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의 < 자본론 > 은 어렵지 않다. 분량이 많고 딱딱할 뿐이다. 분량이 많은 이유는 맑스가 책을 더 많이 팔아먹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풀어서 설명하려는 욕심 때문에 분량이 넘쳐난 것이리라. 맑스, 꽤나 인간적이다. 오히려 알튀세르가 맑스 자본론'을 난해한 경전으로 어렵게 풀었다. 프로이트보다는 라캉이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맑스는 기계가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 것이라 믿었고, 자본가는 기계가 새로운 일자리를 더 많이 양산할 것이라고 맞섰다. 누가 헛소리를 하는 것인지는 당신이 판단할 몫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은 곧 기계(혹은 시스템)의 부품이 된다는 사실이다.  요즘은 일한 품삯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뜯는다. 대표적인 경우가 은행현금입출금 기계이다. 사실 ATM은 은행원이 해야 할 은행 업무를 고객이 대신하도록 고안한 기계이다.

 

놀라운 사실은 그에 대한 품삯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수수료를 내야 한다는 점이다.  맥도날드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고객은 맥도날드 매장에서 직원이 해야 할 서빙, 테이블 청소, 분리 수거'를 무료로 봉사한다. 옛날 같았으면 도와줘서 고맙다고 음식값은 받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맥도날드 테이블에 자신이 먹던 것들을 치우지 않고 나갈 경우 다음날 SNS 세상에서 " 맥도날드녀 " 라는 이름으로 욕을 먹을 것이다. 맥도날드'는 기상천외한 방식으로 노동력을 갈취하는 시스템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봉이 김선달보다 셈법이 빠르다.

 

맑스 자본론이 선뜻 손에 잡히지 않는다면 < 휴버머의 자본론 > 이나 <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 > 를 추천한다. 그리고 나서 < 자본론 > 에 도전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다.

 

 


 

 

 

 

 

 

< 어슷썰기 > 에서 < 총총썰기 > 까지

 

찌개'나 국거리'에 들어갈 파는 대부분 어슷썰기'를 한다. 왜 어슷썰기를 하냐고 물으면 코 파며 잇힝 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식적 행위에 가깝다. 왜냐 ? 우리의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그래 왔기 때문이다. 한석봉 어머니가 가래떡을 반듯반듯 통썰기 하면 이상하잖아 ! 하여튼, 요리에 취미'가 없는 사내들도 모처럼 피서지'에서 요리'를 할 때면 대부분 어슷하게 썬다. 그런데 곰탕'이나 설렁탕'을 파는 식당'에 가면 영락없이 십원짜리 동전 모양처럼 생긴 파( 통썰기 = 총총썰기 ) 가 나온다. 대파'를 한번이라도 썰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신체구조상 팔은 삐딱한 각도로 어슷썰기'를 해야지 편리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 말이 믿기지 않으면 당장 주방으로 달려가서 통통한 대파 하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은 후 어슷썰기와 총총썰기'를 해보라.

 

 

일반 가정에서야 대파 하나 써'는 일'은 일도 아니겠지만, 하루종일 대량으로 대파'를 썰어야 하는 식당에서는 왜 굳이 힘들게 총총썰기'를 할까 ? 궁금증'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일단 읽고 있는 < 논리 철학 논고' > 는 덮기로 하자.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몇몇'은 쪼르르 지식인'에 접속하여 답을 찾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짐짓 어린이'로 가장하여 " 왜 설렁탕에 드러가는 파는 반드타게 자르나용. ㅋㅋㅋㅋㅋ 내공 있삼. 선생님이 내주신 숙제임요. 잇힝 ~  " 이라고 연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뾰족한 답은 없으리라.

 

하여튼, 나는 이 사소한 의문'에 목숨을 걸기로 했다. 장고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놀랍게도 맑스'였다. 오! 대파 썰기'에서 맑스의 흔적을 찾아내다니 ! 옛날 '생활의 달인 코너'에서 대파 썰기 달인이 나온 적 있다. 얼마나 빠른 시간'에 대파'를 써는가'가 그 달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그가 그날 방송에서 선보인 방식은 대파 스무 개 정도'를 가지런히 모아서 커다란 중국식 칼'로 한꺼번에 총총썰기'를 하는 거'였다. 다, 다.다.다.다.다.다.다 ! 순식간이었다. 칼로 썰다'라기 보다는 칼로 절단한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았다. 그 달인'이 바로 유명한 마포 모 설렁탕 20년 차 주방 직원'이었다.

 

그렇다 ! 최소한의 시간 투자'로 생산량을 최대로 뽑아내자는 욕심'이 바로 대파 총총썰기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대파 하나를 썰 때는 어슷썰기가 빠르겠지만 대파 한 묶음을 한 번에 썰 때는 총총썰기가 빠르다. 이게 바로 자본주의'다. 그렇다면 대파 썰기'에 이골이 난 달인은 열 사람 몫'을 짧은 시간에 혼자 해치웠으니 그만큼 쉬는 시간이 늘어났을까 ? 천만에 ! 오히려 이 재주'는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부담만을 안겨주었을 뿐이다. 바람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포드는 대파 총총썰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포드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게 바로 포드주의'다. ( 믿거나 말거나 )

 

