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 자연학자 이브 파칼레의 생명에 관한 철학 에세이
이브 파칼레 지음, 이세진 옮김 / 해나무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책을 읽다보면 책이 책을 부릅니다. 관심이 가는 분야의 흐름이 자연적으로 형성됩니다. 그래서 장기적인 독서계획은 세우기가 힘듭니다. 대략 3~4주 간격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책상 한 곁에서 대기 중입니다. 요즘은 다른 책들과 섞여서 키워드가 ‘우주’인 책들을 자주 들여다보게 됩니다. 나 자신을 우주라는 공간에 던져놓고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생각도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면에는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가 사형 집행 날짜를 며칠 안남기고도 같은 감방에 있던 동료가 자기가 모르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자꾸 캐물었습니다. 그러자 귀찮아진 이 사내가 이 땅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은 철학자에게 핀잔을 줍니다. “곧 죽을 사람이 뭐 그리 알려고 해요” 철학자가 얼굴 표정 하나 안 바뀌며 답을 합니다. “죽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서..” 예..저는 이런 심정으로 책을 읽습니다. 내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책을 읽다보니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니 어쩐 일이지요?
 
최근 읽은 책 중 우주라는 단어가 들어간 책을 잠깐 언급하고 리뷰대상인 책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막스 셸러의 『우주에서 인간의 위치』입니다. 막스 셸러는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의미상으로 볼 때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종래의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온 철학과 과학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매개로 해서 오늘날 새롭게 종합하려는 시도입니다. 시대를 거치면서 인간의 이성은 더욱 혼돈가운데 처하게 되지요. 그래서 역사상 양차 세계대전은 ‘인간에 대한 몰이해’를 단적으로 보여 줬다는 질책도 받고 있습니다.

 

셸러는 인간이 “그 자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동시에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또한 잘 알고 있는”상태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있다고 하니까 좀 위로가 되긴 합니다. 셸러의 사상을 짧은 글로 다 표현 할 수 없고 이 리뷰에서 깊이 다룰 사항도 아닙니다만, 연관이 있기에 옮깁니다. 셸러는 신의 이념과 형이상학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종래의 형이상학은 신의 이념을 ‘나는 존재한다(데카르트)’ 또는 세계는 존재한다(아퀴나스)‘는 명제에 의거하려 추리하려 했지만, 신의 이념을 현상학의 상관적 고찰법에 따라 이끌어냅니다. 즉, 나의 ’모든 사랑하고 관조하며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은 따라서 무엇보다도 신 속에서 사랑하고 관조하며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신의 영원한 이념 속에 뿌리박게 되고, 세계 과정에서 이념적 생성과정의 공동 형성자, 공동 창립자, 공동 수행자가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 이젠 분위기를 바꿔서 본론으로 들어가 봅니다. 이브 파칼레,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떠오른 생각은 “이사람 참 까칠하네”입니다. 나꼼수나 딴지일보에 적응되어 있는 사람들에겐 “뭐, 이정도 갖고..”하겠지만, 내 수준에는 하도 까칠해서 어감이 좀 그렇지만 ‘까자남(까칠한 자연주의 남자)’라고 이름 붙여주고 싶습니다. 저자는 프랑스태생입니다.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다가 68혁명(이 부분은 나중에 좀 더 알아봐야겠습니다)에 가담하여 격동의 세월을 보냈답니다. 그 후 프랑스의 유명한 탐험가인 자크 이브 쿠스토 함장의 탐사에 동참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간 칼립소 호를 타고 항해하며 자연학자로서의 소양을 쌓았다고 합니다. 책도 수십 권 썼군요. 이 책의 제목은 『신은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썼다는 이야긴가요? 저자의 책 중 제목이 더 튀는 것도 있습니다. 『인류는 멸망하리라, 시원하게 잘됐다!』토종 우리말로 표현하면 '쌤통이다!' 가 되겠지요.
 
그런데 이 사람 참 아는 것도 많습니다. 철학은 기본이고 천문학, 식물학, 동물학 등 과학의 전반을 어우르며 종횡무진 합니다. 그래서 붙는 명칭도 많군요. 생태주의자, 자연학자, 식물학자, 철학자, 환경보호 운동가, 자유기고가 등입니다. 이런 면에선 내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문에 대한 열의, 열정은 절대 과소평가할 부분이 아니지요. 저자는 다음과 같은 궁금점에서 생각을 키웠다고 합니다. “우주는 어디에서 왔는가?”,  “생명은 어디에서 왔는가?” 사실 이 질문은 철학의 근원이 되고 있지요. 더 나아가 저자가 차기작으로 계획하고 있다는 “인간은 어디에서 왔는가?” 역시 마찬가집니다.
 
