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11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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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옛날 일인데 내가 재수하던 무렵 알게 된 어떤 이는 내가 못하는 과학을 잘 해서 참 부러워했다. 나보다 잘 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멋져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 역시 그랬는데, 어느 날 무슨 문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쁘다'라는 말을 '예뻐다'라고 쓰는거다. 당연히 오타일거라 믿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예뻐다'가 맞다고 박박 우겼고, 내 표정은 어그러졌다. 멋져 보이던 모습은 그 날로 폭우에 얼룩이 씻겨 내려가듯 엄청난 속도로 사라졌다. 


마까르 제부쉬낀과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바렌까)는 편지를 주고 받는 사이다. 이 소설은 그들의 편지로 이루어져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낯선 여인의 편지>나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처럼 말이다. 바렌까를 사랑하는 마까르는 그의 재산을 털어 그녀를 위한 물건들과 돈을 보내고, 마까르를 아끼는 바렌까는 그를 걱정하며 책과 약간의 돈을 보내고, 각자의 근황을 알려주는 편지를 주고 받으며 그렇게 우정인듯 애정인듯 감정을 쌓아나간다. 처음엔 부성애라고 했지만, 편지를 읽어나가다보면 서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하지만 둘 다 가난하고, 마까르는 나이가 많다. 러시아 소설을 읽다 보면 이런 경우(나이 차이)가 왕왕 있는데, <첫사랑>의 지나이다도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도 <안나 까레니나>의 키티도 <우리 시대의 영웅>에서 페초린을 사랑하는 여인들도 다 그러하다. 여기서 페초린이야 매력적이라고 해도, 피에르나 레빈이 멋진 건 아니니까 저 시대, 저 나라 사람들의 사정이 있는건가 싶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영국이든 러시아든 불과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여자가 스스로 경제활동을 하면서 삶을 꾸려가긴 어려웠다. 특히나 계급 사회에서 상류층 물이 조금이라도 들어 있으면 조신해야 하니 가정교사 일조차 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상속자에게 기대거나 남편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대를 이어야 하니 어린 여자를 선호했겠지. 적당히 교육 받고, 귀족적인 자존심은 있지만 적당히 순종적인.


하지만 우리 바렌까는 똑똑한 여자다. 첫사랑이 책을 좋아하지만 아프고 가난하여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뽀끄로프스키였다. 그는 좋은 사람이었으나, 가난이 그를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누구나 선하게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환경이 그 사람을 선하게도 악하게도 만드는 것일지도. 아니다, 모두 가난하다고 악하게 되는 건 아니니까 범죄자에게 면죄부를 주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환경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기에 누군가를 최악으로 몰아가는 환경을 보다 나아지도록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인 듯 하다.


나는 둘의 사랑 이야기에 슬퍼하고 싶었는데, 읽다보면 나도 모르게 사회에 분노하게 된다. 고골의 <외투>를 읽으며 분노하는 마까르를 이해하게 된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 놓은 듯 하여 부끄럽고 화가 나는 거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바렌까가 권했으니 그녀가 자신을 비웃는 건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기보다 마까르는 좀 더 나은 사람이다. 문학 작품도 알고, 자신을 객관화 해서 볼 줄도 아니까. 하지만 궁지에 몰렸다고 술을 마시는 건 좋지 않았다. 가난은 사람을 자꾸만 더 나쁜 선택지를 택하게 한다. 


바렌까가 이상한 소문에 휩싸인 채 장교들에게 희롱을 당했다는 장면에서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도 주먹질을 하고 싶어진다. 그 더러운 입을 다물라고! 바렌까가 한 남자에게 마음을 준다고 다른 모든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허락해야 하는 것도, 놀림감이 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 마까르는 결혼한 사람도 아니고 범죄자도 아니라고. 가끔 이런 이야기들은 사람을 빡치게 한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한 쪽을 꼭 가볍고 함부로 해도 되는 그런 사람으로 몰고 가는 것 같아서 말이다. 


바렌까와 마까르의 사랑 이야기가 분명한데, 왜 난 둘의 사랑보다는 자꾸 다른 생각이 드는 지 모르겠다. 둘 다 가난하지만, 어린 시절은 풍족하게 보냈고 첫사랑도 배운 사람이라 바렌까는 문학을 사랑하고 문학에 대한 이해도 높다. 하지만 마까르는 이상한 소설을 좋아하고 고골을 싫어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불문율인지, 푸시킨은 싫어하지 않는다. 마까르는 역참지기를 좋아하던데 나는 눈보라가 더 좋다. 아니 아니 대화를 하지 말라고. 바렌까와 마까르의 사랑인데 왜 내가 뭘 좋아하는지가 나오냐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문학적 빈곤에 관한 것이었는데.