자동차 나사를 조이는 노동자는 평생 나사만 조이고, 콘돔 불량 유무를 판단하는 일을 하는 노동자는 평생 콘돔에 바람을 부는 일만 하고, 대파를 써는 일을 하는 달인은 하루종일 대파만 썬다. 내가 아는 노동자 가운데 한 명은 직업이 병아리 감별사'였다. 병아리 똥구멍'을 보고 암수'를 구별하는 직업을 가진 친구'였다. 이 친구는 아침 9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종일 병아리 똥구멍'만 보았다. 나중에 이 친구가 나에게 말했다. " 형 ! 나 이젠 병아리 똥구멍만 쳐다보며 사는 거 지긋지긋해요. 마치 내 인생이 병아리 똥구멍 같아. "

 

포드는 바로 이 반복에 따른 빠른 작업 속도'에 목숨을 건 기업가'였다 : 1. 콘베이어'가 조립제품'을 안전하게 b라인 노동자에게 옮겨준다. 2. 나사 하나를 조이면, 3. 바로 다음 조립제품이 기다린다.  4. 만약 속도가 늦어져 나사를 조이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전체 라인'이 비상벨을 울리며 정지된다. 왜냐하면 c라인은 반드시 b라인에서 일감이 건너와야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숙련 노동자 1명이 전체 노동 라인'을 멈추게 하는 것이다. 얼마나 쪽팔린가 ! 이 비상벨은 " 삐이익 ~ " 이라는 의성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행간은 " 선생님 ! 쟤, 바지에 똥 쌌어요 ! " 라는,  새침데기 짝꿍이 전하는 고자질이나 다름없다.

 

노동자는 싸늘한 동료들이 던지는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나사를 조인다. 아, 포드 ! 잔머리'를 제대로 굴렸다. 물론, 포드는 성공했다. 노동자들이 이 콘베이어 속도'에 익숙해지자 좀더 악랄한 포스트 포드'는 콘베이어를 속도'를 쥐새끼처럼 야금야금 높이기 시작했다. 반복에 따른 신체 반응'은 곧 속도에 익숙해지는 법이다. 결론은 뻔하다. 콘베이어 속도'는 아우토반이 되어 갔다. 노동자는 그렇게 소비되어가는 것이다. 오직 속도전이다.

 

속도. 속도는, 오 ! 무섭다. 수천 년 내려오던 어슷썰기'가 어느 날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는 그 이유 하나'로 폐기처분된 것이다. 한석봉 어머니가 울고 갈 효율 우선 주의'가 아닐까 ? 나는 생활의달인'이라는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불편하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민 휴머니티 예찬 뒤'에 감추어진 노골적인 속도에 대한 맹신'이 엿보인다. 정말 이토록 빠르게, 빠르게, 빠르게 뽑아내는 행위가 칭찬받아야만 할 일일까?  아마, 이 샐활의달인 코너'는 포드 할아버지가 보시면 좋아하실 것 같다. 나는 외치고 싶다. 이렇게 ! " 우리, 좀 게으르게 삽시다. 근면성실'이 훌륭한 모범이지만 그렇다고 게으름'을 탓하지는 맙시다. 시간 당 생산량'으로만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맙시다. 백 미터 달리기 기록이 모두 다 다르듯이 그 차이'를 인정합시다 ! "

 

 

 

덧1. ) 총총썰기'는 국어사전에 없네요. 아마 정확한 표현은 통썰기'인가 봅니다. 통썰기가 뭐냐. 총총썰기 읽기 좋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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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4-13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언젠가 자본론,을 통독해야 하는데 말이죠.
페루애님 글은 식자들이 어렵게 인식시켜 논 얘길 쉽고 재밌게 쓰시는 것도 있지만
뭣보다 해당 책을 읽고 싶게 만든다는 점에서 탁월하단 생각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 아니지만
경제학부 학생들이 자본론조차 읽지 않는다는 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14 12:36   좋아요 0 | URL
글쎄말입니다. 경제활동은 결국 자본의 흐름이고 말이죠...
자본론은 정치경제학적 접근을 시도했으니
경제학부는 자본론을전공으로 해야 도지 않나 싶습니다.
뭐 자본론 읽으면 빨갱이가 되는 세상이니.......

강신주 님이 새롭게 낸 것을 못 읽어봤습니다.
그런데 다시 다른 판본으로 읽으려고 하니 도저히 목 읽겠네요...ㅎㅎㅎ
전 자본론 마음 먹고 아침 9시에 가서 끝날 때까지... 그렇게 3일 동안 점심도 안 먹고 다 읽고 나서
혼자 뿌듯해하던 .. 한 때 그런 때가 있었네요..ㅎㅎ

지금 생각해 보니.. 방금 생각이 났는데... 어쩌면 제가 자본론 3은 안 읽은 것 같기도 하네요...
아닌가 ?! ㅎㅎㅎㅎㅎ. 생각이 안 납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4-16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 강신준 교수님것 어서 읽어야 할듯~!
서재지수가 벌써 만 돌파라니!! 조만간 저를 뛰어넘을듯! 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4-16 18:51   좋아요 0 | URL
10년 뒤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ㅎㅎㅎ.
다시 한번 도전할 생각하니, 왜 기쁜 게 아니라 지겹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늙었나봐요. 이젠 좀 끔직함... 이러면 안 되는데 말이죠.
ㅎㅎㅎㅎㅎㅎ. 강신준 교수님 것 도전하리오... 반드시.. 아자 !
 

 

 

 

 

 

 

타인의 얼굴 : 표절'이라는 이름의 욕망.

