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은 乙이 욕망하는 도깨비감투'이다. 완장만 있으면 싸울 필요도 없다. 선빵을 날릴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완장이 없는 乙은 알아서 쫀다. 전, 쫄면입니다. 우우우. 전, 울면이에요. 우우우. < 남양유업 사태 > 에서 영업사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행패를 부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甲이기 때문이 아니다. 완장을 찼기 때문이다. 완장은 갑질'을 할 수 있게 만드는 유사 아이언맨 갑옷 슈트'다. " iron man " 을 한자로 풀면 쇠 철/鐵에 얼굴 면/面'이니, 유사 갑옷인 완장을 차고 으스대는 놈은 철면피한 놈이라 할 수 있다. 甲과 乙 사이에 완장'이 존재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甲을 욕망하는 乙이거나 유사 甲이거나, 사이비 乙이다. < 완장 > 은 감투(갑옷) 아래 계급이다. 갑질보다 지저분한 짓이 바로 완장질'이다. 팔 완(浣)에 글 장(章)'을 풀어쓰면 문신(文身)이 된다. 浣=身 이고, 章=文'이다. 팔뚝에 그림 그리는 놈은 옛부터 깡패 새끼'라는 소리를 들었다.

 

- 완장은 문신(文身)이다 中

 

 


 

 

 

 

 

 

 

출생의 비밀,

을 듣고 통곡하다.

 

집에 누런 족보' 하나가 있었다. 어린 나이에 궁금한 거라 ! " 이 서책은 무엇을 담은 질그릇이옵니까? " 라고 물으니, 아버지는 꽃씨와 바람'에 대한 이야기'라 하셨다. " 잘 새겨듣거라 ! 태초에 꽃이 있었나니, 꽃이 피어 바람이 불면 조금 먼 곳에 꽃씨'가 날아 또 다른 꽃이 피고 지고 피었나니, 너는 그 태초의 꽃에서 가장 멀리 날아, 가장 먼 곳에 핀 꽃이란다. 알겠느냐 ? " - 이런 식으로 대화가 오고갔을 리'는 없다. 족보가 있었기는 했으나 들보처럼 켜켜이 먼지만 쌓인 채 짐짝 속에 박혀 있었다. 아버지는 족보를 펼쳐서 읽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냥 족보가 있다는 것은 조상이 양반'이라는 증거다, 라고만 말씀하셨다. 그때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시던 어머니가 한 말씀하셨다. " 똥구멍이 찢어져도 양반 타령이네. 하이고, 내가 이놈의 ●씨 집안에 시집와서 고생한 거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눈물이 ! 이것들아, 명심혀 ? 밥이 양반이여, 밥이 ! "   

 

어찌 되었든, 아버지는 양반 가문에서 태어난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썩어빠진 정치 이야기를 하실 때는 캄캄한 밤하늘에 떠 있는 인공위성'처럼 눈이 반짝거렸다. 충청도 출신인 아버지가 진보 진영쪽 인사들을 자주 언급하신 걸 보면 정치적 안목은 있으셨던 것 같다. 특히 아버지는 한시'를 좋아하셨다. 아버지의 필체가 한석봉은 아니더라도 아마츄어 중에서는 갑 중의 갑'이셨다. 아버지는 양반이 맞아 !  하지만 나는 국사 시간'에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다. 국사 교사가 말했다. " 혹시 이 반에 ●씨 성 가진 사람 있나 ? " 내 성이 그 흔한 김이박'은 아니기에 나 혼자 손을 들었다. 선생은 방긋 웃으며 ●씨 성'의 유래에 대해 말했다. 선생이 하는 말이 맞다면 아버지가 말씀하신 태초의 꽃은 < ●다구 > 라는 사람이었다. 성'이 뼈 씨'였다면 뼈다구요, 깔 씨였다면 깔다구, 싸 씨였다면 싸다구'였을 뻔 !

 

그나마 ●씨였다는 것이 위안을 주었다.  그렇다면 ●다구'란 어떤 위인'이었을까 ? 선생이 풀어놓은 이야기 보따리는 차마 이 자리에서 다 풀 수가 없을 정도로 고약했다. 그에 대한 소사'를 적자면 그는 원래 고려인으로 몽골에 귀화한 인물로 원나라 장수가 되어서 고려시대 삼별초를 무자비하게 제압한 오랑캐 장군'이었다. 그는 고려 땅에 10년 넘게 주둔하면서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그 권세가 하늘을 찔렀으리라. 성욕이 꽤나 발달해서 예쁘장한 처자가 있다 싶으면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욕심을 낸 모양이었다. 결국 나란 인간은 그가 뿌린 정념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사실 그는 고려에서는 위세가 등등했으나, 원나라 입장에서 보면 강북의 어두컴컴한 곳에 파견을 보낸 장수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인이 보기에는 ●다구는 아이언맨갑옷슈트'를 입은 인물이었지만 사실 원나라 천황이 준 것인 갑옷이 아니라 완장이었다. 

 

●다구'는 지방 파견 근무자'였다.  아이들이 박장대소했다. 한 달치 왕따 티켓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내 엉덩이에 선명한 몽고반점'은 내가 몽골의 후예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주홍글씨 A였다.  내 낯빛이 어두워지자 국사 선생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대한민국에서 순수 혈통을 가진 성 씨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그것은 나를 위로하지 못했다. 선생은 내 눈치를 살살 살피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니들, 여름에 수박 먹제 ? 수박 맛있제 ? 그쟈 ? 그 수박 ●다구'가 최초로 들어온기라. 알고 먹으래이. 곰곰발이 덕분에 니들 이 여름에 수박 먹는기라. " 이 말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작은 술책이었으나 이미 화딱지가 나 있는 상태여서 흥분이 가시지 않았다. 내가 누구인가 ? 원 펀치 쓰리 강냉이 불광동 도깨비풀이 아니었던가 ? ●다구'라는 인물에 대한 뒷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만 보면 안 될 것을 보게 되었다.  ●다구 본관이 < ●● > 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 본관도 < ●● > 이었다. 성도 같고 본관도 같은 것이다. 우우우, 출생의 비밀은 밝혀졌구나. 그래서 내가 대한민국에 대해 이토록 삐딱했구나. 어흥 ! 지금 생각해 보면, 국사 선생은 사이코 변태 새끼'였던 것 같다. 아마... SM 성향 중에서 S였을 것이다. 가끔 내 글에 등장하는 < 천●● > 도 그 선생 때문에 상처를 받은 적이 있다. 다음은 선생이 한 말이다 :  " ( 출석부를 보며 ) 천●● ?! 천●● 누고 ?! 니가 ? 크크크크. 니 조상 누군지 아나 ? 천방지축이란 말 있제 ? 꼴통을 천방지축이라 하제 ? 여기서 천방지축은 천방지축마골피'에서 나은 기라. 승/姓이야, 승 ! 섹스 말고 사람 승. 옛날 천민들 성이란 말이다. 天씨는 무당, 方씨는 목수나 미장이, 地씨는 장의사, 丑씨는 소백정, 馬씨는 말백정, 骨씨는 뼈(고리)백정, 皮씨는 가죽백정(갓받치) "

