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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영화 1 ㅣ 위대한 영화 1
로저 에버트 지음, 최보은.윤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로저 애버트.
로저 애버트의 부고를 듣고 나서 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다시 읽었다. 세 번째 읽는 중이다. 나는 그가 어떤 영화에 대해 내린 가혹한 혹은 관대한 평가가 정당한 것이었는가, 라는 의문이 종종 들기는 하지만 그가 뛰어난 문장가'라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널리즘 비평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는 커다란 성과를 이룩한 것처럼 보인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로저 애버트가 쓴 < 위대한 영화 > 를 처음 읽고 났을 때는 실망이 컸다. 영화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와 내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틈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읽고 나서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문장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어떤 영화가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우라'를 글로 정확하게 표현할 줄 아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가령 파스빈더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에 대해 “파스빈더는 감정의 고양된 상태와 침울한 상태를 영화에서 모두 제거하고,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조용한 절망만을 간직한다. “ 라고 담담하게 써내려갈 때 그의 영화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이 문장에 감탄했을 것이다.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 조용한 절망 > 이라는 문장을 읽을 때, 나는 울컥했다. 좋은 문장은 결코 잰 체하지 않는다. 그의 문장 몇몇을 소개한다. 아마... 당신은 아래 문장을 읽고 피,똥,쌀, 것이다.
▦ 노스페라투 : 노스페라투는 암과 전쟁, 질병과 광기 등, 새벽 세 시에 잠에서 깨어난 우리의 걱정거리 모두를 다룬 영화다.
3시’는 늘 애매모호한 시간이다. 오후 세 시’는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른 시간이며, 새벽 세 시 또한 잠을 자거나 깨어나거나 하기에는 너무 늦거나 이르다. 이 시간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애버트’는 근심을 새벽 세 시’라고 묘사했는데, 근심이란 원래 생각만 많지 실천하지 않는 것들의 총합이다.
▦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 :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이야기책은 아동용이다. 이야기가 이야기를 더 이상 얼버무릴 수 없을 때까지 끝없이 전개되고 반복되며, 다시 예전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를 되풀이한다는 것을 어른들은 알고 있다.....( 중략 ) 영화 관람의 재미는 질문을 던지는 데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미리 내놓는 것은 패배나 다름 없다.
좋은 영화’는 결말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말은 관객이 선택해야 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오고가는 교감’이다. 그런데 해피엔딩’은 결말이 명확하다. 애버트는 그것을 어린이용 서사라고 말하며 패배라고 규정한다.
▦ 카사블랑카: 마지막 장면의 클로즈업에서 버그먼의 얼굴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표출한다. 혼란스러웠을 법도 하다. 촬영 마지막 날까지도 비행기에 오를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이 영화 관계자 중에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버그먼은 영화가 어떻게 끝날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 배경 사연은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감정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기묘한 결과를 낳았다.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애버트가 훌륭한 문장가’인 이유는 : 그녀는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만 알았지, 어느 쪽으로 불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정성일이라면 이 문장을 이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 할리우드 시스템은 배우와 스텝 간의 계급적 차이’를 조성한다. 그것은 결국 비디제시스와 디제시스 간의 운명적 간극의 문제이며, 불화를 조성하고, 소통은 단절되며, 잡음은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깐 버그만이 공항에서 보여준 혼란스러운 연기는 매우 이상한 방식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연기는 디제시스에 어떤 주관성을, 내면화를, 착각을, 부정확성을, 무엇보다도 비현실성을 부여한다. “ 라고 쓰지 않았을까 ? 정성일이 쓴 골때리는 만연체는 참... 쓰다. 쓸개 같은 문장’이다.
▦ 쉰들러리스트: 그(스필버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다.
쉰들러 리스트’를 좋아하지 않지만, 애버트의 스필버그에 대한 간결한 정의’는 좋아한다. 스필버그는 확실히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분명하다. 이 문장은 고스란히 로저 애버트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로저 애버트는 자신이 말하고 싶은 바를 수백만의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비록 그가 내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가 써내려간 문장을 읽으며 기꺼이 즐거워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설득이 아니다. 로저 애버트가 가지고 있는 힘은 설득에서 나온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