저자의 ‘태초에~’에 대한 관심은 137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5억 4200만 년 전에 멈춥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텍스트로 삼은 것은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입니다. 저자는 여러해 전부터 이를 오늘날의 책으로 다시 써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만물의 본성’이라든가 ‘자연의 섭리’정도의 제목으로 말입니다. 그래서 이 작업에 착수하기 위해 희끗희끗한 수염이 나고 환갑이 넘는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고 하네요. 그러면서 이 사람 하는 말이 걸작입니다. “루크레티우스여, 그대는 나처럼 수염이 하얗게 셀 겨를조차 없었겠소. 백과사전을 뒤져보니 그대는 겨우 43년을 살고 세상을 떠났더군요.”    자연적으로 조만간 읽어야 할 도서목록에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가 포함됩니다. 마침 최근(2012, 1월) 번역 출간된 책이 있군요.

  (강대진 역/아카넷 /원제:De Rerum Natura) 

 

 

저자 이브 파칼레가 루크레티우스를 향한 헌사(獻詞)같은 글이 이 책의 분위기를 그려주고 있는 것 같아 옮겨봅니다.
 

오, 루크레티우스여!
그대에게 나의 죄 없는 황홀경을 바치노라.

나의 터부 없는 쾌락을, 예술적 감흥을,
사물과 사람에 호기심 많은 여행자로서의 소회를 바치노라.
숲, 사막, 산, 바다에 환장하는 자연학자로서의 경이로움을 바치노라.

참으로 덧없이 지나가는 매순간을 음미하되
회백질을 욕되게 하지 않을 정도로만 살다 가고픈
어느 유인원의 넘실대고 굽이치는 철학을 그대에게 선사하고 싶다.
 
 
저자는 스스로 그가 시적이면서도 반어적 유물론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의 시니컬한 문장들은 용서해줄만 하긴 합니다. 그렇지만, 저자의 글은 좀 불편합니다. 아니, 많이 불편합니다.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전제하에 글을 써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그냥 본인의 관심과 알고 있는 지식을 써도 그 양이 장난이 아닌데, 굳이 왜 신을 끌어들여서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지(나의 주관적인 판단)모르겠습니다. 신이 자기한테 뭐라고 했길래, 어쨌길래 말입니다.
 
그대는 데모크리토스(Democritos)와 에피쿠로스(Epikouros)와 더불어 내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와 우주를 상상하였다. 소립자와 힘의 조합이 오직 자기들에게 작용하는 법칙들에만 복종하는 형태로. 수염을 드리운 영원하신 성부 하느님도, 야훼도, 알라도, 브라마도, 데미우르고스도, 성모도, 순교자도, 애매한 성별의 천사도, 지옥으로 이끄는 뿔난 악마도 필요 없나니. 창세 신화도, (사실은 죄다 인간이 쓴)『성경』도, 기적과 기도도, 종교재판관들이 집행하던 의식도, 잔혹한 형벌도, 파트와(fatwa : 이슬람 율법에 따른 판결)도 필요치 않나니........

 

 또 우리 마음에 경각심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인류의 미래는 오로지 우리가 이미 내린 결정, 내리고 있는 결정, 앞으로 내릴 결정에 달린 문제다. 우리가 우주의 힘을 배겨낼 수 있는 한에서 말이다.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글을 뽑으면 개성이 강한 사람(?)으로 비춰지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시야는 일단 우주로 향하고 있습니다. 우주. 수십억 개의 천체.....그만큼이나 많은 수수께끼!  저자는 학자들이 우주가 우리의 모태 혹은 활동무대로 쓰이기 위해 창조되었다고 믿거나 그러한 믿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부분에 대해 심한 반감을 표현하는군요. 그의 우주 이야기는 빅뱅에서 출발합니다. 언젠가는 지구 이외에 다른 행성에서도 생명체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람도 나타냅니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몇 세기 더 버텨준다면 우리의 후손들은 다수 세계의 시민들과 교류를 나누게 될 것이라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생명은 기적처럼 보이지만 그보다는 충동에 더 가깝다고 표현하는군요. 일종의 욕구, 경향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물질이 복합되고 조직화되려는 내재적 성향, 엔트로피가 떨어져 죽음에 이르지 않게끔 맞서 싸우려는 성향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별들이 탄생하는 과정, 태양에 대해, 혜성, 지구지각의 분노, 물과 행성, 40억 년 전엔 세포 형성, 8억 년 전 선캄브리아기의 자취를 찾아서 그리고 5억 4200만 년 전 캄브리아기에 나타난 진화의 흔적들 그리고 너무나 연약했던 우리 선조들의 모습 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일단 대단합니다. 칼럼 형식으로 쓰인 글들이지만, 그저 칼럼이라 생각하고 읽기엔 내용이 무척 깊습니다. 철학적 사유가 깊습니다. 책으로나마 한 번 만나보실 만합니다. 단지 신앙인인 경우에는 읽는 내내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읽다가 그만 둘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한 생각 바꾸어서 나와 반대편에 있는 사람(정확한 표현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반어법을 쓴다고 고백했으니까요)의 말과 생각을 들어보고, 들여다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합니다. 저자는 본인의 미워~! 미워~! 라고 하는 표현이 ‘사랑해~’로 받아들여주길 바라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도 노파심(?)에 이브 파칼레에게 데이비드 흄의 입을 빌어 한 마디 해주고 싶습니다.

