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 성격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오토 바이닝거 지음, 임우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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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性)과 성격(性格). 사실 이 주제는 예민한 부분이다.

이야기하는 주체가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또한 성(性)은 대체적으로 구분이 가능하나, 성격(性格)은 보다 복잡해진다. 외국사정은 어떠한지 모르지만 국내에서 부부간의 이혼 사유 중 1순위가 성격차이라고 한다. 웬수하고 사느니 혼자 맘 편하게 살겠다는 마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니까 ‘성격차이’라고 답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성격차이를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아마도 성(性)의 격차(格差)라고 표현이 되지 않을까?

즉, 성의 격(格)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이런 논리를 적용하면 외국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性)의 격(格)이 달라서 같이 못살겠다는 의식은 우리보다 더 할 것이다.

 

책 이야기로 들어가 본다. 책이 제법 두텁다. 850쪽이나 된다. 읽느라고 머리 좀 아팠다. 그러나 쓰는 머리 역시 힘들었겠다. 저자의 초판 서문의 일부를 옮겨본다.

“이 책은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비춰보려는 시도다. 이 책에서는 가능한 한 많은 특징적인 성격들을 하나하나 열거하거나 지금까지의 학문적 실험결과들을 종합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대신에 남성과 여성의 대립적인 모든 것들을 하나의 원칙(Prinzip)에 따라 끌고 가려고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이런 종류의 다른 책들과 구분된다. 이 책은 이곳저곳에서 한가하게 머무르지 않고 마지막 목적지까지 밀고 나갈 것이다. 관찰에 관찰을 쌓아가지 않으면서, 남성과 여성의 정신적 차이점들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을 것이다. 이 시스템은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적용된다. 비록 이 책이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피상적인 것을 계속 출발점으로 삼겠지만, 그것은 단지 모든 구체적인 개별 경험들을 해석하기 위해서 일 뿐이다. 이 책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귀납적 형이상학’이 아니라 ‘단계적인 심리학적 심화’다.

 

책은 크게 두 파트로 나누어진다. 1부는 준비부분으로 성적 다양성에 대해 6장으로 이어진다. 생물학적이자 심리학적인 부분이다. 2부는 성적 유형들에 대해 기술한 부분이 14장이다. 심리학적이자 철학적인 부분이다.

 

“모든 남성적 특징들은 비록 약하게 발달했어도 어쨌든 여성에게서 증명해 낼 수 있다. 여성 특유의 성격들도 비록 남성으로 형성되면서 발달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다고는 해도 남성에게 어떤 식으로든 모두 존재한다.”

여성 같은 남성, 남성 같은 여성에 대한 설명이 되고 있다. 어느 여행 잡지에선가 유럽 여행 중 턱수염을 기른 여성을 본 적이 있단다. 남성에게 여성적인 요소가 많이 남아 있거나, 그 반대일 경우에 트랜스 젠더가 나오게 마련이다.

 

그럼 성격은 어떤가? 저자는 “인간은 모두 생긴 대로 행동한다.”라고 하는데, 나는 반대 입장에 서고 싶다. 즉, “인간은 행동한대로 생긴다.”로 바꿔보고 싶다. 각각의 생각과 각각의 감정 속에 드러나는 이미지가 그 사람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생긴 대로 행동한다는 말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그 생김의 양상(물론 내면의 모습이 겉으로 드러남이지만)은 변한다.

범죄자의 얼굴에서 평안함과 인자함을 바라보기 힘들듯이 그 마음에 담겨진 것과 주변 환경이 그 사람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란 곧,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생각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

 

“각 세포에 그 개인의 특성이 모두 숨겨져 있듯이, 한 인간의 심리적 충동에는 몇 가지 성격적 특징들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전체가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 한 요소가 이런 특성으로 나타날 뿐이고, 다른 요소는 다른 특징으로 나타나게 된다.”

 

저자는 성격학이 심리학과 결합됨으로써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성격학이 역사적으로 자아의 개념과 운명적으로 연결할 아무런 근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느낌과 감정의 차이는 무엇인가? 뉘앙스 차이일까? 경험에 바탕을 둔 심리학에서 느낌과 감정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느낌은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온다. 반면에 감정은 내부로부터 우러난다.

