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혁명 - 리딩멘토 이지성과 인문학자 황광우의 생각경영 프로젝트
이지성.황광우 지음 / 생각정원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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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고전을 읽어야할 필요성에 대한 이야기를 잘 정리해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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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 과학, 기술, 그리고 서양 우위의 이데올로기
마이클 에이더스 지음, 김동광 옮김 / 산처럼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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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평안함과 나태함에 가까운 편안함의 차이를 생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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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위버 -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 오디세이
잭 보웬 지음, 박이문.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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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은 그 답보다 생각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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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 위버 - 소설로 읽는 유쾌한 철학 오디세이
잭 보웬 지음, 박이문.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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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트르의 『달라이 라마에 관한 일화들』을 보면, 달라이 라마와 한 서양 철학자가 배구 경기를 보면서 나눈 대화가 소개 되어 있습니다. 달라이 라마는 배구에 대한 관심을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서로 적대적으로 경기를 할 필요가 없어요. 모두가 공이 떨어지지 않게 애쓰고 있네요. 그게 전부인 것 같아요. 공이 땅에 떨어지면 모두가 아쉬워하고 공을 떨어뜨린 사람을 위로 하고 있어요.”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을 갈라 상대가 공을 떨어뜨리도록 해요.”

달라이 라마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습니다.

“하지만 공은 항상 땅에 떨어지게 되어 있어요.”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으며 슬퍼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영혼과 하는 놀이 같군요.”

 

생각을 깊이, 많이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배구 경기를 관람해도 참 특이한 감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군요. 달라이 라마가 ‘인간이 영혼과 하는 놀이’라고 표현한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달라이 라마에게 직접 묻는다면, 아마도 꼬꼬 생각(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으로 책 한권 분량의 말이나 글이 나올지 모르지요. ‘영혼과 하는 놀이’를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지적 유희’하고 유사할까요? 분위기가 좀 다르긴 하지요?

 

철학에는 ‘생각하는 방법’과 ‘생각의 결과’가 축적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 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하지요. 철학은 질문의 축적이며, 생각의 축적입니다. 나온 결론도 언젠가는 뒤집어 질 수 있습니다.

 

“철학과 무관한 과학은 없다.

철학이라는 짐이 검사 없이 배에 실린 과학만이 있을 뿐이다.“

- 다니엘 데넷, 『다윈의 위험한 아이디어』

 

학생 : 교수님. 이 문제는 작년 기말고사에서 나왔던 문제인데요.

아인슈타인 : 맞네, 하지만 올해 답은 작년과는 다를 걸세.

 

그래서 저는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철학의 본질은 끊임없는 경이와 물음이지 그에 대한 대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현상을 서술적이며 설명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은 자연과학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사회 현상과 인간의 사회적 행동을 탐구하는 것은 사회과학입니다.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그 시선이 밖으로 향하고 있으나, 철학의 대상은 나 자신입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서 철학이 탄생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책의 감수자인 박이문 교수는 “철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믿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해서 반성적 물음을 던지고 거기서 경이(驚異)를 발견하고 그 경이를 풀기위한 논리적 사유를 추구하는 능력의 행사 자체”라고 합니다.

 

인문학 도서들의 출간, 판매가 조금씩 늘어나곤 있긴 하나, 아직도 철학은 인문학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습니다. 그나마 철학의 입문서가 꾸준히 발간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철학 입문서는 일종의 로드맵인데, 길만 따라다니다가 날을 새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기도 합니다. 철학사(哲學史)역시 과거 철학자들의 철학적 사유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역시 하나의 역사라는 점에서 그것은 철학적 지식에 불과하지 그 자체가 곧 철학적 사유가 아니지요.

마치 어딘가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곳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너무 열심히 자료 수집을 하다보면 마치 안가도 간 것처럼 되거나 코스만 섭렵하고 그만 두지 않을까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 책도 로드맵의 일종이긴 합니다만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철학의 면모를 그려주기 위해 문학과 손을 잡았습니다. 물론 문학작품을 읽다가 철학적 사유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도 종종 있지요. 박교수는 이 책을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와 비교합니다.

