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왕과 죽엽군
죽엽군:대나무 잎 군사

 

제13대 미추왕은 김알지의 7대 손이다. 대대로 벼슬이 높고 성덕이 있으므로 점해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다. 재위 23년 만에 죽었으며 흥륜사 동쪽에 능을 정했다.
14대 임금 유리왕 때, 이서국 사람들이 서울 금성을 공격해 왔다. 신라 쪽에서도 방어에 나섰으나 오래 버티어 낼 수 없었다. 그때 홀연히 어디에서 온지도 알 수 없는 신기한 병정들이 나타나 신라군을 지원해 왔다. 그 신기한 병졸들은 모두 댓잎사귀를 귀에 꽂고 있었다. 그들은 신라군과 힘을 합하여 적군을 쳐부수었다.
적군들이 물러간 뒤 그 신기한 병정들은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다만 미추왕릉 앞에 무수한 댓잎사귀가 쌓여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제사 귀에 댓잎사귀를 꽂고 왔던 그 신기한 병정들이 미추왕 혼령의 공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 미추왕릉을 죽현릉(댓잎 꽂은 병정들이 나타난 능)이라 불렀다.
36대 임금 혜공왕 15년(779) 4월 어느날, 김유신 장군의 무덤에서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죽현릉 쪽으로 불어가고 있었다. 그 회오리바람 속에는 한 늠름한 장군 차림을 하고 준마에 올라앉은 사람과 그 종자로 보이는, 역시 갑옷을 입고 병기를 갖춘 사람 40여 명이 휩싸여 허공에 떠가고 있었다. 그들을 휩싼 회오리바람이 죽현릉에 이르자 그들은 죽현릉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군 차림의 사람과 그 종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죽현릉 속으로 들어가고 난 잠깐 뒤에 능 속에서는 웅숭깊은 울음소리가 울리는 듯하고, 또는 뭔가 호소하는 듯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 말은 이러한 내용의 것이었다.
"신은 평생에 나라를 위해 역사의 한 시대를 도왔고, 환난을 구제했으며, 분단해 있던 국토를 통일시킨, 이러한 공훈을 이루었습니다. 지금 죽어 혼백이 되어 있어도 이 나라를 굽오 돌보아 재앙을 물리치고 환난을 구제해 가려는 마음은 잠시도 변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난 경술년에 신의 자손이 죄 없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지금의 군신들이 나의 공훈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제 신은 차라리 이곳을 떠나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리고 다시는 나라를 위해 애쓰지 않으려
고 합니다. 왕께선 부디 신의 옮겨감을 허락해 주소서."
미추왕의 혼령이 대답했다.
"나와 그대가 이 나라를 돌보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찌하겠소? 그대는 전과 다름없이 다시 힘쓰도록 하오."
세 번을 청했으나 세 번 다 미추왕의 혼령은 허락하지 않는가 보았다. 그러자 회오리바람은 김유신 장군의 무덤으로 되불어갔다.
40여 명의 종자를 데리고 회오리바람을 몰아 미추왕릉을 다녀간 그 장군 차림의 사람은 말할 것도 없이 바로 김유신 장군의 혼령이었다. 당시의 임금 혜공왕은 이 사실을 보고받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곧 공신 김경신을 시켜 김유신 장군의 묘소에 나아가 사과를 드리게 하고, 다시 장군을 위해 공덕보전 30결을 취선사(경주에 있던 절)에 내리어 장군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취선사는 바로 김유신 장군의 평양 토병이 있은 뒤에 복을 비느라 세워진 것으로 장군과는 연고 있는 절이었기 때문이다.
미추왕의 혼령이 아니었던들 김장군의 혼령이 품었던 노여움을 막을 길이 없었을 테니 왕의 나라를 보호하는 공덕은 크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래서 나라 사람들은 왕의 덕을 감사히 여기고서 3산과 같은 등급의 제사를 왕에게도 지내고, 서차를 오릉의 위에 놓아 대묘(大廟)라 일컬었다.

● 미추왕과 김유신 가문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미추왕은 김씨로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오른 사람이다. 그리고 이 설화에 등장하는 김유신도 신라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이처럼 혼령이 나타나 어떤 일을 처리했다는 것은 미추왕과 김유신, 두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가문 신화라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설화가 생겨난 이유를 우리는 정치 사회적인 면에서 찾을 수 있다. 즉 김씨 왕족이 여러 집단으로 분화되었을 때 주도권을 잡은 친족 집단이 직계 선조에 대한 신화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필요를 느낀 것이다. 이런 경우는 고려 왕건의 선조에 관한 신화나 <용비어천가> 등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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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녀와 비형랑

 

사륜왕은 신라 제25대 임금으로 성은 김씨, 시호는 진지대왕이라 했다. 그 왕비는 기오공의 딸 지도부인이었다.
진나라 선제 8년(576)에 즉위하여 나라를 다스리기 4년, 정치는 어지러워지고 왕은 쾌락에 빠져 방종만을 일삼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왕위에서 끌어내려 버렸다.
사륜왕이 왕으로 군림하고 있을 때다. 사량부의 일개 민간 여자로 얼굴이며 맵시가 복사꽃처럼 요염하게 생긴 한 여인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도화랑(桃花郞)이라 불렀다. 사륜왕은 도화랑의 아름다움을 전해듣고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동침을 요구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것이옵니다. 지아비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가게 하는 것은 비록 제왕의 위엄으로써도 결코 안되는 일이옵니다."
왕은 도화랑을 위협해 보았다.
"죽어도 좋은가?"
도화랑은 태연히 대답했다.
"차라리 저잣거리에서 목을 베일 망정 지아비 밖의 다른 남자를 따르고 싶진 않사옵니다."
왕은 슬쩍 희롱하며 말하기를,
"만약 지아비가 없다면 되겠지?"
"될 수 있사옵니다."
왕은 도화랑을 놓아 보냈다.
바로 그 해에 사륜왕은 왕위에서 폐위되고 죽어 버리고 말았다.
사륜왕이 죽은 뒤 3년 만에 도화랑의 남편도 또한 죽어 버렸다. 남편이 죽은 지 열흘쯤 되는 날 한밤중, 죽은 지 3년 때 되는 사륜왕이 생시와 꼭 같은 모습으로 도화랑이 자는 방으로 들어왔다. 왕은 도화랑에게 말했다.
"네가 이전에 허락했듯, 이제 네 지아비가 없으니 되겠지?"
도화랑은 가벼이 응낙치 않고 그 부모에게 사실을 알렸다. 도화량의 부모는 말했다.
"군왕의 말씀인데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왕이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그녀는 들어갔다.
왕은 도화랑에게서 7일 간을 머물러 있었다. 그 사이 늘 오색 구름이 도화랑의 집 지붕을 덮고 있었고 향내가 방안에 가득했다. 7일 후에 사륜왕은 자취없이 사라졌다.
사륜왕의 7일 간의 동거로 도화랑은 임신을 하게 되었다. 달이 차서 아이를 낳으려는데 천지가 진동하였다.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은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당시의 임금 진평대왕은 그 신기함을 듣고서 비형을 궁중에 데려다 길렀다. 비형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자 왕은 그에게 집사란 관직을 주었다.
그런데 이 비형 소년은 매일 밤 궁중을 빠져나가 어느 먼 곳을 노닐다 돌아오곤 했다. 왕은 비형이 하는 짓이 의심스러워 용감한 군졸 50명을 시켜 그를 감시하게 했다. 비형 소년은 번번이 월성의 성벽을 날아 서쪽으로 황천 냇가 언덕으로 가서 도깨비 떼를 모아놓고 놀았다. 군졸들이 수풀 속에 숨어 몰래 엿보았더니 도깨비들은 한창 놀다가 여기저기서 들려 오는 새벽 종소리를 듣고는 뿔뿔이 흩어져 가고, 비형 소년 또한 궁중으로 돌아오곤 했다.
군졸들의 보고를 듣고 난 진평왕은 비형 소년을 불러 물었다.
"네가 도깨비 떼를 거느리고 논다던데 참말이냐?"
비형 소년은 그렇다고 시인했다. 비형 소년이 시인하자 왕은 그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렇다면 네가 도깨비 떼를 부려 신원사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도록 해라."
비형 소년은 진평왕의 명령을 받들어 그가 거느리는 도깨비 떼를 부려 돌을 다듬고 하여 하룻밤 사이에 커다란 다리를 만들었다. 도깨비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그 다리는 귀교(鬼橋)라 이름지어졌다.
진평왕은 비형에게 또 물어보았다.
"도깨비들 가운데서 인간계에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만한 자가 있겠는가?"
길달이란 자가 있습니다. 그가 국정을 도울 만할 것입니다."
진평왕은 다음날 길달을 데려오라 했다.
이튿날 비형을 길달을 데리고 함께 왕을 뵈었다. 왕은 길달에게 집사의 직책을 내려주었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 비할 데 없었다.
그때 각간 임종은 아들이 없었다. 왕은 임종에게 길달을 양자로 맞아들이게 했다. 임종은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문루를 세우게 했더니, 길달은 문루를 세우고 매일 밤 그 문루 위에 가서 자곤 했다. 그래서 그 문을 길달문이라 이름했다.
어느날 길달은 여우로 변하여 달아났다. 비형은 도깨비들을 시켜 길달을 붙잡아서는 죽여 버렸다. 이로 해서 그 도깨비 무리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달아나게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러한 비형을 두고 사(詞)를 지었다.