 

“사랑할 때 남자는 언제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 이것은 자아 중심적 태도도 아니고, 모든 약점과 비열함, 중요하거나 사소한 것에 시달리는 존재인 그가 실제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그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는 모습, 그렇게 되어야 하는 모습, 가장 본질적이면서도 심오한 지적 존재, 너덜너덜한 일상과 지상의 흙덩어리에서 모두 벗어난 모습이다. 이런 존재는 시간적 작용으로 감각적인 제한과 섞여서 더 이상 순수하게 빛을 발산하는 원래의 모습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 그는 자신과 분리 될 수 없는 절대적 가치를 가진 이상적인 존재를 다른 존재에게 투영하게 된다. 그 말은 그가 그 존재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된다.”

 

“인간은 사랑을 할 때 비로소 어떤 식으로든 온전한 그 자신이 된다.”

 

저자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원칙들을 형이상학적 이념이 아니라 이론적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단순히 생리학적이고 성적인 차이를 훨씬 넘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해서, 마치 생리적 활동이 나누어진 것처럼 상이한 기능들이 상이한 존재에 배분되어 있다는 견해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의견에 또한 공감한다. 그러나 2부 13장 유대주의에 대한 챕터는 왠지 불편하다.

 

저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놀랠 분들이 있겠다. 나는 놀랬다. 저자 오토 바이닝거는 1880년 빈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3년 23세의 나이로 자살한 오스트리아 철학자다. 그러니까 이 논문은 불과 20대 초반에 쓴 것이다. 28세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우리의 천재 李箱은 오토 바이닝거에 비하면 형님뻘이다. 바이닝거는 이 책 외에도 엄청난 이론을 쏟아놓고 너무 젊은 나이에 자살함으로써 신화가 되었고, 그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특히 철학, 심리학, 상담학, 발달학, 인지학 등의 전공자들이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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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수필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홍매 지음, 안예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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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재수필(容齋隨筆) / 홍매 지음 / 안예선 옮김 / 지만지”

 

 

《장자(莊子)》에 이런 말이 있다.

“사람들은 유용(有用)의 쓰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무용(無用)의 쓰임은 알지 못한다.”

이런 말도 있다. “쓸모없음을 잘 알고서야 그 쓸모를 말할 수 있다. 대지는 매우 넓고 크지만 사람에겐 두 발을 디딜 자리면 족하다. 나머지 다른 곳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나 두 발로 디딘 땅을 빼고 다른 곳을 다 파버린다면 주변은 깊은 못이 되어버린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용의 쓰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저자 홍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날짐승은 날개로 날지만 만약 그들의 다리를 묶는다면 날 수 없게 된다. 달리는 것은 다리를 써서 달리지만 그 팔을 묶어버린다면 달릴 수가 없다. 과거 시험장에서는 학문과 재능이중요하지만 무디고 아둔한 자 또한 쓸모가 있다. 전쟁을 할 때는 용기를 우선으로 하지만 겁쟁이도 쓸데가 있는 법이다. 어떻게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일괄적으로 구분하겠는가?

그러므로 군주는 천하의 많은 선비들을 무용지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시대가 바뀌었지만 이러한 생각은 마음에 담아 둘 필요가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상당히 쓸모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낮은 자존감에서 허덕이는 사람은 예외로 한다. 그러나 나를 쓰는 사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을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내가 사람을 쓰는 입장이라면 잘나고 똑똑한 사람만 찾는 것이 현명한 방법일까 자문해보는 계기도 된다.