 

“『소피의 세계』가 서술적 이야기의 형식을 채택한데 반해서, 이 책은 논쟁적 주장의 구조를 갖고 있다. 전자의 양식이 문제에 대한 대답의 발견을 통해 결론을 내리고자 하는 닫힌 사유를 나타낸다면, 후자의 양식은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문제를 제기하려는 열린 사고의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안이라고 불리우는 14살 소년이 멘토인 ‘노인’과 삶의 여행을 떠납니다.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안과 내가 탐험하고 있는 것은 현실(더 나은 단어를 찾을 수 없기에)이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 이 여행이 끝날 때 쯤 당신은 우리가 여행을 통해 얻은 성찰이 당신의 세계와 직접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이안이 훈련받은 임무는 앞으로 다가올 당신의 세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를 어떻게 이루어냈는가는 우리와 함께 여행을 마친 후에야 분명해질 것이다.”

 

저자는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세계의 철학사를 장식한 153명의 철학적 스타들의 철학적 잠언들을 인용하여 13개의 장에 적절하게 배치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형식을 빌린 점은 좋으나 단점이 있습니다. 각 쪽 좌우 여백에 주석을 달아놨습니다. 좋은 내용들이지만 글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일차로 소설을 먼저 읽은 후에 두 번째 읽으면서 주석을 참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과학소설《화씨 451》(Fahrenheit 451)이 생각납니다.

책이 금지된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요. 소설의 제목인 화씨 451도(섭씨 233도)는 '종이가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뜻하지요. 모든 책을 태워버린 이곳의 사회지도자(지도자라고 붙이기는 좀 그렇습니다만)는 책을 태우는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하네요.

“혼자 힘으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불행하게 된다. 현관, 정원, 흔들의자를 없애고 벽면에 큰 텔레비전을 설치한다.(이런..이 책이 1953년도에 씌어졌는데 벽면 TV라..대단한 예지력이네요) 덧붙여 이런 말도 합니다. 많은 질문을 하게 되면 당신은 끝내 아주 불행해진다. 누군가 정치적으로 불행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문제의 양면을 보여주어 걱정하게 하지 말 것. 하나만 줄 것.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아무것도 보여 주지 않는 것이다.”

 

설마 이 말을 믿는 것 아니겠지요?

책을 멀리 할 구실로 삼지 마시길.. Never~!!

 

 

P.S : 


책의 제목 드림 위버(Dream Weaver) ‘꿈을 짜는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주인공 이안은 사람들이 꿈을 꾸도록 매개해주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멘토인 ‘노인’으로부터 생각훈련을 받습니다.


조각천을 이어 모아 아름다운 조각보를 만들듯이 흩어져 있던 상념들이 한 곳으로 모아져서 멋진 생각, 밝고 긍정적인 상념들로 우리 모두의 마음에 자리 잡게 되길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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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 - 과학, 기술, 그리고 서양 우위의 이데올로기
마이클 에이더스 지음, 김동광 옮김 / 산처럼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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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유럽인들이 자신들 문화의 물질적 우월성, 특히 과학적 사고와 기술 혁신에서 나타난 우월성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것이 해외에서 마주친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그들과의 상호작용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기계, 인간의 척도가 되다》는 반(反)과학이나 반산업적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의도된 것이 아니다. 사실 내가 컴퓨터로 - 확실히 서양(그리고 점차 일본)의 연구와 혁신의 주목할 만한 산물 중 하나인 - 일하면서 이러한 작업에 관여하는 것이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과학 산업의 질서를 대체하기 위해 제안할 만한 유토피아 체계를 알지 못하며, 그럴 경우 지배자가 될 비서양인 경쟁자들이 본질적으로 더 우수하다고 믿는 것도 아니다. 과학과 기술 혁신과 관련된 제반 문제에서 여전히 과학과 기술은 인류사회의 대다수에게 어지간한 생활수준을 제공하기 위해 지금까지 찾아낸 유일한 길이다. 모든 사회 혹은 산업화된 사회의 모든 집단이 이러한 혜택을 똑같이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지속적인 개혁 노력을 위한 문제이지, 그 자체가 과학과 기술이 인류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의 저명 지식인들 사이에서 기계화와 미국화에 따른 위험과 산업사회의 운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은 대서양 건너편에서 나타난 발명과 혁신에 대한 열광주의, 산업기술의 대량소비 상품, 그리고 전쟁을 거치면서 숱한 유럽 사상가들이 형편없는 망상임을 깨닫고 폐기했던 무한한 향상과 진보라는 환상과 극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이 무렵, 모든 서양 사상가들에게 유럽 문명이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점에서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의식들은 상당부분 과학과 기술의 적절한 역할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즉, 오용되고 남용되었다는 판단을 하게 됩니다.