 

"신의 존재에 관한 우주론적 논증과 목적론적 논증은 받아들일 수 없다. 신은 논증으로 밝혀질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오직 신앙만이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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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떠나는 철학여행 하루에 떠나는 시리즈
김영범 지음 / 페퍼민트(숨비소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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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철학이 정식으로 학문의 영역으로 자리를 잡기 전에 철학을 하던 사람들은 어떤 마음에서 철학에 매료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숙명처럼 짊어지고 갔었을 그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마땅히 내려놓을 자리를 못 잡았던 것 아닌가 라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철학은 여전히 내게 어려운 영역이자 학문입니다. 그러나 철학을 모르고 인문, 사상(思想)서적을 읽는다는 것은 한쪽 눈으로 겨우 겨우 길을 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철학의 여행을 떠나기 위한 가이드북, 로드 맵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가히 철학의 계보 또는 족보 책이라고도 이름 붙일 수 있겠습니다.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근대, 현대까지의 시간 여행을 통해 수많은 철학자들과 만나게 해주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하루에 떠나는 철학여행’이라고 해서, 1박2일이 아니라고 해서 결코 가볍게 넘길 책은 아닙니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마치 바캉스용 로드맵처럼 ‘한 장으로 보는 철학 계보도 (A Map of Philosophy)’ 까지 제공해주고 있지만 당일치기로는 좀 무리입니다. 철학가의 이름이 거론되는 책들을 읽게 될 때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환경에서 누구의 영향을 받고 어떤 동기에서 철학의 대열에 들어섰는가. 어떤 생각이 그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가를 확인해보는 자료가 되겠습니다. 그림과 사진이 곁들여져서 읽기에 지루함이 덜하더군요.

 

철학의 원조 역할을 하는 그리스 철학을 이야기하다보면 단골로 등장하는 문구가 있습니다. “미토스에서 로고스로~”입니다. 미토스(mythos)는 ‘신화’지요. 로고스(logos)는 ‘이성’이구요. 인류의 정신사가 신화에서 이성으로 급격하게 변화하면서 비로소 철학이 탄생되었다고 이해를 해야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신화와 철학이 배다른 자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완전 분리를 시킬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그리스 철학은 과학적인 면과 신비주의적인 면이 뒤섞여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자 김영범 교수는 ‘들어가는 글’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놀라운 것, 경이로운 것 앞에서 인간의 정신이 사유를 작동하기 시작한다고 가정할 때 이 시점이 철학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나는 ‘인간의 깊은 내면에 불씨가 당겨져서 뇌의 한 부분이 활성화되는 과정’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최초의 철학은 오늘날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밀레투스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밀레투스 학파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고 하는데, 하나는 자연(physis)을 발견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설명방식보다는 이성을 통해 비판하고 논쟁했다는 것입니다. 탈레스에 얽힌 에피소드 중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한 것 한 가지 소개해드립니다. 사람들이 탈레스에 대해서 “뭐 하러 그런 짓거리를 하는가? 자기 앞가림도 못해 빈한하게 살고 있는 꼬락서니하고는.....” 사실 철학은 출발할 때부터 먹고 사는데 크게 도움이 안 되는 분야이긴 했습니다.(지금도 별 차이가 없다지요?) 철학은 아무 쓸모도 없다는 듯, 사람들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비난하자, 탈레스는 비수기에 올리브 짜는 기계를 헐값에 임대했습니다. 사람들은 또다시 비웃었지요.

 

“올리브가 나지도 않는 계절에 기계는 뭐 하러 임대할까?”