성제의 혼이 낳으신 아들
비형 도령의 집 바로 여길세.
날고 뛰는 온갖 귀신들아,
이곳에 함부로 머물지 말게나.
향속에서는 이 글을 써붙여 잡귀를 물리친다.

얼마 전 흥륜사 터로 불리던 경주시 사정동에서 영묘사(靈廟寺), 영묘사(令妙寺)란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

● 도깨비 이야기와 신라인의 정조관
이 이야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도화녀라는 미모의 여인 이야기와 비형랑이라 하는 후세에 신격화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설화는 호색설화, 시애설화(屍愛說話), 교혼설화(交婚說話) 등 여러 설화의 모티프가 얽혀 있는 설화이다.
도화녀와 사륜왕의 얘기에서 우리는 신라인의 정조에 대한 태도가 대개 어떠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백제의 개루왕이 등장하는 <도미의 아내>와 비교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지아비가 있는 한 상대가 비록 제왕이라 하더라도 몸을 허락할 수 없다 하고, 그러나 지아비가 없을 때 그것은 비로소 가능하다고 한 도화녀의 태도, 그리고 도화녀와 사륜왕의 혼령과의 동거, 이런 것들은 신라인의 정조관이 조선 시대의 정조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음을 말해 준다.
도화녀와 사륜왕의 혼령과의 동거는 당시 여인의 재혼이 자유로웠음을 전해 주는 한 단서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 신라 사람들의 사상에 '신체미 존중'의 한 양식이 있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도화녀가 뛰어난 미인었다는 점에서 이 설화가 발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수로부인에 관한 얘기와 처용랑에 관한 얘기에서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신라적인 정조관은 바로 이 신라인의 신체미 존중의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흔히
우리나라 도깨비 이야기의 원천이라 한다. 그런데 도깨비의 세계는 별도로 있되 인간 사회의 연장이고, 인간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사고방식이 거기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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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andy 2004-07-20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 비형이 어디 나오는 주인공인가 했더니 바로 여기군요. 이영도님의 <눈물을 마시는 새>에 설정된 비형 스라블 캐릭터 말입니다.

꼬마요정 2004-07-20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영도님의 그 책은 읽어보진 못했어요..^^;;
거기에 비형스러운 캐릭터가 나오나 봐요? ^^
 

다시 읽는 한국인물 열전 - 도미부인

 

이번엔 백제의 열녀(烈女) 도미부인(都彌婦人)이시다. 돗자리 중딩 때로 기억된다. 국어교과서에 실린 도미부인 얘기 읽고 감동 먹었었다. "와~ 이 분 정말 정절의 화신이네." 하고 말이다. 목숨 걸고 정절 지킨다는 거, 이거 어쨌든 쉬운 일 아니잖은가(오해들 마시라. 정절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한다는 뜻 절대 아니다).
근데 대가리 굵어지고 텍스트 읽고 나서 생각이 쫌 달라졌다. 정절 지키는 거 좋은 일이다. 그치만 과연 이러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또 막연히 알고 있던 것처럼 단순한 스토리가 아녔다. 뭔가 머리 굴릴 부분이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 이번에 디비게 된 거다.


도미부인은 소설의 주인공으로도 몇 번 나왔다. 박종화의 『아랑의 정조』, 최인호의 『몽유도원도』가 그런 소설이란다(둘 다 못읽었봤다. 죄송…). 최인호의 소설은 작년인가 같은 제목의 뮤지컬로도 올려졌다. 그치만 도미부인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는 찾아보기 힘들다(사실 연구꺼리도 안된다).
그래서 그냥 널널한 기분으로 이너넷을 뒤지니 밸밸 얘기가 다 나온다. 오호~ 보령시에서 1994년에 도미부인 사당을 지었구만. '정절사(貞節祠)'라. 좋다. 근데 당시 백제의 수도는 한성(漢城) 아녔나? 으흠~ '도미부인선양사업추진위원회'란 것도 있구나. 좋지. 헉스! 이건  또 뭔가. '도미부인동상 설계현상공모'? 서울 강동구에서 올 3월에 내건 현상공모 제목이다. 강동구가 도미부인과 뭔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근거가 있으니까 사업을 벌이셨겠지… 하고 걍 넘어가자.

   미모와 정절을 겸비한 부인을 둔 도미… 부럽당

도미부인, 부인의 이름이 도미가 아니라 '도미의 부인'이란 뜻이다('도미부인'이란 말 자체가 텍스트엔 없다). 최인호씨는 소설에서'아랑'이란 예쁜 이름을 지어주셨다지만,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이 얘기, <삼국사기>열전8  <도미>에만 나온다. 글고 정말 짧다. 이 글 군데군데 나오는 내용이 전부다). 

남편 도미는 '편호소민', 즉 평민으로, 의리를 아는 백제인이었단다【雖編戶小民 而頗知義理】. 이너넷을 뒤지다 보니 도미 직업이 목수였다거나 어부였다는 얘기도 나오는데 근거는 안보인다. 흐미~ 정승이었단 얘기도 있네. 성주도씨(星州都氏) 홈페이지를 보니, "『전고대방(典故大方)』과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의 문헌에는 백제 개루왕 때의 정승 도미를 도씨(都氏)의 시조(始祖)로 기록하고"있다는데, 남의 집안 일엔 껴들지 않으련다.

'비록'평민이었지만, 뒤에 나오듯이 여종도 있던 걸로 봐서 먹고 살 만은 했나보다. 그 아내는 아름답고 우아한 데다 절개도 곧아서【其妻美麗 亦有節行】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단다. 근데 말이다. 어떤 여자가 절개가 곧다는 걸 어케 아나. 이넘 저넘이 찝쩍댔단 뜻이다. 누가? 주위의 돈 많고 힘 있는 넘들 아녔겠나. 남편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데도 말이다. 아마도 비슷한 유혹이나 협박에 절개를 꺾은 평민 신분 이하의 여인들도 많았을 거다. 그때나 이때나 사람 사는 세상은 비슷했나보다.

 
 
 개루왕이냐 개로왕이냐

그럼 이 사건은 어느 왕 때 일어났나. 텍스트엔 백제의 제4대왕인 개루왕(蓋婁王, 재위 128~166)이라 나오는데, 제21대 개로왕(蓋鹵王, 재위 455~475)으로 보기도 한다. 난 개로왕으로 본다. 왜냐.
① 제4대 개루왕은 성품과 품행이 좋았다고 한다【性恭順有操行】(『삼국사기』 백제본기1 개루왕). 어진 왕이었다니 도미부부 갈구진 않았을 거다.
② 도미부부 델구 논 백제왕은 텍스트에 나오듯이 성질이 드러웠다. 근데 제21대 개로왕, 말년에 정치 깽판쳐서 민심을 잃는다.
③ 도미부부 갖고 논 백제왕은 평소 '박(博)'을 좋아했다. 그래서 뒤에 나오듯이 도미부인에게 자기가 도미와 '박'을 해서 이겼다고 썰을 푼다. 이 '박'은 장기?내기?놀음 등의 뜻이 있는데,  내기로 해석하는 게 무난하다. 그치만 혹시 '장기'로 해석해도 된다면, 이 백제왕은 개로왕일 가능성이 높다. 개로왕은 '혁(奕)', 즉 바둑을 좋아했는데【好博奕】, '혁'은 바로 뒤에선 '기(碁)'로 나온다(『삼국사기』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 '기'에는 바둑·장기의 뜻이 있다. 혹시 개로왕은 바둑과 장기 같은 잡기를 좋아했던 건 아닐까.

   개로왕의 너절한 테스트­ "지가 안넘어가고 배겨?"

도미부인의 빼어난 미모와 정절에 대한 소문을 들은 개로왕, 도미를 궁궐로 불러들여 일케 말한다.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貞潔)이 으뜸이라 하지만, 만약 사람이 없는 어두운 곳에서 좋은 말로 꾀면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사람이 드물 것이다.

이 말을 듣고 도미가 그냥 <언저리뉴스>처럼 "아~ 네에~"하고 넘어갔으면 아무 일 없었을 거다. "우리 아내도 별 수 없을 거여여" 했으면 개로왕인들 뭐 어카겠나. 허나 도미, 그러지 못하고 일케 대꾸한다.

