 에리히 프롬은 제가 특히 존경하는 석학입니다. 「소유냐 존재냐」, 「인간을 위한 인간」등 모두 제게 크게 영향을 준 도서들입니다.

신영복 교수님을 떠올리면 존경의 마음과 함께 제 몸과 마음이 위축됩니다. 신 교수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페이지 넘기는 부분이 닳을 정도로 읽었지요. 밑줄도 참 많이 그었습니다. 책을 읽을 때마다 참 이상하게도 감옥 안에 있는 이와 밖에 있는 이가 뒤바뀐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족들에게 보내는 서신들 속에서, 평안하고 자상한 마음자세와 유머러스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읽으면서, 오직 사색만이 인간을 자유롭게 하고 감옥에 갇히지 않게 하는 진정한 힘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신 교수님의 《강의》는 서론에서부터 목이 메어 왔습니다. 수인(囚人)이었기에 도달할 수 있는 문학과 철학, 그리고 역사에 대한 인간적인 해석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수인의 수(囚), 이 한자를 보면 신 교수님이 22년 동안 어떤 삶을 살았는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 네모 벽 속에 한 사람이 갇혀있습니다. 저 좁은 네모벽 속에서만 도달 할 수 있는 문사철(文史哲)의 무한함, 이 역설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Q : 가장 혐오하는 것을 세 가지 드셨던데, 1주일에 1권 이상 책 읽기,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기. 1개월 이상 서울에 머물기. 이 중 제일 첫 번째는 선뜻 이해가 안갑니다. 인터넷 서점은 물론 독서를 권장하는 이런 저런 단체에선 1주일에 1권 이상 책 읽자는 캐치프레이즈가 자주 눈에 띄던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요?

 

A : 아마 제 이야기를 들으면 인터넷 서점이 오히려 좋아 할지 모르겠습니다.

1주일에 한 권 이상 책을 읽자는 이야기는 1주일에 한 끼 정도 밥을 먹자는 이야기나 똑같습니다. 육의 양식은 하루에 한 끼만 건너뛰면 큰 일 날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왜 굳이 책은 1주일에 한 권입니까?

책을 거의 매일 하루에 한 권씩 읽고 리뷰를 쓰는 사람들은 시간이 남아돌아서 그러는 것 아니지요. 남들만큼 바쁘게 삽니다. 단지 일상의 삶에서 틈새시간을 잘 활용하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책도 읽고, 글도 쓰는 것이지요. (이건 완전 이 리뷰 쓴 사람 이야기)

덧붙여 나에게 서울은 너무 산만합니다. 책읽기와 사색을 방해하는 요인이 산지사방에 깔려 있습니다. 공기도 점점 안 좋아지고 있구요. 그래서 개인적으로 은둔처를 마련해 놓았지요. 경기도 여주 깊은 산골에 있는 귀담재(歸淡齋)라는 산장에서 책도 읽고 글도 쓰며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영적 에너지를 보충하고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은둔을 위한 은둔이 아니라 ‘인생 공부’를 위한 글을 쓰며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할 궁리를 하고 있습니다.

 

 

Q : 선생은 이번 책에서 문학은? ~ 이다. 라고 무려 20가지나 이름을 붙여 주셨더군요.

좀 더 간단하게 줄여서 한 말씀 하신다면?

 

A : 이 책의 기획 의도 및 목적이라는 타이틀로 답변 드리고 싶습니다.

최근 문학의 중요성이나 가치가 점점 상실되어 가는 시점에서 문학의 진정한 효용성이나 필요성을 언급함으로써 학생이나 일반인들에게 문학을 통하여 얻게 되는 인생의 새로운 가치 창출에 이바지하는 기회를 부여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습니다. 중학 1-1 교과서에 “문학의 즐거움”이란 단원이 있습니다. “문학이란 인간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언어 예술이다.”라고 되어 있지요. 이 세상에서 문학은 인간의 영혼을 가장 행복하게 하는 장치요, 수단이다. 문학작품 속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인생과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 : 예, 말씀 감사합니다. 다음 멋진 작품 기대 하겠습니다.