읽으면서 결말이 눈에 보였다. 망할 그 곳의 날씨는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결코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니까. 그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그 곳이니까 둘 중 하나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 마까르의 편지는 가슴이 아팠다. 그 편지는 바렌까에게 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문체가 좋아져도 그 편지는 결코 바렌까의 눈에 닿지 않겠지. 그게 너무 슬펐다. '예뻐다'를 주장하던 사람이 이제는 '예쁘다'는 단어를 넘어서 예쁘다는 표현을 수만가지 단어로 나타낸다 한들 나는 알지 못할 것처럼.


현대인의 심리치료법이라는 짤을 봤다. 정신과 의사가 불안에 떠는 환자에게 "푸른 초원에 누워 있다고 생각해봐요." 라고 하면 환자는 "여전히 불안해요."라고 대답한다. 다음 장면은 의사가 "할부와 대출금을 다 갚았다고 생각해봐요." 라고 하면 환자는 "속이 후련해요." 라고 대답한다. 나 역시 우와, 진짜 좋겠다!!를 외쳤다. 그 빚과 삶의 무게에 짓눌려 절망적인 상태가 가난이라면, 그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졌을 때 얼마나 행복할까.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고르쉬꼬프는 그 무게에서 벗어나게 되었는데 어째서 죽었을까. 


바렌까와 마까르가 아무리 가난해도 서로를 위해 가진 모든 것을 탈탈 털어주는 마음, 마까르가 길을 지나다 만난 동냥하는 아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 고르쉬꼬프가 애처롭게 도움을 요청하자 가진 돈을 전부 주었던 마음... 장군이 마까르에게 베푼 1백 루블보다 더 값진 것이 아닐까. 가난해서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알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마음, 하지만 도와줄 수 없어 안타까운 마음. 그것이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가, 톨스토이가, 푸시킨이, 러시아 작가들이 사랑하는 러시아 민중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규선 님의 <야래향>을 들으며 책을 읽는 게 아니었다...

바렌까, 문학이란 정말 좋은 것이더군요. 정말 굉장해요. 저는 그것을 그저께 그들 모임에 참여하면서 깨달았습니다. 문학이란 정말 심오합니다!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고 교훈을 주기도 하고, 그리고 또 저기... 아무튼 문학 속에는 그런 다양한 이야기가 씌어 있어요. 정말 훌륭합니다! 문학은 그림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선 그림 같고 또 거울 같기도 합니다! 욕망에 대한 표현, 신랄한 비평, 가르침을 주는 교훈들, 방대한 자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요. - P91

가난한 사람은 까다로워요. 가난한 사람은 보통 사람과 다른 눈으로 세상을 쳐다보고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을 곁눈질로 쳐다봅니다. 주변을 항상 잔뜩 주눅이 든 눈으로 살피면서 주위 사람들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신경을 씁니다. 누가 자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것은 아닐까, 혹은 다른 사람들이 <뭐 저렇게 꼴사나운 놈이 다 있어!>, <대체 저렇게 가난한 사람은 무슨 느낌을 갖고 살까?>, 아니면 <이쪽에서 보면 어떤 꼴을 하고 있고 저쪽에서 보면 또 어떤 꼴일까?> 등등의 말들을 할까 봐 남의 말에 일일이 신경을 씁니다. 바렌까, 모두 알고 있듯이 가난한 사람들은 발닦개만도 못한 인생이고 아무도 그들을 존중해 주지 않습니다. 누가 책에 뭐라고 쓰든 엉터리 3류 작가 족속들이 뭐라고 끼적이든 가난한 사람의 인생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습니다. - P130

왜 이전하고 같을 수밖에 없냐고요? 3류 작가들의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이 가진 것은 모두 옷을 뒤집어 보이듯 세상에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죠. 그들 말대로라면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스러운 것도 있어서는 안 되고 자존심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절대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P131

정말 나쁜 일은 앞서 말한 부자의 옆에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즉 그의 귀에 대고 <그만 해, 그런 생각은 이제 그만 하라고. 언제까지 너 하나만 생각할 거야. 너 하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이제 그만 해. 너는 가난한 구두장이가 아니잖아. 그런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애들도 건강하고 마누라도 밥 달라고 보채지 않잖아. 주위를 한번 둘러봐. 그 잘난 신발 말고도 걱정할 게 얼마나 많은지 알아? 좀 더 고결한 무엇을 찾아보라고!>라고 질책할 수 있는 사람이 부자의 옆에는 없단 말입니다.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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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분명히 가난은 삶에 영향을 미칩니다. 좋게도, 나쁘게도요.
가난하면 너그럽기 힘들다고 하지요. 늘 가난한 건 싫지만 가난을 경험해 보는 건 나쁘지 않다고 봐요. 사물을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거든요. 어떤 면에선 성숙해지죠.