 

탈레스는 묵묵히 비난을 감수했지요. 그리고 계절이 바뀌어 올리브를 수확하는 시기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올리브는 전례 없는 대풍이 들었고, 덩달아 올리브 짜는 기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되었지요. 결과는? 탈레스는 떼돈을 벌었지요. 요즘 언어로 재테크에 성공한 셈입니다. 탈레스는 세상의 비난을 감수하며 올리브의 작황을 여러 가지 데이터를 가지고 예측했던 것입니다. 이 에피소드를 철학자도 마음만 먹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해석하면 무리겠지만,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원리를 탐구하며 살아가는 철학자들이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게 입증한 셈이지요.

 

 

 

이 에피소드는 박지원의 풍자소설 허생전(許生傳)을 생각나게 합니다.

 

주인공인 허생은 10년 계획을 세우고 글공부에 몰두하지만 7년째 되 어느 날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가 허생 에게 도둑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 오라고 구박을 합니다. 이에 허생은 글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인 변씨를 찾아가서 1만 냥의 돈을 빌립니다. 허생은 1만 냥으로 시장에 나가서 매점 매석으로 독점시장을 형성하여 큰돈을 벌면서 무역이 잘 되지 않는 조선 땅의 현실에 한탄을 합니다. 그 뒤 허생이 한 뱃사공을 만나 살기 좋은 섬으로 남쪽의 어느 작은 무인도를 소개받게 되는데, 마침 그때 조선 땅에 수천의 도둑떼가 들끓어, 허생이 그들을 회유하여 뱃사공이 소개해 준 무인도로 데려가서 새로운 섬나라를 세우고 그 곳에서 난 작물들을 흉년이 든 일본의 한 지방에 팔아 큰돈을 벌고는 허생 혼자서 다시 조선 땅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조선에 돌아와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남은 10만 냥의 돈은 변씨에게 갚습니다. 오...이런 허생 영감 따라가다 길을 잃을지 모르니 그만 돌아와야겠습니다.

 

시대를 넘어 넘어 현대 철학으로 옵니다. 이 책에서 제일 막내로 이름이 올라있는 인물은 ‘차이와 생성'의 철학자 들뢰즈(1925~1995)입니다, 함께 들뢰즈를 만나볼까요. 푸코가 들뢰즈를 향해 한 말이 있습니다. “20세기는 들뢰즈의 시대가 될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그가 1995년 11월 4일 자신의 아파트에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 것입니다. 철학사가로 출발했던 들뢰즈는 철학사에서 만나는 철학자들을 이리저리 비틀었습니다. 만일 철학자들이 무덤에서 나온다면, “오, 이것이 나의 사상이었다는 말인가!” 하고 탄식을 했을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랍니다.

 

들뢰즈는 현대적 사유를 펼친 최첨단 사상가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토대는 매우 고전적입니다. 평생 줄기차게 고전적 물음에 매달렸습니다. 이는 마치 플라톤이 이데아를 평생의 화두로 삼아 자신의 존재론을 펼쳐나갔던 것에 비견됩니다. 역설적이지만 들뢰즈와 플라톤은 이데아에서 서로 만납니다. 플라톤에게 이데아가 ‘영원부동의 실재’를 의미한다면, 들뢰즈에게 이데아란 ‘차이’를 의미합니다, 들뢰즈가 의미하는 차이는 통상적인 개념의 차이. 즉, 같음과 다른 차이, 동일자를 전제한 차이, 차이를 서로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차이 등으로 이해해선 안 됩니다. 이 정도 ‘차이’면 감히 철가 동네에 접근을 못하지요.

 

들뢰즈에게 ‘차이’란 그 존재론적 위상이 이데아, 본질, 절대적 진실의 수준으로 표현됩니다. 그가 말하는 차이는 어떤 존재자가 현실화되어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그저 동일자의 바깥에 타자로서 존재하는 차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은 어떤 보편성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동일자로 환원되지도 않으면서 존재자들이 존재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존재의 심연입니다. 차이란 어떤 존재가 동일성으로 규정되기 이전에 그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주며 그 근거가 되는 존재 자체를 의미합니다. 즉 차이야말로 존재 그 자체이며 개별적인 존재자의 의미가 되고 그러한 존재자들을 가능해주는 조건이라고 합니다.

 

뭔 이야긴지 접수가 잘 안되신다구요? 더 알아듣기 쉬운 말로 표현을 하고 싶어도 마땅히 대체하기가 쉽지 않군요. 차후에 들뢰즈의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 번 정리 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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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바꾸는 책 읽기 -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
정혜윤 지음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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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명한 작가를 인터뷰하러온 젊은 기자가 작가 서재의 사방 벽은 물론 겹겹이 에워싼 책들을 보고 놀라 묻는다. “선생님께서 이 책을 다 읽으셨어요?” “아니요, 다 읽은 책들은 이 방에 있을 필요가 없지요.”