 

P.S : 혹시라도 저자인 정제원 교수님이 이 리뷰 보시면서 마땅치 않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으실지라도 이해하십시오. 원래 글이란 것이 작가의 손에서 떠나면 본인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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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벽
요로 다케시 지음, 김순호 옮김 / 고려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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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잠결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눈이 떠졌습니다. 곁에서 자던 아내가 가위에 눌렸는지 비명을 지릅니다. 이럴 땐 일단 깨워야 합니다. 어떤 상황인지 모르지만, 깨워 살려내고 볼 일입니다. 흔들어 깨우니까, 꿈과 현실의 문턱에서 아내는 한 번 더 놀랩니다. 일어나 물을 한 컵 마시게 한 후에 아내는 다행히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만, 이젠 내가 잠이 안 옵니다. 무슨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기에 그랬나? 내가 책을 보는 사이에 아내는 수사물 미드를 보다 잠이 들어서 그랬나? 생각하다 나도 어느새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고 있어도 뇌가 완전히 기능을 멈추는 것은 아니지요. 호흡을 하고 있으니까 연수도 계속 움직이고 있습니다. 꿈을 꿀 때 뇌파를 측정해보면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뇌피질에서 활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불이 켜져 있습니다. 단지 그 밝기만 줄어 들 뿐입니다.

 

이 책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젊은 사람들을 위해 평이하게 썼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젊은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재밌습니다. 저자는 결코 나이로 젊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에게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모르는 현대인 모두가 우둔하지만 정겨운 젊은이들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도 젊은 편에 속합니다. 아니 어리다고까지 봐야하나요?

 

책의 전편을 통해 흐르는 것은 뇌(腦)이야기입니다.

“아무리 뇌를 관찰해 봐도 마음은 모르겠다.” 신경세포 분야 생리학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존 C.에클스(호주, 1903~1997)와 캐나다 출신의 뇌신경외과 의사로 대뇌피질의 기능적인 지도를 그린 와일더 펜필드 등이 공통적으로 한 말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합니다. 남의 마음뿐이 아니지요. 내 마음도 모르긴 마찬가집니다. 가령 동전을 던져서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알아맞히는 게임에서 왜 그 쪽을 선택했느냐고 물으면 그냥 ‘직관’이라고 대답할 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대부분 ‘뇌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것도 뇌입니다. 자기의 뇌가 자기를 잘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뇌가 뇌를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저자는 이 책에서 뇌가 뇌를 아는지, 또 알면 얼마나 자세히 알고 있는지를 알아보자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쉽게 이야기해도 뇌 이야긴 복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할 수는 없지요. 이 책에선 뇌 이야기라기보다는 마음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저자는 본인의 블로그에 글을 올리듯 편안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마음’과는 친숙하지만 뇌와는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뇌는 곧 마음’이라는 등식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뇌와 마음의 관계는 확인하려고 해도 뇌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확인할 수 가 없다. 뇌가 있다는 것은 다 알고 있지만, 이 사실을 아는 것도 당신의 마음이지 뇌는 아니다. 우리는 뇌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있다.”

 

언어의 유희 같지요? 키워드는 뇌와 마음입니다. 결국 저자는 그대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진실로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상대방의 마음을 콕 찔러볼 때 내 언짢은 마음도 전할 겸 통상적으로 하는 말이 있지요.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해봐!” 가슴엔 뭐가 있지요?

심장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난 내 할 일 하기도 바빠. 내가 템포를 늦추거나 빠르게 하면 당신도 힘들어져. 멈추면 끝이고. 그러니까 제발 나 좀 그냥 내버려둬.”

심장의 말을 존중한다면, 말을 바꿔야 할 듯싶네요. “머리에 두 손을 얹고 생각해봐!”

이런..차라리 두 손 들고 벌서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낫겠네요. 마음이 내킨다면 말입니다.

결론은 ‘마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뇌의 활동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혹시 다른 의견 있으신지요?

