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바닥 그리고 천정'에 대한 고정관념.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어... " 라는 달달한 대사'를 드라마에서 종종 듣고는 한다. 멋진 프로포즈이기는 하나, 사람이 처음 본 대상과 애착 관계를 형성하는 거위 새끼도 아니고 뭔 놈의 < 눈 뜨자마자 타령 > 인가 ! 신혼 3년만 지나봐라. 제일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알람 시계'다. 나 또한 아침에 눈 뜨자마자 보게 되는 것은 시계'였다. 불면증은 내 오랜 병, 새벽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잠이 드니 다음날 출근 걱정에 깊은 잠을 잘 수도 없다. 아침에 천근만근 내려앉은 눈을 뜬다는 것은 차라리 고통에 가까웠다.  1분이라도 더 자고 싶다는 욕심에 벽에 걸린 시계를 자주 보게 되는데 방 구조상 상체를 일으켜  세우거나 몸을 비틀어야 시계를 볼 수 있었다.

몸이 너무 피곤하다 보니깐 사소한 움직임조차도 고통스러웠다. 곰곰 생각했다. 눈 뜨면 시계를 바로 볼 수 있는 위치는 어디일까 ? 다음날, 벽에 걸린 시계를 떼어다가 침대 머리맡 바로 위 천정에 걸어 고정시켰다.  액자를 벽에 걸듯이 말이다. 눈 뜨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아... 시계'였다. 상체를 일으켜 세울 필요도 없고, 탁상용 시계를 찾아 손을 더듬거릴 필요도 없었다. 이불 속에서 꼼짝하지도 않은 채 눈만 뜨고도 시계가 보였다.  친구 놈은 발리로 신혼 여행 다녀와서 < 꽃잠 > 잔 얘길 하는데 나란 놈은 이곳에서 < 쪽잠 > 에 대해 말해야 하다니 감개가 존나 무량하다.  친구가 결혼을 하여 아침마다 퉁퉁 부은 아내의 얼굴을 질리게 볼 동안 나는 시계만 질리게 보았다. 

▷ 꽃잠 : ( 순우리말 ) 결혼한 신랑 신부가 처음으로 함께 자는 잠.

아침에 눈 뜨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사람이 당신이었다고 고백했던, 멋진 프로포즈로 로맨틱 가이'라는 칭찬을 받던 친구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 신혼은 딱 1년이더군. 아침에 눈 뜨자마자 마누라 얼굴이 보이면 화딱지가 나기 시작해.  부엌에서 아침 준비를 해야 할 시간에 마누라가 침대에서 자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고. 그날 아침 밥은 물 건너 간거지. 침대에서 눈 뜨자마자 아내 얼굴이 보이면 그때부터는 불행한 결혼 생활'이 시작되는 거라네. " 아침에 눈 뜨자마자 시계와 마주치는 나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침대에서 잠을 자고 있는 잠꾸러기 아내를 둔 친구의 말을 듣고는 박장대소했다. 그래도 눈 뜨자마자 파란 하늘이 보이는 사람'보다는 행복할 것이다. 

오래 전, 술에 취해서 화물차 트럭 위에서 파란 방수포를 이불 삼아 잠을 잔 적이 있다. 그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보이던 파란 하늘을 아직도 기억한다. 정말..... 판타스틱했다. 시계를 천정에 걸어두는 것은 생각보다 근사하다. 훌륭한 인테리어 배치'가 된다. 뭔가 아방가르드的이지 않은가 ! 물론 부작용도 따른다. 첫날 눈을 떴을 때는 천정을 벽이라고 생각하고는 서서 잠을 잤다고 착각했다. " 가지가지하는구나. 아... 이제는 내가 몽유병'을 앓고 있구나 ! " 하지만 이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여러분들도 한번 시도해 보기를 바란다. 시계는 항상 벽에 걸어두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천장은 반드시 조명 기구만 달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면 좋은 인테리어 공간을 만들 수도 있다.

▷ 에피소드 : 나는 망할랑 말랑 한 독립문의 허름한 산부인과'에서 태어났다. 간호사가 세상에 막 태어난 내 다리를 거꾸로 붙잡고는 말랑말랑한 엉덩이를 때렸다. 나는 우렁차게 울었다. 울음소리를 듣자 모두들 기뻐했다.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크면 클수록 건강하다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내가 망할랑 말랑 한 산부인과 분만실에서 배운 것은 내가 울면 사람들이 즐거워한다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힘차게 울었으나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난처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배운 것은 인간의 배신'이었다. 사람들은 울음'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분만실에서의 풍경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묻고는 한다. 맞는 말이다. 최초의 기억'은  4살 이후라고 한다. 나는 엄마 뱃속에서 4년 동안 살았다.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4살이었다. 나는 내 엉덩이를 때린 간호사를 아동학대죄로 경찰에 고발했다. 다음날, 한국일보 < 표주박 > 코너에 조그마한 기사가 실렸다. " 신생아, 자신을 아무 이유 없이 때린 간호사 고발 ! " 조선일보는 보다 자극적인 제목으로 < 세상만사 >에 기사를 실었다. " 신생아 간호사 고발 사건 일파만파 ! 아동 성추행으로 확산 조짐. " 이 이야기'는 모두 100% 실화다. 모르면 당신은...... 간첩이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이지만 산부인과에 대한 이야기를 할 자격이 있다. 늬낌 아니까.

■  하이파이브 / 김선우 

 

 

하이파이브/ 김선우

 


1년에 한번 자궁경부암 검사 받으러 산부인과 갈 때

커튼 뒤에서 다리가 벌려지고

차고 섬뜩한 검사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

세계사가 남성의 역사임을 학습 없이도 알아채지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듯해졌을 텐데

최소한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개구리처럼 다리를 벌린 채

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을 꾹 참아주다가

 

커튼이 젖혀지고 살짝 피가 한 방울,

 

이 기계 말이죠 따듯하게 만들면 좋지 않겠어요?

처음 본 간호사에게 한마디 한 순간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

두 마리 청개구리 손바닥을 짝 마주치듯 맞아요, 맞아!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니깐요. 자요, 어서요, 하이 파이브!


- 시집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문학과지성사, 2012)

 

펼친 부분 접기 ▲

내가 산부인과 의사'라면 벽에다가 좋은 마감재'를 사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그 비용을 천정 마감재에 사용했을 것이다. 산부인과에서 진료를 받아본 여성들은 모두 공감하리라. 시집 『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 에서 김선우 시인'은 산부인과 진찰실'에서 " 차고 섬뜩한 검사기계가 나를 밀고 들어올 때 / 세계사가 남성의 역사 " 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 여자가 만들었다면 이 기계는 따듯해졌을 텐데 / 최소한 예열 정도는 되게 만들었을 텐데 / 그리 어려운 기술도 아닐 텐데 " 말이다. 출산의 공간인 산부인과는 정작 여성을 위한 배려가 없다. 산부인과 의사가 산모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 진찰대에 누워 30분 정도만 천정을 바라보았다면 이내 생각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산부인과에 다녀본 경험이 있는 아내에게 물어보았다면 " 차고 거만한 기계의 움직임 " 이 불쾌하다는 정도는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일 텐데도 산부인과는 여전히 여성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노력이 부족한 공간이다. < 바닥 > 을 경험하지 못한 자가 < 천정 > 을 볼 턱이 없다. 여성이 남성보다 인간적인 이유는 바닥에서 뒹굴며 고통을 이겨낸 경험이 남성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만약에 당신이 바닥의 고통에 대해 말을 했을 때,  애인이 군대 유격장에서 뒹군 경험을 빗대어 그 고통을 공유하려고 한다면 그런 남자와는 헤어지는 편이 낫다. < 측은지심 > 은 < 역지사지' > 에서 나온다. 바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닥이 되어야 한다. 여성은 남성보다 인간적이다.