 

나는 확실하게 졌다. 그 작가가 부러워졌기 때문이다. 나의 서재에도 책이 제법 있다. 올 해 들어서 전공 서적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거의 100권이상의 책이 늘었다. 여러 해 전만해도 다 읽은 책은 미련 없이 남에게 주곤 했다. 사실 상대방이 꼭 원하지 않는 한 새 책이고 헌책이고 간에 남에게 책을 준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각기 취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주면서도 “과연 이 사람이 언제 이 책을 읽을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다. 그런데 리뷰를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하고 나서는 다른 이들에게 책을 주는 일이 조심스러워졌다. 리뷰를 쓰다보면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진다. 더러 리뷰에 인용할 부분도 찾게 된다. 그래서 요즈음은 남에게 잘 안준다. 열심히 서가에 꽂아 놓는다. 아직 못 읽은 책, 조만간 읽어야 할 책은 책상 옆 서가에 눕혀 놓는다. 누워 기다리게 한다. 다 읽은 후에는 책들끼리 서로 등 기대고 서 있으라고 꽂아놓는다. 나에겐 읽은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80%는 읽은 책이다.

 

이 책 “삶을 바꾸는 책 읽기”로 들어가 본다. 부제는 ‘세상 모든 책을 삶의 재료로 쓰는 법’이라고 되어있다. 문득, 딴죽을 걸고 싶어진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입장에선 “그래?..책을 읽으면 삶이 바뀐다고?. 믿어도 돼? 그럼 한 번 읽어볼까?” 물론 저자가 살아오면서 만난 사람들 중엔 책을 읽어서 삶이 바뀐 사람도 있긴 하다. 그러나 냉정하게 따져보면 삶이 바뀐 것이 아니라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고통, 고난과 어려움을 대하는 시각과 생각의 방향이 바꿔진 것이다. 결국 삶이 달라지긴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지는 점이 앞선다.

 

책을 읽으면 어찌 되느니, 어떻게 되느니 하는 현학적인 이야기보다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삶이, 그들이 삶을 받아들이고 변화되는 과정이 가슴에 와 닿는 이야기들이 좋다.

 

 

일흔이 넘은 뒤 처음으로 한글을 배우신 할머니. 한충자 할머니는 한글을 배우신 정도가 아니라 시까지 쓰신다. 한글을 배우면서 본인이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모른 그의 남편이(뒤늦게 그 사실을 알긴 했지만) 군 입대 후 수없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장을 못 보낸 것이 안타까워 50년 만에 남편에게 답장을 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가 한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편지를 보낸 당신.”

 

한 해고 노동자의 가슴 저린 고백도 있다.

“....우리는 이제 남들이 우리 일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 되는 처지에 몰렸어요. 공장에 돌아간다 해도 예전과 다른 인간이 되어서 돌아가고 싶어요. 다른 인간이 되어서 살아보고 싶어요.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여중생 때 동네 오빠에게 납치되어 결혼까지 하게 된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안타까웠다. 열여덟 살에 딸을 하나 낳았다. 딸이 초등학교 4학년일 때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뒤 수많은 삶의 굴곡 속에 결국 이혼을 했다. 힘들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쌓이는 스트레스를 등산과 여행으로 달랬다. 혼자 있을 때 책도 읽기 시작했다. “1년에 열권은 봤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빨리는 못 읽어. 모르면 되돌아가서 자꾸 봐.” 이 대목에서 호흡이 멈춰졌다. 되돌아가서 본다는 부분. 지나온 삶과 흘려보낸 시간들은 되돌아 가봤자 남은 것이 없다. 내 입으로 뱉은 말도 내가 볼 수는 없다. 어딘가 다른 이 마음엔 남아 있을지 몰라도. 그러나 책은 얌전히 기다려준다. 내 서가에도 수십 년이 넘게 얌전히 꽂혀있는 책도 상당하다. 그렇게 뒤를 돌아다봐주기를 기다리는 책들이 있다.

 

이미 나처럼 강제성을 띄고 책을 읽는 사람들에겐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느껴봄직한 시간이다 이 책을 읽는 동안에 그렇다. 아직 책과 친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왜 도대체 책을 봐야 한다는 거야. 사는데 별 불편 없음 그만이지. 그럴까? 하긴 사는 것에 대한 정의를 어떻게 갖고 사느냐가 중요하지. 먹고 사는 문제? 업무를 위해 부득이 봐야하는 매뉴얼은 물론 여기서 이야기하는 책의 범주엔 들지 않는다. 그야말로 먹고 사는데 별 지장 없는 책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위의 한 해고노동자의 말을 다시 인용.