 

“과학의 세계에는 아주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우리들 뇌의 전형적인 기능인 의식이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주관이라는 것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전적인 과학, 즉 19세기 과학에서는 의식을 자연과학에 포함시키지 않고 문학 부문에 넣어버렸다. 따라서 지금도 심리학은 인문과학에 속해 있다. (………) 그러나, 의식이 과학의 대상으로까지는 되어 있다. 그래서 고전적인 자연과학이나 심리학 같은 것 외에 인지(認知)과학이라는 분야가 생겨났다. 인지과학의 범주는 실제로 우리들의 뇌의 기능뿐만 아니라 계산기의 기능까지 포함하는 종합적인 것이다. 이런 분야가 계속 발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고전적 의미에서의 자연과학만으로는 뇌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21세기는 뇌의 세기’라고 합니다. 뇌 연구학자들의 공통된 말입니다. 그것은 ‘인간’이라는 단어가 ‘뇌’로 전환되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뇌에 대해선 앞으로 더 많은 연구와 서적이 나올 것입니다. 마음의 연구 또한 함께 가겠지요.

 

참..오늘 아침, 출근 준비를 하면서 아내에게 어젯밤에 무슨 꿈을 꿨기에? 하고 물으려다 그만 두었습니다. 얼굴 표정을 보니 기억에서 지워진 듯합니다. 공연히 꺼진 불씨 다시 살릴 필요는 없지요.

 

뇌 이야긴 아무리 쉽게 해도 딱딱하지요. 책에 인용된 이야기 한 꼭지 옮기면서 리뷰를 마무리 하겠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문진합니다.

“당신은 자신이 나폴레옹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환자는 가슴을 펴고 대답한다.

“그래요, 나는 나폴레옹이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죠?”

“신이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다른 환자가 말을 받는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소!”

 

썰렁하십니까?

뇌 이야기 읽으시면서, 그대의 뇌에 켜졌던 불을 잠시나마 끄시라고 옮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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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중원 이야기 - 새 시대를 향한 열망이 들끓던 곳
김상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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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내가 밖에서 신음하면서 들어오는데 피가 흘러 옷을 적셨고, 얼굴빛이 창백했습니다. 자객에게 귀에서 볼까지 베여 살이 떨어질 만큼 쪼개져 있었습니다. 때는 1884년 12월 4일 늦은 저녁시간입니다. 목이 달아날 정도로 칼에 베인 사람은 그 당시 실세인 민영익이었습니다. 그날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일이자, 김옥균, 홍영식이 주도한 급진개화파의 거사일이기도 했습니다. 삼일천하로 막을 내린 갑신정변의 칼날에 민영익이 칼을 맞고 죽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날 산책을 나갔던 알렌은 10시 30분쯤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습니다. 이 때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습니다. 미국 공사관 서기관 찰스 스커드 였습니다. 알렌이 민영익의 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알렌에겐 개인적으로도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의료 선교사로 청나라에서 병원을 차렸지만 실패하고 조선에 건너 온 참이었습니다. 부채도 있었습니다. 조선 왕실이나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마당에 민영익이라는 거물이 자기 앞에서 죽고 만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었지요. 하지만 위기는 또 다른 기회라고 하지요? 뒤집어 생각하면 둘도 없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목숨을 살리기만 한다면, 인생 역전도 가능했습니다. 어쨌든 그의 헌신적인 진료 덕분에 민영익은 목숨을 건집니다. 만약에 민영익을 살려내지 못했다면, 서양의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시기도 일단 뒤로 물러갔겠지요. 민영익의 생명을 구함으로써 왕실과 정부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의 관심까지 한 몸에 받게 됩니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인정까지 받게 되면서 특히 고종은 알렌에게 미국의 의료사정을 묻고 서울에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하고 싶다는 뜻을 밝힙니다. 제중원이 탄생하게 된 배경입니다.

 

제중원(濟衆院), ‘사람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제중원은 최초의 서양식국립병원으로만 기억되기 십상이나 탄생하고 변화되는 과정 속에 조선 말기의 여러 면모들이 개입되는 계기가 됩니다. 즉, 변화의 중심에 서는 역할까지 하게 됩니다.