 

 

 

http://blog.naver.com/gpjm/10165964822

 

 

 

 

내가 놀던 동네에 이상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고만고만한 동네에 고수 한 명이 나타났다. 그녀는 주로 예술 분야에 대한 글을 썼다. 처음 보는 그림과 사진들에 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정보력과 수집력이 뛰어난 고수임이 분명했다. 설상가상 그녀는 한가인보다 예뻤다. 그녀가 보내는 일상을 담은 사진들은 보첼리니의 < 비너스의 탄생 > 을 감상하는 것보다 더 유쾌했으니깐 말이다. 여기에 마음씨 또한 비단이라. 그녀는 친절한 금자 씨'였다. 너나 잘하세요, 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착한 입술이었다. 그녀가 키스를 하듯 입술을 오므린 도발적 사진은 앵두 같았다. 아, 저 입술... 참 예쁘다 ! 앵두 같은 입술을 보다가 다른 여자가 오므린 입술을 보니 닭똥집 같은 거라.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신경질을 부렸다.

 

3박자를 고루 갖추면 여신이 되는 법이다. 블로그를 만든지 2개월 만에 덧글은 평균 100개에서 200개를 왔다갔다 했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도 꼬박꼬박 댓글을 달아주었다. 오늘은 날이 화창한 봄날이에요, 오늘은 무덥군요 ! 시원한 냉면 어떠신가요 ? 빰빠라, 빰빰빰 !!!!굉장하군요. 어디서 많이 놀아본 솜씨인데요 ? 아참... 그녀의 직업은 모 대기업 수석 연구원'이었다. 남이 잘난 꼴은 죽어도 못 보는 성질인 나는 장탄식을 했다. 닝, 기, 미, 조, 또 !

 

내가 보티첼리의 비너스보다 예쁜, 친절한 금자 씨보다 친절한, 한가인보다 한가하지 않은 그녀에게서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이 아니라 " 언캐니 " 였다. 그녀가 블로그 세계에서 점점 완벽해질수록, 나는 그녀가 점점 인조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점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특히 그녀가 전시한 수많은 사진은 일상적인 포즈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일상 속에서 사진 찰칵, 이라며 전시한 사진들은 순간의 포착이기는커녕 치밀하게 계산된 것들이었다. 사진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진 속에 스며든 빛의 농도, 광원의 방향, 그림자의 길이를 통해서 여러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데 그녀가 전시한 사진 가운데는 반사판을 사용한 사진이 꽤 많았다. 반사판까지 동원된 사진이 과연 평범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까 ? 사진을 찍는 솜씨는 훌륭했고, 사진 속 그녀의 포즈 또한 프로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녀'가 가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코 파며 잇힝, 하기에는 확실한 증거가 없어서 오열하며 좌절했다.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구글링을 해도 남의 사진을 도용했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 도대체 넌... 누구냐 ? " 더욱 이상한 점은 그녀의 취향이었다. 그녀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는 르네상스도 아니고, 로코코도 아니고, 바우하우스도 아니며, 야수파, 인상파, 미래파, 양파, 대파, 쪽파, 실파, 좌파, 우파'도 아니었다. 그런 그림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중에는 오로지 벌거벗은 여자 그림이나 예술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녀의 주제는 그림 속에 나타난 여체, 그림 속에 나타난 강간, 그림 속에 나타난 나르시즘이었다. 말이 좋아 나르시즘이지 나중에는 포스트모던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용 자위 기구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했다. 얼굴은 여신인데 이런 자극적인 글을 올리니 늙은 남자들은 환장을 했다. 덧글창을 보면 침이 떨어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꼬리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와 가까운 이웃 가운데 한 명이 영화 < 지슬 > 에 나오는 남자 배우인 " 양정원 " 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보티첼리의 비너스보다 예쁘고, 친절한 금지 씨보다 친절하며, 한가인보다 한가하지 않은, 바쁜 그녀를 발견한 것이었다. 무명에 가까운 여배우양 ! 정 ! 원 !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문제는 양정원 씨'와 블로그 그녀는 얼굴은 동일하지만 서로 다른 사람이었던 것. 그러니깐, 블로그 속 그녀'는 배우 양정원을 카피한 것이다. 그녀의 일상 모두를 말이다. 사실이 발각되자 그녀는 블로그를 폭파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것은 < 표절 > 이었다. 소설가가 다른 소설가의 소설을 표절하고, 음악가가 다른 음악가의 음악을 표절하고, 미술가가 다른 미술가의 미술을 표절하는 것처럼 그녀는 양정원이라는 예쁜 얼굴과 몸을 표절했다.

