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가(安民歌)

 

 <원문>



<양주동 역>
 

<현대어 풀이>

   임금은 아버지요
   신하는 사랑하실 어머니요
   백성은 어린아이로고 하실지면
   백성이 사랑을 알리이다.
   구물거리며 살손 물생이 이를 먹여 다스려져
   이 땅을 버리고 어디 가려 할지면*
   나라 안이 유지될 줄 알리이다.
   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할지면
   나라 안이 태평하나이다

  

[배경설화]

경덕왕이 덕경등을 예를 갖추어 맞아들였다. 왕이 2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릴새 오악 삼산의 신들이 가끔 궁정에 나타나 보이기도 하였다. 경덕왕 24년 3월 3일에 왕이 귀정문 누상에 납시어 옆에 있는 여러 사람에게 이르기를 누가 길에서 영복승 하나르르 데려오겠느나 하셨다. 그때, 마침 위의가 있는 대덕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데려다 왕에게 모였다. 왕이 이르되, 이는 내가 말하는 영복승이 아니니 물러가게 하라 하셨다. 때마침, 또한 중이 해진 장삼에 앵통을 지고 남으로부터 걸어오므로, 왕이 반가이 누상에 맞아들여 그가 진 통을 살펴보니 그 속에는 차가 가득하였다. 왕이 그대는 누구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으니, 그는 이름을 충담이라하며,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바치는데, 이제도 차를 올리고 돌아노는 길이라 하였다.... 왕이 다시 묻기를 일찍 들으니, 그대가 지은 찬기파랑 사뇌가의 뜻이 대단히 깊다 하느데 과연 그런가 하니, 그렇다고 하였다. 왕이 그러면 나를 위하여 이 안민가를 지으라 하시니, 충담사가 그에 따라 노래를 지어 바쳤다.... 이 안민가에 이르되, 

출전:{삼국유사}, 권2, 기이(紀異),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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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2004-09-02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 국어책에 나오던... 쿨럭.

꼬마요정 2004-09-02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능치기 전에 죽어라 봤던...^^;;
 

헌화가(獻花歌)



[원문]
 
紫布岩乎 希     
 執音乎手母牛放敎遣     
 吾 兮不喩慙 兮伊賜等  
 花 兮折叱可獻乎理音如


[양주동 역]
 

 

[김완진 역]

 

[현대어 역]
  자줏빛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을진댄
  제 꽃 꺾어 바치오리다.

[배경 설화]
「삼국유사」 권2  '기이 제이(紀異 第二)'  《수로 부인》편의 배경 설화 중 관련 대목만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성덕왕 시대에 순정공이 강릉 태수로 부임할 적에, 가다가 바닷가에 머물러 점심을 먹었다. 곁에는 돌로 된 산봉우리가 병풍처럼 바다에 다가서 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었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무성하게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가 이것을 보고 좌우에 있는 이들에게 말하였다. "꽃을 꺾어다 바칠 사람이 그 누구인고?" 종자(從者)들이 말하였다. "사람의 발자취가 다다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물러섰는데,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옹이 수로 부인의 말을 듣고는 그 꽃을 꺾어 오고 또한 노래를 지어서 바치었다. 그 노옹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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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a95 2004-08-31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노래 참 멋지지 않나요? 아름다운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꼬마요정 2004-08-3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요... 저한테도 저런 멋진(?) 추종자가 있었으면...^^;;
 


처용가(處容歌 ; 789년)

 

   <원문>



<양주동 역>
 

 

 

 

 

 

  <현대역>

  서울 밝은 달밤에
  밤 깊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잠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내 아내) 것이지마는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이다만은(내 아내이지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배경설화]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 : 지금의 울산)에서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용의 조화로 구름과 안개 때문에 길을  잃었다. 일관의 말에 따라 그 근처에 용을 위하여 절을 세우도록 명하자, 곧 안개와 구름이 걷히고 용이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나타나 왕의 공을 칭송하여 춤을 추고 연주를 하였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정사를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역신(疫神)이 처용의 처의 아름다움을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처용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를  보니 두 사람이 있으므로, 이에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나자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그의 노하지  않음에 감복하였으므로 이후로는 처용의  얼굴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물러갔다. 이로 인하여 나랏사람들이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았다 한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조(處容郞望海寺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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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죽지랑가(慕竹旨郎歌))