“나 먹고사는 것만 신경 쓰고 살면 안돼요. 우린 그렇게 살면 안 돼요.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어요.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책 좀 읽으면서 세상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실은 세상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우는 것이다. 나를 아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변덕스럽고, 못 되었는지를 아는 것이다. 나처럼 힘들고 외로울 때 다른 이들은 어찌 견뎌내었는가를 소설, 인문학 등등에서 배우는 것이다.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인물도 있다. 그러나 찬찬히 들여다보면 누군가를 닮았다. 나를 닮기도 하고, 그 사람을 닮기도 했다. 나는 인문, 철학 쪽 책을 읽다보면 먹고 사는 문제 말고도 참 으로 깊고 그윽한 사색을 하며 살아간 또는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개를 숙인다. 그들이 그 글을 쓸 때 그 간소한 공간과 허전한 배와 불편했을 몸을 생각한다. 글을 써본 사람은 안다. 배가 너무 불러도 글이 안 써진다. 그리고 글을 쓰는 일 자체가 노동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볼 때 가급적이면 아니 거의 책상에 정좌하고 앉아 독서대를 이용해서 책을 본다. 그렇게라도 저자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싶다.

 

저자가 각 챕터의 질문으로 뽑은 것은 책에 관한 한 다소 유치한 듯 원초적이다. 먹고 살기도 바쁜데 언제 책을 읽나? 책 읽는 능력이 없는데 어떡하나? 삶이 불안한데도 책을 읽어야 하나? 책이 정말 위로가 될까? 책이 쓸모가 있나?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는 법이 있나? 어떤 책부터 읽으면 좋을까?

누가 나에게 이와 같은 질문을 했을 때 번개같이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면 굳이 안 읽어도 좋다. 그러나 글~쎄?? 가 떠오르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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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사상선집
데이비드 흄 지음, 김혜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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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단순히 알아들었다는 뜻인가?

그 앞뒤 사정까지도 생각이 보태진다는 뜻인가?

 

흄에 의하면 인간 이성이 다루는 모든 탐구 대상들은 근본적으로 두 부류, 즉 관념들의 관계(Relations of Ideas)를 다루는 것들이거나 사태(Matters of Facts)를 다루는 것들이다. 관념들의 관계에 해당하는 것들로는 기하학, 대수학, 그리고 산수와 같은 학문이 있다. 즉, 직관적으로나 논증적으로 긍정되는 것들에 대한 모든 주장들이 이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사태는 어떤가? 관념과 같은 방법으로 확인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갖는 그 진리에 대한 확실성 또한 그것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관념들의 관계에 대한 탐구가 갖는 확실성만큼 크지 않다. 따라서 사태에 관한 모든 추론은 인과 관계에 기초하고 있는 듯 하다고 한다.

 

“인과관계에 대한 지식은 추론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특정한 대상들이 서로 지속적으로 결합된다는 것을 발견할 때 얻어지는 경험으로부터 생긴다. (......) 어떤 대상이든 감각에 나타나는 성질들만 가지고서는 대상을 산출해 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으며, 그 대상으로부터 나올 결과도 밝힐 수 없다. 경험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의 이성은 사실적 존재나 사태에 어떤 추론도 해낼 수 없다.”

 

여러 관념들은 세 가지의 관념 연합의 법칙에 의해 섞이고 복잡해지며 확장된다. 연상 법칙이라고도 불리는 이 세 가지 법칙은 유사성의 법칙, 근접성의 법칙,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다. 연상 법칙이란 객관적 실재 세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느낌에 의존한 법칙이다. 흄은 인간의 앎 전부를 인상들과 관념들, 그리고 연상 법칙에 의한 관념들의 연합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그의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진리는 주관적인 것, 심리적인 것이 된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1711년 에든버러의 스코틀랜드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을 일찍 여윈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교육받았다. 법률가 가정 출신이고 교육열이 높았던 그의 어머니는 흄이 법률가가 되기를 바랐으나, 그는 문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고, 늘 그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어 했다. 이런 바람으로 흄은 늘 글쓰기에 게으르지 않도록 자신을 채찍질했고, 그 결과 많지 않은 나이인 25세에 대작 《인간 본성론》을 완성하게 되었다.