사람의 정이란 헤아릴 수 없지만, 제 아내는 죽으면 죽었지 두 마음을 품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미, 이 고지식한 친구, 개로왕의 개수작에 걸려들었다. 개로왕이 도미부인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미모보다는 정절 때문이었다. 개로왕은 도미부인이 정말 그럴까 보려고 도미를 그냥 대궐에 붙잡아둔다. 이어 도미부인의 정절을 테스트 대상으로 삼는다.

   개로왕, 쪼금 억울하기도 하겠다

개로왕 그 넘이 뭐가 억울해? 돗자리 생각엔, 아무래도 개로왕이 첨부터 진짜로 도미부인을 능욕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서다. 도미부인의 정절을 테스트하기 위해 누가 갔는가. 위인전과 이너넷을 보니 세 가지로 나온다.

① 개로왕이 직접 갔다 ② 신하를 대신 보냈다 ③ 개로왕이 신하와 함께 갔다. 왜 일케 다른 말들이 나오는가. 텍스트가 쫌 애매해서다.

왕이 (도미부인의 정절을) 시험하려고 일을 핑계로 도미를 붙잡아두고 측근신하에게 옷과 말과 종을 빌려주어 밤에 그 집에 가게 했다. 이에 앞서 사람을 시켜 왕이 온다고 먼저 (도미부인에게) 알린 다음 그 부인에게 이르기를…【ⓐ王欲試之 留都彌以事 使一ⓑ近臣 假王衣服馬從 夜抵其家 使ⓒ人先報王來 謂其婦曰…】

여기선 역할 분담에 주의해야 한다. 일을 꾸며 시킨 건 ⓐ개로왕이다. 개로왕 대신 생쑈의 주인공을 맡은 가짜왕은 ⓑ측근신하다. 바람잡이 역할을 맡은 ⓒ또다른 사신이 왕이 온다고 도미부인에게 알린다. 즉, 개로왕이 직접 간 게 아니라 믿을 만한 근신(近臣)을 대신 보낸 거다. 지 옷과 말과 종을 함께 줘서 그 신하를 자기인 것처럼 꾸며서 말이다. 즉, 개로왕은 도미부인의 미모를 탐낸 게 아니다. 그랬다면 지가 직접 갔겠지 왜 남한테 시켰겠나. 암튼 도미부인을 만난 가짜왕은 일케 말한다.

내가 오래 전부터 네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해서 이겼다【與都彌博得之】. 내일 너를 데리고  가서 궁인(宮人)을 삼을 것이니 지금부터 네 몸은 내 것이다.

글고나서 가짜왕은 바로 도미부인을 난행하려 한다【遂將亂之】. 그럼 개로왕이 신하에게 내린 지시는 뭐였을까? 이거 생각보다 복잡하다. 여러 케이스를 생각해보자.

A. 가짜왕이 유혹해서 도미부인이 넘어갔을 경우
① 진짜로 동침해라
정말 맘씨 좋은 왕이다. "나 대신 니가 그 미인이랑 응응해"하고 시켜? 여러분이 개로왕이라면 그러겠나. 어림도 없다. 왜 남 좋은 일 시키냐. 소문 나면 욕은 지가 다 먹을텐데. 그치만 총애하는 신하라면 그런 특권 줄 수도 있겠다. 어쨌든 도미부인이 정절을 꺾은 것만 확인하면 되는 일 아닌가.⇒ 가능성 있다.
② 동침하는 척만 해라
도미부인이 동침하겠다고 지발로 방에 들어왔으면 그걸로 정절은 깨진거다. 그것만 확인하면 된다. 동침은 하지 말아라. 아무리 근신이지만 그 넘만 재미보게 하긴 싫다.⇒ 가능성 있다.

B. 가짜왕의 유혹에 도미부인이 안넘어갔을 경우
① 강간해라
이거 아닌 것 같다. 글케 해선 도미의 콧대를 꺽지도 못한다. 강간을 당한 건 정절을 꺾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유혹에 넘어간 것도 아니니 도미에게 쫑코를 줄 명분도 없다. 스타일만 구긴다. ⇒ 가능성 없다.
② 그냥 와라
도미부인이 글케 못한다고 버티면 어카겠나. 강간 아니면 포기지 뭐. 왕명인데도 따르지 않는다면 괘씸하긴 해도 곧은 정절은 확인된 셈이다. ⇒ 가능성 있다.

돗자리는 A-①·② 아님 B-②가 개로왕의 지시였다고 본다. 이거 분명히 도덕적으론 잘못된 거지만, 큰 악의는 없는 심심풀이 정도로 봐줄 수도 있다. 그치만 뒤에 나오듯이 도미부인은 유혹에 넘어간 척 했으니, A-①·②의 가능성만 남은 셈이다.

   가짜와 가짜의 생쑈

도미부인은 왕이 가짜인 걸 알았을까. 몰랐을 거다. 지가 언제 개루왕을 본 적이나 있었겠나. 암튼 도미부인, 가짜왕이 난행하려 하자 잔머리를 굴린다.

왕은 망언을 하지 않으니,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왕께서 먼저 방에 들어가 계시면 제가 옷을 갈아입고 나아가겠습니다.

아마 이때 단호히 "No!"를 외쳤으면(B-②) 상황 끝이었을 거다. 또 정절 지키는 거 글케 좋아했다면 그랬어야 옳다. 그치만 칼처럼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남편이 내기에서 졌다고 하니, 만약 "No!" 했으면 도미의 목숨도 날라가리라 생각했을 거다. 근데 가짜왕 이 넘도 글타. "어?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네?"하고 생쑈를 여기서 끝내도 될텐데 굳이 방에 드가서 기둘린다. 정말인지 확인사살을 해보잔 거다. 아님, 막상 만나보니 진짜 미인이라 시간을 더 끌며 놀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일단 위기에서 벗어난 도미부인, 자기 대신 여종을 단장시켜 방으로 들여보낸다【退以雜飾一婢子薦之】. 남편도 살리고 정절도 지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어쨌든 가짜들끼리 생쑈를 펼치누나.

그럼 이 가짜 콤비는 과연 동침을 했을까. 텍스트만 갖곤 알 수 없다. '천지(薦之)'를 "수청을 들다"로 해석한다 해도, 수청을 들게 했다는 건지(지시) 수청을 들었다는 건지(완료) 애매하기 때문이다. 앞서 A-①·②의 가능성이 모두 있다고 했다. 어느 경우이든 가짜왕은 여종의 얼굴을 못봤어야 한다. 쫌전에 도미부인 얼굴을 봤으니 아무리 단장을 시켰다 해도 가짜면 몰라볼 리 없잖은가. 그럼 필수조건은 방의 불을 끈 상태에서 여종이 들어가고 나왔어야 한다. 가짜왕은 이때 들어온 여종을 도미부인으로 알고 있었다(돗자리 니가 어케 아냐고? 좀 뒤에 설명하겠다).

근데… A-①의 경우, 즉 동침을 했다면 불을 끈 상태에서 드갔다가 나왔어도 뭐 이해가 간다. 욕심을 채운 가짜왕이 디비져 자고 있을 때 여종이 몰래 나왔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A-②의 경우, 즉 동침을 안했다면 여종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가짜왕은 "너 담부터 열녀라고 하지 마라. 사실은 여차저차했다. 나 간다"하고 나왔어야 이치에 맞는다. 이때 불을 다시 안켜고 대화를 했을까. 뭐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복잡허네…

   여종의 정절은 개뿔도 아니냐

도미부인, 정절 지키는 거 목숨만큼 중요했을 거다. 그래서 지 정절 지키려고 여종을 대신 단장시켜 들여보낸 거다. 자~알 한다. 지 정절만 중요하냐. 평민도 아닌 자기집 여종인데 뭐 어떠냐고? 그러지 말자. 도미부인이 봤을 때 여종 절개는 하찮아? 그럼 개로왕이 봤을 때 평민 아내 절개 우스운 거나 쌤쌤이다(어느 위인전을 보니, 요 대목에서 도미부인이 어케 하나 고민하니까, 여종이 지가 대신 총대를 매겠노라 자청하고 나섰단다. 물론 창작이다. 또 어느 이너넷에선 그 여종이 "제가 비록 숫처녀는 아니지만 그래도…"라며 갈등 때렸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거 읽고 돗자리 웃겨 디집어졌다). 그래서 솔직히… 도미부인… 싫다.

   도미부인, 개로왕의 내기 얘기를 과연 믿었을까

근데 여기서 궁금한 점, 도미부인은 정말 남편이 자기를 걸고 왕이랑 내기를 했다고 믿었던 걸까. 또 따져보자.

