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 안 할 말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로 쓰여진 문장을 읽으면 짜증이 난다. 플로베르나 프르스트 정도의 레베루'가 되어야지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를 자유자재로 가지고 놀지, 어설픈 잔재주를 가진 사람이 할 말 안 할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하는 만연체를 다루면 문장이 지저분해진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평론가 ○○○'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보고 나서 감읍하야 두 달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낙타'만 그렸다는 수줍은 고백은 시네필로서의 운명'을 보여준 일화'라 할 만하다. 두 달 동안 낙타만 그렸다니, 대, 다, 나, 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던가 ? 또래 아이들이 < 우뢰매 > 나 < 태권븨 > 에 열광할 때, 그는 사려깊은 눈빛으로 < 아라비아의 로렌스 > 에 열광한 것이다. 아이들이 담벼락 위에서 뛰어내리며 수직 낙하에 배울 때, 땡땡땡 평론가는 시네마 스코프 화면에서 수평의 미학을 발견한다. 아, 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생각이 깊었다. 하지만 나는 이 에피소드가 진실이 결여된 허세'처럼 느껴진다.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나는 4살 때 아버지와 함께 장 콕토의 < 미녀와 야수 > 를 보고 나서 두 달 동안 벌거벗은 여자'만 그렸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이미 알파벳을 터득하여 도화지에 세로쓰기로 W.X.Y를 썼다(고 전해진다.)
리바이스 청바지 회사와 이름이 똑같은 레비스트로스'는 자서전을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로 나쁜 기억력을 뽑았다. 그런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디디에 에리봉가 주고 받은 대담'을 엮은 <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 를 읽으면 그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 슬픈 열대 > 에서 누누이 자신은 기억력이 매우 나쁘다고 강조했다. 기억을 재구성할 수 없으니 회고록이나 자서전'을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그는 처음부터 < 기억 > 이라는 것를 신뢰하지 않았다. 기억이란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보기엔 인간의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
어쩌면 ○○○ 평론가는 단순한 기억'을 지나치게 의미 부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한때 그냥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를 본 적이 있었고, 한때 그냥 < 낙타 >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는 이 단순한 기억'을 병렬로 나열해서 " 자신의 시네필的 에티튜드 " 를 과시하고 싶은 속셈은 아니었을까 ? 초2 때부터 이미 중2○을 앓았으니 조숙하긴 조숙했던 모양이다. 나는 < 기억 > 을 믿지 않는다. 내가 내뱉는 문장은 팔 할이 허세요, 뻥'이니 내 글은 믿지 마시길 !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기억해 낸 재현들은 모두 미화된 것들이다. 나를 향한, 촉이 날카로운 경멸'조차도 말이다. 인간이란 자신'에게 불리한 진술은 하지 않는 법이다.
나는 한때 아버지와 < 미녀와 야수 > 를 본 경험이 있고, 또 어느 한때 벌거벗은 여자를 그린 적이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기억'을 연속으로 나열해서 배치하면 될성부른 떡잎이 된다. 이 < 기억-병렬 장치 > 는 나를 4살 때 이미 장 콕토의 < 미녀와 야수 > 를 보고 감동한 조숙한 시네필'로 만든다. 당당해진 나는 이렇게 외치리라. " 야, 이놈들아 ! 너희들이 텔레토비 보고 헤헤거릴 때, 나는 미녀와 야수 보고 와와 했다. 이거시 바로 교양의 레베루'다 ! " 잠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지 ? 아, 아아 그렇지 ! < 만연체 > 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샛길로 빠졌네. 하여튼 만연체'는 실력 없는 사람이 다루면 지저분해진다.
땡땡땡 평론가'는 문장이 뒤틀리면 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데 지우고 다시 쓰기는커녕 쉼표'를 찍고는 새로운 문장을 이어 쓴다. 이런 식으로 쉼표 몇 개가 나열되다가 어느 지점에서 마침표'가 마침내 작성된다. 결국은 꼬리가 긴 문장이 된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주부와 술부 간에 호응이 꼬일 확률이 높고 문장의 긴밀성이 떨어진다. 독자 입장에서는 당최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땡땡땡 평론가가 쓴 평론은 한글로 작성한 글이지만 왠지 모르게 원서를 번역해서 옮긴 글인 것만 같다. 그가 < 낙타 그림 > 대신 < 문법 공부 > 를 더 열심히 했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영화 비평을 쓰는, 꽤 좋은 평론가가 되었을 것이다.
평론이야 그렇다고 쳐도 소설가가 할 말 안 한 말 가려 하지 않고 할 말 안 할 말 다 한 만연체'로 쓴 소설을 읽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그것은 문장이 아니라 옹알이'요, 넋두리다. 심하게 말하면 문학이 아니라 단순한 녹취록'이다. 다듬지도 않은 글을 작가의 개성적 문체라고 우긴다면 지나가는 개도 하 ! 하 ! 하 ! 원석도 깎고 다듬어야 보석이 되지 갈고 닦지 않으면 그 흔한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법이다. 절차탁마하라는 소리이다. 김훈은 < 꽃은 피었다 > 와 < 꽃이 피었다 > 를 두고 오랫동안 고민했고, 박완서는 쉬운 문장을 위해서 의뭉스러운 단어들은 버렸다. 좋은 문장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할 때 탄생한다.
잘 고른 단어 하나는 열 단어 부럽지 않은 법! 박완서 작가'가 < 그 여자네 집 > 에서 " 그해 겨울은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이었네...... " 라고 쓴 문장은 황홀했다. 나는 이 문장에서 < 구슬 > 이라는 단어의 쓰임이 황홀해서 소설 전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녀가 " 내 생애의 주옥 같은 겨울이었네... " 라거나 "... 황금 같은 겨울 " 이라고 했다면, 나는 이 소설을 좋아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내 생애의 구슬 같은 겨울 > 과 < 내 생애의 주옥 같은 겨울 > 은 뜻은 동일하지만 느낌은 다르다. 주옥(珠玉)이 구슬 주에 구슬 옥'이니, 구슬이나 주옥이나 같은 단어이지만 울림은 사뭇 다르다. 이처럼 깎고 다듬은 문장은 힘이 있다.
이러한 고민도 없이 옹알이 같은 문장으로 된 소설이나 평론을 읽을 때마다 한숨이 나온다. 할 말 안 할 말 다 하지 말고, 할 말 안 할 말 가려서 꾹꾹 눌러 써야지 좋은 문장이 나온다. 깎지도 않은 돌을 보석이라고 우기면 곤란하다. 믈방울 크기의 다이아몬드는 커다란 원석을 갈고 닦은 결과이다. 소설은 영화와는 달리 스토리가 훌륭하다고 해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는 없다. 소설의 기본은 < 머리'> 보다는 < 손' > 이다. 이 말은 스토리보다는 문장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스티븐 킹은 스토리가 탄탄해서 좋은 작가가 된 것이 아니라 황홀한 상상력과 함께 튼튼한 문장 실력까지 갖춘 작가였기에 성공한 소설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