 

저자 홍매(洪邁, 1123~1202)의 자는 경로(景盧), 호는 용재(容齋)이며, 시호는 문민공으로 파양(지금의 장시성 러핑시)사람이다. 홍매의 부친과 형들은 모두 명성 있는 학자이자 관료였다. 부친인 홍호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15년간 억류되었다가 천신만고 끝에 송나라로 돌아왔다. 홍매는 3형제 중 막내였는데 형들 또한 학문적으로 상당한 성취를 이루었고 저작을 남겼다. 이러한 가풍 속에서 성장한 홍매는 자연스럽게 사대부로서의 처세와 학문의 자세를 익힐 수 있었다. 홍씨 가문의 3형제는 당시 “3洪의 문명이 천하에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손꼽히던 수재들이었다.

 

흔히 에세이(essay)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수필(隨筆)’이라는 용어를 제일 처음 사용한 용례가 바로 《용재수필(容齋隨筆)》이다. 그러나 홍매가 사용했던 ‘수필’이라는 용어의 함의는 지금처럼 개인의 경험과 감상을 가볍게 서술하는 신변잡기성의 감성적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다.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 경전과 역사, 문학작품에 대한 고증과 의론, 전인(前人)의 오류에 대한 교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는 모두 저자가 독서를 통해 다져진 지식과 생각이 토대이다.

 

凊나라대 학자들의 공부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중요한 것이 ‘찰기(札記)’였다고 한다. 이는 독서를 할 때마다 느낀 점을 기록해서 오랜 시간 축적되면 내용을 정리하고 체계적으로 한 권의 저작으로 만들어냈다. 청대 고증학을 대표하는 역작의 대부분은 이러한 ‘찰기’에서 만들어졌고, 그 시작은 홍매의 《용재수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글 중 특히 마음에 남는 부분이 있다.

김일제(金日磾)에 대한 이야기다. 김일제는 본래 흉노족 휴도왕의 태자였으나 부왕이 한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중국으로 끌려와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일제가 한나라의 황궁으로 끌려와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무제가 연회를 베풀어 말 구경을 했는데, 무제의 곁에는 후궁과 궁녀들이 가득했다. 김일제 등 수십 명은 말을 끌고 황제 곁을 지나가면서 몰래 궁녀를 훔쳐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김일제만은 그러질 않았다. 김일제의 용모는 매우 단정하고 점잖았으며, 그가 기른 말 또한 살지고 기름졌다.

황제는 그의 재주를 훌륭하게 생각해 그날로 말을 총괄하는 관직에 임명했으며, 김일제는 후에 무제의 유조를 받고 어린 황제를 보좌했다. 김일제와 상관걸은 모두 말 때문에 재능을 인정받았으니, 한 무제의 인재 등용은 명철하고도 빈틈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말(馬) 때문에 인정을 받았다. 그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비록 패한 나라지만 태자였다. 그러나 그(김일제)는 그가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겸손했다. 자기 관리를 잘했다. 그뿐이다. 작은 일에 성실한 자 큰 일을 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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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단편집 - 초판본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이상 지음, 이재복 엮음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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剝製가 되어버린 天才’를 아시오? 나는 愉快하오.

이런 땐 戀愛까지가 愉快하오.      (날개)

 

이상(李箱, 1910~1937)을 다시 만난다. 오랜만에 대하는 그의 글들이건만 푸릇푸릇 살아있다. 그의 글에선 비릿한 내음이 난다. 은빛 비늘에 눈이 부시다. 때로 아니 거의 그의 글은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의 글 곳곳에 숨어있는 그의 육신의 편치 않음이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은 참으로 높이 올라가 있다.

 

肉身이 흐느적흐느적 하도록 疲勞했을 때만 精神이 銀貨처럼 맑소. (날개)

 

그의 몸은 말할 수 없이 疲弊해 있고 그의 정신은 맑다 못해 수정 구슬을 들여다보는 것 같다.

날개에서.. 그는 안해(아내)의 직업이 자못 궁금하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단다. 가슴이 저며온다. 어찌 모르겠는가. 그 明晳한 사람이 그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저 독자에게 자기 자신의 마음을, 입장을 이해해주기 바랄 뿐이다. 마치 독백처럼 늘어놓는 그의 글들은 수십 년이 지나도록 퇴색되긴 커녕 더욱 생명력을 키워가고 있다.