<김완진 역>

지나간 봄 돌아오지 못하니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우올 이 시름.
전각(殿閣)을 밝히오신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 가도다.
눈의 돌음 없이 저를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
다복 굴헝에서 잘 밤 있으리.

<조동일 역>

가고 다시 오지 못한 봄(지난날의 좋은 시절)을    그리워하여
죽지랑이 없어 시름에 겨워 운다.
두덩을 밝힌 모습이
해가 갈수록 헐어간다.(노쇠하기까지의 경과)
눈돌림이 없이 죽지랑 만나는 것을 이루겠는가.
그리운 낭의 모습을 좇아
지향없이 가려면 다북쑥 우거진 구렁에서 자야
할 때도 있으리라.

 

[배경설화]

이 노래는 유사 권 2 효소왕에 죽지랑 조에 실려 있다.
술종공이 朔州都督使가 되어서 임소에 가는 길에 그 때는 삼한이 병란이 있는 때라, 기병 삼천으로 호송하였는데, 죽지령에 다다르니 웬 한 거사가 그 산 길을 평평하게 다스리고 있었다. 술종공은 탄복하였는데, 거사도 공의 위풍을 보고 감심하여 서로 의기가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공이 삭주에 도임 하여 다스리기를 한달 뒤에 꿈에 거사가 방에 들어온 것을 보았고, 공의 부인도 같은 꿈을 꾸었다. 놀랍고 괴이해서 이튿날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까 거사는 일전에 죽었다 한다. 더욱이 그 죽었다는 날짜와 꿈의 날짜가 꼭 맞는다. "거사가 우리 집안에 인제 태어나리라" 공은 이렇게 말하고, 사람을 시켜서 거사의 주검을 영상 북쪽 봉우리에 후히 장사하고, 돌로서 미륵을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워 주었다. 부인은 꿈 꾼 날부터 태기가 있어서 아이를 낳은 뒤에 죽지랑이라 이름 지었다. 자라서 벼슬에 나아가 김유신과 함께 부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네 임금의 재상이 되고, 나라를 안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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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문사는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있는 사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이다.

560년(신라 진흥왕 21)에 한 신승이 창건하였다.
608년 (진평왕 30)에 원광 국사가 제1차 중창하였다. 원광국사는 만년에 가슬갑사에 머물며 일생 좌우명을 묻는 귀산과 추항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주었다고 한다.
제2차 중창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오갑사(五岬寺)를 중창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 왕건은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하고 전지(田地) 500결을 하사하였다.
제3차 중창은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가 송나라에서 천태교관을 배운뒤 귀국하여 운문사에 들어와 중창하고 전국 제2의 선찰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당우 일부가 소실되었다.
1690년 (숙종 16) 설송(雪松)대사가 제4차 중창을 한 뒤 약간의 수보(修補)가 있어 왔다.
1907년 운악(雲岳)대사가 제5차 중창을 , 1912년 긍파(肯坡)대사가 제6차 중창을 하엿다.
1913년 고전(古典)선사가 제7차 수보하였고, 비구니 금광(金光)선사가 제8차 수보를 하였다.
1977에서 98년까지 명성스님이 주지로 있으면서 대웅보전과 범종루와 각 전각을 신축, 중수하는 등 경내의 면모를 한층 일신하였다. 현재는 30여 동의 전각이 있는 큰 사찰로서 규모를 갖추었다.

운문사는 1958년 불교정화운동 이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개칭되어 승려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수많은 수도승을 배출하고 있다.



