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성일 영화평론집 세트 - 전2권 -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필사의 탐독
정성일 외 지음 / 바다출판사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정성일 문체 비판 : " 모두 밥그릇 때문... 현실은 어쩔 수 없더군 ! "
정성일은 < 언젠가 세상은... > 에서 " 당신이 하지 말아야 할 것 중 하나는 영화에 별점을 매기는 것이다. " 라고 말했으나 아무래도 나는 당신이 쓴 딱딱한 책에 별 하나를 매겨야 할 것 같다. 이 자세에 대해 천박한 취향'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별점 체크를 하지 않고서는 리뷰를 할 수 없는 알라딘 시스템'에 대한 지적이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 이 지적을 정성일 씨가 자주 사용하는 말 본새'로 흉내 내자면 다음과 같다.
" 이런 식의 별점 체크, 그러니깐 신경쇠약 직전의 자본주의적 욕망 기계가 요구하는 뻔뻔한 자세에 대한 우리는, 영화제를 위해 아무 조건 없이 시간을 할애하는, 힘을 합쳐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대한 우리들의 외침이며 근심입니다. 이제 개인을 향한 집단적 에티튜드'는 버리고 시스템에 대한 통열한 자기 반성으로 나아가, 이런 식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한, 보이지 않는 벽을 허무는 행위가 먼저 선행되어야 한다는 믿음. 그리고 윤리적 결심. 그것은 영화를 사랑하는 자만의, 이상한 방식의 윤리적 태도를 넘어, 너머와 넘어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앎의 음란성을 배제하려는 롤랑바르트적 동의이며 프루동과 바쿠닌 혹은 조르주 소렐적 동맹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저는 믿숩니다. " ( 내가 쓰고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다. )
이 문장을 이해하기란 꽤나 까다롭다. 아래 문장을 보자.
방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침묵. 우리는 영화를 그저 관념적으로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말은 영화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과 같다. 그러니까 영화에 의지해서 칸트와 사드를, 라캉과 지첵을, 들뢰즈-가타리와 바타이유를, 프로이트와 소쉬르를, 벤야민과 아도르노를, 크리스테바와 이리가라이를, 니체와 레비나스를, 또는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리비도를 끌어들이건, 잉여가치를 발견하건, 부유하는 기표를 따라가건, 소문자 타자의 구멍을 채우건, 그건 아무래도 좋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영화를 말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영화에 의지해서 철학을, 정신분석학을, 혹은 다른 예술 장르의 비유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 말을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철학에 의지해서 영화를 사유하는 것이 아니다.
- 정성일, 필사의 탐독 128 p
이 놀랄만한 문장은 꽤나 화려하다. 철학 족보를 일목요연하게 압축시키는 정성일 식 <골때리는 만연체 > 는 발군의 실력을 뽐낸다. 문제는 제시된 철학자를 짝패로 병합하여 나열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이 묶음에는 통일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냥 자동기술 ( 自動記述 , écriture automatique ) 에 의한 무의미한 나열에 지나지 않는다. < 칸트와 사드 > 를 기술하니 문득 라캉이 말한 " 칸트와 함께 사드를 ! " 이라는 구호가 생각났을 것이고, 라캉 하니 지첵이 떠올라 라캉과 지첵을 짝패처럼 묶다가 갑자기 그 유명한 짝패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 의형제 생각이 났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조르쥬 바타이유, 지그문트 프로이트, 벤야민, 아도르노'가 생각났을 것이다. 이처럼 차별성 없는 짝패들의 병합이라면 차라리 칸트, 사드, 라캉, 지첵.... 이런 식으로 나열했음이 옳다. 그런데 그는 왜 문장에서 철학가들을 짝패로 묶어서 나열했을까 ? 굉장히 의미있는 분류처럼 말이다.