 

흄이 역사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역사 공부의 당위성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시대나 장소를 초월하여 거의 모두 같고 역사는 어떤 특정 시대나 장소에서도 특별나고 새로운 사건이 벌어진 바 없다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의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본성을 발견하는 데에는 역사가 주로 많이 이용된다. 역사는 온갖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여러 정황에서 묘사해주고, 우리 자신을 잘 돌아보고 인간의 행동과 행위의 규칙적인 발생 원천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자료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흄은 인간의 본성은 그 원리들이나 작용들에 있어서 늘 여전히 동일하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인정된다고 한다. 같은 동기는 항상 같은 행위를 낳는다. 동일한 사건들이 같은 원인들에서 생긴다. 이는 여러 가지로 얽혀 있으며, 사회 곳곳에서 발견되는 야망, 탐욕, 이기심, 허영심, 우정, 관용, 공공 정신 등과 같은 정념은 태초부터 계속해서 인류에게서 관찰되는 모든 행위와 모험심의 원천이다.

구조주의 문예 이론가이자 사상가인 츠베탕 토도로프는 그의 저서 『민주주의 내부의 적』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의 범죄, 특히 강제수용소의 실상이 밝혀졌을 때, 서구 여론은 자신들을 나치즘의 괴물과 구분 지으려고 애썼다. 오늘날까지도 역사가, 소설가, 영화감독이 나치 주모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동기로 그러한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할 때마다 항의가 빗발친다. 그래서 누군가 과거사건을 이해하려고 하거나 심지어는 단순히 당시의 맥락을 고려하기만 해도 그가 사건을 변호한다고 선언해버린다. 히틀러가 우리와 같은 특징을 가진 인간이었다는 생각에 우리는 분노한다. 히틀러가 저지른 악은 끔찍하다. 사람들은 그를 우리의 본성과 역사의 외부에 있는 비정상적인 괴물로 생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듣고 싶지 않더라도 소수자의 목소리가 정반대의 실상을 명백하게 증언한다. 세계대전 때 자유프랑스 전선에서 싸운 로맹 가리는 첫 소설에서부터 적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인간성을 지녔다는 사실과 인간들의 잔인함을 고발했다. 그의 소설 『튤립』에서 할렘의 흑인 낫(Nat) 삼촌은 “독일에서 범죄자는 바로 인간이야.” 라고 말하며 소설 『절반』에서는 알제리인 라통이 친구 뤽에게 “너 이 세상에 독일 놈들이 몇 명이지 알아? 30억이 넘어.”라고 말한다.

 

흄은 이 책에서 철학의 여러 종류에 관해, 관념의 기원과 연합에 관해, 이해력의 작용에 대한 회의적 의심에 관해,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회의적 해결에 관해, 개연성 그리고 필연적 연관성이라는 관념에 관해, 자유와 필연성에 관해, 아카데미 철학 혹은 회의적 철학에 관한 깊은 내용들을 비교적 쉬운 설명과 문체로 우리의 사고(思考)를 인도해주고 있다. 역자 김혜숙 교수는 이 《인간의 이해력에 관한 탐구》는 칸트에게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 칸트 자신이 술회한 바처럼 그를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은 영어로 된 철학 저술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을 만큼 중요한 저서이므로 누구나 반드시 읽어 봐야할 필독서라고 추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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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의 경제학 - 경제학자들도 모르는 부동산의 비밀
전강수 지음 / 돌베개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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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와 관련된 문학작품은 국내에도 여럿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은 책이 한 권 있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이다.

 

존 스타인벡의 나이 37세 때 출판된 〈분노의 포도〉는 그의 열한 번째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작품 속에 나오는 죠드 가족의 이주과정은 작가가 실제로 동행한 길이다. 그는 철저한 현장체험으로 이 글을 집필했던 것이다.

〈분노의 포도〉가 발표된 1930년대는 1928년의 경제공황의 뒤를 이어서 세계적으로 대불황이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대상황 때문에 정치가뿐 아니라 문학자, 일반 대중도 당연히 경제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농촌의 생활상은 심각했다. 오클라호마의 땅을 빼앗기고 캘리포니아로 이주해온 25만의 빈농들의 문제는 커다란 사회문제였던 것이다. 당시 그들은 더러운 오우키들이라고 멸시를 당하고 있었으며, 온 식구가 나가서 해가 저물도록 쉬지 않고 일을 해도 겨우 한 끼를 먹기 힘들 정도였고 그나마 그런 일자리라도 걸리면 다행이었다. 이렇게 시달리는 오우키들의 굶주림은 차차 분노로 변했고 캘리포니아의 벌판에 포도는 주렁주렁 열매를 맺었건만 이주농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았고 분노만 무르익더라는 이야기다.

