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조가

翩翩黃鳥 (편편황조) 여              훨훨 나는 꾀꼬리는
雌雄相依 (자웅상의) 로다           암수 다정히 노니는데
念我之獨 (염아지독) 이여          외로울사 이내 몸은
誰其與歸 (수기여귀) 리오.         뉘와 함께 돌아가리.
      
                                                                            - <삼국사기> -

 [ 배경 설화 ]

 대략 기원전 1세기 경, 동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2대 왕이 된 유리왕은 송씨를 왕비로 맞았으나 왕비는 1년

후세상을 떠났다. 이에 왕은 두 여자를 계비(繼妃)로 맞이하였는데, 우리나라 골천 사람의 딸 화희와 한나라 사

람의 딸인 치희였다.  이 두 여인은 왕의 사랑을 두고 서로 다투어 사이가 좋지 않았다.  왕은 하는 수 없이 양곡

의 동서에 두 궁전을 지어 따로 살 게 하였다.

 

어느날 왕이 기산(箕山)으로 사냥을 나가 이레 동안 돌아오지 않았는데, 그 사이에 두 여자가 심하게 다투게 되

었다. 이때 화희가 치희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한나라의 천한 계집의 몸으로 어찌 이렇게 무례히 구느냐?"

고 하니, 치희는 부끄럽고 분하여 제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왕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곧 말을 달려 쫓아 갔

으나, 치희는 노여워 돌아오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왕은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었는데, 때마침 쌍쌍이 노

니는 꾀꼬리를 보고 왕이 느낀 바 있어, 황조가로서 외로움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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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도하가

공후인은 조선 진졸사람인 곽리자고의 아내 여옥이 지었다. 곽리자고가 새벽에 일어나 배를 젓고 있었는데 머리가 센 미친 사람 하나가 머리를 풀고 술병을 낀 채 물살을 헤치며 건너가려 했다. 그의 아내가 뒤따르며 막아보려 했으나 막지 못하고 결국 미친 이는 물에 빠져 죽었다. 이에 그의 아내는 공후를 타며 공무도하(公無渡河)의 노래를 지었는데 소리가 매우 구슬펐는데 노래를 마치고는 스스로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곽리자고가 돌아와 아내 여옥에게 그 노래소리를 들려주며 이야기를 하였더니, 여옥은 이를 슬퍼하여 공후를 타며 그 소리를 그대로 내었는데 듣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여옥은 그 소리를 이웃에 사는 아낙인 여용에게 전해 주었는데 이를 이름하여 공후인이라 불렀다.[고금주]

公無渡河(공무도하) 임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公竟渡河(공경도하) 임은 그예 건너시고 말았네
墮河而死(타하이사)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當奈公何(당내공하) 가신 임을 어이할꼬  
   [해동역사 권47]

일명 <공후인> (공후는 비파처럼 생긴 스물 석 줄로 된 현악기)으로 불려지기도 한다.
 앞의 배경 설화로 인해 여옥이냐, 백수광부의 처이냐 하는 작자에 대한 문제가 많이 거론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한국 신가(神歌)의 일면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란 명칭이 옳으며, <공후인>은 악곡의 명칭이요,작자는 백수광부(白首狂夫)의 妻이다. 제작 연대는 서기 2세기 후반으로 원래 민요이던 것이 後漢 때 한역되었다는 설도 있고, 공후인을 음악상의 操曲(조곡)인 동시에 문학상의 작품명으로 보고, 조선에서 한문으로 정착되어 중국에 유입된 가요로 한사군 이후부터 전한말에 백수광부의 처가 짓고, 여옥(麗玉)이 정착시킨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백수광부를 주신(酒神),여옥을 악신(樂神)으로 이해함으로써 이 설화를 神話로 설명하여 작품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한편 이 노래를 우리 노래가 아닌, 중국 고대인의 노래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朝鮮이란 6세기 전까지 존재했던 중국의 직예성(直隸省)의 조선현(朝鮮懸)을 지칭한 것으로, 또 곽리자고의 성명은 '곽마을에 사는 沙工'의 뜻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황패강, 윤원식, 한국고대가요, 1991, 새문사)

 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백수광부의 정체에 대한 의견을 살펴 본다.