 

이 말에 아이들은 까르르 웃었다. 두 달치 왕따 티켓'이었다. 특히 대한민국 성 씨의 50% 차지하는 < 김이박최정 > 은 도도하게 천●●룰 비웃었다. 시부랄 새끼들 ! 그 흔해빠진 성이 뭐가 그리 좋다고 !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하지만, 사실 그때에는 내 조상이 오랑캐 장군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이어서 그 친구에게 무당의 자손이라고 시간 날 때마다 놀렸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천●●'가 나에게 맹공을 퍼부었다. " 닝기미 ! 나는 무당 자손이지만 네 조상은 오랑캐 시다바리나 했구나 ? ㅋㅋㅋㅋㅋ. 어차피 끼리끼리 노는 거다. 그러니깐 앞으로 나 놀리지 마라. 우리 친구 아이가 ! " 나는 친구의 말에 당나귀처럼 흐엉흐엉 울었다.  하지만 까르르르르 웃는 김,이,박,최,정 씨 또한 그렇게 신나게 웃을 처지는 못 된다. 사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자신의 성을 가진 사람은 전체 인구 중에서 30%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대부분은 성도 없고, 이름도 없었다. 저잣거리에서 개똥아, 라고 외치면 정확히 345,754,643명이 뒤를 돌아볼 정도였다. 꽃분이, 예쁜이, 간난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양반 사회가 붕괴되면서 신분제도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름이 없던 사람들은 이름을 지어야 했다. 무당이나 백정 혹은 장의사였던 이들은 각자 직업에 따라 성을 지었다. 하지만 양반 집에서 노예로 살던 사람들은 딱히 직업이라고도 할 수가 없어서 주인의 성'을 그대로 따왔다. 그러니깐 김이박최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중 절반은 노예였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 아버지, 우리 조상은 ●다구 오랑캐 장군이었다면서요 ? " 아버지는 한시를 필사하시다가 멈추셨다. 낯빛이 어두워지셨다. 아차, 싶었다. 조상을 욕보인 탓이었을까 ? 아버지는 획 돌아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 그럴지도 ! " 방긋, 방긋, 방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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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2013-11-19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쥐뿔도 없는 것들이 양반타령 내가 낸데 완장타령이지요.
피부색만 다르지 '모건프리먼' 닮았던 아버지나
전형적인 남방계얼굴인 저를 보더라도 토박이는 아닙니다.
몽고반점은 흑인아이에게도 나타나는 걸로 봐서
족보는 신빙성을 잃었다고 받아들일 수 밖에요. ㅜㅜ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9 07:43   좋아요 0 | URL
오호, 혹인 아이에게도 몽고반점이 있군요. 흠흠....
혈통 따지는 인간들 보면
뭔가 좀 변태 같지 않습니까 ?
인간과 뱀이 교접한 것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나온 인간인데 뭔 놈의 피부색 운운....
하여튼 변태 새끼들 가틈..

Nina 2013-11-2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성씨에 대한건 잘 모르지만
지역색에 대해 한가지 확실히 느낀건 있어요. 충청도 사람들 유머감각 하나는 진짜 남다르다는거!
코미디언 중에 충청도 출신이 많이 보이는것도 괜히 그런게 아니겠죠.. 하다 못해 인간극장에 나오는 출연자를 봐도 충청도 분들 나오시는걸 보면 유난히 웃겨요 ㅎㅎㅎㅎ 저번 인간극장에 염소 키우시는 충청도 아저씨 나왔는데 웃겨 쓰러지는줄 알았다니까요.
페루애님 아버님 고향이 충청도라고 하셨나요. 페루애님이 그래서 유머감각 있으셨나.. 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1 18:39   좋아요 0 | URL
충청도 맞습니다. 코드가 참 기가 막혀요.
저도 충청도 노인들 하는 소리 들음 어찌나 우기드니...

능정과 능글이 아주 교묘하게 얽혀 있어요.
하여튼 충청도 시골 가서 한 달 정도 살면 재미있을거 가타요...ㅎㅎㅎㅎㅎ
 
머니볼
마이클 루이스 지음, 김찬별.노은아 옮김 / 비즈니스맵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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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누가 떠나든 죽든

우리는 모두가 위대한 혼자였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시 " 비가 2 - 붉은 달 " 中 , 시집 < 입 속의 검은 입 >기형도

 

 

초등학생 때부터 프로야구를 보기 시작했다. 내가 응원하는 팀 선수가 안타를 치면 와와, 했고 아웃 되면 우우, 했다. 종종 아아, 하거나 애애, 하기도 했다. 그때는 야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잘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냥 야구모자와 헬맷을 쓴 선수들이 멋있어 보일 뿐이었다. 야구는 수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산수 수업 시간에 배운 것은 +,-, ×, ÷ 부호로 셈을 하는 것이 전부였는데 이 셈법 가지고는 < 야구 방정식 > 을 풀 수는 없었다. 야구가 오묘한 스포츠'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때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였다. 그때 확률과 통계'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야구는 확률과 통계만 제대로 알면 다 아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수학 노트에 ≤, ∞, ∠, √, ∽, ∝ 대신 방어율, 승률, 타율'을 적기 시작했다.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던 나는 한순간에 새 됐다.

 

아마도 내가 야구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때는 이때였을 것이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부터는 야구에 대한 관심이 사라졌다. 왜냐하면 야구'보다 재미있고 짜릿한 경기'에 관심이 쏠렸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레슬링'이었다. 레슬링 심야 경기, 사랑하는 사람과 침대에서 뒹구는, 그 야간 경기 말이다. " 빠떼루 자세 " 는 황홀했다. 나는 그레코로만형'보다는 자유형 경기를 좋아했다. 서로 뒹굴고 엉키다 보면 헉헉거리며 땀이 났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레슬링 선수는 상대방을 메트(mat)에다 자빠트리면 이기는 경기였지만 내가 하는 경기는 상대방을 침대 매트리스(mattress)에다 자빠트리면 되는 경기였다. 나는 레슬링 유망주'여서 항상 상대방을 위에서 제압했지만 종종 상대방 아래에 깔리기도 했다. S와 M은 하나였다. S 역할을 할 때는 상대방에게 " 기모치 ? " 라고 물었고, M 역할'을 할 때는 " 야메떼 구다사이 ! " 라고 앙앙거렸다.