 

또한 유럽의 일부 사상가들은 과학의 발전과 기술적 성취의 근거를 기반으로 어떤 민족이 야만인지를 결정하는 경향이 점차 강화되는 양상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본인의 생각과 의지를 표명한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이 당시 차별화의 피해를 많이 본 민족은 아프리카인입니다. 한동안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고 원숭이와 같은 종으로 분류 한 때도 있었으니 해도 너무 했습니다.

 

1744년에 영국의 여행자 윌리엄 스미스는 앞선 기술적 능력으로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보다 나은 삶의 질을 누리는지 의구심을 품습니다. 여행 초기에 스미스는 여러 차례 아프리카인들이 게으르고 무지한 야만인이라고 단정했지만, ‘가장 융성한 도시’ 베냉과 주변 지역을 방문한 후 아프리카인들의 ‘자연적이고 유쾌한’ 삶이 여러 면에서 유럽인들보다 오히려 더 낫다고 결론짓습니다.

 

 

그가 유럽인들에게 ‘흔하다’고 주장했던 남색(男色)이나 수간(獸姦)이 아프리카인들 사이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처럼 많은 발명’을 했고 ‘자연에 그토록 많은 제약을 가한’ 유럽인들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미 소유가 행복의 전제조건이 되고 있는 시대적 분위기에선 쉽사리 돌이킬 수 없는 삶의 방향이 되고 말았지요. 영국으로 돌아온 후 그는 최소한 자신이 만났던 아프리카인들 못지않게 유럽인들에게도 ‘헛되고 우스꽝스러운 관습과 개념들이’ 많다고 확신하게 됩니다. 아무래도 이 표현은 좀 약하고 완곡하게 여겨집니다만.

 

 

기계화, 산업화 과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보타지(sabotage). 태업(怠業), 파업(罷業)입니다.

sabotage의 어원은 sabot입니다.

중세 유럽에 사보(sabot)라는 나막신들을 신었습니다. 너도밤나무, 버드나무 등을 오래 말렸다가 파서 만든 신입니다. 특히 프랑스 농민들이 많이 신었지요. 기계가 사람을 대신하자 이들은 신고 있던 신을 벗어서 기계에 화풀이를 합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나막신으로 기계를 때린들 표시가 나겠습니까. 화풀이대상은 기계화를 생각하고, 도입한 사람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계에다 그 울분을 털어놓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의 sabotage하곤 전혀 성격이 달랐지요.

 

그 어떤 기술 혁신보다도, 철도는 1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엄청난 물질적 진보를 구현했고, 그 과정에서 유럽과 그 밖의 모든 비 서양 사이에 벌어진 간격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산업변화의 핵심적인 발명품이었던 증기기관이 구동되는 증기기관차는 야금학과 공작기계분야의 최신발전을 뚜렷하게 나타냈습니다.

 

1820년대 처음 영국에 도입된 시점부터, 철도는 ‘당대의 가장 위대한 경이’로 간주되었습니다. 최초의 성공적인 상용철도를 건설했던 공학 천재 조지 스티븐슨의 전기에서, 새뮤얼 스마일스는 리버플-맨체스터 선을 보기 위해 영국 전역에서 구경꾼들이 몰려왔다고 썼습니다. 스마일스는 19세기 중엽이었던 “약 25년 전에 철로 위를 달리는 기차를 보는 것은 평생 처음 겪는 일대 사건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고, 편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편안함은 평안함과 다릅니다.


평안함은 몸과 마음의 건강함이지만, 편안함은 반드시 그렇진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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