괴테는 이런 소리를 했다. " 언젠가 여성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개인적으로 괴테 문학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말한 이 경구는 좋아한다. 바닥에서 뒹굴며 고통을 참아야 하는 산모를 위해서 희멀건 천정에 멋진 그림을 그려넣는 것은 어떨까 ? 천정에 아기 천사'나 구름 위에서 굽어보시는 자상한 성모 마리아'를  그려넣었다면 진료실 침대에 누운 여성들은 부끄럽고 떨리는 마음을 조금은 진정시켰을 것이다. 그리고 병원 매출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산모의 눈높이에서 그 마음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섬세한 의사라면 훌륭한 의사이니 산모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지 않을까 ? 산부인과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산부인과에 갈 때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은 < 팬티 > 가 아니라 < 양말' > 이다.

산모들은 팬티를 벗고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상태에서 진찰실에 눕게 되니 정작 중요한 것은 양말이다. 의사는 발 거치대에 올려진 양말을 본다. 그러니 양말 바닥에 밥풀이 짓눌려 있는 상태로 산부인과를 찾지는 말자. 그렇다면 바닥에 신경을 써야 할 병원은 어디일까 ? 대장 항문과'다. 산부인과의 반대말이 대장 항문과'이다. 산부인과 환자는 천정을 보고 대장항문 클리닉을 찾는 치질 환자는 바닥을 본다. 바닥에 미키마우스 그림이라도 그려져 있다면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어떻게 아냐고 ? 늬낌 아니깐 ! 치질 전문 병원을 방문하던 날,  나는 새벽 일찍 목욕탕에 가서 하루 종일 엉덩이만 닦았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목욕탕에 있던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 성정머리 없는 놈들, 너희들도 대장 항문 클리닉 한 번 가봐라 ! " ○○○ 의사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 오, 아름다운 항문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 보기 드문 국화 무늬'입니다. "  국화 무늬에 위안을 삼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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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9-23 0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 정말... ㅎㅎ 이 글 산부인과, 대장항문과 종사자들이 꼭 좀 봤으면 좋겠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3 11:28   좋아요 0 | URL
치과 천정에 미키마우스 그림 좀 그려넣옸으면 좋겠어요.
애들이 보면 울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새벽 님 정말 잠이 없으시군요. ㅎㅎㅎ.

엄동 2013-09-2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워본 자만이 알 수 있을 공포를 위로하며

슬며시 손내미는 아기천사와 미키마우스라. 우앙굿


산부인과에도 대장항문과에도

여지껏 누워보질 못했지만.

매우 귀여운 생각이십니다 ㅎㅎ


명절연휴 후 후폭풍이 센 오전입니다.

아침에 '눈뜨자마자' 얼마나 오늘이 싫던지 아후우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3 11:27   좋아요 0 | URL
설한 님 오셨군요. 뭐.... 대장항문과는 바닥에 반드시 미기마우스가 그려져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삭막하던지......
사실 산부인과는 여성 중심적 디자인이 되어야 하는데
사실 남성 중심적 디자인으로 가득합니다.

그나저나 오늘은 모두 지긋지긋한 하루가 되겠군요...
연휴 길면 좋을 것도 없어요..ㅎㅎ

잉크냄새 2013-09-23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천정에 형광 별자리를 붙여야지 생각은 했는데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군요.

천정과 바닥의 인테리어는 멋진 발상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3 15:55   좋아요 0 | URL
형광 별자리... ㅎㅎㅎㅎㅎ. 한때 유행하기도 했죠. ㅎㅎㅎㅎㅎㅎ.

J 2013-09-23 2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형광 별자리 만드는 걸 실제 실행하기도 했는데, 큰 곰자리, 작은곰자리, 백조자리, 독수리자리, 쌍둥이자리 까지 정확하게 모두 방천장에 있기를 원했었지요. 그렇게 욜리 팔아파하며 삼일동안 만들고나서 불을 딱 끄고 자리에 누우니 지독히 눈이 나빠서 안경을 쓰지 않으면 별의 자세한 위치가 보이지 않았어요. 안경을 써야만 보였지요. 잘 때 안경쓰고 잠을 자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사서개고생이었다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24   좋아요 0 | URL
가람 님은 워낙 별자리에 관심이 있으시니 천정에 형광 별자리가 잘 어울립니다.
저도 어느 집 갔더니 형광 별자리를 했더라고요.
근데.... 지저분하더이다. 별은 하늘에서 봐야지 천정에서 보면 안 됨...ㅎㅎ

히히 2013-09-23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옛날(유년기) 살던 집엔 천정 중앙에 50x50cm의 아크릴(?)창이 있었어요.
아마도 채광때문에 만든 모양인데
저에게는 그 목적과 상관없이
때론 조심스럽게 때론 파닥거리던 빗소리를 잊을 수가 없어요.
흐릿하여 별구경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다음에 집을 지을 때 저의 추억을 주문하였으니
신랑이 소홀히 넘기진 않겠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26   좋아요 0 | URL
신기하군요. 살다살다 그런 집은 처음 보는데요.
가끔 멋진인테리어 집 소개할 때 언덕에 최고의 건축가가 설계한
집에서 종종 그런 구조를 보는데... 아마 전 주인이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나 봅니다.

만화애니비평 2013-09-24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계하니 우리 어머니 생각납니다. 집에 가면 온 방에 시계가 있고, 심지어 큰방에 시계가 2개가 있습니다. 시계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탁상시계의 쨰각거림이 싫고, 전자시계의 붉은 빛이 번쩍이는 것도 싫어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핸드폰 알람 정도입니다. 시계에 너무 집착하면 시간에 집착하게 되니 말이죠. 안 그래도 조급증에 성격이 불같읁데 말이죠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5 15:34   좋아요 0 | URL
시계가 온 방에 있다라..... 제 집에는 시계가 없습니다. 탁상 시게가 있을 뿐...
천정에 달아놓았던 시계 이야기'도 이미 오래 전 이야기... 방엔 각각 탁상 시계가 있을 뿐입니다.
요즘 논문 쓰시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건투를 비니다...

응화 2013-09-25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벽과 바닥, 그리고 천정에 대한 고민은 아마
유럽의 성당들을 인테리어하던 건축분야의 마에스트로들이 가장 많이 하지 않았을까요.
르네상스... 낭만과 지독함이 공존하지만 실용성보다 아름다움의 중요함을 알았던 시대니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5 15:36   좋아요 0 | URL
고딕 성당 그림을 보고 싶군요... 천정 높이 그려진 거 보면 느낌이 다르겠죠 ?
종이책에 인쇄된 거 말고 진짜 가서 보면 웅장할 것 같습니다.
빛과 높이가 만들어낸 신성함이 묘할 거 같습니다.
 