 

그녀는 카피캣이었다. 그녀를 여신처럼 따르던 사내들은 이내 장탄식이 이어졌다. 마트에서 추파춥스를 훔치다가 걸린 여배우를 바라보는 팬의 입장이랄까 ? 그런, 느낌. 사나이 울리는 건 신라면만이 아니었던 듯 싶다. 양정원을 카피한 그녀는 과연 그녀일까 ? 혹은 그일까 ? 그(녀)는 예술이 좋아서 예술에 관련된 글과 그림을 올린 것일까, 아니면 남성들을 유혹하기 위해서 벌거벗은 보티첼리의 비너스를 미끼처럼 이용한 것일까.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표절은 나쁘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표절에 대한 입장 표명이 있어야 한다. 그녀는 현재 침묵 중이다. 입을 다물고 오래 있으면 똥구멍에 털 난다. 입과 항문은 연결되어 있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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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트 특급살인 애거서 크리스티 추리문학 베스트 2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유명우 옮김 / 해문출판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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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고 : 이 글은 친절하게 이 소설의 트릭을 폭로합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쓴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 칼레를 향해 달리던 오리엔트 특급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 열차는 폭설에 의해 멈춘다, 고립된다. ㉢ 범인은 12명의 승객 중 한 명이다. ㉣ 하지만 그들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즐겨 사용하는 " 고립 " 이 다루어진다는 측면에서 이 소설은 밀실 트릭'이다. 폭설에 의한 고립은 산사태나 폭풍 때문에 외부와 단절된 <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 와 < 쥐덫 > 을 연상케 한다. 이 장치'는 작가가 독자에게 내미는 도전장이다. 범인은 무조건 내부에 있으니 똑똑한 독자여 ! 맞, 춰, 보, 세, 용.  추리소설 마니아'인 당신은 발끈한다. 그녀의 < 그리고 아무도... > 와 < 쥐덫 > 의 트릭'을 미리 경험한 독자'라면 코 파며 잇힝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소설의 결말을 예상하지 못했다. 독자는 패자가 되고, 저자는 승자가 된다.

 

 

 

 


 

 

 

 

 

 

 

 

12명의 크레타 사람들

 

- 삐에르 비야르를 흉내내며

 

 

①건파이터의 최후 ②집시 엔젤 ③ 위험한 유혹④ 새 2' ⑤해리 구출 작전 ⑥리비에라 ⑦홈 프론트 ⑧고스트 하우스 ⑨하우스 3 ⑩지옥에서 온 멕시칸 ⑪아울 ⑫반칙 게임의 공통점은 ? 정답은 한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다. 바로 알란 스미시/ Alan Smithee ' 다. 만든 작품마다 평단의 저주 같은 욕설을 들어야 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났을 터.  < 시민 케인 > 의 오손 웰즈'가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면 알란 스미시'는 저주 받은 감독 열전에서 대왕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하나 숨어 있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 알란 스미시 " 라는 감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감독이다.

 

그렇다면 유령이 영화를 만들었냐 ? 그것도 아니다. 영화적 완성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버지가 물려준 이름을 걸기에는 부끄러울 때 사용하는 이름이 바로 알란 스미시이다. 설에 의하면 Alan Smith에 - ee'를 추가했다거나, 'The Alias Men'의 철차를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두 개의 설이 있다. " 가공의 인물 " 이라는 뜻이다. 알란 스미시란 가명이면서 동시에 익명들의 조합이다. 이처럼 쪽팔려서 숨은 익명들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알란 스미시 필모그라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명의 알란스미시가 아니라 12명의 알란스미시들'이다. 그것은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가 선보인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 에서의 트릭과 유사하다. 살해당한 사람은 1명이지만 그  사람을 살해한 사람은 12명인 것처럼......

 

독자인 당신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이유는 부분/1명의 범인'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 12명의 범인들'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 오리엔트 특급... > 에서 " 범인은 다. 오직 범인들이 있을 뿐이다. " 그러므로 범인은 nothing'이고, 범인들은 thing'이다. nothing'이란 < 아무것도 아니 > 거나 < 단 하나도 없 > 는 존재를 가리키는 대명사이기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도전장에 뿔난 당신이 계속 씩씩거리면서 < 범인 > 을 찾는 데 집착할수록 당신은 점점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찾는 데 진땀을 흘릴 것이다. 저자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알리바이'는 alius ( 다른 ) + ibi ( 거기에 ) 를 합친 것으로 " 다른 + 장소에 " 라는 뜻이다. 그러니깐 용의자가 살인이 일어난 장소'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알리바이'다.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은 곧 타소존재증명/ 他所存在證明'을 의미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 장소A에 내가 없었음/부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장소 B에 내가 있었음/존재'를 증명 "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장소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대상은 누구인가 ? 바로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설정'이다. 그것은 응시다. 알리바이란 2명 이상이 (살인현장이아닌) 다른 장소에 함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성립이 될 수 없다. < 오리엔트... > 에서 12명의 용의자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12명 각자가 다른 장소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12명의 용의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곧 12명의 용의자 가운데 살인 사건 당시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12명 가운데 1명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혼자일 수밖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12명 모두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가 있을까 ? 결국 12명 가운데 최소 1명은 살인자이고 나머지 1명 이상은 살인자를 도와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포와르는 수사의 초점을 범인'이 아니라 범인들'에 맞추어 사건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포와르가 고심했던 부분은 < 범인들 > 이라는 범위'다. 만약에 A를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A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B는 공범자가 된다. 그렇다면 공범자인 B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C의 진술은 믿을 만한 것인가 ? C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D는 ?! 만약에 공범자인 B와 공범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C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C 또한 공범자일 가능성이 높다. 포와르는 이러한 방식으로 D, E, F, G, H, I, J, K, L 의 공통분모'를 찾아낸다.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소설은 공교롭게도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데카르트가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라고 주장했다면, 라캉은 " 타자가 나를 보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라고 주장한다. Alibi란 결국 존재 증명이다. < 나 > 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진술이 아니라 타자의 진술에 의해서이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로부터 사라진 사람이거나, 실종된 사람, 잊혀진 사람, 죽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nothing에서 thing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야만 가능한다. 타자가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된다. 늑대인간, 설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들'이다.