 

흥미진진한 경기였다. 하지만 레슬링도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하는 일마다 틀어지고, 설상가상 괄약근과 남근마저 부실해져서 무근적 수컷이 되자 상대방은 내 곁을 떠났다. 대한민국에서 괄약근과 남근이 부실하다는 것은 한물간, 나이 먹은 퇴물을 의미했다. 딱딱한 남근을 가진 성공한 남성은 젊고 예쁜, 탱탱한 여자만 좋아했다. 대한민국에서 예쁘면 모든 것은 용서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성공한 자만이 행복한 사회가 되었다. 패자부활전'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루저와 비정규직'이란 말이 떠돌기 시작하더니 88만원세대'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졌고 이어서 乙 과 잉여'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21세기의 화두는 실패'였다. 하지만 실패를 다루는 접근법은 너무 후졌다. < 슈퍼스타 케이 > 나 < 위대한 탄생 > 이 도입한 멘토링'은 사실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을 뽐내기 위한 제스츄어'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초라한 멘티를 만나기 위해 1억짜리 알반지를 끼고 접선 장소에 나가는 멘토의 허세와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내뱉는 힐링과 멘토링은 실패한 자를 이해한다기보다는 성공을 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실패가 중요하다고만 말한다. 실패를 성공을 위한 동기 부여'로 이용하라는 것이다. 멘토에게 있어서 실패는 성공을 위한 자양강장제이며 박카스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원빈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 오징어 생김새를 말하는 것과 똑같다. 실패'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아니다. 하지만 절망할 필요는 없다. 야구가 있으니깐 말이다. 학문에 빗대어 설명한다면 야구는 < 실패학 > 을 다루는 학문에 가까울 것이다. ( 야구가 왜 실패를 다루는 스포츠인가는 이 자리에서 빌려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숱하게 말하고는 했으니깐 말이다. )

 

마이클 루이스의 < 머니볼 > 은 오클렌드 에슬레틱스 단장인 빌리 빈'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는 확률과 통계를 무기로 야구계에 퍼진 뿌리 깊은 비합리성'에 도전한다. " 템파베이 레이스 " 와 함께 가장 가난한 구단에 속하는 " 오클렌드 에슬레틱스 " 는 부자 구단인 양키스와 다저스'처럼 어마어마한 자금력으로 성공한 스타 선수'를 영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스카우터들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떨거지'에게만 주목했다. 부자 구단 스카우터들은 배리 본즈 같은 근사한 몸매를 원했다. 그들은 키 크고 팔뚝 굵은 우람한 체형을 가진 호타준족을 선호했다. 그리고 여기에 홈런을 빵빵 쳐낼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그리고 투수는 커다란 키에서 내품는 강속구와 삼진에 열광했다. 하지만 오클랜드 스카우터들은 생각이 달랐다. 키가 작아도 되고, 빼빼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어도 상관없었으며 가슴 대신 젖이 달린 뚱뚱한 선수도 상관없었다.

 

심지어는 어릴 때 병을 앓아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선수를 영입하기도 했다. 부자 구단 스카우터들이 보기에는 그러한 선수들은 마이너리그에서도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빌리 빈'이 눈여겨본 것은 화려한 홈런 타자나 빠른 발, 뛰어난 수비 능력이 아니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출루율이었다. 타율은 낮더라도 출루율이 높은 타자가 좋은 타자였다. 그러니깐 타율 3할에 출루율 3할인 타자보다는 타율 2.75에 출루율 4할인 타자가 더 좋은 선수였다. 안타를 치든, 볼을 골라서 나가든, 데드 볼을 맞든, 무슨 수를 쓰든, 살아서 많이 나가기만 하면 만사오케이'인 것이다. 그가 기형도의 시'를 알고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 누가 떠나든 죽든,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 " 그래서 그는 출루율은 훌륭했지만 외형적 조건이 초라한 뚱뚱한 포수, 키 작은 야수, 타 구단에서 방출된 퇴물'을 모아서 팀을 꾸린다. 결과는 환상적이었다. 2002년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최종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오클랜드 103승 59패

애너하임 99승   63패

시애틀    93승   69패

텍사스    72승   90패

 

재미있는 사실은 각 구단이 선수에게 지급하는 총연봉이었다.

 

오클랜드 총연봉 지급액   41,942,665

애너하임 총연봉 지급액   62,757,041

시애틀    총연봉 지급액   86,084,710

텍사스    총연봉 지급액 106,915,180

 