A. 믿었을 경우
남편이 왕이랑 뭐라 약속했든 자기의 정절이 더 중요했다고 생각한 거다. 이 경우 '여필종부(女必從夫)'는 어긴 거지만 을마나 장하냐. 그치만 이 때 정공법으로 치받았어야 했다. "아무리 왕명이라도, 남편이 뭐라 약속했어도 글켄 못하져. 전 열녀거든여. 배째세여~ 목따세여~" 하고 말이다.
허나 잔머리를 굴렸다. 일단 위기는 넘겨보잔 거다. 그럼 그 담엔? 자결 아님 도망이다. 왜? 가짜왕이 뭐라 했냐. 내일부터 궁녀로 삼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근데 그게 아니다. 자결도 안했고 도망도 안쳤다. 당장의 위기는 벗어났지만, 대체 담날엔 어쩌려 했을까. 가짜왕이 그냥 돌아갈 거라고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B. 안믿었을 경우
"우리 남편이 그런 약속을 했을 리 읎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 어케? 뭘 어카냐. 가짜왕을 개로왕으로 알고 있는데,"쌩치지 마세여. 울 남편 그런 사람 아녀여~"할 수는 없잖겠나. 앞서 말했듯이 왕명을 어겼다간 자기는 물론 남편의 목숨도 날라갈 판이었으니 말이다. 이래저래 결과는 A와 똑같다.

   도미, 그냥 꾹 참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어쨌든 분명한 건, 도미부인은 궁녀가 되지 않았단 거다. 가짜왕은 첨에 도미부인에게 "내일부터 넌 궁녀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여기서 다시 분명해진 점 두 가지다. 첫째, 개로왕은 도미부인을 진짜로 궁녀로 삼을 생각은 없었다. 둘째, 가짜왕은 속은 걸 몰랐다. 왜 속은 걸 몰랐냐고? 따져보자.

텍스트를 보면 개로왕은 뒤에 속은 걸 알았단다【王後知見欺】. 이거 이상하다. 가짜왕이 (도미부인이 여종을 대신 방에 들여보낸) 뒤에 속은 걸 알았다고 하면 말이 된다. 여종이 방에 들어왔을 때 알았을 수도 있고, 동침한 뒤 알았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개로왕에게 즉빵 글케 보고했을 거고, 텍스트에 "개로왕이 뒤에 속은 걸 알았다"고 나올 리가 없다. 글면 이게 어찌된 일인가. 또 개로왕은 어케 지가 속은 걸 알았을까.
뻔하다. 도미가 '범인'이다. 신하는 (여종이랑 동침을 했든 안했든) 속은 줄도 모르고 일케 보고했을 거다. "도미부인, 별거 아니던대여? 꼴딱 넘어가대여~" 이 말을 들은 개로왕, 득의양양 했을 거다. 그 담 순서는 뭘까. 도미한테 뻐기는 거다(가짜왕이 결과를 보고할 때 까진 틀림없이 도미를 대궐에 붙잡아 놓고 있었을 거다).

개로왕 : 이봐~ 자네 부인도 별수 없더구먼. ㅋㅋㅋ
도   미 : 뭔 말씀이신지… ?
개로왕 : 사실은 말야, 어제 저녁에 여차여차… 저차저차… 자네 마누라도 별 수 없더구만. ㅎㅎㅎ
도   미 : 허걱! 그럴 리가…
개로왕 : 내 말을 못믿겠냐? 언능 집에 가서 니 마누라한테 물어바바. ㅍㅍㅍ


뚜껑 열린 도미, 씩씩대며 집으로 온다. 글고 부인을 박박 다구쳤겠지. 도미부인, 자초지종을 말해준다. 도미, 거기서 그냥 참았어야 했다. 자기 아내가 정절을 지킨 걸 그나마 다행으로 알고 넘어갔어야 했다. 그치만 그러지 못했다. 자존심 때문이다. 자기를 비웃던 개로왕의 얼굴이 떠오른다. 더구나 도미는 의리의 사나이【頗知義理】 아녔던가. 이런 분들,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다시 개로왕한테 가서 말했을 거다. "왕께서 속으셨네여. 그 여자 우리 아내 아니고 여종이었다네여~ 우리 아내 그런 사람 아녀여."
에구구… 앵간하면 참을 것이지, 으쩌자구 개로왕 열받게 맹그나. 그제서야 속은 것을 깨달은 개로왕은 노발대발한다. 엄청 분했을 거다. 그래서 도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두 눈알을 뺀 뒤 끌고 나가 작은 배에 태워 물에 띄워 보낸다. 이건 사형보다 더 무섭다. 그만큼 개로왕은 분통이 터졌던 거다.
분명히 개로왕이 잘못했지만, 어쨌든 평민이 왕명을 어겼으니, 아니 교묘히 속였으니 죄라면 죄인 셈이다. 왕이 평민을 속인 것과 평민이 왕을 속인 게 당시로선 쌤쌤일 수 없다. 결국 부인의 죄를 도미가 뒤집어쓴 거다. 그럼 도미부인은 왜 안죽여? 죽일 때 죽이더라도 정조는 뺏어야 직성이 풀린다. 글고… 미인이잖아. 더구나 이젠 남편도 없다. 후궁으로 삼아도 그만이다. 강간하고 나서 죽여도 누가 어쩌겠나.  

   도미부인, 띨빵한 개로왕을 일단 따돌리다

개로왕 열받았다. 눈에 뵈는 거 없다. 그래서 도미부인을 아예 궁궐로 끌고와서 강간하려 한다. 구겨진 자존심 일케 해서라도 펴보겠다는 마초 근성이다. 그러자 도미부인, 이번에도 잔머리로 위기에서 벗어난다.

이제 남편도 잃었는데 저 혼자 어찌 살아가겠습니까. 더구나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제가 지금 월경 중이기 때문에 몸이 더럽습니다. 청컨대 다른 날 목욕을 한 뒤 다시 오겠습니다.

진짜 생리 중인가는 궁녀들을 시켜 조사했어도 될 일인데 우리 얼빵한 개로왕, 그 말을 믿고 일단 돌려보낸다. 글고 보니 지난 원효편에 이어 이번에도 생리 얘기가 나왔네. 머 이왕 나온 김에'그때를 아십니까'함 해보자. 울 나라에서 요새같은 생리대가 나온 건 1971년이 첨인 것 같다. 유한킴벌리(유한양행, 울 나라에서 젤 멋진 회사다. 설립자 고 유일한 선생님, 돗자리가 젤 존경하는 기업인이시다) 홈페이지에 글케 나온다. 그때 그 해괴한 CF가 아직도 생각난다. 1974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별들의 고향'여자주인공 경아역의 안인숙씨(대농그룹의 며느리로 드가셨는데… 대농그룹이야 날라갔지만… 그래도 머 잘 살고 계시겠지)가 CF에 나오셨다. 탁자 위에 상자 하나 올려놓고서,"남자분들은 아실 거 업꼬요 … 매달 그날이 오면… 이젠 걱정 마셔여…"대충 멘트가 이랬던 거 같다. 제품명은 '코텍스 프리덤'('프리덤'이 '자유'란 뜻인 걸 이 때 첨 알았다). 하두 궁금해서 엄니한테 저게 뭐냐고 여쭤보니 숙제 다 했냐고 물으시더라. 암튼 한동안 정말 궁금했는데, 친구들 중 아는 넘 암도 없었다. 중딩 되서야 생리가 뭔지 알았다. 그것도 엄니 생신 때 누나들이랑 돈 모아 코텍스 선물했다고 자랑하던 조숙한 친구 덕분에…

잠시 옆길로 샜다. 죄송하다. 암튼 궁궐에서 나온 도미부인은 곧바로 강으로 달아난다【便逃至江口】. 근데 배가 없어 건너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며 하늘을 보고 통곡한다. 그러자 갑자기 어디선가 배 한 척이 물결을 따라 오더란다.
그럼 도미부인은 남편이 그 꼴이 돼서 배에 실려 떠내려간 걸 알고 있었을까? 알고 있었다. 강간을 하려 할 때 개로왕이 도미부인에게 남편 얘기를 안했을 리 없다. "너 이제 남편도 없으니 포기해라." 했을 거다. 만약 남편이 죽은 것으로 알았으면, 글고 정말 열녀라면 이때 목숨 끊는다. 그치만 위기를 벗어난 뒤 강가로 뛰어간 건 남편이 배에 실려 떠내려간 걸 알았단 뜻이다. 열녀는 열녀다.
근데 이상하다. 그날이 생리 끝날이라고 하지도 않았을텐데 왜 그리 서둘러 내뺐으며, 강에 배가 없다고 징징 짰을까.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단 뜻이다. 왜? 개로왕이 미행을 붙였기 때문이다. 텍스트에 그런 얘기 나오냐구? 안나온다. 그치만 '척'하면 '뻑'이다. 아무리 개로왕이 얼빵하다지만, 여러분 같으면 도미부인 혼자 그냥 보내겠는가.
우야튼 배에 올랐더니 천성도(泉城島)에 이르러 거기서 남편 도미를 만났단다. 이들은 풀뿌리를 캐먹으며 살다가 다시 배를 타고 고구려 산산(蒜山) 아래에 닿으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겨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주었고, 거기서 구차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단다(이 장면에서 눈물겨워야 하는데… 솔직히 맹숭맹숭하네). 고구려 사람들 인심도 좋네, 도미부인을 과연 가만 놔뒀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아름답게 생각하자. 텍스트는 여기서 끝난다.