 

< 오리엔탈 특급... > 은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 의 세련된 확장형'처럼 보인다. < 애크로이드... > 가 제임스 쉐퍼드'라는 인물이 말하는 거짓 진술'이라면, < 오리엔탈 특급 > 은 12명나 되는 제임스 쉐퍼드가 말하는 거짓 진술이다. 독자는 그들에 의해 농락당한다. 그래야 재미가 있다. 그게 추리소설의 룰이다. 고전이 되어버린 이 소설이 가진 트릭을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발설'이 될 수 없다. 범인은 1명이 아니라 12명이다. 이런 속임수라면 우리는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능력 가운데 가장 신뢰가 안 가는 부분은 < 눈 > 이다. 형광등은 1초에 60번이나 깜빡거리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시력 좋은 파리만이 깜빡거리는 조명 때문에 죽을 맛이다. 알리바이'란 결국 인간이 가진 기관 가운데 가장 믿지 못할 눈에 의지하는 진술 방식'이다. 그래서 처소존재증명'은 늘 불완전하다, 존재는 불안이다 !

 

거짓말 패러독스'에서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포와로 ) 추궁 때문에 억지로 입을 연 ( 살인자 ) 자백들'은 액면 그대로 진실일까 ? 살인자들이 말한 정의에 대한 심판 운운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그들이 말한 진술은 거짓말일 확률이 더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100%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크레타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다. 만약에 대다수 공모자들이 댓가를 받고 죽은 아이의 부모를 도운 것이라면 ?! 그렇다면 그것은 청부살인이 아닐까. 살인자들이 말한 마지막 진술은 진짜 속내를 숨기기 위한, 포와로의 연민을 건드려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포와로가 명석한 두뇌로 모든 사건을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은 피해자 12명이 전하는 진술이었다. 포와로는 연민 때문에 판단을 그르친다 !  소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끝난다.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탐정 포와로'가 연민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포와로는 크레타 사람이 말하는 거짓말에 속은 것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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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ter 2013-04-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도우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네요. 알란 스미시...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9 00:31   좋아요 0 | URL
아, 세븐에 나온 캐릭터를 기억하네요. 후후.. 맞습니다. 알란 스미시나 존도우나 홍길동이나 무명씨'나 모두 같은 말입니다.
 
위대한 영화 1 위대한 영화 1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로저 애버트.

 

 

 

로저 애버트의 부고를 듣고 나서 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읽는 중이다. 나는 그가 어떤 영화에 대해 내린 가혹한 혹은 관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종종 들기는 하지만 그가 뛰어난 문장가'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널리즘 비평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다란 성과를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로저 애버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처음 읽고 났을 때는 실망이 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와 내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틈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고 나서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문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글로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령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에 대해 파스빈더는 감정의 고양된 상태와 침울한 상태를 영화에서 모두 제거하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절망만을 간직한다. “ 라고 담담하게 써내려갈 때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문장에 감탄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 조용한 절망 > 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울컥했다. 좋은 문장은 결코 잰 체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 몇몇을 소개한다. 아마... 당신은 아래 문장을 읽고 피,똥,쌀, 것이다.

 


 

 

노스페라투 : 노스페라투는 암과 전쟁, 질병과 광기 등,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난 우리의 걱정거리 모두를 다룬 영화다.

 

 

3는 늘 애매모호한 시간이다. 오후 세 시는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간이며, 새벽 세 시 또한 잠을 자거나 깨어나거나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르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버트는 근심을 새벽 세 시라고 묘사했는데, 근심이란 원래 생각만 많지 실천하지 않는 것들의 총합이다.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책은 아동용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을 때까지 끝없이 전개되고 반복되며, 다시 예전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를 되풀이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중략 ) 영화 관람의 재미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내놓는 것은 패배나 다름 없다.

좋은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은 관객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오고가는 교감이다. 그런데 해피엔딩은 결말이 명확하다. 애버트는 그것을 어린이용 서사라고 말하며 패배라고 규정한다.

 

카사블랑카: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에서 버그먼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출한다. 혼란스러웠을 법도 하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도 비행기에 오를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영화 관계자 중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버그먼은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 사연은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버트가 훌륭한 문장가인 이유는 :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일이라면 이 문장을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은 배우와 스텝 간의 계급적 차이를 조성한다. 그것은 결국 비디제시스와 디제시스 간의 운명적 간극의 문제이며, 불화를 조성하고, 소통은 단절되며,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깐 버그만이 공항에서 보여준 혼란스러운 연기는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 라고 쓰지 않았을까 ? 정성일이 쓴 골때리는 만연체는 참... 쓰다. 쓸개 같은 문장이다.

 

쉰들러리스트: (스필버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쉰들러 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애버트의 스필버그에 대한 간결한 정의는 좋아한다. 스필버그는 확실히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이 문장은 고스란히 로저 애버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로저 애버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내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가 써내려간 문장을 읽으며 기꺼이 즐거워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설득이 아니다. 로저 애버트가 가지고 있는 힘은 설득에서 나온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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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정성일 문체 비판 : " 모두 밥그릇 때문... 현실은 어쩔 수 없더군 ! "

 

 

 

 

 

 

정성일은 < 언젠가 세상은... > 에서 "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것이다. " 라고 말했으나 아무래도 나는 당신이 쓴 딱딱한 책에 별 하나를 매겨야 할 것 같다. 이 자세에 대해 천박한 취향'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별점 체크를 하지 않고서는 리뷰를 할 수 없는 알라딘 시스템'에 대한 지적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적을 정성일 씨가 자주 사용하는 말 본새'로 흉내 내자면 다음과 같다. 