[운문사사적]에 의하면, 557년(진흥왕 18년)에 한 신승(神僧)이 북대암 옆 금수동에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여 도를 깨닫고 도우(道友) 10여 인의 도움을 받아 7년 동안 동쪽에 가슬갑사, 서쪽에 대비갑사(현, 대비사), 남쪽에 천문갑사(현, 운문사), 북쪽에 소보갑사를 짓고 중앙에 대작갑사를 창건하였으나 현재 남아 있는 곳은 운문사와 대비사 뿐이다.
그후 600년 (신라 진평왕 22) 원광 국사가 중창하였다. 그는 대작갑사와 가슬갑사에 머물면서 점찰법회를 열고, 화랑도인 추항과 귀산에게 세속 오계를 내려줌으로써 화랑정신의 발원지가 되었다.
오갑사가 창건된 시기는 신라가 불교를 중흥하고 삼국통일을 위해 국력을 집중하여 군비를 정비할 때였다. 이때 오갑사가 운문산 일대에 창건되고 화랑수련장이 만들어 진다. 그것은 곧 신라가 서남일대 낙동강 유역으로 국력을 신장해가는 과정으로써 운문사 일대가 병참기지로서 당시 신라로서는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로 추대되어 1281년까지 머무르셨다.
이 곳에서 일연은 『삼국유사』 의 집필을 착수하였다. 운문사의 절 동쪽에는 일연선사의 행적비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8세기 중반, 운문사는 설송 연초대사가 제4차 중창할 때와 19세기 전반 헌종 년간에서 운문사의 사세는 상당했다.
운문사의 제5차 중창주인 운악화상은 1839년에 오백전을 중수하였다. 이듬해 응진전과 명부전, 미타전, 내원암, 북대암등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청신암을 창건하였고, 1842년 금당을 중건하였다.



해방이후 제1세 김상명 스님에서 제4세 박상웅스님까지 잠시 대처승이 거주하였다.
1950년대 교단정화 이후 비구니 정금광 스님이 1955년 초대 주지로 취임하여 제8차 보수.중창하였다.
이후 2.3대 유수인, 4대 배묘전 , 5대 이태구, 6대 안혜운, 7대 위혜안 스님을 거쳐 8대부터 12대까지(1977~1998) 전명성 스님이 운문사 주지와 학장을 겸임하면서 제9차 중창불사를 이룩, 대웅보전과 요사 등 29동을 신축하고, 만세루 등 기타 전각들을 중수하는 등 명실공히 대가람으로서의 면모를 일신하였다. 이어 1998년부터 제13대 주지로 송혜은 스님이 부임하면서 선원을 신축하여 교와 선을 아울러 익힐 수 있는 도량으로 가꾸었다. 2002년부터 제14대 주지로 고흥륜 강사스님이 부임하여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비구니 강사를 양성하는 전문 교육기관으로는 최초로 승가대학원이 개설되었다. 1958년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된 이래 수많은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87년 승가대학으로 명칭이 바뀌고 전문교과 과정과 교수진을 확보하여 승가대학의 명분에 걸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대략 260여 명의 비구니 스님들이 이곳에서 경학을 수학하고, 계율을 수지봉행하고 있으며,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 청규를 철저히 실천하고 있다. 운문승가대학은 국내 승가대학 가운데 최대의 규모와 학인수를 자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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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4-08-26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접 가보세요.
가시기 전에 경산지역의 홍시도 보시구요..
10월 말쯤 가시면 넘 좋을 거예요.

꼬마요정 2004-08-2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야지..가야지..늘 마음만 가야지..입니다. 정말 가보고 싶은데, 맨날 여건 타령만 하고 있지요..올해는 꼭 가보도록 해야겠어요~~^^

mira95 2004-08-2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년전에 갔다 왔어요... 운치있고 좋더군요... 사진도 찍고, 여기저기 구경하고 좋았어요..꼬마요정님도 꼭 가보세요^^

꼬마요정 2004-08-26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