   개로왕, 어쩌다 민심을 잃었나

그 진위 여부를 떠나 이런 얘기가 펴졌다는 건 개로왕에게서 민심이 떠났음을 보여준다. 개로왕, 실제로 말년에 민심 팍팍 잃었다. 왜? 고구려에서 온 이중간첩 때문이다. 대충 이런 스토리다(<삼국사기> 백제본기3 개로왕 21년).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에 보낼 간첩을 모집한다. 이때 도림(道琳)이란 스님이 자원하신다(스님이 간첩 된 거 원효편에서도 나왔다. 거칠부… 생각들 나시나?). 이 스님이 백제에 거짓으로 투항하신다. 글고 개로왕의 환심을 산다. 뭘로? 바둑이다. 강아지 말고 이창호 두는 그 바둑【博奕】 말이다. 개로왕은 바둑 매니아였다. 글고 도림의 바둑 실력은 국수 수준이었다【果國手也】. 개로왕은 도림에게 바둑 배우는 재미에 홀딱 빠졌다. 글다보니 그에 대한 신임도 날로 커져갔다. 글던 언날, 도림은 본색을 드러내며 개로왕을 파탄의 길로 꼬드겼다. 왕실의 위엄을 갖추기 위해선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야 한다고 꼬신 거다. 개로왕은 그 말을 따랐고, 이 때문에 백제의 창고가 텅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졌다【是以倉庾虛竭 人民窮困】. 당근 민심도 떠났다(대원군의 경복궁 재건 생각하심 된다). 이 틈을 타 고구려군이 쳐들어왔고,  결국 개로왕은 한때 백제의 신하였으나 고구려군의 선봉에 선 걸루(桀婁)와 만년(萬年)에게 붙잡혀 아단성에서 죽는다. 따라서 도미부인 얘긴 이 무렵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민심을 잃으면 아무리 이전에 정치를 잘했더라도 꽝이다. 민심은 변화무쌍이고 예측불허다. 그래서 민심이 무서운 거다(그치만 돗자리, "민심이 천심"이란 말 안믿는다).  

   개로왕과 비슷했지만 그나마 격조가 있었던 진지왕

근데 신라에도 개로왕 비스끄리한 왕이 계셨다. 뉘시냐고? 재25대왕 진지왕(眞智王, 재위 576~579) 되시겠다. 이 분은 개로왕과 두 가지 점에서 닮았다(진지왕에 대해선 위서 논쟁이 한창인 <화랑세기>에도 잼난 내용이 실려 있다. 그치만 오늘의 주인공은 이 분이 아니니 그냥 넘어간다).

첫째, 정치 개판으로 하다 죽었다. <삼국사기>에는 재위 4년만에 그냥 죽은 것으로 나와 있으나(신라본기4 진지왕 4년), <삼국유사>를 보면 정치가 문란하고 행실이 음란하여【政亂荒淫】 폐위되었다고 한다(기이1 「도화녀·비형랑」. <화랑세기>에선 진지왕이 폐위된 뒤 유배생활을 했다고 나온다).
둘째, 남의 아내 건드리려 했다. 사량부에 도화(桃花)라는 여인이 살았다. 복사꽃처럼 예뻐서 글케 불렀단다. 그 소문을 듣고 진지왕이 도화를 궁중으로 불러들인 뒤 관계를 가지려 한다. 근데 도화가 개긴다.

도  화 : 아무리 왕명이라 해도 남편이 있는데 글케는 할 수 없슴다.
진지왕 : 널 죽여도?
도  화 : 눼. 차라리 죽이세여.
진지왕 : 그럼 니 남편이 죽고나면 어쩔래?
도   화 : 그땐 개안아여.


진지왕은 도화를 그냥 놔준다. 글타고
남편을 죽인 것도 아니다. 이 정도면 그나마 젠틀한 거다. 글고 바로 그 해 진지왕은 폐위되어 죽는다. 2년 뒤, 도화의 남편도 죽는다. 남편이 죽은 뒤 10일쯤 지난 어느날 밤, 진지왕은 귀신이 되어 도화를 찾아온다. 생전의 모습 그대로 말이다. 글고 묻는다. "니 남편 죽었으니 이제 어칼래?" 스퍼… 증말… 집요하다.
도화도 어케 해야 할지 헷갈린다. 그래서 부모님께 상의한다. 그랬더니 부모님 말씀, (죽었지만 그래도) 왕명이니 어쩌겠냐면서 같이 자랜다. 이래서 진지왕 귀신은 7일 동안 그 방에서 함께 머문 뒤 사라진다. 뽕빨 다 뽑았단 거다. 일케 해서 낳은 아들이 비형(鼻荊)이다. 이 친구, 나중에 귀신들과 놀며 그들도 무서워 하는 대빵이 된다(어떤 연구자는 진지왕이 유배시절 데리고 산 여자가 바로 도화라고 보기도 한다. 비형은 화랑이구 말이다. 그럴 듯 하다).

   정절이데올로기… 언젠가 그 공과(功過)를 따져보련다

첨에 도미부인편 쓰려고 맘먹었을 땐 정절이데올로기 문제를 건드려보려 했다. 전통시대 우리 여인들이 정조를 소중히 한 것 사실이다. 그거 좋은 일이다. 그치만 그것 너무 자랑스러워 할 것 없다. 왜 소중히 했을까. 지키지 못하면 사회에서 매장되기 때문이다. 누가 매장해? 부모와 형제, 이웃들이 먼저 매장한다. 글고 그 교묘한 시스템 속에서 같은 여자들끼리 치고받는다.
외간 남자와 눈이 맞아 간통했다면 할 말 없다. 허나 어쩔 수 없이 강간을 당했어도 별로 동정받지 않는다. 원인이나 이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의든 타의든 정절을 잃었으면 그때부터 여자는 죄인이다. 울 나라 정절이데올로기의 허구성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무궁무진하다. 기회가 되면 정말 쓰고 싶다. 다른 분들도 이미 많이 쓰셨겠지만, 역사적 사례를 들어 따져보고 싶단 거다.
돗자리 중딩 때 어떤 반이 모범반으로 표창받았다. 그 반 넘들은 결석도 지각도 조퇴도 없었다. 왜? 만약 그랬다간 담임쉐임의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기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학생들의 평소 태도나 성품이 아닌 살벌한 시스템 때문이었단 거다. 난 울 나라 전통시대 여인들의 정절이데올로기도 비까비까하다고 본다.

도미부인의 서글프고 아름다운 얘긴 그냥 그대로 곱게 간직하련다. 그치만 여종 대신 들여보낸 부분은 아무래도 맘에 걸린다. 지꺼 지키겠다고 남꺼 빼앗으면 나쁜 사람이다. 글고 이 얘기가 정절지상주의을 내세우는 인간들의 텍스트로 이용되는 건 싫다. 여인들의 정절 문제, 언젠가 다시 디비겠다. 어우동이나 황진이편쯤 될 것 같다. 그때까정 안짤리고 버텨야 할텐데…

딴지 역사부 / 돗자리 (e-rigby@hanmail.net)

딴지일보 112호(2003.6.8)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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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의 처

 
 