 

" 이런 식의 별점 체크, 그러니깐 신경쇠약 직전의 자본주의적 욕망 기계가 요구하는 뻔뻔한 자세에 대한 우리는, 영화제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대한 우리들의 외침이며 근심입니다. 이제 개인을 향한 집단적 에티튜드'는 버리고 시스템에 대한 통열한 자기 반성으로 나아가, 이런 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행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윤리적 결심. 그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자만의, 이상한 방식의 윤리적 태도를 넘어, 너머와 넘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앎의 음란성을 배제하려는 롤랑바르트적 동의이며 프루동과 바쿠닌 혹은 조르주 소렐적 동맹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숩니다. " ( 내가 쓰고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

 

이 문장을 이해하기란 꽤나 까다롭다. 아래 문장을 보자.

 

 

방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침묵. 우리는 영화를 그저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의지해서 칸트와 사드를, 라캉과 지첵을, 들뢰즈-가타리와 바타이유를,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를, 니체와 레비나스를, 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리비도를 끌어들이건, 잉여가치를 발견하건, 부유하는 기표를 따라가건, 소문자 타자의 구멍을 채우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에 의지해서 철학을, 정신분석학을, 혹은 다른 예술 장르의 비유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철학에 의지해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 정성일, 필사의 탐독 128 p

 

이 놀랄만한 문장은 꽤나 화려하다. 철학 족보를 일목요연하게 압축시키는 정성일 식 <골때리는 만연체 > 는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문제는 제시된 철학자를 짝패로 병합하여 나열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묶음에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냥 자동기술 ( 自動記述 , écriture automatique ) 에 의한 무의미한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 칸트와 사드 > 를 기술하니 문득 라캉이 말한 " 칸트와 함께 사드를 ! " 이라는 구호가 생각났을 것이고, 라캉 하니 지첵이 떠올라 라캉과 지첵을 짝패처럼 묶다가 갑자기 그 유명한 짝패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의형제 생각이 났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르쥬 바타이유, 지그문트 프로이트, 벤야민, 아도르노'가 생각났을 것이다. 이처럼 차별성 없는 짝패들의 병합이라면 차라리 칸트, 사드, 라캉, 지첵.... 이런 식으로 나열했음이 옳다. 그런데 그는 왜 문장에서 철학가들을 짝패로 묶어서 나열했을까 ? 굉장히 의미있는 분류처럼 말이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은 결국 철학을 말하기 위해서 영화'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충고다. 철학이라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영화를 엑스트라'로 쓰지 말라는 것. 이러한 태도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가 써온 글(들)은 한 페이지 걸러 한 장 꼴로 데리다를 거론하고, 들뢰즈와 지첵을 경유해서 에릭 홉스본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자신의 영화 평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인용된 수많은 철학'은 용서할 수 있지만 철학을 말할 때 영화를 인용하면 안 된다는 불관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영화는 오로지 영화 내에서만 사유해야 한다는 고집 아닌 똥고집'은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글 본새와는 차이가 많다. 그는 왜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 칸트사드라캉지첵들뢰즈가타리바타이유프로이트소쉬르벤야민아도르노크리스테바이리가라이저리가라이니체레비나스 " 를 거들먹거리는 것일까 ? 다음은 그가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던 ( 영화를 사랑한다는 ) 친구와 우정에 대한 정의다.

 

 

박상륭의 < 열명길 > 을 읽고 감명했다는 독자를 만날 때 문학평론가들에게는괴로워질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존 레논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문장을 볼 때 음악평을 쓰는 내친구는 괴로워진다는 말을 한다. 소설의 이곳저것에서 < 블레이드러너 > 를 논하고, 이유 없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장면이 인용되고, 내가 본 그 영화에 대해서는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루한 영화론을 읽어야 할 때, 나는 그냥 소설을 덮어 버린다.... ( 중략 ) # 사람은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

 

" 영문과 교수들께서 먼저 영화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도 프레드릭 제임슨이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던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다. 소설가들이 영화의 기법을 소설에 도입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넘겼다. 시인들이 영화의 제목을 빌려 왔을때 그건 한 번 하고 말아야 할 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어야만 했다. "

 

-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 왜 한국 문학과 한국 영화는 서로 우정을 나눌 수 없는가 )

 

 

 

 

 

 

 

 

 

 

 

" ......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 사람들이 < 도둑질 하고 도둑질당하고 > 을 읽으면 혀를 끌끌 찰 것이다. 김성곤 교수는 영미문학에 대해서나 말을 하지 왜 영화를 기웃거리다가 욕을 먹는 것일까, 고미숙 또한 수유 너머에서 고전 독해에만 집중했다면 < 그 혀' > 라는 조롱은 면했을 것이 아닌가. 정성일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은 " 너나 잘하세요 ! " 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짜증처럼 읽힌다. " 남의 업장 넘보지 마라이잉 ? " 결국은 밥그릇인가 ?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대한민국 평론가의 평론집보다는 고미숙의 < 이 영화를 보라 > 가 내용이 알차고 깊다. )

 

 

 

 

 

 

 

 

 

 

 

그런데 영화에 대한 훌륭한 저서들 가운데는 딴 살림 차린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정성일 씨가 존경하는 ( 영화학자도 아닌, 감히...... ) 철학자 들뢰즈'는 < 영화 1,2 > 를 쓰지 않았던가 ?  틈만 나면 히치콕에 대해 말하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슬라보예 지첵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이며, 사회학 교수인 더글라스 켈너의 < 카메라 폴라티카 > , 영문과 교수 수잔 재퍼드의 < 하드 바디 >,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 스타 >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 혀가 그 혀인가 ?  