 모습이나 거동이 예사롭지 않은 점을 보아 죽은 사람이 무당일 것이라고 하는 견해가 특히 주목된다. 머리를 풀어 헤치고, 술병을 들고, 미치광이 짓을 하면서 강물에 뛰어들기도 하는 것은 황홀경에 든 무당의 모습이라야 이해가 된다. 강물에 뛰어들어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권능을 확인하는 의식이 거행됐겠는데,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으니 문제이다. 서툰 무당인 탓이라고 하면 심각한사태가 가볍게 처리되고 만다. 실패에서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찾으면서 새로운 견해를 더 보탤 필요가 있다. 무당으로서의 권위가 추락했기 때문에 죽음에 이른 것이 아닌가 하고, 그렇게 된 이유가 고조선이 국가적인 체계를 확립하면서 나라 무당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지 못한 민간 무당은 불신되거나 배격되는 사태가 벌어진 데 있었을 법하다. 그 자리에서 공후를 탄 아내도 무당인 것 같으며, 그래서 굿노래 가락에 얹어 넋두리를 했다고 볼 수 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지식산업사,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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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로원야화기(要路院夜話記)                  - 박규세 -

 

낙향하는 선비 '나'는 "종도 없는 데다가 짐 실은 병든 말까지 타고 가지, 그 행색이 말이 아니라 보는 사람마

 

다 업신여긴다. 간신히 요로원에 당도하여 주막을 찾으니 먼저 와 있던 한 양반이 자기 종복들을 대뜸 꾸짖

 

기부터 한다. 왜 저런 인간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었느냐 하는 것. 그때부터 속이 뒤틀린 나는 겉으로 보기

 

에 서울 명문 대갓집 양반이 틀림없는 그를 꾀로써 골탕을 먹여야겠다고 생각한다. 작은 소동 끝에 나는 자

 

기도 양반이라고 속여 한방에 들 수 있었다. 마침 심심하던 서울 양반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은 끝에 내가

 

참으로 별 볼일 없는 위인이라고 짐작하여 놀려먹기로 작정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그대는 몸이 단단하여 제대로 자라지 못한 듯하고, 턱이 판판하고 수염이 없으니 장차 장가들 곳이 없을 것

 

같구려."

 

나는 계속 바보 행세를 하면서 은근히 기회를 엿본다. 서울 양반은 언문(諺文: 한글)은 글도 아니고 진서(眞

 

書: 한문)를 모르면 어찌 사람일 수 있겠느냐는 식으로 나온다.

 

그대 형상을 보니, 반드시 활을 쏘지 못할 것이니 능히 글을 하느냐?

 

내 대답하여 말하기를

 

"문자는 배우지 못하고 글은 잠깐 배웠는데, 다만 열 다섯 줄 중의 둘째 줄 같은 줄이 외우기 어렵더이다."

 

객 왈

 

"이는 언문(우리글을 낮추어 부르던 말)이라. 진서(언문에 빗대어 한문을 높여 부르던 말)에 이같은 글줄이 있으

 

리오."

 

내 대답하여 왈

 

"우리 향곡(시골)에는 언문 하는 이도 적으니 진서를 어이 바라리오. 진실로 진서를 하면 그 특기를 어이 측

 

량하리오. 우리 향곡에는 한 사람이 천자문과 사략(간단하게 쓴 역사와 곧 대단치 않은 글공부를 빗댐)을 읽어

 

서 원이 되어 치부(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는 것)로 유명하고, 또 한 사람은 사략을 읽어 교생(조선시대 향교나

 

서원에 다니던 생도)이 되어 과거의 출입하노니, 공사 소지(관의 공소장) 쓰기를 나는 듯이 하기에 선물이 구름

 

이 모이듯하며 가계 기특하니, 이런 장한 일은 사람마다 못 하려니와, 우리 금곡 중에도 김 호수(땅 여덟 결을

 

한 단위로 하여 공부를 바치는 책임을 지던 사람)는 언문을 잘 하여 결복(토지에 매기던 단위, 목, 짐, 못의 통칭)

 

마련하여 고담을 박람(책을 많이 읽음)하기로 호수를 한지 십여 년의 가계 부유하고 성명이 혁혁하니, 사나이

 

되어 비록 진서를 못하나 언문이나 잘 하면 족히 일촌중 행세를 할 것이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풍월 댓거리를 하게 된다.

 

먼저 서울 양반이 한 구를 읊는다.

 

 我觀鄕之賭(내가 시골 사람과 내기를 하고 보니)

  

 怪底形體條(글을 짓기가 괴이하구나)

 

그러자 속으로 벼르던 나는 이런저런 말대꾸 끝에 다음과 같이 한 수를 지어 보인다.