그가 힘주어 말하는 것은 결국 철학을 말하기 위해서 영화'를 끌어들이지 말라는 충고다. 철학이라는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영화를 엑스트라'로 쓰지 말라는 것. 이러한 태도를 비판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그가 써온 글(들)은 한 페이지 걸러 한 장 꼴로 데리다를 거론하고, 들뢰즈와 지첵을 경유해서 에릭 홉스본을 이야기하는 식으로 끝난다는 점이다. 자신의 영화 평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인용된 수많은 철학'은 용서할 수 있지만 철학을 말할 때 영화를 인용하면 안 된다는 불관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영화는 오로지 영화 내에서만 사유해야 한다는 고집 아닌 똥고집'은 그가 지금까지 선보인 글 본새와는 차이가 많다. 그는 왜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 칸트사드라캉지첵들뢰즈가타리바타이유프로이트소쉬르벤야민아도르노크리스테바이리가라이저리가라이니체레비나스 " 를 거들먹거리는 것일까 ? 다음은 그가 습관처럼 자주 사용하던 ( 영화를 사랑한다는 ) 친구와 우정에 대한 정의다.
“ 박상륭의 < 열명길 > 을 읽고 감명했다는 독자를 만날 때 문학평론가들에게는괴로워질 것이다. 소설의 첫머리에서 존 레논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문장을 볼 때 음악평을 쓰는 내친구는 괴로워진다는 말을 한다. 소설의 이곳저것에서 < 블레이드러너 > 를 논하고, 이유 없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장면이 인용되고, 내가 본 그 영화에 대해서는 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지루한 영화론을 읽어야 할 때, 나는 그냥 소설을 덮어 버린다.... ( 중략 ) # 사람은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 “
" 영문과 교수들께서 먼저 영화에 대해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아마도 프레드릭 제임슨이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제임스 조이스를 이야기하던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다. 소설가들이 영화의 기법을 소설에 도입하겠다고 나섰을 때 그냥 웃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받아넘겼다. 시인들이 영화의 제목을 빌려 왔을때 그건 한 번 하고 말아야 할 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어야만 했다. "
- 도둑질하고, 도둑질당하고 ( 왜 한국 문학과 한국 영화는 서로 우정을 나눌 수 없는가 )
" ...... 그 혀로 삼류 헐리우드 영화를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 사람들이 < 도둑질 하고 도둑질당하고 > 을 읽으면 혀를 끌끌 찰 것이다. 김성곤 교수는 영미문학에 대해서나 말을 하지 왜 영화를 기웃거리다가 욕을 먹는 것일까, 고미숙 또한 수유 너머에서 고전 독해에만 집중했다면 < 그 혀' > 라는 조롱은 면했을 것이 아닌가. 정성일 씨가 하고 싶었던 말은 " 너나 잘하세요 ! " 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쓰지 말라는 짜증처럼 읽힌다. " 남의 업장 넘보지 마라이잉 ? " 결국은 밥그릇인가 ? (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대한민국 평론가의 평론집보다는 고미숙의 < 이 영화를 보라 > 가 내용이 알차고 깊다. )
그런데 영화에 대한 훌륭한 저서들 가운데는 딴 살림 차린 사람이 의외로 많다. 정성일 씨가 존경하는 ( 영화학자도 아닌, 감히...... ) 철학자 들뢰즈'는 < 영화 1,2 > 를 쓰지 않았던가 ? 틈만 나면 히치콕에 대해 말하는 친근한 이웃집 아저씨 슬라보예 지첵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이며, 사회학 교수인 더글라스 켈너의 < 카메라 폴라티카 > , 영문과 교수 수잔 재퍼드의 < 하드 바디 >, 사회학자 에드가 모랭의 < 스타 >에 대해서는 뭐라고 할 것인가. 그 혀가 그 혀인가 ?