꼬마요정 2022-04-29 22:29   좋아요 1 | URL
그렇죠. 가난이 무조건 나쁜 건 아니지만, 원하지 않는 선택이나 더 나쁜 선택을 하게 하는 게 안타까운 듯 해요. 하지만 그 일을 겪으면서 성숙해지기도 하니, 세상은 참 신기합니다. 무조건 좋은 것도, 무조건 나쁜 것도 없으니까요.

새파랑 2022-05-21 0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뻐다‘가 ‘예뻐 (전부)다‘ 아니었을까요? ^^ 저도 <가난한 사람들> 완전 좋아하는데 요정님 리뷰 보니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꼬마요정 2022-05-21 11:01   좋아요 1 | URL
아니에요!! 아니에요!! 20년이 지나도 생생하게 떠올라요 그 때의 당혹감이 ㅋㅋㅋ 그런데 새파랑님 문학적 상상력 정말 대단하십니다!! <가난한 사람들> 좋아하시는 분들 많네요. 너무 좋아요^^
 
소설 부산 누벨바그 4
곽재식 외 지음 / 아르띠잔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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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산에서 나고 자라 여전히 부산에서 살고 있다. 어릴 때는 남포동 근처에서 살았기에 아주 자연스럽게 바다를 접했다. 지금은 매립된 동삼동 어느 곳에서 저 멀리 커다란 배가 떠 있는 것을 보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에서 놀기를 즐겼다. 발가락으로 담치(홍합)를 따고 놀았고, 높은 바위에서 물 위로 뛰어 내리며 아빠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아마, 어린 시절 힘든 일이 많았어도 이렇게 긍정적으로 자란 건 저 넓은 바다 덕분이 아닐까 싶다.


<산 너머 보던 풍경>은 내가 좋아하는 곽재식 작가님의 글로 '나'의 첫사랑 이야기다. 누구나 하나씩 갖고 있을 그 아련한 첫사랑 말이다. '나'는 남몰래 태희를 좋아하는데, 어느 날 친구인 교진이가 태희와 사귄다는 거다. 아니, 나는 좋아한다는 티라도 날까봐 눈도 못 맞췄는데, 교진이는 자연스럽게 다가가서 자연스럽게 사귀게 된 거다. 정말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할 기회는 딱 한 번이라는(p.19) 그냥 흘려들을 국어 선생님의 말에 사로잡혀 '나'는 태희를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좋아한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점심시간에 학교 뒷산을 오르게 된 '나'는 정상까지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저 넓은 바다를 보게 된다. 그리고 자경을 만난다. 국어 선생님의 말은 정말 딱 맞았다. 불 같이 타오르는 사랑도 사랑이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듯 서서히 젖어드는 감정도 사랑이다. 산 정상에서 저 멀리 보이는 바다는 햇살에 반짝이며 눈부시고, 바다 절벽은 마치 하늘에 걸친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어떨까? 가까이에서 본 바다는 여전히 눈부시고 절벽은 더 거인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평범한 신도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환상 속의 사람일지도 모른다. 


<부산에서 김설아 찾기>는 고등학교 다닐 때는 친했으나 대학에 가고 각자 자리를 잡으며 멀어진 친구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세상 변치 않을 것 같은 우정도 세월의 힘 앞에서는 무색해지기도 한다. 흑역사들이 가득한 싸이월드가 사라지니 마니 할 때, 우연히 접속한 그 곳에 김설아가 단 내용 없는 댓글이 있었다.


자신이 놓아버린 친구가 다시 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무 말이 없다. '해란'은 이제 자신이 설아를 찾기로 한다. 소중한 줄 몰랐던 소중한 친구. 먼저 손 내밀어 줬으니 그 손을 잡아야 하니까. 그런데 어떻게? 핸드폰 번호도, 사는 곳도 아무 것도 모른다. 동창들에게 물어 물어 우연히 부산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봤다는 증언을 확보, 해란은 '인싸'인 부영과 함께 부산에서 설아를 찾기로 한다.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인연이 닿는다면 찾아지지 않을까. 서로의 마음이 있다면. 누구는 부산에서 누구는 서울에서. 한 편의 로맨스만큼 아름다운 우정 드라마 한 편 본 기분이다.