  

我觀京之表(내가 서울 것들을 보니)

  

果然擧動戎(과연 거동이 오랑캐들이 하는 짓 같구나)

 

서울 양반이 깜짝 놀라 정색을 하며 자세를 고쳐 앉으며, 그제서야 미안하다고 한다. 그때부터는 두 사람 사

 

이에 본격적인 내기가 벌어진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운을 내도 나는 척척 막힘이 없이 시를 지어낸다. 그

 

리고 그 격도 서울 양반이 혀를 내두를 정도. 그 과정에서 물론 양반의 위선과 허세를 통렬하게 비판한다. 붕

 

당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지만, 그 전후 맥락을 정확히 따져 비판해야 한다는 훈계도 잊지 않는다.

 

"그대는 어찌 붕당의 이야기를 들어 말하시오? 당시 우가, 이가(牛哥, 李哥: 당 문종때 우승유의 당과 이덕유의

 

당) 어느 쪽의 한퇴지(韓退之: 당 목종 때의 선비인 韓愈로 자가 퇴지)는 들지 않았으나 정이천(程伊川)은 대현

 

(大賢)임에도 그들의 권유를 떨치지 못하지 않았소? 비록 퇴지의 도덕과 학문이 정이천에 비해 못하기는 했

 

지만 퇴지는 붕당에 휩싸이지 않았고, 정이천은 휩싸여서 시시비비의 낭패를 면치 못하였으니, 이는 정이천

 

이 사위를 몰라서가 아니라 문중의 한 사람이었기에 붕당의 화를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오."

 

마침내 서울 양반이 손을 든다. 그런데 밖에서 말이 울자, 금방 화를 내며 종을 나무란다. 그러자 나는 사람

 

이 어찌 그리 경솔하냐고 비판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수 더 가르친다.

 

".....내 소시 적에 성질이 급하여 고치려 해도 쉽게 고치지 못하였으나,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깨달으니 어렵

 

지 않았소이다. 마음이 노하였을 때는 '참을 인(忍)'자를 생각하면 노했던 마음이 자연히 없어지기에 이때부

 

터 아홉 가지 글자를 써서 늘 보고 외우고 있소. 그릇된 생각이 나면 문득 '바를 정(正)'자를 생각하면 사벽

 

(邪僻)하기에 이르지 않고, 거만한 마음이 나면 '공경할 경(敬)'자를 생각하면 거만함에 이르지 않고, 나태한

 

마음이 나면 '부지런할 근(勤)'자를 생각하면 나태해지지 않으며, 사치스런 마음이 날 때 '검소할 검(儉)'자를

 

생각하면 사치함에 이르지 않으며, 속이고 싶은 마음이 나면 '정성 성(誠)'자를 생각하면 속이기에 이르지 않

 

고, 이익을 구하는 마음이 날 때 '옳을 의(義)'자를 생각하면 이욕(利欲)에 이르지 않으며, 말할 때에는 '잠잠

 

할 묵(默)'자를 생각하면 말의 실수를 막을 수 있고, 희롱할 때에는 '영걸 웅(雄)'자를 생각하면 가벼움에 이

 

르지 않고, 분노할 때에는 '참을 인(忍)'자를 생각하면 급하게 죄를 짓지 않게 되오."

 

이 정도까지 이르르면 서울 양반은 당해도 한참 당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 장면에서는 서로 웃으며 헤어지는데, 박두세는 여기서 또한 해학을 잊지 않는다. "서로 소매를 잡고

 

길을 떠나니 저도 내 성명을 모르고 나도 제 성명을 모르니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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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東明王)
신화

동명왕 신화는 고구려 성업을 이룩한 주몽을 '위대한 영웅적 인물'로 형상화하고 있는 신화이다.
우리 민족은 수천 년의 긴 세월에 걸쳐 멀리 중앙아시아로부터 동쪽으로 또는 남쪽으로 이동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고난과 투쟁의 역사는 한반도에 정착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연의 위력 앞에서, 또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을 당하였을 때, 그들은 초인간적이고 초현실적인 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신의 세계를 상상하고 인식하게 된다. 인간 사회를 에워싼 자연물에게 다원적인 신의 자격을 부여하고, 영웅적인 부족의 추장을 조상신으로 숭배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신이나 조상신에게 자주 제사 지내고, 그들의 위대한 능력과 위업을 찬양하게 된다.