멜랑콜리아
라스 폰 트리에, 샬롯 갱스부르 (Charlotte Gainsbourg) 외 / 익스트림 / 2012년 9월
평점 :
품절


 

 

 

 

지구는 사악하다.

  

< 멜랑콜리아' > 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 " 다가온다 " 라는 동사가 밋밋해서 상황 파악이 안 된다면 " 돌진한다 " 라고 정정하자. 일주일 후면 지구는 행성과 충돌하여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이번에는 " resetting" 되는 것이 아니라 아예 " nothing " 인 상태가 된다.  < 인류 > 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 지구 > 라는 행성 자체가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신이 깜짝 이벤트로 준비한 " 노아의 방주 " 따위는 없다는 말이다. 만약에 당신'이라면 지구 종말 일주일 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 ? 죽기 전에 해야 할 것'을 작성해 보자. ① 최고급 호텔'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밤을 보낸다. ② 제비집 요리와 불도장 그리고 거위 간 요리'를 주문한다. ③ 마당에 사과나무를 심는다 ④ 기타 등등......

하지만 이러한 버킷 리스트'는 한갓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 뻔하다. 당신은 최고급 호텔에 투숙할 수도 없고, 제비집 요리'는커녕 그 흔한 닭똥집 요리'조차 구경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하는데 어느 미친 놈이 일터에 나와서 일을 할까 ? 그러므로 통장에 남은 돈을 펑펑 쓰다가 죽겠다는, 웃으면서 코 파며 잇힝 하는 버킷 리스트'는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럴 땐, 차라리 무라카미 하루키가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 현명할 지도 모르겠다. 그는 사과나무를 심는 대신 자위'를 할 것이 분명하다. " 미안해, 아야코 양 ! 당신의 섹스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겠어. 난... 조용히 < 심슨가족' > 을 보면서 자위나 하겠어. " 결국 이 기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딱히 없다. 

지구 멸망을 다룬 대부분의 영화들은 < 그날 > 이 다가올수록 두려움에 떨며 아름다운 지구를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지 못한 죄책감을 호소하지만 쾌활한 멜랑콜리인 내가 상상하는 < 그날 > 은 꽤나 명랑'하다. 누군가에게 마지막 일주일'은 봄 방학' 같지 않을까 ?  입시 지옥에 시달리는 학생들에게는 공부할 필요가 없으니 공부를 잘하는 놈이나 못하는 놈이나 달콤한 휴식이 되고, 암 환자들은 신이 내린 결정에 대하여 겉으로는 내색은 하지 않지만 속으로는 웃으면서 코 팔 것이다. " 나만 억울하게 죽는 게 아닌 게야.... 히히히 ! "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그리 아쉬울 것 없다. 동일 환경 동일 노동에서 받는 대가'는 정규직의 절반이니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은 21세기 新 홍길동'이다. 서자'다.

희망이 거세된 노동만큼 힘든 것도 없다. 乙은 희망이 없다. 귀신을 잡는 해병대'와 (갑에게) 멱살을 잡힌 乙'의 공통점은 ? 영원하다는 점이다. 한 번 < 해병 > 은 영원한 해병이듯이, 한 번 < 을 > 은 영원한 을'이다. 그리고 뚱뚱한 여성들이여 ! 그날이 다가오면 다이어트'에 대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지구 종말 시계는 44사이즈를 위해서 死死( 죽을 각오로 굶는 )하는 당신을 잠시나마 구원할 것이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도, 아...... 좋아 ! 칼로리 제로 다이어트 콜라는 개나 주고 오리지날 코카콜라를 마시자 ! 일주일 후면 모든 것은 사라지나니 비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인류 멸망'을 비극으로 보는 관점은 지극히 편협한 시각이다. 인류의 멸망은 오히려 지구 생태계에 두 번 다시 없는 기회를 제공한다.

폐허가 된 아스팔트에서 고사리가 필 때 지구는 다시 시작될 것이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많은 사람을 죽이면 전사가 되듯  많은 사람들이 죽으면 재난이 되지만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죽으면 신이 내린 한 수'가 된다. 나라면 < 그날 > 사랑하는 사람과 콘돔이 필요 없는 섹스를 하겠다 ! 지구가 불타 사라지기 전에 먼저 정염에 불타 죽으리라. 젖가슴을 욕심껏 움켜쥐고 거칠게 입 맞추리라. 평소 짝사랑하던 사람을 찾아가 고백을 해도 좋을 것이다. 상대가 거절하면 어떠랴 ! 퇴짜 맞고 돌아오는 길에 분풀이로 종로 3가 8차선 도로에다 똥을 싸도 좋다. 행운이라는 것은 신이 평소에 편애하던 놈들에게 내리는 선물이지만 죽음은  모두에게 내리는 평등이다.

영화 < 멜랑콜리아 > 는 " 그날 " 을 다룬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하고 싶은 말은 < 그날 > 이 아니라 < 그녀 > 에 대한 이야기'다.  행성과 지구 간의 충돌'은 곁가지 서사' 에 불과하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영화는 < 여성 멜랑콜리와 히스테리'에 대한 보고서 > 이다. 영화는  " 1부 저스틴 "에 대한 이야기와 " 2 부 클레어 " 에 대한 이야기로 나뉜다. 결혼 피로연의 주인공인 저스틴은 전형적인 우울증 환자'다. 신부의 무관심과 무기력은 결국 파혼으로 끝을 맺는다. 그 어느 누구도 멜랑꼴리한 저스틴'(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 을 이해하기란 불가능하다. 우울증'이란 타자에 대한 공격을 멈추는 대신 화살의 촉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는 형태이다. 자신에 대한 징벌이 우울증'이다.

슬픔을 사람들과 나누면 애도'가 되지만 슬픔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 간직하면 우울'이 된다. 그러니깐 우울이란 슬픔을 나누지도 못하고 소화시키지도 못한 체증 상태'다. 목구멍에 걸린 것인 생선 가시가 아니라 멜랑콜리'다. 저스틴'은 내부의 문제에 몰입하다 보니 외부(타자)에게 관심을 두지 못한다. 이 우울증은 타자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이 무관심은 곧 무기력'을 동반한다. 불면과 기면 그리고 체증에 따른 식욕 감퇴와 구토가 이어진다. 프로이트는 마지막까지 여성이라는 성'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가 없어서 쩔쩔맸는데 그가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은 nothing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책임이 아니다.  그가 보기에 여자는 알 수 없는, 아...... 그런 존재'다. 앞이 캄캄한 구멍'이다.

반면 클레어'는 동생과는 달리 타자와 맺는 사회적 관계를 중요시한다.  화려한 결혼 피로연'은 부르주아인 클레어의 욕망과 겹친다. 그녀는 결혼 피로연'이 성공적으로 치뤄지기를 간절히 원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생을 위한 따스한 배려와 근심 같지만 사실은 부르주아의 과시적 이기와 사려 깊은 욕심'일 뿐이다. 저스틴이 내부의 문제 때문에 " 멜랑꼴리 " 하다면, 클레어는 우울증을 앓는 동생의 모습이 피로연 참석자들에게 들통날까 봐서 " 히스테리 " 에 빠진다. 우울증에 걸려서 이상행동을 보이는 동생을 이해하지 못하던 클레어'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할수록 불안에 빠진다. 궁극에 다다를수록 클레어는 이성을 잃고 저스틴은 오히려 차분히 이성을 찾는다.