총연봉 액수가 적은 구단일수록 성적이 좋았다. 텍사스는 일 억 달러를 투입해서 72승을 거두었고, 오클랜드는 고작 사천만 달러를 투입해서 103승을 거둔 것이다. 몸값이 1000억인 대형 스타 선수들은 볼을 골라서 1루를 밟는 것보다는 홈런을 치기를 바란다. 홈런과 타율은 몸값 책정에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사구나 골라서 나가면 뭔가 꾀죄죄하게 보이지 않을까 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타점이 높은 선수보다 득점이 높은 선수가 팀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타점을 올린 타자의 안타는 사실 1타점이 아니라 0.5점을 올린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이 타석에 들어설 때 동료가 2루나 3루에 나가 있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동료의 출루 때문에 타점을 얻은 것이다. 그런데 팬들은 항상 안타를 쳐서 점수를 낸 타자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투수도 마찬가지'다. 삼진을 많이 잡는 투수보다는 아웃 카운트를 쉽게 잡는 투수가 더 좋은 투수이다. 팬 입장에서는 응원하는 팀 투수가 상대 선수를 삼진으로 잡으면 통쾌할지는 모르겠지만 투구수만 늘릴 뿐이다. 8구 끝에 삼진을 잡아내는 것보다는 초구에 땅볼을 유도해서 아웃시키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선발 투수는 타자와도 싸워야 하지만 자신의 투구수 하고도 싸워야 한다. 평균 한 타자당 10구 정도를 던져서 9타자를 삼진으로 잡았다면 차라리 안타 4개를 맞는 것보다 더 나쁜 투구'라 할 수 있다. 아웃 카운트 9개를 잡기 위해 공을 90개를 뿌렸다면, 그 투수는 공을 잘 던지는 투수가 아니라 못 던지는 투수'다. 그런 식으로 던지면 4회에 이미 한계 투구수인 100개를 초과해서, 타자들이 힘 빠진 공을 무차별적으로 난타할 것이 틀림없다. 6회를 책임지지 못하는 선발 투수는, 비록 무실점으로 내려온다고 해도, 훌륭한 투구를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사구나 사구를 얻어서 출루를 한 선수나 2루타를 쳐서 점수를 낸 선수나 똑같은 가치'란 말이다. 오클랜드 선수들은 열심히 싸웠다. 가슴 대신 젖가슴을 가진 타자는 볼을 잘 골랐고, 키 작고 삐쩍 마른 타자는 홈런은 못 치지만 내야 안타를 잘 만들어서 출루율이 좋았으며, 느린 구석을 가진 투수는 안장다리'로 절묘한 구질을 선보였다. 오클랜드가 아니었다면 사회에 나가 세일즈맨이나 되었을 선수들은 화려한 플레이보다는 성실한 플레이로 승리에 도움을 주었다. 사람들은 타율이 높은 스타플레이어'를 좋아한다.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출루율'이다. 사람들이 출루율이 높은 선수에게는 그닥 관심이 없는 이유는 화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사람들은 높은 타점을 올린 선수에게 열광하지만 사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득점'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이건희는 천재 한 명이 노동자 만 명'을 먹여살린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을 바꿔 말하면 4번 타자'가 팀을 승리로 이끈다는 말과 같다. 하지만 그 아무리 홈런 타자'라고 해도 동료의 도움 없이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점수는 ( 메이저 역사 100년사에 한두 번 나올까 말까 한 4연타석 홈런을 친다고 가정해도.... ) 솔로 홈런 4방에 의한 4점이 한계이다. 솔로 홈런만 가지고 점수를 내는 팀은 안타만 가지고 점수를 내는 팀을 이길 수 없다. 야구는 팀 플레이'다. 그러므로 이건희가 말한 " 천재론 " 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타율은 높은데 출루율은 형편없는 타자보다 타율은 낮은데 출루율이 높은 타자'가 팀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빌리 빈은 증명했다. 문장으로 빗대서 설명하자. 타율은 낮아도 출루율이 높은 선수를 품사로 따지자면  < 조사/助詞 > 다.  조사란 " 체언이나 부사, 어미 따위에 붙어 그 말과 다른 말의 문법적 관계를 표시하거나 그 말의 뜻을 도와주는 품사 / 네이버 사전 "  이다.

 

 실력 있는 문장가는 조사'를 정확히 사용한다. 김훈은 종종 어떤 조사를 쓸 것인가에 목숨을 건다. 그의 문장이 아름다운 이유는 조사 덕이 팔 할이다. 반면 타율은 높은데 정작 출루율이 낮은 선수는 형용사나 부사 혹은 감탄사'와 비슷하다. 이런 문장은 자극적이기 일쑤다. 헤밍웨이였다면 형용사가 부사가 잔뜩 들어간 문장을 보고 조미료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며 구겨서 버렸을 것이다. 좋은 타자는 품사 " 조사 " 같은 선수다. 그러므로 쫄지 마라, 시바. 키 작다고 실망할 필요 없다. 남자 새끼가 가슴 대신 젖가슴 달렸다고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다. 여자도 마찬가지다. 젖가슴이 작다고 쪽팔릴 필요도 없다. 허리 사이즈가 77사이즈이면 어떤가 ? 그리고 전문대 나와서 별 볼 일 없는 직장을 얻었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다. 별 볼 일은 천문학자들이나 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오클랜드 소총부대'가 있다. 스타플레이어는 없지만 경기에서는 지는 날보다 이기는 날이 많았다. 이 세상은 아이큐 100이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야구란 10번 중에 3번 성공하면 잘했다고 대접받는 스포츠다. 10번 중에 3번 성공했다는 말은 뒤집으면 10번 중에 7번은 실패했다는 것 아닌가 ?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타율을 간직한 테드 윌리엄즈의 기록은 4할이었다. 그 이후 4할 타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타율 4할을 다른 말로 하자면 10번 타석에 들어서서 6번 실패한 경우를 말한다. 성공보다 실패가 많은 것이 바로 야구다. 그리고 그 실패를 좋게 평가하는 것 또한 야구다. 만약에 테드 윌리엄즈가 이명박에게 이 기록을 내밀었다면 따귀를 맞았을 것이다. 그는 특유의 쇳소리를 내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는 10타수 10안타였습니다. 여러분, 내 말 믿습니까 ? 믿습니까 ? 믿습니까 ? " 그러는 당신이 정말 밉습니다. 가카 ! 당신은 언제나 완벽한 물질입니다. 하여튼 야구는 매럭적인 스포츠'다.

 

 

 

 

부록

 

■ 타점과 득점을 혼동하기 쉽다. 타점은 안타 따위로 동료 선수를 홈으로 불러들인 타자에게 부여하는 점수이고, 득점은 출루한 선수가 동료 타자의 안타 따위로 홈을 밟았을 때 홈을 밟은 선수에게 부여하는 점수다. 4번 타자가 타점이 높은 이유는 찬스에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타석에 들어섰을 때 1,2,3루에 동료 선수가 많이 나가 있기 때문이다. 야구를 생각없이 보는 놈은 타점에 열광하고 야구를 심각하게 보는 놈은 득점을 올린 선수를 높게 평가한다.

 

■ 2.75와 3.00 타자의 차이점은 사실 굉장히 미미하다. 3할 타자는 2주 간격으로 끊어서 계산하면 2.75 타자보다 고작 안타 하나를 더 치는 사람이다. 차이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만약에 내가 구단주라면 3할 타자에 출루율 3할인 타자보다는 2할 타자에 출루율 3.50인 타자를 고르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다.

 

■ 삼진을 당하지 않고 사사구를 잘 고른다는 점은 투수가 투구수를 많이 던지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투수는 보통 100구 정도가 한계이기 때문에 볼을 잘 고르는 타자'가 얻어낸 투구수'는 안타보다 소중한 경우가 허다하다. 7번 타자가 2아웃에서 초구에 안타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9번 타자가 계속 파울 타구를 쳐내서 결국에 삼진으로 아웃 당하는 경우가 훨씬 값어치가 나간다. 그래서 출루율이 중요한 것이다. 출루율이 좋은 타자들은 대부분 투수의 투구수를 늘리는 선수들이다.