▦ 자신의 책 제목인 < 언제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 는 들뢰즈의 문장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쓰면 안 된다고 했는데, 사실 이 말은 틀린 말이다. < 폭풍의 언덕 > 은 불꽃 같은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가 쓴 책이었다. 에밀리 브론테는 그 흔한 사랑 한 번 못하고 서른에 결핵으로 죽었다. 그리고 히치콕은 경찰이 무서워서 평생 운전면허증도 없었던 사내였다. 히치콕은 오히려 범죄의 세계를 잘 몰랐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이 탄생한 것은 아닐까 ? 우리는 누구나 그 영화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입장료를 내고 영화를 보았으며 티븨 수신료를 매달 내면서 < 주말의 명화 > 를 시청했다. 이 정도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영화는 오로지 평론가의 몫인가 ? 웃으며 코 판다. 잇힝 ~
그가 가진 태도는 접어두고서라도 일단 쓸데없이 긴 나열, 불분명한 주어 설정, 그리고 미완성으로 끝나는 술어들의 나열은 읽기를 방해한다. 문장이 틀어지면 삭제하고 다시 써야 하는데 그는 삭제 대신에 완성되지 않은 문장을 그냥 쉼표로 남겨두고는 다시 다음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결국은 완성되지 않은 문장들이 둥둥 떠다니다가 뜬금없이 마침표로 끝난다. 그것은 빵 봉지'를 뜯어 빵을 한 입만 베어물고는 식탁 위에 놓은 채 다시 다음 빵 봉지를 뜯어 한 입 베어무는 꼴과 다르지 않다. 먹다 만 빵들이 탁자 위에 널려 있다간 엄마한테 혼나요. 그는 개성적 문체라기보다는 차라리 세계 인명 사전식 보그**체'에 가깝다. 끝없이 물고 늘어지는 수많은 이름들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의, 인용이다. 다음은 < 취화선 > 에 대한 부분이다.
우리는 소설을 읽고 난 다음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조이스나 프루스트 같은 미로를 헤치고 나온 다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 그저 할 수 있는 일은 친구들의 이름이 적힌 수첩을 들추면서 우리의 하루를 돌아볼 뿐이다. 세잔의 그림을 보고 난 다음 그 감흥을 아무렇게나 말하지 못한다. 브루크너의 제 8교향곡 3악장 아다지오에 대해서 방금 듣고난 다음에도 다시 한 번 더 듣고 말하겠다고 대답을 미룬다. 베케트의 무대는 거의 등장인물이 없는데도 무언가 보지 못한 것이 거기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영화는 보고 나오면, 그 영화가 난니 모레티건, 허우 샤오시엔이건, 제임스 캐머린이건, 데이비드 린치건, 임권택이건, 그게 누구의 영화건, 누구라도 영화관 문을 나서면서 방금 보고 나온 것에 대해서 금방 입을 연다.
- 필사의 탐독, 취화선
이런 문장을 읽을 때 종종 칼칼한 고추장에 밥을 비벼먹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명 사전 식 나열'은 어김없이 이어진다. 그는 임권택을 말하기 위해서 조이스, 프루스트, 브루크너, 베케트, 난니 모레티, 허우 샤오시엔, 제임스 캐머런, 데이비드 린치'를 나열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요 ? 문체보다 더욱 곤혹스러운 것은 인터뷰'다. 인터뷰어'는 기본적으로 인터뷰이'보다 낮은 자세'로 인터뷰'를 진행해야 한다. 이 겸손은 인터뷰어'가 가져야 할 기본적 자세'이다. 그런데 정성일은 항상 감독보다 많이 안다는 자세'로 영화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다. 그는 내 해석이 맞는가 틀린가에 대한 확인에 열중한 나머지 종종 무례하기까지 하다. 정성일은 날카로운 질문과 무례한 질문(들)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트뤼포가 쓴 < 히치콕과의 대화 > 에서 트뤼포가 빛났던 점은 인터뷰이에 대한 존경과 영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 그리고 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질문이 더해져서 좋은 인터뷰를 뽑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성일의 인터뷰는 언제나 살얼음을 걷듯 삐걱거린다.
그가 쓴 글을 읽다 보면 하얼핀 역에 도시락 폭탄을 던지기 직전에 작성한 혈서 같다. 비장하다. 그가 동료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트뤼포의 겸손함이나 로빈 우드의 적확한 텍스트 그리고 로저 에버트'의 담백한 글들이다. 그리고 또 하나, 문법 연습과 대화의 기술이다. 조이스도 좋고 브루크너의제8교향곡3악장아다지오'도 좋은데 주어와 술어의 호응 관계에 대한 개념부터 가져야 할 것 같다.
정성일 : 앎의 음란성이라고 부르는 것에 너무 가까이 다가간 게 아닌가, 라는 느낌이 있어요.
박찬욱 : ?? '앎의 음란성'이란 게 뭔지 잘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