시조 동명왕의 성은 고(高)씨요, 이름은 주몽이다.  이보다 앞서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부여로 피해가고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었다.

한나라 신작 3년  임술(壬戌)에 천제는 아들 해모수(解慕漱)를 부여의 옛 도읍터에  내려보내어 놀게 하였다. 해모수는 하늘에서  내려올 때 오룡거를 탔고, 종자 백여 명은 모두 흰 학을 탔으며, 채색한  구름이 위에 뜨고, 구름 속에서 음악이  들렸다. 웅심산에 머물러서 십여 일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내려왔는데, 머리에는 까마귀 깃으로 된 관을 쓰고, 허리에는 용광이 빛나는 칼을 찼다. 아침에  정사를 듣고 저녁이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이를 천왕랑이라 하였다. 

성 북쪽 청하에 사는 하백(河伯)(물을 주관하는 신)의 세 딸이 아름다웠는데, 장녀는 유화, 차녀는  훤화, 막내는 위화라고 하였다. 그 자매가 청하로부터  웅심연 위로 놀러 나가니, 신 같은 자태는 곱고 빛나며 몸을 장식한 패옥이 어지럽게 울려 한고와 다름없었다.  

왕(해모수)이 이들을 보고 좌우에게 말하였다.
  "이를 얻어서 왕비를 삼으면 아들을 두리로다."
  여인들은 왕을 보자 곧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자 좌우에서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어찌 궁전을 지어 여인이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닫지 않으시나이까?"
  왕이 옳다고 여겨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문득 구리로 만든 방이 생겨 장관이었다.  방 가운데 세 자리를 마련해 놓고 동이 술을 준비하니,  여인들이 각기 그 자리에 앉아서 서로 권하며 술을 마시고  크게 취하였다. 왕이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급히 나가 문을 막으니,  여인들이  놀라서 달아나고 장녀 유화만이 왕에게 붙들렸다. 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 말하였다.
  "너는 어떤 사람인데 나의 딸을 머물게 하였는가?"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나는 천제의 아들로 이제 하백과 혼인을 이루고자 한다."
  하백이 다시 사자를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천제의 아들로 나에게 구혼을 하려  한다면 마땅히 중매를 보내야 될 터인데, 이제 갑자기 나의 딸을 붙잡아 둔 것은 어찌 실례가 아닌가?"
  왕은 부끄럽게 여겨 장차 하백을 가서  보리라 하고,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서 여인을 놓아 주려 하였다. 그러나 여인은 이미 왕과 정이 들어서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오룡거만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왕이 하늘을 가리켜 고하니 문득 오룡거가 공중으로부터 내려왔다. 왕과 여자가 수레를 타자 갑자기 풍운이 일어나며 하백의 궁전에 이르렀다. 하백은 예를 갖추어 이들을 맞이하고 자리를 정한 뒤에 왕에게 말하였다.
 "혼인하는 법은 천하에 통용하는 법인데 어찌하여 예를 잃고 나의 기분을  욕되게 하는가? 왕이 천제의 아들이면 무슨 신기함이 있는가?"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문득 시험해 볼 일이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가 되어  노니 왕은 수달로 변하여 이를 잡았다. 하백이 다시 사슴이 되어 달아나자 왕은 늑대가 되어 이를  쫓고, 하백이 꿩으로 변화하자 왕은 매가 되어 이를 쳤다. 하백은 '이 사람은 참으로 천제의 아들이로다.' 하고 생각하여 예로써 혼인을 이루었다.
 하백은 왕이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겁내어 잔치를 베풀고 왕에게 술을 권해서 크게 취하게 한 뒤, 말과 함께 작은  가죽 가마에 넣은 다음 오룡거에 실어 하늘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그 수레가 물을 채 빠져  나오기 전에 왕은 바로 술이 깨어서, 여자의 황금  비녀를 뽑아 가마를 찌르고, 그 구멍으로 빠져 나와 홀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백은 크게 노하여 그 딸에게 말하였다.
   "너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나의 가문을 욕되게 했다."
   그리고는 좌우에 명령하여 딸의 입을 잡아 늘여 그 입술의 길이가 세 자나 되게 한 다음, 노비 두 사람만을 주어 우발수 가운데로 귀양 보냈다.
   어부 강력부추가 (금와왕에게) 고하였다.
 "요즘 밤중에 제가 잡은 고기를 가져가는 자가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 알지 못하겠나이다."
  왕은 어부를 시켜서 그자를 그물로 끌어 내게 하였는데, 그물이 찢어졌다. 다시  쇠그물을 만들어 끌어 내니, 비로소 한 여인이 돌 위에 앉아서 나왔다. 그 여인은 입술이 길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으며, 입술을 세 번 자른 뒤에야 비로소 말을 하였다.
  