이 지점에서 저스틴과 클레어는 겹친다. 클레어가 보이는 이상 불안 증세(2부)는 저스틴이 앓던 증후(1부)와 비슷해 보인다. 이처럼 멜랑콜리와 히스테리는 유사해 보이지만 닮은 만큼 다르다. < 멜랑콜리 > 는 잃어버린 대상에 대한,  원망에 따른 자기 징벌과 포기에 가깝지만 < 히스테리 > 는 욕망하는 대상에 대한 신경질적인 공격과 불완전한 집착에 가깝다. 두 자매는 본질적으로는 유사 형질을 가지고 있지만 계급에서 차이'를 만든다. 그들은 유사한 불안에 시달리지만 서로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잃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는 저스틴과 부와 명예를 잃어버리기엔 너무 많은 것을 가진, 부르주아인 클레어'는 무기력하게 종말을 지켜볼 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평등인가 !

나는 극중 저스틴의 대사에 공감한다. 지구는 사악하다. 없어져도 된다.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은 니체의 망치'다. 망치로 지구를 부순다.

 

 

 

 

+

이 영화는 추석 연휴 기간 동안 < 한국 영상 자료원 > 에서 상영하기에 보았는데 필름 영사 방식이 아닌 디지털 영사 방식이었다.  아, 개같은 디지털 영화들 ! 디지털 상영은 작은 모니터를 극장 스크린으로 옮긴 것에 불과해서 영화를 보는 재미를 반감시킨다. 필름 특유의 색감과 스크레치 그리고 미세하게 떨리는 프레임과 소음을 디지털 영화는 재현이 불가능하다. 디지털 영화가 선명한 화질 면에서는 뛰어나지만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그닥 매력적이지 않다. 오히려 필름'은 디지털'이 가지지 못한 영역을 구축한다. 필름 상영은 디지털 상영보다 단점보다는 장점이 많다.  필름 상영으로 보았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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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3-09-23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운과 죽음을 절묘하게 비교하는 대목에서 무릎을 치네요^^ 죽음이야말로 어찌 보면 기본소득보다 더 평등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세상의 종말보다는 일상의 불안을 더 두려워합니다. 차라리 한큐(!)에 인류가 몰살되는 것이, 일상의 갖가지 감정들을 감내하는 것보다 나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3 04:02   좋아요 0 | URL
수다맨 님도 항상 이 시간에 글을 남기시니 저처러 불면증인가 봅니다.
멜랑콜리아 보니 한 큐에 모든 게 사라지더군요. 제가 보기엔 축복 같습디다...
이 영화를 너무 뒤늦게 보았습니다....

마노아 2013-09-23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픔을 사람들과 나누면 애도'가 되지만 슬픔을 버리지 못하고 혼자서 속으로 간직하면 우울'이 된다. 그러니깐 우울이란 슬픔을 나누지도 못하고 소화시키지도 못한 체증 상태'다.
*
이 문장은 시처럼 들려요.
요새 황금의 제국을 재밌게 보고 있는데 (현재 21회 보는 중) 어떻게 해도 올라갈 수 없는 자본주의의 정점을 보는 기분이거든요. 지구 멸망 얘기를 듣고 보니 그 드라마가 퍼뜩 떠올랐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29   좋아요 0 | URL
< 황금의 계곡 > 하니 가진 자'들에 대한 비판이겠네요.
가진 자들이 아주 악랄하게 나오는 모양이죠 ? 요즘 드라마 확실히 선과 악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별로 바람직한 방향은 아닌 거 같지만...ㅋㅋㅋㅋ.

애도 행위는 확살히 슬픔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래야지
죄책감에서 벗어나거든요. 우울은 이 슬픔에 개인의 마음 속에 고착된 형태입니다.

히히 2013-09-23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죽음이 개별성을 지닐 때 슬프고 억울한 것이지
지구 종말에 불안할 필요는 없지 않나요?
차라리 혼자 살아 남는 게 억울하지.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31   좋아요 0 | URL
사실 야금야금... 지구가 불텅이가 되어서 고통스럽게 오랜 기간에 걸쳐 멸망한다면
두렵지만 이처럼 갑자기 몇 초 안에 꽝 해서 사라진다면 즐겁지 않을까 싶어요.
얼마나 공평합니까...

전쟁터에 있는병사가 가장 두려운 것은 무리 중 가장 먼저 죽는 게 아니라
무리 중 가장 늦게 죽을 때'라고 하더라고요..
 

개와 배추.

  

 

 

 

 

 

 

< 터앝 > 이라는 낱말'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듯싶다. 사전적 정의에 의하면 " 집의 울안에 있는 작은 밭 " 이 터앝'이다. 반대로 울타리 밖에 있는 밭은 < 텃밭 > 이다. 쉽게 말해서 마당 안(울타리 안)에 있는 밭은 < 터앝 > 이고, 마당 밖에 있는 밭은 < 텃밭 > 이다. 지금이야 자투리땅에 남새를 키우는 밭을 통틀어 " 텃밭 " 이라고 부르지만은 그 옛날 조상들은 < ~ 앝 > 과 < ~ 밭 > 을 확실히 구분한 모양이었다. < 야생의 사고/레비스트로스 > 에서 지적했듯이 < 언어 > 와 < 사회 > 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문명 사회'에서 보면 미개인 사회'에 가까운 태와족 언어'에는 초목의 잎사귀 형태를 나타내는 말이 40개나 되고, 옥수수의 각 부분을 나타내는 말은 15개나 된다.

옥수수를 대체할 수 있는 단어'라고는 " 강냉이 " 가 전부인 21세기 문명인이 보기에는 옥수수의 각 부분을 세분화한 말'은 화려하고 섬세하다. 이 사실은 태와족과 옥수수 간의 밀접한 밀월 관계를 잘 보여준다. 필요는 특정 분야의 언어'를 세분화한다. 레비스트로스는 " 어떠한 분류도 혼돈보다는 낫다/야생의 사고,68 " 고 말했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태와족 원주민은 옥수수를 15개로 분류한다. 반면 현대 도시인은 옥수수를 단순히 < 강냉이 > 라는 1개의 말밖에는 없다. 우리는 여름 휴가철 냇가에서 옥수수를 뜯거나 극장에서 팝콘을 먹으며 " 옥수수, '남자에게 참 좋은데,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네... " 라는 장탄식을 내뱉을 수밖에 없다. 그 답답함 이해한다. 늬낌 아니까 ! 

도시 현대인에게는 " 그게 그거 ! " 이지만 태와족 원주민에게는  " 그게 그게 아닌 게 " 다.  그러니깐  전자는 " 하나를 열 다섯으로 나눈 결과 " 이고, 후자는 " 열 다섯'을 하나로 통합 " 한 결과이다. 과학이라는 분야가 기본적으로 분류를 통해 차이와 유사'를 도출한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태와족 원주민은 현대인보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문명 사회보다 비문자 혹은 비문명 사회'가 더 과학적 사고를 갖춘 시스템이라는 것이 아니다. 문명과 야만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문명 사회는 비문명 사회를 과학적이지 않기 때문에 야만적이라고 주장하지만 레비스트로스가 증명했듯이 그 주장은 틀렸다.