 

■ 내 기준에 의하면 4번 타자보다는 1번 타자가 중요하다. 4번 타자가 명성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1번 타자'를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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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a 2013-11-17 0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머니볼은 영화로 봤었는데 당시에 브래드 피트가 왜 출루율에 그리도 집착했는지 페루애님의 이 글을 보니 싹 정리가 되네요. 당시엔 지금보다도 훨씬 더 야구를 몰랐을 때라 별 감흥없이 봤거든요.

중학교 때 좋아했던 국어 선생님이 있었는데
'조사 助詞' 부분을 설명하시며
"나도 '조사'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잔잔하게 티 안나는 조력자가.."하며 천진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잊혀지질 않아요.

출루율 부분에서 갑자기 '조사'가 생각나네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7 07:30   좋아요 0 | URL
오, 정말 기막힌 비유네요. 맞습니다. 김훈이 항상, 제일 많이 신경 쓰는 부분이 조사라고 하죠.
조사는 사실 별거 없는 영향처럼 보이지만 조사를 무엇을 쓰느냐에 따라서 엄청 달라지잖아요.
조사, 조사... 좋은 비유입니다.

투수는 타자가 출루를 하면 온통 타자에게 신경을 써요.
도루 하지 않을까 ? 치고 달리기 작전하나 ?

안타를 허용하지 않을 때는 공을 잘 던지다가 선수가 출루만 하면 180도 달라져서 폭투를 던지는 경우가 많아요.

실투를 던질 확률도 높아집니다. 4번 타자가 타율이 좋은 이유는 1번 타자 따위가 출루를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피트가 출루율 출루율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사사구 얻어서 나가는 걸 관객들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Nina 2013-11-17 13: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정말.. 1루에 누가 출루만 했다하면 아무리 멘탈 강한 투수도 흔들리는게 보이더군요. 더구나 발 빠른 사람이 출루했을땐 더더욱. 점수 올리는데 기여도로 따진다면 진짜 출루율 무시 못하겠어요.

그나저나 글 너무 재미있어요.
야구에 조예가 깊으신거 같은데, 이참에 페루애님이 '재미있는 야구이야기' 또는 '야구는 인생이다'라며 인생에 빗대어 친근감있게... 이런식으로
책 하나 내시는건 어떨까요? 혼자만 보긴 아까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7 14:00   좋아요 0 | URL
주자만 나가면 타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어요.
주자가 나가면 일단 투구폼을 빠르게 가져야 합니다.
평상시대로 느리게 던지면 도루를 하거든요.
투구폼이 빨라지면 당연히 제구에 문제가 생기죠.
잘 던지다가도 한순간에 새 되는 경우 엄청 많습니다.

새벽 2013-11-1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야구를 거의 안 봐선지 야구 영화도 잘 보질 않는데, 머니볼 만큼은 정말 제대로 꽂힌 영화였습니다.
저는 야구 외의 다른 것들이 눈에 많이 들어 오더라구요.
글을 읽고 나니 당시 그냥 지나친 것들, 그리고 페루애님이 왜 그리 야구를 좋아하시는지도 조금 더 알 것 같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7 14:01   좋아요 0 | URL
전 막상 이 영화는 보지 모했네요.. ㅎㅎㅎ.
야구가 굉장히 복잡합니다. 은근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미국은 야구 때문에 축구가 인기가 없을 거예요.
야구보다가 축구 보면 재미가 없더라고요...

yamoo 2013-11-1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니볼을 영화로 봤었는데, 정말 끝내주는 영화였습니다. 이게 원작이 있었네요~
브레드 피트와 오클랜드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멋진 영화였습니다!

흠, 곰발님의 글도 홈~랑~^^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8 02:54   좋아요 0 | URL
원작이 있었다기보다는...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잠행취재기 정도 될까요 ? ㅎㅎ.
평소 제가 늘의아해했던게 좌타자 나오면 무조건 좌투수 내보내서 한 명 상대하잖아요.
그게 전 의아스럽더라고요. 과연 효율적일까 ? 아니면 그냥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일까 ?
야구에 대한 비효율적 상식을 뒤집는 묘미가 있더군요. 이 책 말이지요..

히히 2013-11-18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갈림길에서 멘토를 만난다면 잠시 그의 농담에 휴식을 취하며 몸의 피로를 달래겠으나
그가 갔던 길을 택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삶의 상응관계에 근거하여 내 나름의 길을 성큼성큼 걸어가겠습니다.
둘러 가면 어떻고, 한숨 자고 쉬어 가면 어떻습니까?
제게 맞닥뜨린 외길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9 07:44   좋아요 0 | URL
어차피 인생이 외길'이에요.. 외길...
둘이 가지 못하는 좁고 좁고 좁은 길.....
그걸 알아야지, 따라다가가는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음...
 

 

 

 

 

 

심장이, 뛴다

 

- 이 이야기는 100% 실화'이다.

 

 

 

 

 

 

4월이 오면 늘 병원을 찾는다. 봄철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이다. 올해도 어김없이 피부 발진에 의한 열꽃이 피어서 피부과를 찾았다. 더군다나 감기로 고생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의사는 피부 상태 대신 내 눈동자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내과 진찰이 필요하다며 빠른 시일 안에 검사를 받도록 조치를 취했다. 며칠 후 나는 이런저런 검사를 받았다. , 올 것이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말들이 오고가겠지 ? 간암 말기입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십시오. 말랑말랑한 감성은 개나 주시구요. 일주일 후 진찰 결과를 받기 위해 병원을 다시 찾았다. 의사가 말했다. ... 별다른 이상 소견은 보이지 않습니다. 간 수치 정상이고요, 당도 정상입니다. 혈압도 정상이군요. “ 의사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마자 말이 이어졌다. .. 정상인데 한 가지 조금 우려되는 상황이 있군요. , 걱정할 정도는 아닙니다만....... “  의사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 심장이 뛰지 않아요. 혹시 독신이신가요 ?“ 

 

내가 네, 라고 답하자 의사는 부럽다는 듯 입을 오므리며 오, 라는 감탄사를 흘렸다. 오므린 입술이 마치 괄약근 같았다. 의사는 30대 중반으로 보였는데 이미 머리는 다 빠져서 문어처럼 반들반들했다. 갑자기 아랫배에서 묵직한 통증이 왔다.  “ 혹시 그동안 은행 대출 이자를 꼬박꼬박 내셨나요 ? 앞으로는 내지 마십시오. 무단 횡단을 하거나, 거리에 침을 뱉거나, 한밤중에 주차된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차서 부러뜨린 적 있으신가요 ? , 오해하지 마세요. 그건 아니고요. ,네네.. 없으시다고요. 그렇다면 오늘 밤 주차된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차도 됩니다. “ 농담도 잘하셔.  크크크크.  내가 웃자 의사도 지지 않으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하하 하고 웃으면, 그는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내가 다시 하하하하하하 하고 웃었더니 그는 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고 더 길게 웃었다. 나중에는 서로 섞여서 배꼽을 잡고 웃기 시작했다

 

- 그럼 저는 살아 있는 시체'네요. 크크.