 

1885년 4월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을 연 서양식 국립병원의 첫 이름은 광혜원(廣惠院)이었습니다. 이는 ‘널리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이지요, 이 이름은 조선 초기의 제생원(濟生院)이나 1882년에 폐지된 혜민서, 활인서와 같은 조선 시대 전통 의료 기관의 이름을 계승한 것입니다. 4월 14일 의정부는 국왕(고종)에게 “혜민서와 활인서가 모두 혁파되어 조정에서 백성에게 시혜(施惠)하는 뜻이 소홀해져 별도로 병원하나를 만들어 광혜원이라 칭했다”라고 보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주일 후인 4월 26일,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는 고종에게 ‘광혜원’을 ‘제중원’으로 개명하자고 했습니다. 고종은 즉시 이를 재가(裁可)하여 이때부터 병원의 이름은 제중원이 되었습니다. ‘제중’은 『논어(論語)』에 나오는 ‘박시제중(博施濟衆)’의 준말로, 널리 베풀어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이름을 바꾸게 된 이유 몇 가지가 나오나 이름 이야기는 이쯤 할까 합니다. 어쨌든 제중원의 설립자는 고종과 조선 정부였습니다.

 

 

새로운 의학에 대한 바람은 모든 신문물이 그러듯이 바다를 끼고 시작되었습니다. 부산, 원산, 인천. 이 세 곳의 공통점은 일본과 적지 않은 ‘인연’이 있습니다. 1876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던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부산이 개항되고, 이어서 원산, 인천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 세 항구에는 일본인들이 속속 상륙해 저팬타운을 조성 했습니다. 1884년 9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알렌은 일기장에 “부산은 완전히 왜색(倭色)도시다”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6일 뒤 인천에 도착해서도 “일본인이 우세하고, 가장 좋은 요지를 차지하고 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개항장은 한마디로 조선 속 일본이었습니다. 이런 내용을 접하면 화가 치밉니다. 어쩌다 그 지경까지 갔는지요. 이 세 항구에는 일본 병원이 들어서있었습니다. 일본인 영사관 직원을 포함한 거류민들의 치료를 담당할 기관이 필요했지요. 이 병원들은 일반 개업의가 경영하는 병원이 아닌, 일본 정부가 군의관들을 파견해 세운 병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껏 한반도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서양식 병원이었습니다. 제중원의 오픈을 더 이상 늦출 수 없었던 배경이기도 합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닫혀있던 문고리를 푸는 고종과 조선 정부가 내세운 정치 철학은 ‘동도서기(東道西器)’였습니다. 고종은 1882년 교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저들의 종교는 요사스럽고 악하나 저들의 기술은 이로우니,

진실로 이용후생(利用厚生)할 수 있다면

농업, 양잠, 의약, 병기, 배, 수레 등을 왜 피하겠는가.

그 종교는 배척하되 그 기술을 본받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강약의 형세에 이미 현격한 차가 벌어졌는데,

만일 저들의 기술을 본받지 않는다면

저들의 모욕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고종실록』, 1882. 8.5

 

당시 고종과 조선정부는 미국을 짝사랑했다고 표현해야 할까요? 다른 주변국가에 비해서 미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입장 이었습니다. 미국 역시 조선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요. 영토 확장에 올인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최종 목표는 동아시아의 중심이자, 땅도 크고 인구도 많은 청나라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청나라로 가는 항로상 중간 기착지로 가장 좋은 곳은 일본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이나 러시아가 일본을 차지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때문에 비교적 일찍부터 일본에 공을 들였지요. 영국 등 유럽 열강이 아시아에서 즐겨 사용했던 작전인 ‘함포 외교’를 통해 1850년대에 일본을 개항 시켰습니다.

그런 반면 미국이 한반도에 갖고 있던 관심은 일본에 비해선 미미했습니다. 단지, 아시아로 진출하던 미국 상선이 일본과 청나라의 교역로에서 조난당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조선 정부에 미국 선원들에 대한 인도적인 조치와 미국 선박에 대한 재산 보호를 보장 받고 싶었지요. 1882년 5월 22일에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엔 청나라의 물밑 작업이 주효를 봤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청나라는 특히 1870년대 중반부터 조선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을 하게 됩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활발한 대외 팽창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움직임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여 일취월장하고 있는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청나라 생각에 미국은 자국과 조선의 영토에 대한 야심이 없는 나라이면서, 러시아를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을 한반도에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미국이 청나라 땅에까지 욕심을 안 부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순전히 오판이긴 했습니다. 미국과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네요.