< 터앝 > 과 < 텃밭 > 도 마찬가지이다. 현대인이 보기에는 터앝과 텃밭은 " 그게 그거(유사) " 처럼 보이지만 옛 조상들은 분류할 필요(차이) 가 있었을 것이다. 터앝과 텃밭'은 한국 사회가 뿌리 깊은 농경 사회였음을 증명한 예이다. 입말이 길어졌다. 마당 한켠에 작은 터앝'이 있다. 터앝이라고 하기에는 자투리 공간이라고 해두자 ! 하지만 어머니에게는 이곳은 터앝인 모양'이다. 내가 이 터앝을 보고 깨달은 것은 < 흙 > 이라는 존재의 위대함'이었다. 몇 년 전 봄날,  마당에서 싱크대 서랍'을 정리하다가 뒹구는 콩 몇 알을 아무 생각 없이 터앝에 버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해 여름 콩잎이 삐죽 고개를 내밀더니 이내 콩줄기가 거침없이 자라기 시작했다.

어느 날 < 콩 > 이 내게 와서 " 방세를 얼마를 내면 좋을까요 ? " 라고 묻길래 콩알만 한 놈 꼴이 하도 우스워서 콧방귀를 뀌었던 적이 있었는데, 콩 씨 가족은 그해 콩 300개를 내놓았다. 콩 입장에서 보면 남의 집 터앝에 전세를 얻어 사는 꼴이니 방세'라도 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터앝 주인인 우리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비료를 준 것도 아니고 제초를 한 것도 아니며 물을 주지도 않았으나 콩은 땅을 빌린 값을 톡톡히 한 것이었다. 아스팔트와 콘크리트가 전부인 열악한 환경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콩은 감사의 뜻을 전한 것이다. 주렁주렁 열린 콩을 볼 때마다 나는 콩의 보은에 울컥했다. 풀의 힘이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요즘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바람'은 컨디션 난조에도 불구하고

꽃씨를 물고 와 흙에게 주었다. < 흙 > 은 바람 잘 날'도 없으면서 꽃씨를 옮겨다주는 바람의 성실한 마음이 고마웠다(고 한다. ) " 고마워, 바람 ! 하루 빨리 불면증에서 벗어나길 바라. 언젠가는 바람 잘 날이 아닌 바람 잔 날'이라는 소식을 전해주는 날이 오겠지?  " 흙은 좋고 나쁨을 떠나서 숨탄것이라면 차별 없이 모두 품었다. 버려진 자투리땅에 이름 모를 꽃이 피었고, 나비가 찾아왔으며, 지렁이가 고슬고슬한 똥을 누기 시작했다. 메뚜기도 방문했다. 서울이라는 아스팔트 정글'을 생각하면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것은 흙의 힘이다. 그들이 가진 생명력을 볼 때마다 레비스트로스가 < 슬픈 열대 > 에서 말한 경구가 떠올랐다." 세계는 인간 없이 시작되었고, 또 인간 없이 끝날 것이다. "

빚 지고는 못 사는 콩 씨네 가족과 흙이 가지는 포용력'은 인간이 가진 성질머리를 압도한다. 당신이 교양머리가 있는 인간이라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흙은 더러운 것'이라고 가르치면 안 된다. 올해에는 콩 대신 배추를 심었다. 하지만 자라지 못해 시들시들하다. 재작년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재작년에는 어머니가 배추 다섯 포기를 심었는데 무서운 속도로 자라서 시장에 내다 팔아도 될 정도로 잘 컸다. 잘 컸어 ! 처음에는 식용으로 키울 요량이었다. 집에 리트리버 종 개 한 마리'를 키우는데 어머니는 틈틈이 개를 배추 앞으로 끌고 와 무릎 꿇게 하고는 단단히 충고했다. 콩은 전세(비)를 내고, 상추는 월세'를 냈으나 개는 기세등등하여 텃세'만 부렸다. 성정머리 없는 놈 !

하루가 멀다 하고 싹이 나오자마자 뜯거나 짓밟는 짓을 하기에 내린 잔소리'였다. 땅을 빌린 세입자는 모두 그 값을 치뤘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개는 그 이후 단 한번도 배추를 뜯거나 짓밟지 않았다. 주인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 아, 배추는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마음을 바꿔 관상용으로 키우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온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잘 자라는 배추와 말귀가 트인 개에 대한 사연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 동물농장 > 에 나갈 사연이라고 추켜세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기세등등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당에서 어머니가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 이 개놈의 새끼가 미쳤나벼 ! 

검은 개 꼬리 십 년 묻어도 검은 개 꼬리라더니만 으이구, 밤새 지랄 발광을 다 했슈. "  마당에 나가보니 배추 하나는 뿌리가 뽑혀 마당에 뒹굴었고, 뽑히지 않은 배추 위에는 개가 똥을 쌌다. 30kg 정도 되는 놈이 싼 똥은, 아.... 아름다웠다. 어머니는 그 이후 배추와 개의 기특한 사연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한가위'다. 깊은 밤, 풀 자라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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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9-20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 정말 그러고 보니 콩들은 전세를 내고 상추들은 월세를 내고 암탉들은 일일세를 내고 개는 텃세를 부리고 그러는 셈이네요. (읭?)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22:59   좋아요 0 | URL
아, 이 덧글 정말 춘천살인'이네요. 이거 너무 좋은 문장이어서 제가 허락 없이 좀 본문에 삽입시키겠습니다.
새벽 님 알고 보면 마치 이문열 같습니다.. 허허..

새벽 2013-09-21 03:2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으악! 곰곰발님, 하필 제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작가를.. -_ㅜ
허긴 그마저 사실 감지덕지이지만요. 하하 ;;

전 이문열, 이외수보다 곰곰발님이 더 좋아요.(더 탁월한 작가라고 생각)

히히 2013-09-23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겨울에 언 땅이 녹아
지천에 흙냄새가 봄을 보챌 때는
감히 밀쳐내지 못하고
봄바람나지요.
 

 

 

 

할 말 안 할 말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로 쓰여진 문장을 읽으면 짜증이 난다. 플로베르나 프르스트 정도의 레베루'가 되어야지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지, 어설픈 잔재주를 가진 사람이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를 다루면 문장이 지저분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평론가 ○○○'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보고 나서 감읍하야 두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낙타'만 그렸다는 수줍은 고백은 시네필로서의 운명'을 보여준 일화'라 할 만하다.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니, 대, 다, 나, 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  또래 아이들이 < 우뢰매 > 나 < 태권븨 > 에 열광할 때,  그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에 열광한 것이다.  아이들이 담벼락 위에서 뛰어내리며 수직 낙하에 배울 때, 땡땡땡 평론가는 시네마 스코프 화면에서 수평의 미학을 발견한다. 아, 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가 진실이 결여된 허세'처럼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4살 때 아버지와 함께 장 콕토의 < 미녀와 야수 > 를 보고 나서 두 달 동안 벌거벗은 여자'만 그렸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이미 알파벳을 터득하여 도화지에 세로쓰기로 W.X.Y를 썼다(고 전해진다.)