 

새롭게 편집된 이 단편집엔 날개 외에 「終生記」,「지주회시」, 「逢別記」, 「失花」 등이 실려 있다. 「종생기」는 거의 유서 분위기다. 그러나 그의 육신이 비록 생명을 잃을지언정

“.... 退色한 亡骸우에 鳳凰이 와 앉으리라.” 는 氣槪를 잃지 않는다.

 

나는 날마다 殞命하였다. 나는 자든 잠 ― 이 잠이야말로 언제 시작한 잠이드냐 ― 을 깨이면 내 痛切한 生涯가 開始되는데 靑春이 여지없이 蕩盡되는 것은 이불을 푹 뒤집어쓰고 누었지만 歷歷히 目睹한다. (종생기)

 

 

李箱은 외롭다. 그의 존재감은 가히 넘볼 수 없다. 아마도 이 힘으로 버텼으리라.

 

나는 찬밥 한 술 冷水 한 목음을 먹고도 넉넉히 一世를 威壓할 만한 ‘苦言’을 嫡嫡할 수 있는 그런 智慧의 實力을 갖었다. (종생기)

 

 

지주회시는 ‘거미가 돼지를 만나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단편을 읽다보면 누가 거미이고, 누가 돼지인지 알 수 있다. 왜 거미와 돼지라고 이름 붙였는지 이해가 된다. 李箱은 여전히 바라보는 입장이다. 아니 이 단편에선 좀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어색하다. 아무래도 그는 일상의 편린들과는 거리를 좀 두는 것이 좋겠다. 그답지 않다.

 

그날밤에그의안해가층계에서굴러떨어지고 ― 공연히내일일을글탄말라고어느눈치빨은어룬이타일러놓섰다. 옳고말고다. 그는하로치씩만잔뜩산(生)다. 이런 복음에곱신히그는딩어리(주:벙어리)(속지 말라)처럼 말(言)이없다. 잔뜩산다. 안해에게무엇을물어보리오? 그러니까안해는대답할일이생기지않고 따라서부부는식물처럼조용하다. 그러나식물은아니다. 아닐뿐아니라여간동물이아니다.          (지주회시)

 

부부는 식물처럼 조용하다고 했다가 여간 동물이 아니라는 표현에 깊은 공감이 간다. 부부라는 관계에선 어쩌면 동물적인 감각과 기질을 서로 덮어 누르면서 식물처럼 감추고 사는 것이리라.

 

 

「봉별기」는 李箱과의 끈질긴 인연인 그녀 錦紅을 만나고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그 누가 이렇게 자기 이야기를 남 이야기하듯 그려갈 수 있었을까. 거의 실시간으로 말이다.

 

「失花」에는 李箱이 1936년 10월 중순경 동경에 건너가서 생활한 흔적이 남아있다.

이 책을 엮은이 이재복에 의하면 그곳에서 삼사문학 동인들과 교유하고, 김기림, 안회남, 동생인 김운경과 서신을 교유하기도 하지만 동경 생활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1937년 3월 12일 일본 경찰에게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니시간다 경찰서에 34일간 수감되어 있다가 3월 16일 건강악화로 풀려난다. 결국 그는 1937년 4월 17일 새벽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의 모든 작품(시 56편, 소설 16편, 수필 35편)은 21세부터였다. 더욱이 처음 각혈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시기와 첫 작품인 《십이월 십이일》을 발표한 시기(1930년)가 같다는 것은 그가 자신의 몸의 모든 에너지를 글쓰기로 소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작품의 생명력은 길다.

그는 떠났지만 누군가의 겨드랑이가 간지럽다. 날개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ㅅ구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ㅅ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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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서 인간의 위치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막스 셸러 지음, 이을상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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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잘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치감각이라 이름 붙인다.

나름대로 위치감각을 내, 외적 감각으로 나누어본다. 내적 위치감각을 더듬어 찾는 중에 철학과 문화가 피어났다. 외적 감각은 좀 더 본능적이고 생물적이다.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온 환자에게 중요한 것은 팔과 다리의 위치감각을 다시 찾아주는 것이다. 따라서 재활치료를 하는 과정 중에 환자가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팔과 다리를 똑똑히 바라보며 운동을 하는 것이 관건이다.