 

▦  자신의 책 제목인 < 언제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는 들뢰즈의 문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이다. < 폭풍의 언덕 > 은 불꽃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가 쓴 책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 흔한 사랑 한 번 못하고 서른에 결핵으로 죽었다. 그리고 히치콕은 경찰이 무서워서 평생 운전면허증도 없었던 사내였다. 히치콕은 오히려 범죄의 세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 우리는 누구나 그 영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영화를 보았으며 티븨 수신료를 매달 내면서 < 주말의 명화 > 를 시청했다. 이 정도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오로지 평론가의 몫인가 ? 웃으며 코 판다. 잇힝 ~

 

그가 가진 태도는 접어두고서라도 일단 쓸데없이 긴 나열, 불분명한 주어 설정, 그리고 미완성으로 끝나는 술어들의 나열은 읽기를 방해한다. 문장이 틀어지면 삭제하고 다시 써야 하는데 그는 삭제 대신에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그냥 쉼표로 남겨두고는 다시 다음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결국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뜬금없이 마침표로 끝난다. 그것은 빵 봉지'를 뜯어 빵을 한 입만 베어물고는 식탁 위에 놓은 채 다시 다음 빵 봉지를 뜯어 한 입 베어무는 꼴과 다르지 않다. 먹다 만 빵들이 탁자 위에 널려 있다간 엄마한테 혼나요. 그는 개성적 문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인명 사전식 보그**체'에 가깝다.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수많은 이름들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이다. 다음은 < 취화선 > 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제 8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난 다음에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케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건, 허우 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캐머린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 필사의 탐독, 취화선

 

 

이런 문장을 읽을 때 종종 칼칼한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명 사전 식 나열'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그는 임권택을 말하기 위해서 조이스, 프루스트, 브루크너, 베케트, 난니 모레티, 허우 샤오시엔, 제임스 캐머런, 데이비드 린치'를 나열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 문체보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기본적으로 인터뷰이'보다 낮은 자세'로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이 겸손은 인터뷰어'가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그런데 정성일은 항상 감독보다 많이 안다는 자세'로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는 내 해석이 맞는가 틀린가에 대한 확인에 열중한 나머지 종종 무례하기까지 하다. 정성일은 날카로운 질문과 무례한 질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트뤼포가 쓴 < 히치콕과의 대화 > 에서 트뤼포가 빛났던 점은 인터뷰이에 대한 존경과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질문이 더해져서 좋은 인터뷰를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일의 인터뷰는 언제나 살얼음을 걷듯 삐걱거린다.

 

그가 쓴 글을 읽다 보면 하얼핀 역에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직전에 작성한 혈서 같다. 비장하다. 그가 동료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트뤼포의 겸손함이나 로빈 우드의 적확한 텍스트 그리고 로저 에버트'의 담백한 글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법 연습과 대화의 기술이다. 조이스도 좋고 브루크너의제8교향곡3악장아다지오'도 좋은데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에 대한 개념부터 가져야 할 것 같다.

 

 

 

 

정성일 : 앎의 음란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닌가, 라는 느낌이 있어요.

박찬욱 :  ?? '앎의 음란성'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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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3-04-06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쩌면...어쩌면! 그 빌어먹을 한도 끝도 없이 주저리주저리 이어지는 거지같은 정성일 식 만연체에 대한 생각이 이리도 똑같으신지? 아하하하하하하하- 삼 년 묵은 똥이 쑥 빠지듯 속이 다 시원. 근데 더 골 때리게 환장하겠는 건, 그 분이 입으로 자기 문체를 뱉어낸다는 사실이지요. 아하하하하하하하- 도대체 어디서 쉬어야 할 지 내가 더 난감한 그 이의 말투를 듣고 있노라면 듣고 있던 라디오를 집어 던져 뽀개버리거나 옆에 있다면 멱살을 쥐고 제발 그 입 닥쳐! 라고 소리질러 주고픈 충동이;;;


언어 논술 강사 오래 하다보니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정성일 씨 비문법적 말투마다 빨간 팬으로 돼지꼬리 땡야-를 쳐 주고 싶다는;; 하도 말 많아서 그럼 영화는 잘 찍을라나? 혹시나 하고 영화 보러 갔다가 3시간 내내 이를 북북 갈며 욕만 줄창 하다 왔다는;; 블로그에 느와르 다방 욕 좀 올렸더니 몹쓸 추종자란 분들이 와서는 욕을 욕을...어후 썅, 역시 영화는 입으로 찍는 게 아니었어요. 영화를 글로 배웠어요! 의 정성일 씨는 청보 핀토스 감독에 취임했다 1년 만에 짤린 허구연 해설위원과 도플갱어! 영화게의 허구연!