 

제중원의 설립을 비롯한 각종 근대화정책에 고종과 조선정부가 열정적으로 추진했던 부분들은 사실 실패작이었습니다. 그것은 국력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한때 열강 간의 세력 균형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하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세우고 황제가 되면서 나라가 부흥하는 듯 했으나 어느새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급부상한 일본을 상대하기는 어려웠지요. 결국 그는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물러났고,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크게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 무심했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 땅의 역사를 모른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요. 과거를 알면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안목도 생길 것입니다. 이제 좀 더 애정을 갖고 한국의 근, 현대사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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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에서 실천으로 내일을 여는 지식 정치 26
김영명 지음 / 한국학술정보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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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출근길 불쑥 내미는 손길이 있습니다.

명함입니다. 제법 고급입니다. 사진과 번호 그리고 약력이 실려 있습니다. 바야흐로 선거철입니다. 올해는 세계적으로 약 250여개 국가에서 중요한 선거가 치러지는 해라고 합니다.

정권을 유지하느냐, 뺏기느냐에 서로 목숨 걸고 혈전을 벌이겠지요. 선거 양상을 보면 혈전이라는 단어밖에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부터 상대방 후보 흠집 내기와 검은 커튼 속 선거운동이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와 있는 건가요? 나라 살림을 맡겨도 될 만한 인물이 있기는 있는 겁니까? 훨훨 타는 장작불에 겁 없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철없이 뛰어노는 벌거숭이 어린애처럼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뛰어드는 정치 지망생들이 정치학에 대한 고민과 공부나 하고 덤비는지요?

 

이번에 제가 읽은 것은 모처럼 정치관련 책입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국제, 정치, 경제, 사회, 환경 관련 책들을 많이 보면서 함께 고민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래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동안 제가 이 쪽 동네는 별로 관심이 없었기에 더욱 애정을 갖고 들여다봐야겠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시사해주는 바와 같이 “말은 많으나 실행이 적다.”는 것이 ‘한국적 정치학’의 현주소라고 합니다. 한국의 정치학이 지나치게 서양, 특히 미국 정치학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이는 비단 정치학에 국한된 일이 아니고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의료 일반 심지어는 국방, 군인들의 복장조차도 미국의 그것을 카피한 모습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대외 의존성을 비판하거나 추상적인 담론 수준에서 이를 타개하기 위한 제언을 내놓는 일이 고작이었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외교, 정치학 분야의 석학인 저자 김영명 교수는 한국적 정치학에 관심을 갖고 한국 정치학계의 풍토에 대한 비판을 여러 지면에 발표했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의 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제로 한국적인 정치학 연구를 실천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한국의 정치문화 연구는 우리가 현실에서 상식적으로 느끼는 한국의 문화현상에서 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문화현상은 무엇일까요? 개인에 따라 각기 판단기준이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흔히 지적하는 것으로 타협의 서투름, 지나친 명분론, 연고주의, 권력 지향성, 빨리빨리 - 대충 대충주의, 부패, 휩쓸림, 바람의 정치 등등을 들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안전 불감증과 책임 있게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공직자나 정치가가 부족한 것을 첨가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한국 정치의 특수성을 다음과 같이 논합니다.

1) 이념, 계급, 지역 쏠림

2) 당파 싸움의 지배

3) 인물정치

4) 정서적 휩쓸림 등과

이를 일으키는 특수한 ‘조건’으로

1) 분단 상황 2) 압축 성장 3) 단일사회 문화의 세 가지로 주목합니다.

 

이 중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부분은 ‘쏠림’ 현상입니다.

「이념 쏠림」이 있습니다.

“분단된 한국에 대한 미국의 영향은 한국의 정치경제체제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국한하고, 그 바깥을 허용하지 않았다.”

분단 상황은 한국 정치경제 구조의 근본 한계선을 설정하였지요. 또 한미 동맹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한국의 대내외 정치에 반공국과 미국 동맹국으로서의 근본 한계선을 설정하였습니다. 이런 구조는 정치인과 국민 일반의 반공의식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고조시켰고, 보수적 가치관과 이념이 한국에 팽배하게 만든 계기가 됩니다.