 

플라톤은 철학하는 것이 곧 ‘영원한 노력’이라고 말했다.

명백한 이성주의는 ‘금욕적 이상’ 위에 근거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 책은 ‘철학적 인간학(philosophische Anthropologie)'의 창시자인 막스 셸러(1874~1928)의 사상을 매우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철학적 인간학이란 의미상으로 볼 때 ‘인간에 관한 철학적 고찰’을 가리키는 말이다. 저자 셸러는 오늘날 문제 제기되는 ‘철학적 인간학’이 종래의 인간론과는 다르다고 분명히 선을 긋는다. 환언하면 철학적 인간학이란 종래의 전혀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온 철학과 과학을 인간이라는 하나의 사실을 매개로 해서 오늘날 새롭게 종합하려는 시도이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존재 속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위치란 무엇인가?”

저자는 ‘인간’이란 말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크게 세 개의 사상권(思想圈)에서 거의 항상 팽팽하게 맞서게 된다고 한다.  첫째, 아담과 이브, 창조와 낙원, 타락을 주요 내용으로 삼는 유대교적-그리스도교적인 전통의 사상권이다.  둘째는 그리스-고대의 사상권인데, 여기서 세계 최초로 인간의 자기의식이 특수한 지위를 나타내는 개념으로 고양되었다.  세 번째의 사상권은 근대 자연과학과 발생심리학의 사상권인데, 이 사상권도 또한 오랜 전통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지구라는 별의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가장 후기의 산물이다.  이러한 자연과학적 인간학, 철학적 인간학, 신학적 인간학은 지금까지 서로 무관한 것들로 존재해왔다는 것이다.

 

저자가 자연에서 인간의 위치라 하지 않고 더욱 시야를 넓혀 우주에서 인간의 내적 사유를 이끌어냄은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특수한 지위란 우리가 생명의 심적 세계 구조 전체를 자세히 음미해 볼 때 비로소 명백해진다고 한다. 의식도 없고, 감각도, 표상도 없는 ‘감각 충동’이 심적인 것의 최하 단계를 이룬다. 식물은 그 유기적 구조의 재료를 무기물로부터 스스로 마련한다. 따라서 식물은 영양과 성장, 번식과 죽음만으로 그 생존을 마감한다.(식물에는 그 종에 특수하게 정해진 생존 기간이라는 것이 없다).

 

식물과 비교해서 동물은 어떠한가. 동물의 경우는 신경계통의 중추화가 증가하는 것과 함께 동물의 부분 반응간의 독립성도 증가하며, 이와 함께 동물의 신체는 기계적 구조에 점점 유사해져 가기 때문이다. 저자는 생명의 내적 측면의 첫째 단계인 감각 충동은 모든 동물에게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나타난다 한다. “기관학적으로 볼 때 무엇보다도 영양배분을 통제하는 식물적인 신경계통이야말로 이미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인간의 내부에 들어있는 식물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다. 식물적 신경계통을 위해 밖으로 향하는 힘의 작용을 통제하는 동물적인 신경계통에서 주기적으로 에너지를 빼앗는 것은 아마도 수면 상태와 각성 상태의 리듬을 조절하는 근본 조건이 될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수면이란 상대적으로 식물적인 상태다.” 뇌사상태의 사람을 ‘식물인간’이라 한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언제나 각자의 내면 상태를 표현’해준다는 말은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 속에 나의 내면의 상태가 표출되는 것이다. 행동을 통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내면적, 심적인 존재란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본능적’이라고 부르는 행동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첫째로 행동은 의미에 합당한 것이어야만 한다. 둘째, 행동은 어떤 확고하고 불변적인 리듬에 따라 진행되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어감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런 대로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고 평가 할 수 있겠다. 저자는 발생학적 과정을 예로 들면서 인간이 나이를 들어감은 충동 생활의 강도가 약화되기 때문에(대체적으로) 감각은 ‘순수’감각의 자극 비례성에 가까워진다고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다. 덧붙이면 인간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점점 더 습관의 노예가 되어간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적용되는 부분이다.