<포옹>은 좀 슬펐다. 5년동안 운영하던 가게를 접게 된 마지막 날, 운명처럼 나타난 남자, 형우는 오늘 광안대교에서 뛰어내릴 것이라 말한다. 한강보다 넓은 곳에 뛰어내리고 싶다는 그는 우연히 들어 온 또 다른 남자, 선균과 가게 주인 덕분에 산다. 셋이 나눈 온기는 생의 의지를 지펴주었을까? 나도 며칠 전 온 선배의 전화를 받았더라면, 선배는 그 차가운 바다에 뛰어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광안대교에서 보는 바다는 새카만 하늘과 닿아 빨려들어갈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도 으스러진 채로라도 미래의 어느 밤을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 기묘한 느낌이 형우를 삶으로 당겨온 건지도 모르겠다. 추운 밤 쓰러진 사람을 등에 업고 온 사람은 둘의 온기와 열기로 살아남았으나, 외면하고 간 사람은 얼어죽었다던 우화가 생각난다. 사람은 사람을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


<불면의 집>은 현대인이 겪는 불안을 잘 보여준다. 돈이 성공의 잣대이고, 비싼 집에 살면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안착한 것 같은 요즘, 해운대의 금빛 찬란한 아파트는 부와 성공의 상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곳에 산다고, 돈이 많다고 행복하지는 않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 혹은 마음 붙일 곳을 못 찾은 듯 남자는 자신을 잃어간다. 그리고 밤마다 쥐가 무언가를 갉는 소리를 듣는다. <아메리칸 사이코>가 떠오르는 이야기였다. 자,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망상인걸까. 해질 무렵 바다를 바라보면 뛰어내리고 싶어진다는데, 그래서일까. 우울증과 불안은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잔인한 곳이다, 그 곳은.


<떠나는 시간의 음>은 버리지 못한 아버지의 카세트 오디오와 불행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적도 있던 가족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전쟁을 겪은 부모님을 둔 IMF 때 가장이던 사람들이 다들 겪었던 일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전쟁의 기억과 눈부신 경제 성장의 기억, 독재의 기억, 국가 부도의 기억, 촛불 혁명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이 다 함께 어우러진 신기한 곳이다. 어찌보면 다 이해해 줄 것도 같지만, 또 어찌보면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을만큼 반목하기도 한다. 


한국전쟁 때 피난처였던 부산에서 가진 것 없이 비석촌에서 겨우 살던 아빠 김중근은 가난이 싫어 가수를 꿈꾸며 서울로 올라갔지만, 가수가 아닌 노동자가 되고, 택시 운전자가 되고, IMF를 맞아 사업에 실패하고 그렇게 카세트 오디오를 통해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십여 년을 보낸다. 처음으로 자신을 알아 준 '고래'라는 지인을 만나 세상 속으로 나온 아빠는 '고래'의 죽음으로 세상과 단절되는 듯 하다. 아빠의 장지가 부산인 탓에 부산까지 다녀 온 엄마와 나는 '김중근'과의 기억을 따라 그를 추억하게 된다.


<흔들리다>는 사춘기 소년들의 이야기이다. 감천문화마을에서 어묵 가게 알바를 하는 영석은 안타깝다. 건설노동자인 아버지가 임금을 떼여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추락하여 사망하고, 어머니는 추락하는 아버지에게 깔려 병원에 누워 있다. 영석은 학교를 그만두고 알바를 하며 이모와 함께 사는데, 친구들과 낚시하는 게 유일한 즐거움이다. 읽다보니 찰스 디킨스가 생각나는데, 그래도 디킨스네 아이들보다는 영석이 더 튼튼하고 돌봐주는 사람도, 살아갈 능력도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리핀 엄마를 둔 동철과 은행원 아버지와 교사 엄마를 둔 민수 역시 각자의 아픔이 있다. 이 세상은 안 아프면 망하기라도 하는지 이렇게 어린 애들도 아프고, 다 큰 어른들도 아프고, 하여간 다 아프다.


그래도 영석에게 친구들이 있어 다행이고, 작은 희망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시간이 흘러 낚시터의 그 우정이 색을 잃고 옅어진다 하더라도 그 기억으로 추억으로 미래를 살아가면 좋겠다.