- 자기 비하는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 사실... 일주일 동안 검진 결과 때문에 걱정이 많았습니다. 혹시나 했는데

의사선생님께서 이렇게 화기애애한 농담을 하셔서 긴장이 싹 풀렸어요.                                                

- ( 정색을 하며 ) 농담이라뇨 ?

- 네에 ?!

- 농담이라뇨. 선생님의 심장은 정말 뛰지 않습니다. 심 ! 장 ! 이 ! 뛰 ! 지 ! 않 ! 는 ! 다 ! 고 ! 요 !

- 뭐요 ? 아니... 의사라는 양반이 진료 환자 앞에 두고 쌍말을 하네. 이보슈, 심장이 멈췄는데

어떻게 이렇게 살아서 돌아다닙니까 !

 

나는 벌떡 일어났다. 뭐 이런 개 같은 ! , ......어어어어이 없어. 나는 문을 박차고 나갔다. 심장이 뛰지 않아?!  하하하. 집에 돌아와 뜨거운 방바닥에 등을 지지고 누워 오늘 낮에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곰곰 생각해 보았다. 심장이 멈추면  곧바로 죽는다는 것은 지나가는 개도 다 아는 사실 아닌가 ?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손바닥에 전해지지 않았다. 두꺼운 가을 후드를 입고 있어서 그러리라. 옷을 벗고 다시 손을 얹었다. 이러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런데, 정말 심장이 뛰지 않는 것 같았다. 심장이 오른쪽으로 이사를 했나?!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 그지 깽깽이 같은 돌팔이 새끼 때문에 별 걱정을 다 하는군 ! 에이, 시부럴 !  그래 나 그냥 곰곰 생각하는 시체, ! "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청계천 의료 기구 상가를 찾아 < 청진기 > 를 구입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 그지 깽깽이 돌팔이이며 해삼 멍게 말미잘 문어 같은 의사가 못내 괘씸한 거라. 좋아, 내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당신을 허위 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손해 배상을 청구하리라.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시체라고 비아냥거리다니 ! 몽돌처럼 생글생글 웃는 그 의사의 얼굴을 떠올리며 다짐에, 다짐에, 다짐을 했다. 두고 봅시다잉집 현관문을 열자마자 상자를 뜯어 청진기를 왼쪽 심장 위치에 대 보았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라 ?! 고장인가 ? 메이드 인 차이나 ? 차이나는 국산 제품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 . 불량품인가하지만... 청진기는 고장이 아니었다. 시험삼아 마당에 엎드려서 잠을 자고 있는 개에게 청진기를 대 보니 펄떡거리는 심장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그러나 내 심장은 뛰지 않았다. 그렇다, 내 심장은 의사가 시큰둥하게 말한 경고처럼 뛰지 않았다 !!!!

 

*

 

나는 그 의사를 다시 찾았다. 의사는 나를 보더니 방긋 웃으며 말했다. “ 올 줄 알았습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말하면 대부분은 같은 반응을 보이고는 하죠위는 음식물을 분해하는 기능을 하죠. 폐는 숨을 쉬는 기능을 맡고 있습니다. 간은 독소를 분해합니다. 그렇다면 심장은 ? 섣불리 대답을 못하시는군요. 심장은 맹장처럼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장기랍니다. 맹장처럼 떼어낼 필요도 없습니다. 그거 아십니까 ? 포르노 여배우를 케스팅할 때 중요하게 보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항문입니다. 항문이 예뻐야 하거든요. 국화 무늬'를 최고로 치죠. 그런데 사실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는 항문이 보기 흉하든 예쁘든 어떻든, 항문이 어떻게 생겼나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심장도 마찬가지죠. 속에 있으니 쓸모없다고 굳이 떼어낼 필요는 없습니다. 심장이 가장 중요한 장기라구요 ? 후후,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어요.

 

심장은 매우 게으른 장기죠. 평생 팅가팅가 놀다가 일 년 정도만 일을 하죠. 간이 부지런한 개미라면 심장은 놀고 먹는 베짱이입니다. 심장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할 때에만 두근 두근 움직이지요. 선생님은 최근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신 적 있으셨나요 ? 심장이 떨리고, 설레고, 기쁘고, 슬프고, 안아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었나요지금 사랑,   하는 사람 있습니까 ? “ 의사의 말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모기가 내 검은 눈동자를 쏙 빼먹는, 그런 통증 같은 사랑을 한 적이 아득하구나. 멈춘 지 오래된 협궤열차였구나. 부끄러웠다. 눈물이 났다. 오래 전 헤어졌던 모서리 같던 여자가 생각났다. 그때 내 심장은 거칠게 뛰고 있었으리라. 눈물이 났다.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심장이 뛰고 있는 사람은 현재 전체 인구의 16.7%에 불과합니다. 거의 대부분 심장이 멈춘 상태죠. 사랑해서 결혼을 한 사람들의 심장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89% 정도는 뛰지 않아요. 사랑이 식었기 때문이죠. 그러니 너무 상심하지 마십시오. 외로운 건 당신만이 아니니까요. 심장 없이도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러니 사랑 없이도 살아갈 수 있죠. 하지만 10월의 연어처럼 펄떡거리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군요. 선생님 나이 때가 되면 단단한 심장보다는 딱딱한 페니스'에 신경을 쓰죠.  요즘 아이들은 우리 같은 세대'를 꼰대'라고 하더군요. 청춘과 꼰대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 청춘은 심장이 두근두근 뛰고, 꼰대는 페니스가 남근남근거리죠. 아, 미안해요 ! 취미로 힙합을 하다보니 라임에 늘 신경을 쓰게 되는군요.  사람들은 착각을 해요. 사랑과 섹스에 대해 말입니다. 제 심장도 멈춘 지 꽤 오래 되었습니다.