 

습관이라는 것도 모방과 모사에서 출발한다. 저자는 인간의 삶에 나타나는 전통(Tradition)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이 모방과 모사에서 형성된다한다. “전통이란 같은 종이 누려 온 과거 생활을 통해 동물의 행동을 규정하는 전혀 새로운 하나의 차원을 생물학적 ‘유전’에 첨가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대한 모든 자유 의식적인 ‘상기(Anamnesis)’와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야만 하고, 또한 기호, 원전, 문서에 근거하는 모든 전승과도 매우 엄격하게 구별되어야만 한다.”

동안(童顔)이라는 단어가 인기 검색어에 포함되어 있다. 얼굴만 어려보이면 되는가? 물론 나이에 비해 더 들어 보인다는 사람들은 이 또한 스트레스일 것이다. 덕분에 강남의 성형외과나 일반 의원들이 안 좋은 경제상황에도 버티고 있다. 저자가 노화와 관련해 인간의 ‘쾌락’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특히 귀담아 들을 만하다.

 

“순전히 쾌락만을 목표로 삼는 생활태도는 분명히 개인생활이나 민족 생활에서 노화 현상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한 방울의 술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셔 버리는’는 오랜 술꾼과 호색적인 사람들에게서 이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높고 낮은 심적인 만족의 기능을 충동적인 기쁨의 상황적 쾌락과 분리하는 것, 생명적인 만족이나 정신적인 만족 기능에 대해 상태적 쾌락이 만연해 있다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로 일종의 노화 현상이라고 하겠다.(........) 인간은 언제나 동물이상이거나 동물 이하 일 수 있을 뿐이지, 결코 동물이 아니라는 말이 참으로 정당하다고 하겠다.”

 

인간이 동물과 차이가 나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동물보다 두드러진 점, 비교도 할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들은 인간에게 보다 겸허한 자세로 다른 생물들을 바라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저자는 동물은 지능과 관련해서보다는 감정적인 면에서 훨씬 더 인간에 가깝다고 한다. 우리는 선물, 남을 기꺼이 도우려는 자세, 화해 및 이와 유사한 것을 이미 동물에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오히려 인간의 감정적인 면은 더 피폐해지지 않나 반성해 볼일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정신’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영’이다. 그러기에 인간을 ‘영적인 존재’라고 한다. 나아가 정신이 유한한 존재 영역의 내부에 나타나는 활동의 중심체를 ‘인격(Person)’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정신적 존재’는 충동과 환경에 구속되어 있지 않고, 환경으로부터 자유롭다. 저자는 이를 ‘세계 개방적(세계에 대해 열려 있는)’이라고 이름붙인다. 동물의 행동이 환경과 충동에 지배당하고 있는 것과 달리 인간은 환경으로부터 풀려나 세계를 자유로운 사고의 상관자로서 가질 수 있다는 뜻이다.

 

셸러의 책을 한 권 읽고 그의 사상을 논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다. 그렇지만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저자의 사고의 폭이 무척 넓고 깊다는 것이다. 윤리학과 종교철학, 세계관학, 지식사회학, 철학적 인간학, 의학, 천문학 등이 상식수준이상으로 녹아 들어있다. 그리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 없는 균형감을 들 수 있겠다. 그래서 후세인들의 평가가 후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철학자”, “거상과도 같은 철학자”, “서양 철학을 공부하려면 누구나 셸러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저자가 후반부에서 언급한 글을 특히 마음에 새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이겨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자기 자신 속에 추악하고 타락한 것이 있음을 인정하는 성향도 감내해야만 한다. 인간은 그러한 성향들에 대해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공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의 양심이 선하고 적절하다고 인정하고 또한 실천 할 수 있는 그러한 가치 있는 과업에 자신의 에너지를 투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그러한 성향들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이미 스피노자가 그의 《윤리학》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서술한 것처럼, ‘악’에 대한 ‘무저항’ 이론 속에 위대한 진리가 깃들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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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혁명 -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이지성.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겨우내 얼어있던 대지들이 봄기운을 맡으면서 기지개를 폅니다. 일궈진 논밭이 제법 눈에 띕니다. 뒤집어엎을 때가 되었습니다. 씨를 뿌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때마침 봄비가 진하게 내려줬습니다. 굳어있는 땅에는 씨를 뿌린들 새가 물어가거나 바람에 날아갈 뿐이지요.