<오월의 여행>은 사실 공감 가지 않았다. 삶이 똑같이 흘러가는 것 같고, 더 이상 설레는 것도 없고 단조롭다면 운동을 하는 건 어떨까요? 요가도 좋고 주짓수도 좋아요. 아니면 글을 쓰는 건 어떨까요? 아니면 책을 읽는 건? <보바리 부인>을 읽어봐요. 권태 때문에 바람이 났다가 삶이 사라졌는데. 아니면 맛집 여행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다면 이혼을 하고 오는 건 어떨지... 불륜 여행지로 매년 부산을 가는 건, 부산이 아무리 설레는 여행지고 낭만이 있다해도 별로 기쁘지 않았다. 매년 늘어나는 유혹적인 신발에게도 못할 짓이 아닐까?


책을 덮고 가만히 앉아 있으니,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떠올랐다. 참 크고 예쁜 곳이었는데... 내가 긍정적인 데는 바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 어우러진 넓은 학교를 다녀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친 개나리와 지랄 분수와 닭둘기가 있던 그 곳. 지금도 있을라나...  


친하게 지내면서 어울리고 자꾸 만나고 하면서 살살 이쪽으로 끌어당겨서 나한테 빠져들게 해서 좋아하게 만들어야 기회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그게 아니라 좋아한다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관계 같으면 그 후로는 그냥 사심 없이 친하게 지내면서 어울리기도 어려워지겠지요? 사실 아무 상대한테나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무례한 일이기도 하고 같이 지내는 것을 방해하기도 하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좋아한다고 말할 기회는 딱 한 번뿐인 겁니다. 평생에 단 한 번, 내가 한평생 못 잊고 좋아할 가장 살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고 말할 기회는 백 년을 살던, 이백 년을 살던 처음 딱 한 번 뿐이란 말입니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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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2-04-23 0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은 부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객지인 서울에서 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제가 꼭 읽어야 할 책이군요.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2-04-23 23:46   좋아요 0 | URL
부산 출신이셨네요. 아마 읽으시면 뭔가 아련하실지도 모릅니다. 고향이란 그런 존재니까요. 재밌게 읽으시면 좋겠어요. 저는 좋았는데 또 사람마다 다르니까요^^

coolcat329 2022-04-23 07: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정님 부산에 사시는군요!
부산 네 번인가 갔었는데 늘 다시 가고 싶어져요. 저도 바다가 근처에 살고 싶습니다.😙
소설 부산이라니 이 책은 부산가는 ktx 에서 읽으면 좋겠어요.ㅎㅎ

꼬마요정 2022-04-23 23:47   좋아요 0 | URL
저는 어릴 때 바다 근처에 살았구요.(걸어서 15분 정도 가면 자갈치 시장이 나왔어요 ㅎㅎ) 지금은 바다 가려면 차로 30분 이상은 가야하지만 그래도 부산이죠. 부산 가는 ktx에서 읽다니 정말 센스쟁이시군요!! ㅎㅎ

책읽는나무 2022-04-23 10: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부산이 고향인 사람은 아니지만 부산을 자주 드나들어 요정님 글의 동네 지명들이 눈에 익어 옛 추억 떠올라 잠깐 즐거웠네요.^^
말랑말랑해질 것 같은 책이네요.
읽어보고 싶어서 일단 담아 뒀습니다^^

꼬마요정 2022-04-23 23:50   좋아요 0 | URL
여행지로 부산 좋죠. 저도 아직 제대로 안 가 본 곳도 많답니다. 해운대나 광안리는 워낙 유명해서 다 아시더라구요. 책읽는나무님이 부산 자주 오셨다니 뭔가 따뜻합니다. 책 재미있게 읽으시면 좋겠어요^^
 
롤랑의 노래 - 국내 최초 중세 프랑스어 원전 완역본
김준한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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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은 상아나팔 부는 걸 수치스러워 하다가 죽고, 샤를마뉴는 복수하고… 가늘롱은 위험한 임무를 맡게 했다고 의붓아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결국 자신도 비참하게 죽는다. 이 곳 세상에서는 이교도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도가 되고, 천사가 내려와 이교도들로부터 사람들을 구하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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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유명한 샤를마뉴 대제 시절, 사라센과의 전투에서 영웅적인 행적을 보여 준 롤랑을 추모하고 찬미하는 노래다. 문제는 스페인에서 롤랑과 전투를 벌인 건 바스크 족이라는 거지만. 샤를마뉴 대제의 업적을 찬양하고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도록 독려하는 목적이라지만 번역이 술술 읽혀서 재미가 있다.