 

외롭고, 쓸쓸했다. 심장이 사나운 야생 들짐승처럼 뛰던 옛날이 생각났다. 고운 여자였다. 착한 여자였다. 가난한 여자였다. 그 여자 생각만 하면 자주 심장이 아팠다. 남산을 오르는 길, 어느 모퉁이에서 나는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그 여자의 손을 잡았었다깡통 뚜껑을 열면 튀어나오는 삐에로 용수철 장난감처럼, 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자주 가슴을 쳤다.  하지만 이제는 다 옛일이 되었다. 그날 나는 의사가 농담삼아 던진 충고대로 주차된 자동차 백미러를 발로 차서 부러뜨리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대신 못으로 주차된 차의 문들을 모두 긁어주었지.......

 

*

 

나는 그 길로 서울을 떠나 강원도 고성에 터를 잡았다. 죽은 시체나 다름없는 나에게 속세에서의 출세와 부귀영화가 다 무엇이랴 ! 도시 속 좀비'로 사느니 차라리 자연 속에서 세월을 낚을 요량으로 선택한 길이었다. 직업도 구했다. 내 직업은 머구리였다. 취미로 스킨스쿠버 자격증을 취득했었는데 이 취미 활동이 요긴하게 쓰일 줄은 몰랐다. 우주복 같이 생긴 옛날 잠수복을 입고 물밑 바다에서 왕문어를 잡는 일이었다. 이 머구리는 일반 잠수복과는 달랐다. 착용하는 장비만 해서 50kg에 달했다. 3,40미터 해저에서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무거운 중량이 필요했다. 일반 잠수복은 산소통을 지고 잠영을 하지만 머구리는 우주복 같이 생긴 잠수복 안에 공기를 공급하는 공기 튜브가 따로 있었다. 이 공기 튜브를 책임지는 사람을 줄잡이라고 불렀는데, 줄잡이는 머구리가 물밑 작업을 할 때 배 위에서 머구리에게 공기를 주입하는 튜브가 꼬이지 않도록 관리를 하는 일을 했다 

 

나는 물밑 작업을 끝내면 입에 물던 똥줄을 머구리 옷 속에 넣었다. 그러면 옷은 풍선처럼 부풀어올랐고, 그 부력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곳 사람들은 산소 공급을 하는 튜브'를 똥줄이라고 불렀다. 무게만 50kg인 머구리 장비를 지고 바다 밑바닥에서 작업하는 일은 말 그대로 똥줄이 타는 일이었다. 몹시 힘 들고, 마음 졸이는 작업이었다. 스크루'에 튜브가 잘리기라도 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인생도 그닥 다르지 않으리라. 우리는 날마다 똥줄을 문다. 선주와 줄잡이 그리고 머구리는 그날 잡은 수확량을 서로 사이 좋게 나누었다. 선주가 4이고 줄잡이와 머구리가 각각 3를 챙겼다. 왕문어의 경우 20kg에 평균 40만 원 선에서 거래가 되어서 몇 마리만 잡아도 독신인 나는 며칠은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운이 좋은 날은 하루에 왕문어를 다섯 마리나 잡고는 했다.

 

물론 잡히지 않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왕문어를 잡지 못했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나는 왕문어 사냥 틈틈이 전복이나 해삼 따위를 잡아 어망에 담아서 시장에 내다팔았고, 남은 것은 술안주로 먹었다. 줄잡이인 왕씨'는 함경북도 출신으로 탈북해서 이곳 고성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새터민이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줄잡이를 하지만 왕년에는 꽤 유명한 머구리'였다고 한다.  그는 술만 마셨다 하면 전설 속에 등장하는 괴어 목격담을 말하고는 했다. " 으마으마한 기야. 내래, 고렇게 큰 놈은 첨 봤지비. 백두산 크기라면 믿갔어 ? 안 믿갔지. 안 믿갔지. 나라도 안 믿지. 하지만 내래 진짜 봤지비. 이보우, 내래 진짜 봤다니깐 !! " 그럴 때마다 나는 빙글빙글 웃었다. 줄잡이 왕씨가 말하는 괴어'는 크라켄'인 것 같았다. 전설 속 괴어'다.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난파된 선원들이 간신히 섬에 도착했더니 그곳은 섬이 아니라 수면 위로 떠오른 크라켄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해양 모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녀석이 바로 크라켄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다 이야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지어낸 이야기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닷속 생명체는 전체의 30%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심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생명체가 다양한 형태로 살아가고 있다.  줄잡이 왕씨가 본 것은 정말 크라켄이었을까 ? 

 

 

운명의 날은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무더운 여름이었다. 그날따라 물질하기가 힘들었지만 먹고살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중 거대한 바위 동굴을 발견했다. 어두컴컴했다. 그때 동굴 속에서 대왕문어 다리가 꿈틀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다리 굵기로 보아 족히 300kg은 되는 놈이었다. 어림잡아 계산하니 600만원의 몸값이 아닌가나는 작살로 다리를 냅다 찔렀다.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위 동굴 속에서 갑자기 거대한 물체가 튀어나온 것이었다. 그것은 왕문어가 아니라 대왕오징어였다. 전설 속에서만 존재했던, 줄잡이 왕씨가 술만 마셨다 하면 흥분해서 말하던 바로 그 크라켄'이었다. 너무나 커서 전체를 볼 수도 없었다. 내 앞에 그놈이 있는 것이다. 잔뜩 화가 난 크라켄의 촉수가 내 몸을 감쌌다.  내 몸을 휘감은  촉수는 너무 강력해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내 몸은 발판에 감겨서 바닷속 깊숙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한편 튜브를 관리하던 줄잡이도 이상 증후를 발견했다. 줄 패에 감긴 공기 튜브가 빠른 속도로 물 속으로 빠지자 줄잡이 왕씨가 성급하게 줄을 잡아당겼지만 거대한 크라켄을 이길 수는 없었다. 줄은 이내 끊어졌다. 왕씨'는 손을 바들바들 떨었다. 얼굴은 창백했다. 물 속에서 줄을 이렇게 빨리 끌어당길 수 있는 놈은 크라켄 밖에 없었다. 지금 바닷속에 그놈이 있는 것이다 ! 선주가 급히 뛰어왔다. " 무슨 일인겨 !!!! " 왕씨는 넉이 나간 사람처럼 촛점 없이 바닷속만 쳐다보았다. " 무슨 일인겨 !!!! " 선주가 다급하게 묻자 왕씨가 말했다. " 그, 그그그그놈이다..... " 선주가 물밑을 보자 거대한 검은 물빛이 출렁거렸다. 평상시 물빛이 아니었다.

