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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방의 바람 - 하
최해심 지음 / 신영미디어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예전에 풀 하우스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엘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바람이 머무는 곳이니까요." 라이더라는 바람이 머무는 곳, 엘리의 옆자리는 바람이 쉴 수 있는 곳이었다. 마찬가지로 운원의 옆자리는 변방에 부는 매섭고도 차가운 바람이었던 천소가 유일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이다. 어린 시절 계모의 모진 학대에 아끼고 아끼던 유모가 차가운 주검이 되어버린 그 날 이후 항상 변방에 머물던 그에겐 행복이란 단어는 낯설면서도 간절한 염원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혼인을 하려 초례청에 섰을 때, 아리따운 신부는 어디에도 없었다. 서생과 도망을 쳐서, 겁탈을 당해 목을 매었기 때문에 그와 혼인하려던 두 여자는 그렇게 그를 외면했다. 두 차례나 혼인이 깨어지자 천소는 더욱 더 냉소적이고 지독한 바람이 되어 변방을 몰아쳤다. 그러다 세번째 혼인이 정해지자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혼인을 성사시키려 했던 그는 신부를 위협하고 겁탈한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녀를 자신의 옆에 묶어두어야 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서, 더 이상 버림받는 것은 끔찍했기에.
1년 전 자신의 정혼자였던 재휘가 죽었다는 소식에 넋을 놓고 있던 운원은 자신이 혼인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펄쩍 뛰며 완강하게 반항한다. 자신의 정인은 오로지 재휘 뿐이라며 이 혼인을 결사적으로 반대하지만, 그녀가 혼자이기를 원하지 않는 부모님에 의해 혼인은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운원은 평생 재휘를 추모하며 살고 싶었기에, 자신의 지아비가 될 천소에게 자신의 사연을 담은 편지를 전한다. 자신은 재휘를 사랑한다고. 그를 위해 추모하며 살고 싶다고. 그러니 이 혼인을 막아달라고. 그러나 이미 천소는 이 혼인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사시켜야 한다고 작정을 한 남자였다. 당당하고 대찬 여자였던 운원을 얽어매던 그 시대의 관습은 그녀에게 두 가지 선택의 길을 남겨놓았다. 이대로 목을 매던가, 그의 아내가 되던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기엔 자아가 강했던 그녀는 결국 초례청에, 천소의 앞에 서게 된다.
끔찍한 인연으로 만나버린 두 사람. 한 사람은 상대에게 지독한 증오를, 한 사람은 상대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둘은 부부의 연을 맺었다. 그러나 그의 불행한 과거를 알아버린 운원은 점점 무디어져가는 증오를 추스르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이 그를 은애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천소의 닫혀버린 여린 마음은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운원은 알고 있었다. 그가 지독히도 외로워하고 있음을, 따뜻한 정을 그리워함을..그러나 그 따뜻한 온기가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하고 있음을.
운원은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사랑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죽었다던 재휘가 살아돌아오고, 천소가 정을 주었던 아정이 죽고, 운원마저 자신을 떠나버릴 것을 저어하던 천소는 그녀를 잔인하게 내쳐버린다.
휘몰아치듯, 흐느끼듯 여기까지 왔다. 천소의 과거에 슬퍼하고 운원의 사랑에 아파하다 거센 급류에 휘말린 듯 끝이 보이는 곳에서 둘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이젠 아프지 않기를... 너무나 아파했던 그들이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