"나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은 유화(柳花)다. 동생들과 놀러 나왔다가 하느님의 아들인 해모수를 만나 웅신산(熊神山) 밑 압록강에서 같이 살았는데, 그는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부모가 중매 없이 남을 따라간 것을 책망하며 여기에 귀양 보냈다. " 
  고 하였다.
왕은 그 여인이 천제의 아내임을 알고 별실에 가두었다.  

하루는 유화가 집에 있으니 햇빛이 비쳐 몸을 피해도 쫓아가며 비추었다. 이로 해서 잉태하여 신작 4년 계해(癸亥) 4월에 알 하나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 되들이나 되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말하기를,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상서롭지 못하다." 하고, 사람을 시켜 마구간에 두었더니, 여러 말들이 밟지 않았고, 깊은 산에 버렸더니, 모든  짐승이 호위하였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에 항상 햇빛이 있었다.
왕이 깨뜨리려 해도 깨어지지 않으니 도로 어머니에게 주었다. 어머니가 알을 싸서 따뜻한 곳에 두니, 한 아이가 껍질을 깨고 나왔는데, 울음소리가 매우  크고 골표(骨表)가 영웅답고 기이하여 7세에 벌써 보통 사람과 다르게 뛰어났다.

햇빛이 유화의 몸을 쫓아가며 비춘 것은 하늘과의 연관이 지속되었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알을 낳는데, 알은 세계를 상징한다. 알이 깨뜨려지는 것은 세계가 깨뜨려져서 하나의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몽이 알을 깨뜨리고 세상에 나온 것은 그가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됨을 의미한다. 또, 와나 짐승이 알을 보호하는 것은 주몽이 매우 신성한 존재임을 보여주고 있다.

 주몽이 그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잘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오."
 하였다. 그 어머니가 대가지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화살을 쏘는 족족 맞혔다. 부여에서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朱蒙)이라고 했다.
 주몽은 나이가 많아지자 재능을  다 갖추었다. 금와왕은 아들 일곱이 있었는데,  항상 주몽과 놀며 사냥하였다. 왕의 아들과 따르는  사람 40여 인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는데, 주몽은 사슴을 꽤 많이 쏘아 잡았다. 왕자가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고 사슴을 빼앗았는데, 주몽은 나무를 뽑아 버리고 갔다.
 태자 대소가 왕에게,
 "주몽이란 자는 신통하고  용맹한 장사여서 눈초리가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그 뜻을 시험하였다. 주몽이 마음으로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탄식하여,
"나는 천제의 손자인데, 남을 위하여 말을 기르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합니다. 남쪽 땅에 가서 나라를 세우려 하나, 어머니가 계셔서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였다.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일이다. 장사가 먼 길을 가려면 반드시 준마가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
하고,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어지럽게 때리니 여러 말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한 마리 붉은 말이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가만히 바늘을 혀 밑에 꽂아 놓았다.  그 말은 혀가 아파서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몹시 야위었다.
 왕이 목마장을 순시하며 여러  말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고,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이 이 말을 얻고 나서 그 바늘을 뽑고 다시 먹였다.
 주몽은 오이, 마리, 협부 등 세 어진 벗과 함께 남쪽으로 행하여 엄체수에 이르렀다. 그러나 배는 없고 쫓는 군사가 곧 이를 것이 두려워, 채찍으로 하늘을 가르고 우러러 탄식하기를,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황천과 후토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주소서."
 하고, 말을 마치고  활로 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가 나와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넜다. 한참 뒤에 쫓는 군사가 하수에  이르니, 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허물어져 이미 다리에 오른 자는 모두 빠져 죽었다.
 주몽이 떠날 때, 차마 어머니를 이별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이르시기를,
 "너는 어미 때문에 걱정하지 말아라."
 하고 오곡 종자를 싸 주었다. 주몽이 살아서 이별하는 마음이 애절하여,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왔다. 주몽이,
 "아마도 신모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리라."
 하고, 활을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려,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얻고 나서 물을 뿜으니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주몽은 졸본주에 이르러 도읍을 정했다. 미처 궁실을 짓지 못하여 비류수 위에 초막을 짓고 살며,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고씨로 성을 삼았다. 그때 주몽의 나이 열 두 살이었다.      