봉투칼 완전 귀엽다. 지금 쓰는 건 킹 아더 봉투칼인데 뒤랑달 봉투칼로 바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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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19 00: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4-19 0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반반 무 많이 서해문집 청소년문학 16
김소연 지음 / 서해문집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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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인사말도 밥 먹었어? 밥 한끼 하자~ 등등 밥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난 먹는 걸 싫어했다. 어릴 때부터 작다고 하도 엄마가 밥을 강요해서다. 5살 때인가 유치원 대신에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그 때 도시락을 싸서 들고 다녔더랬다. 엄마는 은색 타원형 도시락에 밥을 가득 담아서 나에게 들려 보내며, 학원 선생님께 꼭 '꼬요'가 밥을 다 먹게 해달라 부탁했다. 덕분에 나는 다른 애들이 다 그림 그리는 동안 교실 한구석에서 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밥을 먹어야 했다. 점심 시간 동안 밥을 다 못 먹었으니 수업시간까지 밥을 먹어야 한 것이다. 그러고 집에 오면 또 저녁을 먹어야 했다. 밥을 먹고 잠들면 다음 날 아침 또 밥을 먹고, 도시락을 싸서 점심을 먹고... 밥을 적게라도 주면 모르겠으나 늘 밥그릇 가득 밥을 주고 먹으라고 하니 난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안 먹는다고 반항하면 집에서 쫓겨났다. 민망하게도 옷도 안 입히고 쫓아낼 때도 있었다.(난 여자앤데?) 그래서 맨날 체하고, 속이 메슥거리고, 급기야 병원에 갔더니 의사 선생님이 나이를 보고 갸우뚱 하며 '위장장애'입니다. 라고 했다. 아니, 6살 짜리가 왜 위장장애죠?


지금도 여전히 스트레스가 많고 우울하면 잘 먹지 못한다. 가슴이 턱 막혀서 잘 넘어가지 않는거다. 그래서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적게 나간다. 하... 그래서 주짓수 할 때 너무나 힘이 든다. 체구도 작은데 허리는 플랫이다. 하하하 


하지만 남편을 만나고 먹는 걸 좋아하고 즐기는 남편의 취미 덕에 나도 먹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먹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 지 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이 책을 만났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어서 먹지 못하던 시절 이야기부터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여전히 먹고 사는 것이 걱정인 이야기까지 우리 사는 이야기들이 가슴 아프게 펼쳐진다.


6.25 전쟁, 그러니까 1950년 북한이 일으킨 그 전쟁부터 10년 마다 이야기 하나씩 해서 1990년대 말 IMF까지 총 5개의 먹거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는데, 가장 먼저 나오는 먹거리가 '고구마'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대통령이 있다는 대구로 피난가던 영진과 어머니는 지나는 길에 운 좋게 고구마를 캐게 된다. 먹을 것이 생겨 좋았지만 일부 빼앗기기도 하고, 일부는 금반지랑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금반지를 도로 강탈당할까 밤을 틈타 도망을 치고 그 금반지로 트럭을 얻어 타고 대구에 도착한다. 하지만 대통령도, 오촌 아저씨도 그 곳에는 없다. 한강 다리 끊고 도망가신 그 분은 이미 부산에 있을 테니까. 영진은 그것도 모르고 오촌 아저씨네에서 밥을 먹을 거라 생각하고 남은 고구마를 자신보다 더 안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와 할머니에게 건넨다. 명령은 윗대가리들이 내리고 피해는 선량한 사람들이 입지. 영진과 갈 곳 없으면 우리 집으로 오라던 여자아이는 부디 살아남아 행복해졌기를 바란다.


두 번째 이야기는 유엔탕, 그러니까 부대찌개의 시조새 뻘 되는 음식이다. 순자 고모는 일본 여학교를 다녔을만큼 엘리트였지만 해방이 되고 전쟁이 난 나라에서 부모도 없이 아끼는 조카와 함께 살아가기는 너무 어려웠다. 자신이 엘리트였던 시절 이름인 준코를 고집하는 것도, 해방된 세상에서 여전히 득세하는 무리들 때문이겠지. 휴전이 되고 부모님도 못 찾고 부산에서 다시 의정부로 온 순자 고모는 여전히 유학 시절을 못 잊고 그 때 동경했던 레스토랑을 꿈꿨고, 남희는 어떻게든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겠다 생각했다. 마침 동경에서 알던 김인호를 만난 순자 고모는 미군 물품을 팔아 남희를 학교에도 보내고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이 한여름밤의 꿈처럼 바스라졌다. 그래도 부대찌개는 남았으니, 흔한 표현이라 해도 눈물 젖은 음식이 아니겠는가.