이 이야기는 한 음탕한 임금이 여성에 대한 불신을 품고 미모의 유부녀를 겁탈하려다가 실패한 이야기이다. 음탕한 개루왕은 천한 인생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끝내 도미에게 굴복하고 마는 인물이다.
   이 이야기는 도미의 처의 재치, 도미의 눈 뽑힘, 도미 부부의 기적적인 만남 등 극적인 사건의 연속이다. 따라서 '도미의 처'는 상당히 극적인 구성을 가진 단단한 이야기이다. 주제는 물론 '정절'이다. 이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이 글에는 지배층의 횡포에 대한 하층민의 저항 의지가 드러나 있다. 이 설화는 소위
관탈민녀형으로 후대 열녀 이야기의 근원이 되었다.
   이 설화에서 도미의 눈을 빼서 던진 나루가 나오는데, '동국여지승람' 광주목 산천조에 전하는 '도미진'이 그곳이라 한다. 박종화가 이를 소재로 '아랑의 정조'를 지었으나 설화에서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도미는 백제 사람이다. 그는 비록 미천한 백성이었으나, 자못 의리를 알았으며, 그의 아내는 용모가 아름답고 또한 절개를 지켰으므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이때 개루왕이 이 말을 듣고 도미를 불러 말하기를
   "비록 부인의 덕은 정결이 첫째라지만 만일 남이 모르는 곳에서 좋은 말로 꾀인다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적을 것이다."
   하였다. 도미는 대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측량하기 어려우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는다고 해도 딴 마음은 먹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왕은 이를 시험하고자 하여 도미에게 사건을 만들어 궁에 머무르게 하고 하인을 거느리고 밤중에 도미의 집으로 가서 하인으로 하여금 왕이 왔다는 것을 알리게 하고 들어가 그녀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도미와 내기를 하여 내가 그대를 얻게 되었으니 내일부터는 궁궐에 들어와 궁인이 되라. 이제부터는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는 음란하고자 하니, 도미 부인이 말하기를,
   "국왕께서는 거짓말이 없겠사오므로 제가 감히 순종하지 않으리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으로 들어가소서. 제가 다시 옷을 갈아입고 곧 들어가 모시겠습니다."
   하고 물러나와서는 계집종을 단장시켜 모시게 했다. 그런데 뒤에 왕은 자신이 속은 줄을 알고 크게 노하여 도미를 애매한 죄로 다스려 그의 두 눈동자를 빼고 사람을 시켜 그를 끌어내어 작은 배에 실어 강물 위에 띄워 놓았다.   
   그리고 다시 도미 부인을 끌어들여 강제로 음란하려 하니, 도미 부인이 말하기를,
   "남편을 이미 잃고 혼자 몸이 되었으므로 이제 스스로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항차 대왕을 모시게 되었는데 어찌 감히 명령을 어기겠습니까? 그러나 지금은 생리중으로 온몸이 더럽게 되어 있사오니, 청하옵건대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하게 목욕을 한 다음 모시러 오겠나이다."
   하니, 왕은 그 말을 믿고 이를 허락하였다.
   도미 부인은 마침내 도망하여 강가에 이르렀으나, 배가 없어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 통곡하니, 갑자기 한 조각배가 나타나서 물결을 따라오므로, 이를 잡아 타고 천성도에 이르러 도미를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므로 풀뿌리를 파서 먹으며 굶주림을 면하였다.
   그들은 드디어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蒜山) 아래에 당도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이들을 불쌍히 여겨 옷과 밥을 주니 거기서 일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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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한국 인물 열전- 설씨녀


 

설씨녀(薛氏女)... 들어들 보셨남? 성이 설씨인 신라의 여인이다. 이름은 모른다. 이 얘기 <삼국사기> 열전에만 달랑 나온다. 근데... '설씨녀', 이거 읽기도 쓰기도 번거럽다. 걍 줄여 '설녀'라고 하자. '설녀'? <지옥선생 누베>에 나오는 '설녀(雪女)'와 헷갈린다. 글치만 뭐 어떠냐. 돗자리, <지옥선생 누베>에 나오는 설녀 업빠 좋아한다. 그러니 걍 '설녀'로 한다. 꼬우면 그대들이 중간에 '씨'자 넣어서 읽으시라.

  가실, '몸빵'으로 미녀를 얻어내다

신라 제26대왕 진평왕(재위 579~632) 때 일이다. 율리(栗里)에 사는 설녀는, 비록 집안은 개뿔도 없이 가난했지만 얼굴과 맘씨가 곱디 고왔다. 하는 짓도 반듯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설녀를 본 남자들은 첫눈에 안구가 돌출했단다.
그치만 그저 그러고 말 뿐, 용기를 내어 수작을 거는 놈들은 없었다. 너무 예쁜 여잘 보면 감히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는 법이다. 적어도 돗자리 세대엔 그랬다.
근데 설녀 집안에 시련이 닥쳤다. 늙고 골골한【年老... 衰病】아빠가 국경지대에 가서 복무를 해야 될 차례가 온 거다【番當防秋】. 아니, 그 나이에 뭔 군대냐고? 당시엔 군역의 의무란 게 좀 복잡하다. 관련 자료도 밸로 없지만 대충 일케 본다. 일단 15세가 되면 군인이 될 자격을 갖춘다. 글고 적어도 3년은 국경지대, 즉 전방에서 뺑이친다. 그걸로 땡인가? 아니다. 삼국간의 항쟁이 치열해져 국가께서 부르시면 몇 번이고 겨나와야 한다. 늙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 샤량부(沙梁部)에 가실(嘉實)이란 소년이 있었다. 얘 역시 집안은 찢어졌지만 성품은 괜찮았단다. 글고 딴 넘들과 마찬가지로 설녀를 짝사랑했다. 그치만 가진 거라곤 두 쪽밖에 없는데다 사랑을 고백할 용기마저 없으니 속만 끓일 뿐이었다. 이런 가실의 처지를 터보는 이렇게 읊어댄다.

처음 만났을 때 첫눈에 반한다는 그 말을 그때야 알게 되었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너의 눈빛조차 쳐다볼 수 없었지
너를 만나면 아무말 못하고 애매한 담배만 피워댔고
너와 헤어지고 나서야 못다한 말들을 후회했어

그러던 중, 늙은 아빠를 군대에 보내야 하는 설녀의 슬픈 얘길 듣고 그 집을 찾아간다. 지가 설녀 아빠 대신 군대에 나가주려고다. 가진 건 두 쪽 달린 몸땡이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른바 '몸빵'이다. 가실의 얘기를 들은 설녀는 뛸 듯이 기뻐하며 아빠에게 이 얘길 한다. 아빠 역시 입이 찢어진다. 글고 가실을 불러 일케 말한다.

 
"그대가 이 노인을 대신해 군대에 가준다니 기쁘고도 미안하구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네. 싫지 않다면 내 딸을 아내로 삼게 해주고 싶은데 그대 생각은 어떤가?"

지 대신 군대 가준다고 개뿔도 없는 넘한테 덥석 딸을 앵겨주는 이 아빠, 예사롭지 않는 분이다. 가실이야 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게 있나. '몸빵' 하려는 목적이 바로 그거였는데. 가실은 바로 설녀에게 묻는다. "언제 결혼할까여?" 그치만 설녀의 대답은 가실을 맥빠지게 한다.

 
"혼인은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갑자기 할 수는 없지요.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했으니 죽어도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대가 군대에 갔다가 돌아오고 난 뒤 결혼을 해도 늦지 않아요"

뜨바... 어차피 할 결혼이면 언능 하면 좀 어떠냐. 없는 집안끼리 하는 혼인인데 체면이니 격식이니 따질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돗자리같으면 '젠장... 없던 일로 합시다' 하며 네고를 벌였을거다. 그치만 우리의 가실, 돗자리와는 달리 착실한 청년이었다. 아쉽지만 설녀의 말을 따르기로 한다.

근데 말이다. 요 얘길 그대로 믿는다면 당시엔 대체 복무도 가능했단 거 아닌가. 텍스트엔 가실이 '소년(少年)'이라고 나오지만 지금으로 따지면 '청년(靑年)'이다(울나라 옛날 기록엔 '청년'이란 단어가 안나올 거다. 울나라에서 '청년'이란 단어를 쓴 건 1897년이 첨 아닌가 싶은데... 뭐 틀리면 좀 갤챠주시라).
그럼 지도 일단 징집 대상 아녔을까. 근데 아직 영장이 안나와서 그럴 수 있었던 걸까. 돈  주고 바꿔치기 했을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설녀네나 가실네나 모두 가난했으니까. 국가의 입장에서야 골골한 노인 대신 팔팔한 청년이 지원한다니 밑질 건 없겠지만, 좀 알쏭달쏭하다.

  오호~ 구리거울을 뽀개시겠다?

암튼 우리의 설녀, 당장 결혼하지 못해 맥풀린 가실이 딱했는지 거울을 두 쪽으로 뽀개 건네주며 일케 다독인다.

 
"이걸 신표(信標)로 삼아 한 쪽씩 갖고 있다가 뒷날 맞춰봅시다"

여기서 좀 딴지를 걸어보자. 설녀는 거울을 두 쪽으로 뽀갰단다【取鏡半分】. 당시 거울이라면 구리거울, 즉 '동경(銅鏡)'이다('유리+수은'으로 맹근 거울이 나온 건 15세기인가 16세기인가 유럽에서였다).
그럼 구리거울을 뽀갰단 말인데, 이거 결코 쉬운 일 아녔을 거다. 뭐 쇠톱으로 잘랐다면 할 말 없지만. 글고 구리거울은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없는 살림에 이걸 왜 뽀개냐. 부엌칼을 쪼갤 수도 있고 숟가락을 쪼갤 수도 있다. 그 비싼 구리거울을... 하긴, 부엌칼이나 숟가락 쪼개 나눠가졌다면 분위기가 폐품수집같이 엿 같기는 했겠다. 뭐 백년가약의 상징이니 비싼 거울 뽀개도 이해한다고 치자.

근데 말이다. '달랑' 3년 군대 갔다 오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가. 3년 만에 모습이 달라져야 얼마나 달라진다고 아무렴 서로 얼굴을 몰라볼까. 멀쩡히 돌아왔어도 거울쪼각 잃어버렸으면 걍 쌩치잔 속셈인가. 잘 이해가 안가기도 한다. 그치만 정말로 몰라보는 경우도 있었나보다. 한참 뒷 시기인 조선시대이긴 하지만, 정재륜이 지은 <공사견문록(公私見聞錄)>엔 이런 얘기가 나온다.