<동국이상국집>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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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南門) 안 주점(酒店)

 

 

남대문 안 어느 탁주 장수가 개점한 첫날 해장국을 끓여서 파루 즉시 가게문을 열고 등불을 걸었다.  한 상주(喪主)가 혼자 들어오더니,
"해장국에 술 한 잔 주오."
했다. 곧 내가니 또르르 마시고는,
"여기 국하고 술 한 잔 더 따르오."
또 얼른 내가니 쭉 들이켜고는,
"내 돈이 없소. 이담에 갚으리라."
탁주 장수는,
"아무렴 어떻겠수."
그 상주가 나간 후에 술군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서 진종일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술을 팔았다. 이튿날도 새벽에 가게문을 열고 등불을 내걸자, 그 상주가 또 들어와서 어제와 똑같이 행동했으나 탁주 장수는
"아무렴 어떻겠수."
하였다.
상주가 나간 후로 술꾼이 역시 어제처럼 밀렸다. 탁주 장수는 그가 도깨비거니 생각하고, 그 이후부터 더욱 각별히 대접했다.  
그 상주가 어느 날 밤 돈 200 냥을 들고 와 주면서,
"이게 외상 술값이오."
했다. 종종 이렇게 했고, 술도 한결같이 잘 팔려서 1년 미만에 돈은 여러 만금을 벌었다.
술장수가 상주에게 묻기를,
"내 술장사는 치우고 달리 계획을 세워보는 게 어떨까요?"
"좋지."
가게를 내놓으니, 어느 선혜청 사령 한 놈이 집 판다는 말을 듣고 그 술집이 술이 잘 팔리는 데 잔뜩 눈독을 올렸다. 사령이 집값을 두둑히 지불하고 기명 부정 등속도 후한 값으로 사갔다.  사령 놈도 술을 수십 항아리 빛은 연후에 해장국을 끓이고 파루 즉시 가게를 열고 등불을 달았다.  한 상주가 혼자 들어오더니,
"해장국에 술 한 잔 주오."
곧 내 가니 또르르 마시고는,
"여기 국하고 술 한 잔 더 따르오."
또 얼른 내가니 쭉 들이켜고는,
"내 돈이 없어 내일 갚으리다."
술 장수는 잔뜩 골이 나서,
"남의 새로 낸 가게에 외상술이 어디 있어. 빨리 돈을 내시오."
상주는,
"돈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돈이 없거든 상복이라도 잡히고 가시오."
상주는 욕을 퍼부었다.  
"상복을 너 푼 술값에 잡는단 말야?"
술 장수가 욕설에 바짝 약이 올라 맨발로 뛰어내려와서 상주의 볼따귀를 갈겨 주려 했더니, 상주는 욕을 연발하며 달아났다. 술 장수는 붙잡아서 때려 주려고 뒤쫓았으나 잡히진 않고 오히려 점점 멀어졌다. 한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웬 상주가 붙들리었다. 다짜고짜로 방립을 벗기고 왼손 오른손 번갈아 볼따귀를 갈기며 욕지거리를 해붙였다.  
"남의 마수에 와서 돈도 안 내고 술을 마시고는 게다가 욕가지 하니 무슨 버릇이야. 이런 자는 심상하게 다뤄선 안 되지."
하고는 상복을 벗겨 가지고 방립과 함게 옆에 끼고 갔다. 이 상주는 다름 아닌 벼슬아치 양반이었다. 큰집 기제 에 참례하고 파제 후에 단신으로 귀가하다가 뜻밖에 망칙한 변을 당한 것이다. 뺨이 얼얼할 뿐 아니라 분기가 탱천하여 다시 큰집으로 돌아갔다. 온 집안이 대경하여 어찌된 영문인가를 물었다.  
"엉겁결에 어떤 놈이 돌출하여 약차약차 합디다."
모두들,
"술 장수 놈 소행이 틀림없다."
하고 하인을 다수 발동하여 방립과 상복을 찾고 술 장수를 잡아왔다.
우선 단단히 분풀이를 하고 날이 밝자 형조로 이송했다. 형조에서 법에 의거해 귀양을 보내니, 저간에 난 비용이 불소하고, 술 역시 한 잔 마시는 이 없어 이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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