세 번째 이야기는 '라면'이다. 70년대 어린 여자애들이 하는 일은 주로 미싱 돌리는 것이었다. 꽉 막힌 공간에서 하루 종일 천 먼지, 실 먼지에 폐가 막히고 미싱 바늘에 손톱이 뚫리면서 하루에 열 시간을 넘게 일하는 사람들... 사장은 욕심 부려 주문을 다 받아놓고 직원들이 그 일을 다 감당하도록 했다. 야근을 안 하면 싫어하고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하던 그들... 그 시절 대부분 서민들이 그러했든 막내인 아들 성재는 공부하고 나머지 누이들은 모두 일을 하러 가야했다. 성옥은 공부를 하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이 성자 언니와 다른 공장에서 일했다. 월급을 받으면 성자는 라면을 사서 갔다. 국수 면을 넣어 라면 양을 많이 만들어 도란도란 다같이 라면을 먹었다. 아버지는 지게꾼, 어머니는 떡장수, 딸들은 옷 공장에서 일을 하며 청계천 판자촌에서 사는 '평범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일상'은 판자촌이 뜯겨져 나가고 그들에게 경기도 광주에 집을 주겠다는 정부의 말에 산산이 부서졌다. 아버지가 찬양하던 박통이 준다는 집은 천막에 불과했다. 비가 오면 세간살이가 다 떠내려가는 그런 천막. 게다가 취득세도 내야했고, 서울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서도 써야 했다. 공장이 있다했지만 그 곳엔 들판 뿐이었다. 화가 난 이주민들이 시위하자 폭력 시위로 매도해 그들을 폭도로 몰아갔다. 전라도 광주의 모습이 다른 게 아니었다. 결국 성자네 가족은 다시 용산 판자촌으로 이사했다. 그들의 삶이 좀 더 나아졌을까. 


네 번째 이야기는 '떡볶이'다. 와아!!! 나는 떡볶이가 좋다. 그런데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이야기는 가슴이 아프다. 하긴 이 다섯 가지 이야기 중 가슴 안 아픈 이야기가 없긴 하다. 나도 어릴 때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이 있었다. 포장마차 가게였는데 팥빙수도 맛있고, 떡볶이도 맛있었다. 성희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네를 자주 이용했다. 내가 이 글을 읽을 때 약간 내 어릴 때 모습 같아서 옛 생각에 잠겼더랬다. 맛있는 떡볶이 이야기지만, 얽힌 사연은 가슴 아팠다. 변명 할라치면 그 시절 그럴 수 밖에 없었겠지 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동호 삼촌은 그렇다쳐도, 민주네 아주머니에게 성희 엄마는 너무했다. 교회 근처라서? 보여지는 그 체면이라는 게 뭐가 그렇게 내세울만한 게 있는건지. 일 하느라 낮에 공부를 하지 못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민주주의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걸 빨갱이 취급하고, 포장마차에서 신세 한탄을 들어주던 민주네 아주머니를 못배운 상스러운 사람 취급하고... 과연 성희는 어른이 되면 그 시절을 돌아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 어른의 세상은 다 위선적이고 겉치레 뿐이라는 생각일까. 오히려 경찰서에서 만난 민주네 아줌마와 기호의 모습이 더 아름다웠다.