리바이스 청바지 회사와 이름이 똑같은 레비스트로스'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나쁜 기억력을 뽑았다. 그런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디디에 에리봉가 주고 받은 대담'을 엮은 <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를 읽으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 슬픈 열대 > 에서 누누이 자신은 기억력이 매우 나쁘다고 강조했다. 기억을 재구성할 수 없으니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는 처음부터 < 기억 > 이라는 것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억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어쩌면 ○○○ 평론가는 단순한 기억'을 지나치게 의미 부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한때 그냥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본 적이 있었고, 한때 그냥 < 낙타 >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이 단순한 기억'을 병렬로 나열해서 " 자신의 시네필的 에티튜드 " 를 과시하고 싶은 속셈은 아니었을까 ? 초2 때부터 이미 중2○을 앓았으니 조숙하긴 조숙했던 모양이다. 나는  < 기억 > 을 믿지 않는다. 내가 내뱉는 문장은 팔 할이 허세요, 뻥'이니 내 글은 믿지 마시길 !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기억해 낸 재현들은 모두 미화된 것들이다.  나를 향한, 촉이 날카로운 경멸'조차도 말이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한때 아버지와 < 미녀와 야수 > 를 본 경험이 있고, 또 어느 한때 벌거벗은 여자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억'을 연속으로 나열해서 배치하면 될성부른 떡잎이 된다. 이 < 기억-병렬 장치 > 는 나를 4살 때 이미 장 콕토의 < 미녀와 야수 > 를 보고 감동한 조숙한 시네필'로 만든다. 당당해진 나는 이렇게 외치리라. " 야, 이놈들아 ! 너희들이 텔레토비 보고 헤헤거릴 때, 나는 미녀와 야수 보고 와와 했다. 이거시 바로 교양의 레베루'다 ! " 잠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 ? 아, 아아 그렇지 ! < 만연체 > 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샛길로 빠졌네. 하여튼 만연체'는 실력 없는 사람이 다루면 지저분해진다.

땡땡땡 평론가'는 문장이 뒤틀리면 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데 지우고 다시 쓰기는커녕 쉼표'를 찍고는 새로운 문장을 이어 쓴다. 이런 식으로 쉼표 몇 개가 나열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마침표'가 마침내 작성된다. 결국은 꼬리가 긴 문장이 된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주부와 술부 간에 호응이 꼬일 확률이 높고  문장의 긴밀성이 떨어진다.  독자 입장에서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땡땡땡 평론가가 쓴 평론은 한글로 작성한 글이지만 왠지 모르게  원서를 번역해서 옮긴 글인 것만 같다. 그가 < 낙타 그림 > 대신 < 문법 공부 > 를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영화 비평을 쓰는, 꽤 좋은 평론가가 되었을 것이다.

평론이야 그렇다고 쳐도 소설가가 할 말 안 한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한 만연체'로 쓴 소설을 읽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옹알이'요, 넋두리다. 심하게 말하면 문학이 아니라 단순한 녹취록'이다. 다듬지도 않은 글을 작가의 개성적 문체라고 우긴다면 지나가는 개도  하 ! 하 ! 하 !  원석도 깎고 다듬어야 보석이 되지 갈고 닦지 않으면 그 흔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절차탁마하라는 소리이다.  김훈은 < 꽃은 피었다 > 와 < 꽃이 피었다 > 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고, 박완서는 쉬운 문장을 위해서 의뭉스러운 단어들은 버렸다. 좋은 문장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때 탄생한다.

잘 고른 단어 하나는 열 단어 부럽지 않은 법!  박완서 작가'가 < 그 여자네 집 > 에서  "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네...... " 라고 쓴 문장은 황홀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 구슬 > 이라는 단어의 쓰임이 황홀해서 소설 전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 내 생애의 주옥 같은 겨울이었네... " 라거나 "... 황금 같은 겨울 " 이라고 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 > 과 < 내 생애의 주옥 같은 겨울 > 은 뜻은 동일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주옥(珠玉)이 구슬 주에 구슬 옥'이니, 구슬이나 주옥이나 같은 단어이지만 울림은 사뭇 다르다. 이처럼 깎고 다듬은 문장은 힘이 있다. 

이러한 고민도 없이 옹알이 같은 문장으로 된 소설이나 평론을 읽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할 말 안 할 말 다 하지 말고, 할 말 안 할 말 가려서 꾹꾹 눌러 써야지 좋은 문장이 나온다. 깎지도 않은 돌을 보석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믈방울 크기의 다이아몬드는 커다란 원석을 갈고 닦은 결과이다.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스토리가 훌륭하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소설의 기본은 < 머리'> 보다는 < 손' > 이다. 이 말은 스토리보다는 문장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티븐 킹은 스토리가 탄탄해서 좋은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황홀한 상상력과 함께 튼튼한 문장 실력까지 갖춘 작가였기에 성공한 소설가'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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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9-19 0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막 옛 추억 속을 헤집고 다녔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화,라는 걸 진지하게 자각하게 된 작품이 뭐였나..
생각해 보니, 전 중1 때 여름방학에 본 이티,에서 최초의 감동을 느낀 것 같습니다.
그 이전에 아버지 손 잡고 신설동 전철역 앞에 있던 동보극장,에서
킹콩을 비롯, 몇몇 액션영화, 서부영화를 본 기억들은 듬성듬성 나는데
무슨 감회 같은 건 특별히 없었던 것 같네요.

전 너댓 살 취학 전에 뽑기를 그렇게 잘했다고들 해요.
그래서 이모들 사촌누이들이 골목에 뽑기 장수 아저씨 와서 판 벌이면
자기들 돈으로 사다가 막 저한테 주고 전 그걸 기막히게 도려내서
더 비싼 뽑기로 바꿔서 또 하고... 그랬다는 전설이..
아무래도 손재주를 이용한 뭔가를 하는 길로 갔어야 인생이 폈을텐데.. ^^;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13:13   좋아요 0 | URL
전 정말 영화를 진진하게생각했던 영화가
파리텍사스였어요. 신나고 재미있는 영화만 보다가
파리텍사스를 보는데 재미도 없고 우울하고고통스러운 겁니ㅏ.
어라 ?! 왜 영화가 고통스럽지 ?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닏.
< 파리텍사스 > 는 내게 영화란 반드시 웃기고 재미있고 해피엔딘으로 끝나야지만 한다는
공식을 깨트린 영화였죠. 항상 저의 베스트 목록입니다.

새벽 2013-09-19 05: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앗, 또 생각났어요!

초등학교 4,5 학년 때 쯤, 토요명화 시간에 본 '텍사스 대소동'!
아랑 드롱, 버트 랭카스터 나오는 코믹 서부극을 엄청 재밌게 봤고
비슷한 무렵 히치콕의 '39계단'도 참 세련되고 흥미롭구나 하며 본 기억이 있습니다.
특히 '새벽의 7인'을 보면서는 왜 그리도 뭉클했는지... 아마 비장감,이란 걸 느꼈나봐요.

이거 저도 더 기억을 파헤집다 보면 땡땡땡 평론가처럼 멋진 영화 신동 서사 하나 만들 수 있겠는데요. 하하.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13:11   좋아요 0 | URL
39계단.....ㅎㅎㅎ
전 에이에프케이엔에서 본 기억이 나네요...
중간에 봐서 몰랐는데
알고 보니 히치콕 작품이었던.....

새벽의7인'은 정말 어린이 수컷들에게 엄청 우정 이러 걸 막 뿌렸던 영화였죠..ㅎㅎㅎㅎ
생각나네요. 새벽의 7인도 보면 7인의 사무라이 레메이크였어요.큰 틀에서 보면 말이죠..

