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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명의 크레타 사람들
- 삐에르 비야르를 흉내내며
①건파이터의 최후 ②집시 엔젤 ③ 위험한 유혹④ 새 2' ⑤해리 구출 작전 ⑥리비에라 ⑦홈 프론트 ⑧고스트 하우스 ⑨하우스 3 ⑩지옥에서 온 멕시칸 ⑪아울 ⑫반칙 게임의 공통점은 ? 정답은 한 감독이 만든 작품이라는 점이다. 바로 알란 스미시/ Alan Smithee ' 다. 만든 작품마다 평단의 저주 같은 욕설을 들어야 했으니 속에서 열불이 났을 터. < 시민 케인 > 의 오손 웰즈'가 가장 위대한 감독이라면 알란 스미시'는 저주 받은 감독 열전에서 대왕 자리'를 차지할 만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전이 하나 숨어 있다. 거창한 것은 아니다. " 알란 스미시 " 라는 감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감독이다.
그렇다면 유령이 영화를 만들었냐 ? 그것도 아니다. 영화적 완성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아버지가 물려준 이름을 걸기에는 부끄러울 때 사용하는 이름이 바로 알란 스미시이다. 설에 의하면 Alan Smith에 - ee'를 추가했다거나, 'The Alias Men'의 철차를 조합해서 만들었다는 두 개의 설이 있다. " 가공의 인물 " 이라는 뜻이다. 알란 스미시란 가명이면서 동시에 익명들의 조합이다. 이처럼 쪽팔려서 숨은 익명들이 모여서 만들어 놓은 것이 바로 알란 스미시 필모그라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1명의 알란스미시가 아니라 12명의 알란스미시들'이다. 그것은 마치 아가사 크리스티가 선보인 < 오리엔트 특급 살인 사건 > 에서의 트릭과 유사하다. 살해당한 사람은 1명이지만 그 사람을 살해한 사람은 12명인 것처럼......
독자인 당신이 아가사 크리스티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 이유는 부분/1명의 범인'에 집착한 나머지 전체/ 12명의 범인들'을 보지 못한 까닭이다. < 오리엔트 특급... > 에서 " 범인은 없다. 오직 범인들이 있을 뿐이다. " 그러므로 범인은 nothing'이고, 범인들은 thing'이다. nothing'이란 < 아무것도 아니 > 거나 < 단 하나도 없 > 는 존재를 가리키는 대명사이기에 아가사 크리스티의 도전장에 뿔난 당신이 계속 씩씩거리면서 < 범인 > 을 찾는 데 집착할수록 당신은 점점 아무것도 없는 헛것'을 찾는 데 진땀을 흘릴 것이다. 저자가 노린 것은 바로 그것'이다.
알리바이'는 alius ( 다른 ) + ibi ( 거기에 ) 를 합친 것으로 " 다른 + 장소에 " 라는 뜻이다. 그러니깐 용의자가 살인이 일어난 장소'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알리바이'다. 현장부재증명/現場不在證明'은 곧 타소존재증명/ 他所存在證明'을 의미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 장소A에 내가 없었음/부재'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장소 B에 내가 있었음/존재'를 증명 " 하면 된다. 그렇다면 다른 장소에 당신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대상은 누구인가 ? 바로 누군가가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설정'이다. 그것은 응시다. 알리바이란 2명 이상이 (살인현장이아닌) 다른 장소에 함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성립이 될 수 없다. < 오리엔트... > 에서 12명의 용의자가 모두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12명 각자가 다른 장소에 자신의 알리바이를 증명해 줄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 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12명의 용의자가 완벽한 알리바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곧 12명의 용의자 가운데 살인 사건 당시에 혼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논리는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이다. 왜냐하면 12명 가운데 1명은 살인자이므로 반드시 혼자일 수밖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12명 모두 다른 장소에서 누군가와 함께 있을 수가 있을까 ? 결국 12명 가운데 최소 1명은 살인자이고 나머지 1명 이상은 살인자를 도와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된다.
포와르는 수사의 초점을 범인'이 아니라 범인들'에 맞추어 사건을 해결한다. 이 과정에서 포와르가 고심했던 부분은 < 범인들 > 이라는 범위'다. 만약에 A를 범인이라고 가정한다면 A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B는 공범자가 된다. 그렇다면 공범자인 B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C의 진술은 믿을 만한 것인가 ? C의 알리바이를 증명한 D는 ?! 만약에 공범자인 B와 공범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C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면 C 또한 공범자일 가능성이 높다. 포와르는 이러한 방식으로 D, E, F, G, H, I, J, K, L 의 공통분모'를 찾아낸다. 그들은 모두 한통속이었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의도했던 바는 아니겠지만 소설은 공교롭게도 철학적 질문에 대한 답처럼 보인다. 데카르트가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 라고 주장했다면, 라캉은 " 타자가 나를 보고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라고 주장한다. Alibi란 결국 존재 증명이다. < 나 > 라는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의 진술이 아니라 타자의 진술에 의해서이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고립된 로빈슨 크루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는 사회로부터 사라진 사람이거나, 실종된 사람, 잊혀진 사람, 죽은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nothing에서 thing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어야만 가능한다. 타자가 그를 발견하는 순간 그는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된다. 늑대인간, 설인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누군가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세상에 없는 존재들'이다.
< 오리엔탈 특급... > 은 < 애크로이드 살인 사건 > 의 세련된 확장형'처럼 보인다. < 애크로이드... > 가 제임스 쉐퍼드'라는 인물이 말하는 거짓 진술'이라면, < 오리엔탈 특급 > 은 12명나 되는 제임스 쉐퍼드가 말하는 거짓 진술이다. 독자는 그들에 의해 농락당한다. 그래야 재미가 있다. 그게 추리소설의 룰이다. 고전이 되어버린 이 소설이 가진 트릭을 말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발설'이 될 수 없다. 범인은 1명이 아니라 12명이다. 이런 속임수라면 우리는 기꺼이 속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능력 가운데 가장 신뢰가 안 가는 부분은 < 눈 > 이다. 형광등은 1초에 60번이나 깜빡거리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한다. 시력 좋은 파리만이 깜빡거리는 조명 때문에 죽을 맛이다. 알리바이'란 결국 인간이 가진 기관 가운데 가장 믿지 못할 눈에 의지하는 진술 방식'이다. 그래서 처소존재증명'은 늘 불완전하다, 존재는 불안이다 !
거짓말 패러독스'에서 크레타 사람들은 거짓말'만 한다. 그들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포와로 ) 추궁 때문에 억지로 입을 연 ( 살인자 ) 자백들'은 액면 그대로 진실일까 ? 살인자들이 말한 정의에 대한 심판 운운은 과연 진심이었을까 ? 논리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그들이 말한 진술은 거짓말일 확률이 더 높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100%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크레타 사람은 입만 열면 거짓말만 하는 사람들이다. 만약에 대다수 공모자들이 댓가를 받고 죽은 아이의 부모를 도운 것이라면 ?! 그렇다면 그것은 청부살인이 아닐까. 살인자들이 말한 마지막 진술은 진짜 속내를 숨기기 위한, 포와로의 연민을 건드려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발버둥인지도 모른다.
포와로가 명석한 두뇌로 모든 사건을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판단을 흐리게 만든 것은 피해자 12명이 전하는 진술이었다. 포와로는 연민 때문에 판단을 그르친다 ! 소설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 끝난다. 판단을 독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것은 탐정 포와로'가 연민 때문에 사건을 해결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포와로는 크레타 사람이 말하는 거짓말에 속은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