마지막 이야기는 드디어 '치킨'이다. 닭!! 반반 무 많이를 외칠 수 있는 그 음식. 90년대 경제 호황 속에서 누군가는 은행을 다니며 딸을 영국으로 유학 보낼만큼 부를 가졌고, 누군가는 겨우 형제에게서 보증금 없이 월세로 슈퍼였던 가게를 닭집으로 바꿔 겨우 빚을 갚으며 살아간다. 각각의 집의 아들들은 한 명은 치킨을 외치며 컴퓨터도 사고, 한 명은 돈을 벌어야 해서 대학을 포기한다. 하지만 IMF는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풍족하게 살던 진우는 이제 현식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 읽고 나면 먹먹함이 덮쳐온다. 내가 겪은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대를 돌아보게 했고, 내가 겪지 못한 시대의 이야기는 그 시절을 살았던 분들의 괴로움과 힘겨움을 돌아보게 했다. 그래, 다들 열심히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살았고,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살았고, 맛있는 걸 먹기 위해서라도 살았다. 힘겨워도 살아남은 분들께는 존경의 마음을 표하고, 그 힘겨움의 원인이 된 나쁜 놈들에겐 욕을 전하고 싶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야. 왜정 때 목숨을 부지하겠다고 조상이 내린 이름을 성까지 왜놈 걸로 바꾸고, 그걸 또 무슨 자랑이라고 해방이 되고 10년이 넘었는데도 고집을 부리면서 입에 올리다니. 순자 고모뿐이었겠니. 미군정이 들어서고 나서 다들 미국말로 된 이름 하나씩 있어야 출세한다는 소문이 파다했었는데 뭘. 이놈의 나라는 어찌 된 게 배운 놈이면 배운 놈일수록, 사는 놈이면 사는 놈일수록 골수에 사대주의가 박혀서 중국 다음에 일본, 일본 다음에 미국, 여하튼 사대할 나라는 귀신같이 찾아내 알아서 기니, 참 그 요지경 속을 알다가도 모르곘단 말이지. -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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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2-04-18 09: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휴 리뷰 읽으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네요, 꼬마요정 님. 부모님이야 걱정하는 마음에 그러셨다 하지만 먹지 못하는 아이에게 자꾸 더 먹으라고 하시다니. 그걸 다 먹어야 할 어린이 꼬마요정 님 생각하니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먹는 양이 있는데 그보다 더 적게 먹어라, 많이 먹어라 하는 것은 잔인합니다. 그래도 다정한 남편 덕에 먹는 재미를 알아가신다니 그게 너무 좋아요. 맛있는 음식 잘 드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꼬마요정 님!!

꼬마요정 2022-04-18 23:51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저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결국 키는 크지 않았답니다. ㅎㅎㅎ 그래서 전 애기들 먹고 싶어하면 주고 싫어하면 기다리게 되었어요. 먹는 즐거움을 뺏으면 안 되니까요. 그래도 남편이 먹는 거 좋아해서 같이 먹으러 다니다 보니 제법 잘 먹고 있답니다. 그게 벌써 연애까지 포함해서 16년 째네요. ㅎㅎㅎ 다락방님도 좋은 와인 즐기시며 요가도 재미나게 하시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책 읽으며 건강하세요^^ 함께 행복하게 지내요!!!

감은빛 2022-04-21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밥을 안 먹는다고 쫓아내다니! 무서운 부모님이셨네요.
저 역시 키도 작고 체구가 작은 어린시절을 보냈는데,
저는 밥만 엄청나게 많이 먹었어요.
제 도시락 밥통은 친구들의 것보다 1.5배는 컸고, 밥을 꾹꾹 눌러 담아 주셨죠.
그 밥을 쉬는 시간에 다 먹어 치우고 점심 시간에는 매점으로 달려가 라면을 또 먹었죠.
그렇게 많이 먹어도 키도 안 크고 살도 안 찌더라구요.

한편 꼬마요정님 이야기를 읽으며 군대 시절 먹는 걸로 고문하곤 했던 선임병들이 떠올랐어요.
식판에 밥을 산처럼 퍼주고는 시간 안에 다 먹으라고 협박하고 조금이라도 남기면 두들겨 패곤 했던 인간들.
부식으로 나온 빵을 10여개 모아서 제 관물대에 넣어두고 저녁까지 다 먹으라고 강요했던 인간들.
저녁까지 못 먹으면 취침 점호 때 관물대 검사를 해서 벌을 주고, 점호 때 지적받았다는 이유로 남들 잘 시간에 화장실에더 두들겨 맞곤 했던 기억들이 떠올랐어요.

이 책 저도 읽어보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읽으라고 권하고 싶네요.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2-04-22 00:39   좋아요 0 | URL
아니, 그렇게 드셨는데 키가 안 컸다구요? 저도 잘 먹었어도 안 컸을지도 모르겠네요. 엄마가 조금만 먹는 것에 관대했더라면 지금의 전 어땠을까요 ㅎㅎ

어릴 때 부모님이야 키 크라고 먹는 걸 강요한다지만, 군대에서 먹는 걸로 고문하는 건 진짜 나쁜 짓이네요. 사람이 먹고 자고 내보는 게 진짜 중요한데, 게다가 식량 부족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도 많은데 그런 식으로 강요하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진짜 나쁘다고 생각해요. 어줍잖은 권력으로 사람을 그렇게 짓밟으면 기분이 좋을까요? 사람을 그렇게 때리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까요? 슬프고 화나는 일이네요ㅜㅜ

책이 참 맘에 들었어요. 괜히 생각에 잠기게 되고 맘이 아프더라구요. 옛날 생각도 나고… 재미를 느끼시면 좋겠어요. 전 좋았는데 감은빛님껜 어떨지.. 떨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