2013-09-19 10: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13:07   좋아요 0 | URL
반가워요. 포르테 님 ! 여긴 명절이지만 미국은 평일이니......
열공 모드시군요. 에이 ~ 그냥 놀아요 ! ㅎㅎㅎㅎㅎ
제가 이미 포르테 님 몫까지 잔뜩 먹어서 지방을 잔뜩 섭취했습니다.
하여튼.. 그래도 한가위이니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 같았으면 합니ㅏ.
날 참 좋더군요. 걷기 좋은 날이에요...

성재입니다. 2013-09-19 2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에 터를 잡으셨군요. 반갑습니다 !
한번 전화 했더니 번호가 바뀌었더군요...
블로그로 찾아갔더니 그곳도 영업 종료...
물어물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함 연락 주십시요. 술 한 잔 하시죠.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13:09   좋아요 0 | URL
앗 !!!!!!!!!!!!!!!! 성재 ! ㅎㅎㅎㅎㅎ. 나 순간적으로 성재기입니다'로 읽어서
누가 장난하나 했다.
핸드폰 사용 안 한지가 언제인데 이제서야 안 거슬 보면
꽤 오랫만에 전화를한 거로군....
저놔 번호나 함남겨라....

2013-09-20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20 2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다맨 2013-09-21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불필요한 수식을 덕지덕지 단 문장이야말로 간결과 투명의 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각은 깊게, 글은 쉽게 써야지요. 소설도 그렇지만,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평론의 문장이 지나치게 길고 복잡한 모습을 보면 어느 순간 한숨부터 나옵니다 ㅜㅜ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1 12:33   좋아요 0 | URL
저도 평론 문장은 읽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짜증이 납니다.
후카시'는 더럽게 많이 잡더군요.
평론집 열 권 놓고 자세히 보면문체가 모두 똑같습니다. 짜증 대폭발 !!!!!

히히 2013-09-2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김훈쌤은 글과 글 사이에 여백이 있어요.
그 여백은 독자가 메우고 말입니다.
독자의 자리를 마련하기위하여
얼마나 많은 문장을 버렸을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33   좋아요 0 | URL
김훈은 갖다버린 흔적이 문장에서 보입니다.
그는 아마 대하소설은 못 쓸 거예요.
요즘은 정말 소설가들이 서평가보다 글재주가 없는 사람들이 있어요..
 

 

 

 

레미콘과 시멘트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7월 말이었다. 올 것이 왔구나 ! 눈물이 앞을 가렸으나 울면' 안 되어서 짜장면'을 먹으면서 웃으면서 코 팠다. 나는 군대 가기 전까지 공사판에서 일했다. 근사한 홈시어터'를 만들기 위해서는 목돈이 필요했으니 말이다. 성능 좋은 스피커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감상하리라 ! < 귀 > 가 호강하기 위해서는 < 좆 > 이 고생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래서 노가다판에서 < 좆 > 나게 고생했다. 당시 공사판에서 같이 일했던 형이 있었는데, 그는 완도 출신이었다. 배 타다가 서울로 상경해서 공사판에서 일하던 형'이었는데 걸죽한 남도 사투리를 섞은 욕은 가히 입말의 장관이었다.  그는 레미콘 차를 뺑뺑이 차'라고 불렀다.

개미 엉덩이 같이 생긴 게 빙글빙글 쉬지도 않고 돌아가니 그리 틀린 표현도 아니었다. " 왜 쉬지 않고 뱅글뱅글 돌아가죠 ? " 내가 묻자, 그는 신나게 대답했다. 네이버에서 제공하는 국어 사전 뜻풀이에 의하면 < 레미콘 > 은 " 콘크리트 제조 공장에서 아직 굳지 않은 상태로 차에 실어 그 속에서 뒤섞으며 현장으로 배달하며 콘크리트가 굳지 않도록 개면서 운반하도록 장치한 트럭  " 인데, 그 형은 장장 한 시간 동안 일하는 틈틈이  " 레미콘이라는 녀석의 운명 " 에 대해 입말을 풀었다. 굉장한 말빨이었다.  나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저토록 재미없는 내용을 재미있게 만드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 입' > 은 문득 펜을 쥔 밀란 쿤데라의 < 손' > 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7월 무더위가 정점을 찍던 날에 나는 훈련소로 향했다. 그리고 그 형은 현대 아파트 완공을 끝내고 완도로 돌아갔다.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퇴소하자마자 전화를 했더니 광어 양식장'에서 일한다고 했다. 내가 < 뭍 > 에서 일하는 것보다야 < 물 > 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하니 그는 늘 한결같은 소리로 화답했다. " 아야 ! 힘들어 뒈져불것다. 나처럼 부모 잘못 만나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한 놈은 뭍이나 물이나 다 똑같다야. 니나 나나 뺑뺑이 인생 아니냐. 흐미, 시부랄 놈 ! 주인 새끼, 승질이 고약해서 잠시도 내가 쉬는 꼴을 못 본다야. 휴가 때 함 놀러오니라. 알았제 ? 바빠서 끊는다잉 ! "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때 말한 < 뺑뺑이 인생 > 이란 아마도 < 뺑뺑이 레미콘 차 > 를 두고 한 소리였을 것이다.

뱃속에 있는 시멘트를 굳게 하지 않으려면 쉬지 않고 돌려야 하니 레미콘 인생이나 주인 눈치 보며 맘껏 쉬지도 못하고 일해야 하는 인생이나 엇비슷한 것이다. 곰곰 생각하면, 레미콘과 시멘트'는 형질이 정반대'이다. 레미콘은 동적인 형질을 가진 수다쟁이요,  시멘트는 정적인 형질을 가진 과묵한 내성적 사내'다. 소설도 두 부류로 나뉜다. 전자를 페이지 터너'라고 한다. 내용이 흥미진진하니 책장 넘기기 바쁘다. 반대로 시멘트처럼 정적인 성질을 가진 소설도 있다. 내용이 따분하면 문장이라도 읽는 맛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한 문장 읽으면 졸음이 쏟아진다. 문장은 시멘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지 오래......  < 꼴 > 에 소설가랍시고 항상 거창한 주제만 다룬다. 고독, 소외, 절망, 구원'에 대한 이야기만 하니 잠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여자가 주인공인 경우는 늘 아버지와 불화한다. 한국 소설에 나오는 여성 주인공만 놓고 보면 팔 할은 아버지에게 매 맞는 여성'처럼 보인다. 문장은 대부분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썼다기보다는 평론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쓴다. 그러니 소설이 너무 재미있어서 책장을 넘기기에 바쁠 턱이 있나. 엉엉 울거나 깔깔 웃다가 빠질 턱이 있나. 바쁠 턱도 없고 빠질 턱도 없으니 문장은 퍽퍽한 닭가슴살 같다. 그 이유가 < 독자 우선 > 보다는 < 평론가 우선' > 을 선언하다보니 스토리보다는 플롯에 목숨을 걸고, 고급스러운 상징'으로 아부를 떠니 평론가보다 읽는 눈이 낮은 독자 입장에서는 정교한 플롯과 고도로 압축된 상징으로 이루어진 글은 팍팍한 문장처럼 읽힌다.  졸립다, 졸립다, 졸립다.