임진왜란 때, 어떤 선비의 아들이 결혼한 지 3일만에 왜군에게 붙잡혀 일본으로 끌려간다. 졸지에 생과부가 된 아내는 수절하며 지낸다. 근데 수십 년이 지나 웬 낯선 남자가 찾아와 지가 남편이라고 하네. 근데 전혀 알아볼 수가 없다. 아내는 물론 부모조차 누군지 모르겠단다.  
그러자 기발한 방법으로 진짠지 가짠지를 가려낸다.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시아버지는 그 남자에게 신혼 초 3일 밤 동안에 있었던 정황을 각각 묻고 나중에 서로 맞춰본다. 딱이다. 그래서 진짜로 판명이 났단다(그 당시 신혼 첫날밤 테크닉이야 다 그게 그거 였을텐데... 안 맞으면 이상하쥐).
근데 이게 이 집만의 일이 아녔단다. 심지어, 좀 의심이 가긴 하지만 포로로 끌려갔다 온 남편인 줄 알고 같이 살았는데 알고 보니 딴 넘인 경우도 있었단다. 뭐 그러니 설녀의 처사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생각되며, 실제로 나중에 적절하게 쓰였으니 대충 넘어가자.

  "그말 듣자마자 군대를 가버렸던거야 애마(愛馬)에게 널 맡기고 내 자릴 비웠찌"

가실은 떠나면서 설녀에게 말 한 마리를 맡기며 일케 말한다.

 
"이 말은 천하의 명마(名馬)이니, 뒤에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거요. 이제 내가 떠나면 길러줄 사람이 없으니 부디 맡아두었다가 쓰도록 하시오"

돗자리, 요 대목을 첨 읽었을 때 과연 이 말이 나중에 어떤 눈부신 활약을 펼칠까 기대에 부풀었다. 여러분들은 그런 기대 갖지 마시라. 그랬다간 이따가 이루 감당하기 벅찬 허무감이 노도처럼 밀려온다. 돗자린 앞으로 꼬꾸라져 한참을 웃었지만...

  Love is... (3+3=6)

1줄 건너뛰니 어느덧 3년이 흘렀다. 근데 가실은 안 돌아온다. 1칸 건너뛰니 다시 3년이 흘렀다. 벌써 6년이 지났는데도 돌아오지 않는다. 마침 나라에 뭔 일이 생겨 군인들을 교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會國有故 不使人交代】. 뭔 일이 생겼을까. 뻔하지 뭐. 딴 나라랑 치고 박고 한 거다.
진평왕 25년(603)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공격한 뒤 계속 신라의 변경을 위협하자, 신라는 진평왕 30년과 33년에 수나라에 청병(請兵)한다. 이듬해 수나라가 마침내 고구려를 공격하고, 이후 신라와 고구려의 쌈질은 한동안 뜸해진 대신 신라는 백제랑 엉겨붙는다.

그럼 가실이 복무할 때는 고구려와 싸우던 때일까 백제와 싸우던 때일까. 고구려로 보는 게 나을 듯 하다. 앞서 텍스트에 보면 설녀의 아빠가 '방추할 당번이 되어【番當防秋】'라 나오는데, '방추'란 '북적(北狄)'의 침입을 방어하는 거란다('북적'은 항상 가을에 침입하기 때문에 글케 부른단다).
그럼 뭐 고구려밖에 더 있냐. 따라서 가실이 전방에서 뺑이치던 때는 대략 진평왕 25~33(603~611)년 정도가 아녔을까. 우리의 가실, 재수도 드럽게 없구나.

허나 일케 생각할 수도 있다. 그 마을에서 전방으로 끌려간 넘이 가실 혼자가 아니라면 그 넘들도 못 돌아왔을 거다. 그럼 뭐 단체로 뭔 일이 있나보다 생각하면 될 거 아닌가. 고구려와 한참 치고 박고 하는 사정이야 신라 백성들도 모르진 않았을테니 말이다.
어쩜 이랬던 건 아닐까. 가실은 3년이 지나자 제대할 준비를 한다. 근데 3년 더 뭉개란다. "왜여?" 하고 물으니, "이 시캬! 쫌 있으면 진짜로 니 차례 돼서 다시 와야 혀. 왔다 갔다 하느니 걍 3년 더 눌러 있어, 스캬" 했을 수도 있쟎은가. 그래서 '3+3=6'이 된 거라고 말이다. 그래야 3년이면 돌려보낼 넘을 3년 더 잡아놓는 명분이 서지 않을까.

  설녀, '미녀+효녀+열녀' 3관왕에 오르다

암튼 기다리다 지친 설녀의 아빠, 이제 단념하고 딴 넘에게 시집가라고 딸을 꼬신다. 충분히 이해한다. 3년 만에 돌아오기로 한 넘이 암 소식이 없다. 글고 나서 3년을 더 기다린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만하면 설녀도 아빠도 할 만큼 한 거다. 딴 넘한테 시집가도 뭐라 할 사람 없다. 설녀도 혼기가 꽉 찼고 아빠도 이미 늙었다. 또 솔직히 가실이 그리 조건이 좋은 넘도 아녔다. 그치만 우리의 설녀, 일케 말하며 아빠에게 개긴다.

지난번엔 아버지를 편안케 해드리려고 억지로 가실과 약혼을 했으며, 가실은 그걸 믿고 군대에 간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가실은 춥고 배고파 고생하며, 더구나 국경지대에 있어 손에서 무기를 놓지 못하고, 마치 호구(虎口)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늘 물릴까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신의를 저버리고 식언을 한다면 그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아버님의 말씀은 결코 따를 수 없사오니, 다시는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허거덩~ 이거이 먼 말인가. '억지로 가실과 약혼을 했다【强與嘉實約】'는 대목에 유의하자. 설녀의 속내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별로 끌리지 않는 약혼이었단 거다. 즉, 가실이 별로였나보다. 그치만 늙은 아빠를 위해 지 한 몸 바친 거다.
아빠를 위해 내키지 않는 넘과 약혼한 효성이 눈물겹고, 그 미모를 갖고도 이상형을 만나지 못한 신세가 안타깝고, 내키지 않는 약혼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신의를 지키려는 그 모습이 애처럽다. 그래서 돗자리는 삼국을 탈탈 털어 최고의 효녀이자 열녀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설녀를 치켜세운다. 게다가 미녀이니 뭔 말을 더 하겠는가.

   "어차피 너의 곁에 남은 채로 너만을 사랑할테니"

그치만 이 아빠, 어케든 설녀 시집보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설녀 몰래 동네 청년과 약혼시키고 그 날이 되자 그 넘을 집으로 맞아들인다. 그러자 우리의 설녀, 굳게 버티다 몰래 도망치려 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이에 마굿간에 가서 가실이 남겨놓고 간 말을 보고 크게 한숨을 쉬며 눈물을 떨군다. 글타면 이 명마(名馬)의 활약은? 암껏두 없다. 이게 전부다. 싀퍼... 이게... 대체... 무슨 명마냐.
근데 말이다. 놀랍게도 바로 이 때 가실이 돌아온다. 말 보고 한숨쉬며 울었더니 말이다. 암껏두 한 일은 없지만, 명마는 명마구나. 허나 가실이 뼈만 앙상한 거지꼴로 나타나니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이 때 가실은 뭘 하나 툭 내던진다.
오홋~ 거울쪼각이다. 그걸 주워든 설녀, 서러워 통곡한다. 그제서야 이 넘이 그 넘인 걸 안 설녀 아빠와 집안 사람들이 기뻐한단다. 아무도 깽판 치지 않는다. 모두들 맘씨는 착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동정의 눈길을 줘야 할 딱한 인간이 있다. 그 누구도 모른 척 하는 이 얘기의 유일한 희생자, 바로 설녀와 결혼할 뻔한 그 동네 총각이다. 가실이 며칠만 늦게 왔어도 설녀는 그 넘 차지였을텐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근데도 설녀와 가실이 결혼해서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걸 보면, 피 튀기는 복수극은 안 벌어졌나보다. 아~ 이름은 알 수 없으나 그 넘이야말로 진정한 싸나이다. 이런 넘들이 있기에 세상은 살 만한 거다.

  가실은 어쩌다 '꽃제비'가 되었을까?