 

객토(客土)를 생각합니다. 객토는 농경지의 지력(地力)을 증진시키기 위하여 다른 곳으로부터 적당한 성질을 가진 흙을 가져다 넣는 일입니다. 땅은 그렇다 치고, 우리의 마음 밭은 어찌해야 할까요? 어떻게 객토를 해야 할까요?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했지만 내안에 생각할 재료가 없으면 그저 일상사의 잔걱정과 염려만 하다 말겠지요. 독서가 곧 객토작업이라 생각합니다. 건전하고 생산적인 생각거리를 넣어주고, 심토(心土)에 영양을 공급해주는 것이지요.

 

이 책은 인문학을 위해 거의 목숨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두 사람이 의기투합 되어 나온 작품입니다. 두 사람의 『인문고전』에 대한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냥 고전을 읽으면 좋다가 아니라, 왜 읽어야 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습니다. 살아가며 결단의 시간, 어려움의 시간이 없을 수 없지만, 두 사람이 두 다리에 힘을 줄 수 있었던 힘은 인문고전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선 생각이 필요합니다. 생각은 생존의 결정적 요소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생존은 나다운 나, 삶다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먼저 내가 원하는 나는 누구인지, 내가 바라는 삶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하는 것이지요. 이 생존을 위해 고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전은 곧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바꾸는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합니다.

 

혁명은 굳어진 밭을 갈아엎는 것입니다. 생각을 뒤집는 일입니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의 의식을 깨뜨리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한 생각만 바꾸어도 죽을 사람이 살 사람으로 바뀌는데 까짓 저자들이 역설하는 혁명의 대열에 들어서도 그다지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삶의 극적인 변화, 180도 달라진 나를 꿈꾸며 그 방법을 새롭고 혁신적인 무엇에서 찾지만, 좋음을 넘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축적’이 필요하다. 생각을 축적하고, 그 생각을 실현할 힘을 축적해야만 위대함이 가능해진다.”

 

‘한 번에 한 걸음’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살아가며 분초를 다투며 해야 할 일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축적’은 바로 차근차근 쌓아가는 일을 의미하지요. 고전은 축적된 에너지가 많습니다. 거르고 걸러져서 지금까지 살아있고, 또 앞으로도 살아있을 것입니다. 물론 잊혀져 갈 것도 있겠습니다.  

 

 

고전은 과거에 행해진 질문과 답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누군가 앞서 던진 질문과 그에 대한 고민의 결과를 접하면서, 우리가 품은 의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갈 수 있다고 합니다.

공자가 말한 ‘학문으로써 나를 박학하게 하시고 예로써 나를 다잡아주신 스승’이 곧 우리에겐 고전이라고 합니다.

 

저자들의 자아혁명을 들어봅니다. 자아혁명을 완성하는 네 가지 단계입니다.

- 생각하라 -- 생각의 확장

- 질문하라 -- 대상의 확장

- 변화하라 -- 실천의 확장

- 다시 생각하고, 질문하고, 변화하라 - 확장의 확장.

 

세상살이가 힘들어지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과의 관계 탓이 더 큽니다. 인간관계만 잘 유지되어도 우리의 마음은 그런 대로 행복감을 느낍니다.

 

저자는 관계란 단순히 나와 대상과의 사이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간의 개념에도 대입이 된다고 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대부분의 일은 과거와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도 혁명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 공간과 공간, 사람과 사람 등 모든 것은 연결돼 관계를 맺으며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공감합니다.

 

저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약간 왼쪽으로 치우친 느낌입니다만, 뭐 괜찮습니다.

틀린 것이 아니고, 좀 다를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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