안그래도 로저 이버트 옹이 별세했다 해서 그 이의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는데, 곰곰발 님도 정성일 씨를 떠올린 모양입니다. ㅎㅎㅎㅎ


마지막으로 정성일 씨께 한 마디 해주고 싶어요.

"(당신 요즘 말할 때) 숨은 쉬고 다니쇼?" 라구요.



참, 저는 (페루에 님 때문에) 알라딘에 로그인 하고 서재 만든 스눞이라고 합니다.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7 04:3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드디어 알라딘에 서재 하나 만들었군요. ㅎㅎ. 만들고 나니깐 리뷰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은데요..ㅎㅎ.
가끔 정성일 열혈팬들이 많아요. 저도 카페... 그거 비판했다고 욕만 먹고...ㅎㅎㅎㅎ.
맞습니다. 로저 에버트 사망 기사 보고... 짠해서 그에 대한 글을 쓰려고
정성일과 문장 비교하다가 그냥 정성일 비판으로... 어찌나 깔 게 많은지...ㅋㅋㅋㅋㅋㅋㅋㅋ
그의 문장 특징 가운데 하나가 문장이(주부+술부) 가 완성되지도 않은데 마침표대신 쉼표 찍고는 다른 걸 주우욱... 이게 나열이 되요.... 대부분 술부가 미완성들인... 술부가 10개인다 주어가 정확히 안 보인다는 겁니다.
논술 가르치셔서 아시겠지만... 이건 정말 논술 고사 보면 0점입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이 비판하는 보그 ** 체보다 더 보그 ** 체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것을 잘 모르는 정성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게 좋은 문장인 줄 안다는 겁니다.
영화 리뷰 비스무리한 것 보면 죄다 정성일체'예요. 아니 이걸 왜 따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앎의 음란성'이란 게 뭔지 정말 궁금해요. 제가 국어 순혈주의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의, ~적, ~ 성... 이런 번역투는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 ( 안 쓰는 건 아닙니다 ~ 의'는 안 쓸 수가 없더라고용.. ) 이 사람은 그래도 잡지 편집장까지 하신 분인데 너무< A의 B 性 > 이런 게 너무 많습니다. 앎의 음란성' 같은 별천지 대꾸'처럼 말이죠.

로저 에버트를 보세요. 저널리즘 비평과 본격 비평'의 차이를 인정한다고 해도 둘 사이의 틈이 너무 큽니다.
에버트 옹 쓰려다가 정성이 건드리게 되고 그러다가 그만...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04-07 05:59   좋아요 0 | URL
스누피 님 열불나라고 글을 더 추가했습니다. 추가한 글은 좀더 더 더 열받습니다...

비로그인 2013-04-09 18:49   좋아요 0 | URL
아....이 분 참 대단-똑똑하긴 한데 좀 재쉅다- 스타일이심. ㅋㅋ
읽어 보고 더더 열 받을게요. ㅋㅋㅋㅋ


2013-04-06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7 04: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9 18: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09 1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winspica 2013-04-10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리가라이저리가라이 ㅋㅋ 훠이 훠이

곰곰생각하는발 2013-04-10 04:26   좋아요 0 | URL
전 저 분 이름 외울 때 이라가라저리가라.. 식으로외웠어요.. 왜 영어 연상 암기법있잖아요..ㅎㅎ.

소림꿈나무 2018-12-31 0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야씨발 개소리도 좀 그럴듯하게 해
정성일이 얘기하는게 니가 말하는 그거같어?
니가 보기에 영화는 씨발 언터처블하라고 정성일이가 말하는거같냐?
씨;발 같은 텍스트를 놓고도 왜 나랑 니 생각이 씨발 왜케 차이가나는거여
정성일은 영화를 오독하지 말라고 말하잖어 병신새끼야
너같이 대가리에 똥박에 안들은 새끼들이 아는척 할라고 영화를 끌어들이면서 오독을 하니까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잇잔아 병신새끼야 이해안되 새대가리야? 간단하게 설명해줘? 사회현상이나 역사나 철학이나 뭐 어떤분야에서 지들 이론 설명할때 영화를 끌어다 쓰면서 설명을 하면은 그거에 맞게 끌어다 쓰면서 설명을 해야는데 너같은 돌대가리 새끼들이 어줍잖게

소림꿈나무 2018-12-31 0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상황에도 맞지도 않는 영하 끌어들이면서 꼴깝떠ㅏ니까ㅣ 그러지 말라고 얘기하잔어 그러니까 그냥 간단하게 너같이 대가리에 똥밖에 안들은 새끼들이 내머리엔 똥은 없고 뇌가 잇습니다 이러니까 씨바ㅓㄹ 그냥 보기에도 같잖은거지

소림꿈나무 2021-12-17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문학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만큼 훌륭한 예술이고 누구나 들먹일수 있을정도로 만만한 예술이 아니라는 말을 정성일이 하고 있는데 잘 이해가 안가나요? 예컨데 이문열이나 김훈 진중권에 대해서는 감히 칼날을 들이댈수 없으면서 영화에 대해서는 감히 칼날을 들이대면서 이리저리 파헤지는거 자체가 영화를 하위문화로 인지하는것에대한 오만함을 저지르지 말라는 말이에요. 글쓴이가 감히 진중권이나 김훈 이문열과 정면으로 논의할수 있다고 믿습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보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할거 같은데요. 마찬가지로 정성일은 영화에 대해서 감히 논하지 말라는 거예요. 좆도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