 

분노의 포도는 여전히 열리고 있다.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은행잔고는 두 번째다. 부동산 소유의 많고 적음이 부의 판단이다. 부동산도 강남땅이냐 빌딩이냐 저 산간벽지의 임야냐에 따라 달라진다. 많이 가진 자를 무조건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내 삶이 더 팍팍해진다. 비교하는 것은 싫다. 단지 그들이 페어 플레이를 하지 않는 것이 맘에 안 든다. 비중 있는 공직자 청문회 때 단골메뉴는 부동산 투기와 위장 전입이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은 ‘땅’이다. 그 땅도 보통 땅이 아니다. 귀하신 ‘몸 땅’이다. 곧 개발 될 예정지(일반에겐 공표가 안 된)는 이미 알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본인 이름으로 매입하면 티가 나니까 다른 사람에게 정보를 줘서 사거나 정보 제공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다. 이런 문제가 문제인 것이다.

 

저자는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무지함과 어긋난 욕심에 의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시장만능주의자’와 ‘가격규제만능주의자’들이 그들이다. 이 두 부류 모두 몹시 맘에 안 든다. 한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다. 한 쪽 면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들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음이 훤히 보인다.

 

“지식인들의 무관심과 침묵은 사회가 내부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했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징후인데,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이런 현상이 보이고 있으니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이 책을 통해 ‘헨리 조지’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헨리 조지라는 걸출한 경제학자는 고전학파의 토지이론을 완성했다. 헨리 조지는 당시 영미권에서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에 버금가는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헨리 조지의 엄청난 영향력에 위협을 느낀 미국의 막강 지주세력이 당시 엘리트로 꼽히던 경제학자들을 고용해서 헨리 조지 경제학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전개했다. 고매한 학자마저도 해결사로 움직이게 하는 돈의 위력이다. 미국에서 헨리 조지의 휴매니티 정신이 가득한 토지이론을 뒤집어엎고 일어선 것이 신고전학파이다. 이들은 주류경제학에서 토지를 빼버리는 혁혁한 공을 세우고 그 기세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를 위한 일등공신이다.

 

 

“토지의 천부성(토지는 창조주가 인류에게 공짜로 준 것이다)과 공급고정성(토지의 공급은 일정하다)은 인류가 토지를 어떻게 다루어야 좋을지 가르쳐준다. 토지는 일반 재화나 자본처럼 개인에게 절대적. 배타적 소유권을 인정해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한 권리를 누리도록 하는 것이 옳다.”

 

토지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토지의 가치는 절대적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이다. 단지 시간이 문제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토지의 가격이 전체 경제에 막강한 힘을 휘두른다는 점에 있다.

“토지 소유와 토지 가치는 소득과 자산의 분배에 심대한 영향을 끼친다.

토지와 부동산 가격의 변화는 소비, 투자, 금리, 임금 등 주요 거시경제 변수들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따라서 경기변동에 큰 영향을 준다. 토지를 이용목적이 아니라 투기목적으로 보유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것은 토지 이용 양태와 환경에 영향을 끼친다.”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들어서는 정부마다 돌려막기식의 단기성 대책 말고 장기적으로 상생의 묘안이 없을까? 저자는 이런 의견을 제안한다.

 

“토지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해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면 된다. 토지의 수익권을 공공이 갖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지가의 문제나 토지 불로소득 같은 문제들은 바로 사라진다. 토지 매매시장은 극도로 위축되거나 소멸하겠지만, 토지 임대시장이 남아서 작동하기 때문에 가격을 매개로 하는 토지의 효율적 배분은 아무런 문제없이 이뤄진다. 뿐만 아니라 투기 목적으로 토지를 보유하려는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고, 토지 사용자는 그때그때 사용료를 납부해야 하므로 토지를 최선의 용도로 사용하고자 노력하게 된다. 토지가치공유제(토지가치세제와 토지공공임대제)는 토지의 사용권을 민간에게 부여하되 사용료를 공적으로 징수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대표적인 수단이다. 이런 제도야말로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만드는 시장친화적인 토지제도가 아닌가?”

 

이 땅에 회복되어야만 할 정의 중에 토지정의가 우선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소위 좋은 땅, 괜찮은 땅은 모두 죽은 땅이다. 거대한 건물과 고층 아파트에 짓눌려있다. 코르타르로 빈틈없이 메워져있다. 도회지 땅의 소유자는 땅이 돈으로 보인다. 그러니 들풀이 자라는 것조차도 용납 못한다. 땅은 이렇게 절규한다.

 

“나 숨 좀 쉬게 해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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