저자는 요즘 거론되는 한국의 좌우파 개념은 세계의 보편 기준에 비해 볼 때 매우 오른쪽으로 치우친 상태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한국의 진보좌파는 세계적 기준으로 볼 때 좌파라고 말하기 어려울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념이 한 쪽으로 쏠렸다고 해서 이념 갈등이 없다는 말은 아니지요. 예를 들면, 정파들 간의 이념 격차는 좁지만 그 좁은 범위 안에서 갈등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념 격차와 갈등의 정도가 꼭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지요.

 

「계급 쏠림」이 있습니다.

“분단 상황은 급속한 산업화를 겪은 한국사회에서 반공 이데올로기를 팽배하게 만들어 노동계급을 비롯한 하층 계급의 조직화나 정치화를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독재, 권위주의 시대뿐 아니라 소위 민주화가 된 이후에도 노동운동은 용공세력으로 몰리기 일쑤였습니다. 이런 점은 국가와 상층계급을 지배적인 위치에 두는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한국은 특히 전쟁이후 일종의 하향평준화가 일어나 비교적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급속한 경제성장을 겪으면서 경제적 불평등과 함께 계급불평등이 고조됩니다.

 

 

「지역 쏠림」현상은 압축성장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압축 성장은 지역 간 불균등 발전을 통해 이루어져서 지역 갈등을 유발하였고, 이는 지역 맹주를 중심으로 한 인물 정치 및 당파싸움과 밀접히 결합하였다. 이는 정치제도화를 지연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일종의 간접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수도권 집중을 가속화시켰고 중앙 집중 정치를 심화시켰다. 1995년부터 시행된 지방자치제도도 이를 막지는 못하였다.”

 

「단일사회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볼까요? 리뷰초두에 언급해드린 바와 같이 한국정치에 대한 연구는 주로 서양, 그 가운데서도 주로 미국 정치학의 분석방법과 이론에 입각하여 연구 되어왔다고 합니다. 한국이 단일사회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요즘처럼 다문화가정이 점점 늘어나고, 그들을 위한 관심과 행정적 뒷받침에 대한 지혜가 필요한 시점엔 더욱 단일사회라는 단어를 제고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단일민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문화적, 지리적으로도 다양하지 않고 단일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우선, 다른 민족이 1%도 없고 하나의 민족으로 국가가 구성된 나라는 한민족으로 구성된 대한민국과 조선인민민주공화국 외에 거의 없다고 합니다. 동질성의 신화를 내세우는 일본도 한국인 중국인 등 외국인과 아이누, 오키나와 종족이 섞여 소수민족이 2~3%는 존재한다고 합니다. “한국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명제에 대한 반발이 요즘 와서 많아진 것 같은데, 그것은 민족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라고 주장을 하면서 현재 한국에 외국인이 아무리 많이 거주하더라도 그들이 하나의 또는 여러 사회 ‘집단’으로서 한국인의 행동 양식과 의식 구조에 영향을 줄 만한 정치사회적 의미를 지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글쎄요?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현재의 상황만을 갖고 판단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좀 더 숙고를 해봐야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다문화가정, 외국인 거주자들이 늘어나면 늘어났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책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제 1부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나타난 정치학 연구들의 대외 의존성을 분야별로 비평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제1장은 한국 정치문화 분석의 대외 의존성을 지적하고 한국적 특수성에 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촉구하며, 제2장은 국제정치 분야에서 지금까지 시도된 한국적 학문의 담론과 실제 실천 노력들을 평가하고 이를 이루기 위한 실용적 접근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제3장은 한국적 정치학의 모색에 대한 기존 학계의 거부감을 소개하고, 그 편향성과 오해를 해명합니다.

제4장은 이들을 종합하여, 한국적 정치학에 관련된 주요쟁점들을 논의하고 현실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2부는 글쓴이가 그동안 시도해 온 몇몇 분야에서의 한국적 정치학 연구 결과물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봄이 오긴 오나봅니다. 오후 되면 몸이 나른해지는 것을 보니까요.

한국의 정치마당에도 진정한 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바른 생각과 행동을 실천해나가는 정치가들이 새순처럼 돋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좀 시간이 걸리면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을 이 땅과 이 세상인데.. 안 그렇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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