근데 말이다. 왜 가실은 군대 갔다가 그만 '꽃제비'가 되어 돌아왔을까? 그게 일반적 현상이었다면 사람들이 그리 놀랠 일도 아녔을텐데 말이다. 아무리 물자가 딸리고 군역이 힘들다 해도 일상적인 현상은 아녔을 거다. 혹시 군수품을 중간에서 언 넘들이 빼돌려 결국 쫄따구들만 죽어난 건 아녔을까. 이런 꼬라지를 하고 어케 고구려군하고 싸웠을까. 허긴, 그쪽 넘들이라고 해서 뭐 특별히 사정이 나았겠는가.
일케 생각할 분들도 계시겠다. 가실이 군대에 있을 때 꼭 누가 중간에서 삥땅치지 않았어도 워낙 물자가 부족하니 그럴 수도 있쟎겠냐고 말이다. 그럴 듯한 말씀 되시겠다. 그치만 말이다, 글케만 보기엔 당시 공무원들의 기강이 너무 개판이었다. 다음은 설녀와 가실이 살았던 진평왕 때의 일이다.

사량궁(沙梁宮)의 말단관리인 사인(舍人) 중에 검군(劍君)이란 청년이 있었다. 진평왕 47년(627), 때는 바야흐로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먹고사는 형편이었다【民賣子而食】. 근데도 관리들은 서로 짜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 나눠먹었다.
오직 한 사람, 검군만 예외였다. 부정부패엔 모조리 한 통속이 되어야 서로들 든든한 법이다. 예외가 생기면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그 넘들은 검군에게 일케 묻는다. "모두 곡식을 받는데 오직 너만 버티는 이유가 뭐냐? 적어서 그래? 그럼 더 줄께 받을래?" 이 얘길 들은 검군은 씨~익 쪼개며 일케 대답한다.

 
"내가 화랑인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두고 풍월도(風月道=花郞道)를 닦았으니,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千金)의 이로움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련다"

근랑은 아빠가 이찬이었으니 고위층 자제였던 셈이다. 그 밑에서 낭도(郎徒)로 있던 검군은 결코 부정부패에 끼어들 수 없다고 버틴 거다. 검군이 근랑을 찾아가려 하자 관리들은 불안해한다. 틀림없이 말이 샐 거 같아서다. 그래서 서둘러 검군을 불러들여 죽이려 한다.
검군은 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걸 눈치챘다. 그래서 근랑에게 "이제 다신 만나 뵙지 못하겠습니다"라 말한다. 근랑이 왜냐고 물었지만 이유는 말하지 않고 버틴다. 허나 자꾸 근랑이 캐묻자 결국 이실직고한다. 그러자 근랑은 "왜 관청에 알리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에 검군은, 자기가 죽는 것이 무서워 다른 사람을 꼰지를 순 없다고 말한다.
그럼 차라리 도망가는 게 어떠냐"고 근랑이 물으니, 아무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망치는 건 대장부의 도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오호~ 간만에 대단한 인물 만났다. 청렴하고 강직한 공무원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별로 본받을 자신은 없지만...
암튼 검군은 죽을 줄 알면서도 관리들을 찾아간다. 그 넘들은 술자리를 벌여놓고 지들이 잘못했다면서 검군에게 독이 든 술잔을 건넨다. 그걸 뻔히 알면서도 검군은 술잔을 비운다. 그리고 죽는다. 뜨바... 눈시울 붉어진다. 뭐 일케 허전하게 죽냐. 검군... 똘똘이냐 띨띨이냐.

진평왕 47년이면 고구려가 못 살게구니 그 놈들 좀 때찌해 달라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며 징징대던 때다. 더구나 흉년이라지 않나. 그런 때라도 해먹을 넘들은 해먹는다. 중앙정부의 기강이 이 정도인데 군대라고 뭐 얼마나 달랐을까.
글고 생각해보자. 검군이 섬긴 화랑인 근랑은 아빠가 17관등 중 2nd 고위인 이찬이다. 지 아빠 빽 동원하면 검군 살리는 게 뭐 어려웠겠냐. 부정부패 척결하잔 거니 명분도 좋다.
그치만 근랑은 그러지 않는다. 기껏 한다는 소리가 관청에 알리던가 도망치든가 하라는 거다. 왜? 잘 모르겠다. 어쩜 말이다. 지 아빠도 그 더러운 먹이사슬에 낑겨 있던 건 아녔을까. 말단들만 썩어 있는 공직사회는 없다. 말단들도 다 윗넘들 하는 거 보고 배우는 거다. 상납과 묵인의 상호관계 없인 부정부패도 없다. 즉, 부정부패는 시스템 전체의 문제란 거다.

  '국민방위군사건'을 아시는감?

아무리 그래도 글치 평시도 아니고 한창 적군과 싸우고 있는 전시에 설마 군수품을 빼돌릴 나쁜 넘들이 있겠냐고 생각하실 분들도 계시겠다. 순진한 분들 되시겠다. 난세일수록 이권도 커지고 협잡도 넘친다.

멀리 갈 거 없다. 6.25전쟁 때 일어난 그 유명한 '국민방위군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그게 머냐고? 이러심... 곤란하다. 이거 상식으로라도 알고 계셔야 한다. 우리의 평생 도우미 <네이버백과사전>엔 일케 나온다.   

  6.25전쟁 중의 1.4후퇴 때 국민방위군의 일부 고급장교 사이에 일어난 부정사건. 1951년 1월 후퇴작전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1950. 12. 11. 설치법 공포)의 고급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 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아사자(餓死者), 동사자(凍死者)가 속출하였는데, 사망자수만도 1,000여 명에 이르렀다.
  이 참상은 국회에서 폭로되어 진상조사단이 구성되었다. 국회조사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1950년 12월 17일부터 51년 3월 31일까지 유령인구를 조작하여 착복한 금품만도 현금 23억원(圓), 쌀 5만2천 섬이나 되었다. 이 사건으로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이 물러났고, 이시영(李始榮) 부통령은 사임서에서 국민의 의혹을 풀기 위한 국회의 적극적인 조치를 촉구하였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하였고, 관련된 국민방위군 간부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그 해 7월 19일 중앙고등군법회의는 사령관 김윤근(金潤根), 부사령관 윤익헌(尹益憲) 이하 5명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8월 12일 총살형이 집행되었다

대단타. 정말 대단타. 띵겨먹을 게 따로 있지 전쟁 중에 목숨 걸고 싸우겠다는 불쌍한 군인들 보급품을 쓱삭해서 굶어 죽고 얼어죽게 만들다니. 트바르너무쉐이드르... 일케 죽어간 군인들은 암매장되기도 했단다.
글고 1950년 당시 23억원? 5만2천섬? 이게 대체 5명 사형으로 끝날 일인가. 대통령 이승만, 국방장관 신성모, 느그들은 정말 관련 없냐(근데 신성모라... 올만에 듣는 이름이다. 백범김구암살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 국민방위군사건 등에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이다. 그 넘두 나쁘지만 끝까지 감싸준 이승만이 더 나쁘다).

잠시 옆으로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이제나 저제나 '말단' 공직자들은 박봉에 시달린다. 그러니 애교스런 '삥땅'까정 비난할 생각은 별루 없다. 그치만 백성들이 굶어죽는 판에 창고의 곡식을 뽀리치고, 군인들이 굶어죽는 판에 군수품을 삥땅쳐댄 넘들까정 동정해선 안된다.

  해피엔딩인데도 으째 이리 뒷맛이 띱띨한가

다행히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했지만, 설녀와 가실의 어정쩡한 러브 스토리는 어딘지 씁쓸한 뒷맛을 남겨놓는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고구려네 백제네 쌈질은 이어지고, 애비는 늙고 골골해도 전방으로 불려가야 하고, 놈씨는 결혼하고 싶어 '몸빵'으로 대신 끌려가고, 딸년은 맘에 없어도 아빠 위해 약혼을 하고, 서로들 뭐가 못미더워 멀쩡한 거울 박살내고, 놈씨는 3년이면 땡일 줄 알았는데 3년 더 구르고, 아빠는 딸년을 딴데 시집보내려 안달이고, 딸년은 버티며 도망치다 붙잡히고, 요긴히 쓰이리라던 말놈은 암껏두 하는 일 없이 멀뚱대기만 하고, 기다리던 놈씨는 '꽃제비'가 되어 돌아오고...

이런 총체적 난국이 없다. 암 상관도 없는 돗자리까정 절로 한숨이 팍팍 나온다. 효녀지은이 그랬고 도미부인도 그랬듯이, 왜 옛날 울나라 여인네들의 삶은 이다지 고달팠던 걸까. 뭐 멀리 갈 것도 없이 울 할머니들의 삶만 봐도 글치 않았나. 갑자기 <집으로>의 김을분 할머니가 생각나네. 에잇~ 날씨도 기분도 꿀꿀한 토요일 오후, 나가서 영화나 한판 쌔리고 꼼장어에 쏘주나 걸쳐야겠다.

끝으로 여러분들께 한 가지 묻겠다. 터보의 노래방 가면 <Love is...> 제목에 붙어 나오는, 그 괄호 속의 <3×3=0>이 대체 뭔 뜻이냐? 왜 여기서 '곱하기'가 나오냐? 갤촤주시라.

딴지 역사부 / 돗자리 (e-rigby@hanmail.net

- 딴지일보 117호(2003.7.13)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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