눈꺼풀이 무겁다. " 시멘트 문장 " 이다. 이런 소설을 2시간 동안 억지로 읽는 것보다는 완도 형이 쉴 새 없이 들려주던 잡설을 듣는 게 더 재미있다. 그 아름다운 육두문자들...... < 시멘트 문장 >으로 이루어진 소설이 재미없다면 < 레미콘 문장 > 으로 이루어진 소설을 읽으면 된다. 어릿광대가 되어서 뱅글뱅글 돌아가는 공 위에서 신나게 재주를 부리는 작가가 쓴 책 말이다. 우선 ① 찰스 부코스키 소설을 추천한다. 술 마시며 놀고 여자와 섹스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주인공은 술 마시며 놀고 여자와 닥치는 대로 섹스를 하며 쉴 새 없이 떠든다. 그것이 부코스키 소설의 특징이다. 곰곰생각하는발은 10분마다 코 파며 잇힝 하지만, 부코스키는 10분마다 똥구멍 이야기'를 한다.

그의 소설에는 한국 소설가들이 지긋지긋하게 고뇌하는 척하며 밑밥을 까는 인간의 고독, 인간의 절망, 인간의 소외, 인간의 구원, 인간의 불안따위'가 없다. 한국 소설가들이 고약한 점은 소설을 통해서 독자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 지루한 문장으로 말이다. 부코스키'는 적어도 독자를 훈계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순수하게 배설할 뿐이다. 그런데 말이다. 그의 소설을 낄낄거리며 읽다 보면 인간의 고독과 인간의 절망과 인간의 소외'가 전해진다. 아,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것이다. 단언컨대, 부코스키 소설은 편혜영, 천운영, 배수아, 윤대녕 소설보다 10배는 훌륭하다. 부코스키, 진정한 페이지 터너'이다 ! 무진장 재미있다.

레미콘처럼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문장을 구사하는 대가는 역시 ② 스티븐 킹과 밀란 쿤데라'를 빼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펄프 픽션 작가라고 스티븐 킹을 얕잡아보다가는 큰 코 다친다. 그만큼 문법적으로 바른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도 드물다. 밀란 쿤데라의 경우는 위대한 작가 대우를 받으니 그를 얕잡아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가진 장기는 재미없는 플롯을 기똥차게 재미있게 서술한다는 점이다.  이 두 작가'는 소설도 재미있지만 무엇보다도 소설이 아닌 산문도 매우 뛰어나다. < 유혹하는 글쓰기 > 를 읽고 나서 킹에게 반하지 않을 독자가 있을까 싶다. 그리고 소설 작법서를 가장한 에세이 < 소설의 기술 > 또한 밀란 쿤데라의 뛰어난 산문 실력을 볼 수 있다.

대부분 소설가가 산문으로 글을 쓰면 뭔가 밋밋한 맛이 있는데, 킹과 쿤데라'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모두 환상적인 문장력을 과시한다. 정말 무시무시한 인간들이다. 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작 가운데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뽑으라면 주저없이 < 파리 대왕 > 을 뽑겠다. 읽는 내내 손과 불알에 땀이 찼다. 노벨상 위원회'가 ④ 월리엄 골딩에게 문학상'을 수여한 것은 실수'라고 생각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만큼은 끝내준다. 월리엄 골딩은 어쩌다가 좋은 작품 하나 건진 것이다.  얼굴과 가면이라는 주제'를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엮는 것은 골딩의 재주'다.  내가 출판사 사장이라면 이 소설책에 대한 띠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삽입하겠다.

" 해리포터  시리즈보다 재미있는, 판타스틱하며 서프라이즈한  소설 ! " 이라거나  " 제임스 조이스가 잘난 척하느라고 버린 < 재미 > 를 윌리엄 골딩이 냅다 주워서 소설 속에 재미를 삽입한  작품 ! " 끝으로 한 권 더 뽑자면 ⑤ 코멕 메카시의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이다. 의외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 코맥 메카시의 소설은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내용은 둔중한 무게감을 가지고 있으나 미문을 읽는 맛은 짜릿할 정도로 자극적이어서 취하게 된다. 스티븐 킹은 < 유혹하는 글쓰기 > 에서 코멕 메카시라는 작가를 예로 들며 비아냥거렸으나,아... 어쩌란 말이냐 !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이니 말이다.

<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와 < 로드 > 를 읽을  때에는 아쉬워서 일부러 야금야금 속도는 늦추며 읽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코멕 메카시 소설이 지루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단문 위주로 문장을 구성힌 코멕 메카시 작가 특유의 건조체'에 뻑이 갔다. " 할 말 못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못 할 말 다 하는 " 어설프고 이상한 만연체에 질린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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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2013-09-18 0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이번엔 제가 읽은 소설이 한 권 등장했습니다. 파리 대왕. :)
포스팅 하다보면 늘 문장이 질질 늘어지는 저로선 꽤 찔리지만, 그래도 재밌고 맞는 얘기라 공감이요. 하하 ;;

곰곰생각하는발 2013-09-18 12:18   좋아요 0 | URL
새벽 님 문장이 왜 질질 끕니까.
아니 그렇습니다. 새벽 님 문장 실력이면 문단 데비할 실력입니ㅏ.

수다맨 2013-09-18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부코스키는 참으로 대단한 소설가지요. 무엇보다 문장에 아무런 '후까시'가 없다는 것, 자신의 농탕한 일상을 가감없이 들려준다는 것, 이 두 가지야말로 부코스키 소설의 소중한 미덕이자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아닐까 싶어요. 사실 오늘날 (한국) 소설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새로움'이나 '상상력'따위가 아니라 저러한 부코스키적 자세가 아닐까 싶어요. 역시나 곰곰발님께서 가려운 부분을 시원히 긁어주는 통쾌한 글을 써주셨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19 00:26   좋아요 0 | URL
후카시가 없다... 맞습니다. 그래서 편히 읽히는 것 같습니다.
한국 소설 너무 진지해요. 별로 도덕적 인간들도 아닌 것 같은데
마치 엄청난 도덕적 인간 흉내 내는 걸 보면 꼴불견이란 생각도 간혹합니다...

2013-09-18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9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9-19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팜므느와르 2013-09-19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역시! 이런 포스팅 나올 줄 알았어요.
기다린 보람이 있네요.
부코스키는 그렇다치더라도 파리대왕이 그리 괜찮단 말이지요?
곰발님이 권하시니 다시 도전할게요.
중학생 논술 권장도서라 준비하긴 하는데 전 아직 완전히 접수가 안 되었거든요.
곰발님이 말씀하고자 한 포인트를 새기며 찬찬히 읽어볼게요.
추석 아침이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0 13:15   좋아요 0 | URL
오, 팜므 님은 파리대왕 별로 안 내켜하시는군요전 흥미진진하게 보았습니다.
사실 어릴 때 읽어서 정확한 기억들은 가물가물한데
어릴 땐 이 소설이 암굴왕'처럼 흥미롭더라고요.
제 또래아이들이 나오는 모험극이니 더 재미있었나 봐요..ㅎㅎ

히히 2013-09-24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에서 생각나는 책이 [한밤의 아이들]입니다.
인도의 슬픈 역사을 쉼 없이 재잘거린답니다.
정말이지 귀가 얼얼거리지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9-24 15:34   좋아요 0 | URL
오, 이 책 읽어볼게요. 살만 루시디'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