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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
김지혜 지음 / 영언문화사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고려는 10여년에 걸쳐 몽고와 싸웠고, 결국 패했다. 그 결과 종,조로 끝나던 왕의 시호도 원의 제후국 수준인 충~왕으로 고쳐지게 되었고, 왕후는 늘 원의 공주였다. 게다가 매년 온갖 공물들을 원의 황실에 바쳐야만 했고, 고려의 여인들은 원나라로 공녀 신세가 되어 끌려가게 되었다. 예영은 최씨 가문의 외동딸이고, 가문의 번성을 위해 황제를 위한 공녀가 되어 원나라로 끌려갔다. 그 곳에서 만난 한 사람, 샤하이. 그는 황제의 친위군 케시탄의 대장이었고, 황제가 가장 신임하는 장수였다. 그런 그가 예영을 보았다. 낯선 이국 땅에 와서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자신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것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가득찬 예영의 눈에는 공녀들을 지키는 장수인 그가 원수쯤으로 보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관례대로 공녀로 온 예영을 비롯한 금옥과 송이는 각기 원의 귀부인 밑에서 교육을 받기 위해 흩어지고, 어이없게도 예영은 샤하이의 집으로 오게 된다. 그곳에서 예영은 알지 못하지만 샤하이는 가슴 아픈 눈으로 예영을 바라본다.
1인칭 시점으로 철저히 예영의 관점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절반이 넘어가는 페이지를 읽으면서도 좀체 로맨스가 펼쳐지지는 않는다. 아니, 이 책 전체에 걸쳐 로맨스는 그다지 없다고 봐야하나..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샤하이가 등장한 때부터 계속 예영에 대한 애절함을 읽을 수 있었다. 간간이 그가 흘리는 말들이 황제에게 바쳐지는 여인을 사랑한 그의 마음을 절절하게 나타냈다. 우여곡절 끝에 샤하이의 부인이 될 수 있었던 예영은, 아니 샤오메이는 (샤하이가 그녀에게 준 이름이 샤오메이, 작은 매화, 한어이다.) 여전히 그의 곁을 벗어나 고려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녀의 마음을 돌리고 싶었던 샤하이는 온갖 선물 공세에 두 오라버니까지 그녀 앞에 데려온다. 그러나 가족을 만났다는 기쁨보다 어떻게 공녀로 오게 되었는지를 듣고 난 뒤의 절망은 그녀를 삶에서 격리시킬 정도였다. 서서히 죽어가는 그녀를 옆에서 지켜보던 샤하이는 절망하지만, 기어코 그녀를 살려내고야 만다.
이제 고려를 그리워하지 않으리라고, 가족을 그리워하지 않으리라고 모질게 각오한 그녀는 조금씩 샤하이를 받아들이게 되고, 공녀로 같이 왔던 금옥이 귀비에 봉해지며, 황제가 직접 예영을 샤하이의 정실로 인정해주는 등 앞날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샤하이가 다른 나라의 공주를 제1부인으로 맞이하여야만 한다는 말에 예영은 열었던 마음을 다시 닫아버린다. 다시는 아무도 믿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나 막상 샤하이가 자신을 찾지 않자 그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녀는 점점 시들어갔다.
혼인날, 심상치 않은 소란에 놀란 예영은 샤하이의 반란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이미 잡혀 황궁에 감금되어 있었고, 혼인은 무산되었다. 게다가 전부터 예영을 탐내던 황숙이 들이닥쳐 예영을 끌고 간다. 그리고 그에게 겁탈 당하느니, 샤하이의 가슴에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는 그녀의 굳은 의지는 결국 그녀를 거의 죽음까지 몰아넣는다. 독약을 마신 그녀는 반란 사건이 사실은 황후와 황숙 등 탕치씨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황제와 샤하이의 계략이었다는 것을 알게되지만, 마신 독약을 어찌할거나.
"메이, 기어이 이대로 죽는 거라면, 너를 혼자 보내진 않겠다. 홀로 보내진 않겠어."
독약을 먹고 사경을 헤매는 그녀 곁에서 샤하이가 오열하며 내뱉은 말이다. 어찌나 가슴이 절절하던지, 너무나 감동적인 말이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살아나라는 말도 아닌 혼자 두지 않겠다니. 그의 한결같은 사랑은 예영에게 전해졌다.
시대별로 따지자면, 그 둘의 행복은 끝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이 멸망하고 명이 들어서니까. 원의 마지막 황후가 바로 기황후이니까. 그들은 저 먼 사막으로 쫓겨갔을 것이다. 어쩌면 샤하이와 예영에게는 그게 더 행복할는지도 모르겠다. 샤하이의 고향은 저 먼 사막.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사막의 모래 속으로 스며들겠지.
공녀. 그들은 우리 역사에서 아픈 이름 중 하나이다. 다른 나라에 노리개로, 노예로 팔려갔어야만 했던 그들은 철저하게 고통받은 이들이었다. 기황후처럼, 혹은 그곳에서 그나마 잘 살게 된 이들이 있다고 해서 그들을 내몬 자들에게 면죄부가 내려지지는 않는다. 정말로,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아 행복해졌다는 것은 그녀들의 능력이니까. 그리고 그리 되지 않은, 이 책에서의 송이 아가씨처럼 정신이 나간 채 죽어갔을, 혹은 하녀가 되어 평생 고국땅을 그리워했을 하많은 이들은... 정말 가슴 아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