 

*

 

줄이 끊어졌다는 사실은 내 생명줄이 끊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는 빠른 속도로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수압이 점점 높아졌다. 더 이상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 몸은 수압에 의해 귀와 코 그리고 입에서 쉴 새 없이 검은 피가 쏟아지고 있었다. 의 색이 검다는 사실은 산소가 거의 없다는 것을 뜻했다. 피의 주성분인 헤모글로빈은 산소와 결합하면 빨간색이 되는데 반대로 산소가 없으면 검은색이 된다. 정맥혈이 검실검실한 이유는 바로 산소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극한의 고통과 두려움이 다가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심해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외로웠다. 그때였다, 그때였다, 그때였다 !  캄캄한 바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환해졌다.

 

 환영이 보였다. 산소 결핍으로 죽어가는 잠수부들에게 종종 보이는 환영이었다. 수압과 무호흡에 따른 뇌의 산소 공급이 차단되면 뇌는 종종 이상 반응을 보이고는 했다. 내 앞에는 화창한 봄날 내가 사랑하던 모서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보고 웃었다. 단정하게 묶은 머리, 둥근 어깨, 엷은 입술, 웃을 때 쓸쓸하게 그늘이 지던 눈가의 주름. 그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가 나에게로 다가와서 내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는 손으로 위를 가리켰다. 심해 속에서 바라본 수면은 아름다웠다. 에메랄드 빛 수면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여자를 향해 사랑해 라고 속으로 말했다. 그때 어디선가 북 소리가 들렸다. 낯익은 소리였다. 그것은 내 심장 소리였다. 멈췄던 심장이 뛰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 그 여자를 사랑했었다.

 

, 옛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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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2013-11-16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옛일이 되었다.
..


아 토욜아침부터 찌질하게 ㅠ
시야가 흐릿흐릿

술이 덜깨서" 그런거라 자위하며
왼쪽 가슴에 슬며시 손을 대어 봅니다.

언제고 다시 뛰거든
씨근펄떡"이게 뛰지 말고
바운스바운스 콩콩"
한결같이 조심스럽고 끈기있기 뛰기를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6 11:04   좋아요 0 | URL
머구리에 대한 다큐를 걸었으니 함께 봅시다..

하늘바람 2013-11-17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모 단편소설이네요 재미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7 13:31   좋아요 0 | URL
재미있나요 ? 나름 야심작입니다...

히히 2013-11-18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개구쟁이였던 여고시절에 지리산 골짝에서 캠핑하며 머구리 아니 머저리짓을 하다가
저를 포함한 과년한 처녀들을 물귀신으로 만들 뻔 했죠.
그때 그니까 죽음의 문 앞에서
캄캄한 물속이 환해지는 신비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생물학적으로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고 죽음이 자연스럽게 찾아왔을 때
재차 그러한 체험을 한다면 두려움에 떨며 목숨을 마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9 07:46   좋아요 0 | URL
호오.... 그런 경험이 있으셨군요. 저는 오토바이 타다가 떨어져서 논두렁에 박힌 적 이는데
그때 붕 떠 있던 그 짧은 시간이 1시간 정도 되는 것 같더군요.
다 보였어요. 세세한 것 모두가 .. 돌맹이 숫자도 셀 수 있을 정도 여습니다. 신기한 경험이었어요...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지상의 방 한 칸‘이 이토록 간절할 때’는 크리스마스 때‘가 아닌가 싶다. 김애란 단편 < 성탄특선 >에서  연인은 기분 좋게 술 한 잔 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서로 엉키려고 하는 순간, 방이 없다 ! 엄기영 앵커’가 “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 라는 통속적 멘트를 날리기도 전‘에, 이미 모텔 간판’은 불이 꺼진 지 오래이다. 대한민국 연인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전투 중이다. 이때‘가 바로 < 정기 大방출 > 이 아니라 < 정액 大방출 > 이 시작되는 기간'이다. 정액들의 엑소더스다. 모두, 하고 있습니까? 모두 탈출 하셨습니까 ?  소설 속 연인‘은 모두 다 하고 있을 때 하지 못하는 커플이다. 열 군데 넘게 돌아다닌 모텔 방은 이미 벌거벗은 어처구니들로 가득 찼고, 호텔은 지나치게 비싸며 여인숙'은 정액을 고급스럽게 대방출하기에는 너무 왁자지껄하다. 김애란은 이번 소설집에서 < 자기만의 방 > 을 이야기한다. 사랑스럽고, 편안하며, 방음 잘 되어서, 신나게 응, 응, 응, 아흥'을 당당하게 샤우팅으로 내지를 수 있는 그런 단단한 방'이 필요하다고.....

 

- 소설집 < 침이 고인다 > , 우우 하지 맙시다. 와와 합시다 中

 


 

 

 

 

여인숙과 비디오방.

 

호텔에서도 뒹굴어 보았다, 모텔에서도 뒹굴어 보았다, 유스호스텔에서도 뒹굴어 보았다, 여관에서도 뒹굴어 보았고 여인숙에서도 뒹굴어 보았다. 숙박업소 명칭은 좋은 매트리스'와 나쁜 매트리스'가 만든다. 숙박비가 비쌀수록 매트리스 속 스프링 복원력은 뛰어났다. 반면 숙박비가 저렴한 곳은 매트리스가 늙은 여자의 마른 젖가슴처럼 움푹 파여 있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어차피, 눈만 붙이면 될 것 아닌가 ! 성공한 자는 호텔에서 머물 것이고, 실패한 자는 여인숙에서 쪽잠을 잘 것이다. 잠을 자야 한다는 간결한 목적으로 보자면 호텔이나 여인숙이나 도 긴 개 긴'이다.  문득 < 성공 > 과 < 실패 > 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궁금해졌다. 형설시공사에서 나온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 을 찾아보았다. 이 사전'은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했는데 사전이 꽤나 재미있어서 자주 들여다본다. 이 사전'에 의하면 성공과 실패'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성공(成功) [ 명사 ] 여인숙→여관→유스호스텔→모텔→호텔

실패(失敗) [ 명사 ] 호텔→모텔→유스호스텔→여관→여인숙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소율 著 

 

무슨 뜻인가 한참 생각했다. 그리고는 아, 했다. 풍찬노숙 끝에 돈을 벌어서 나중에는 호텔'에서 뒹굴며 아침이 되면 조식을 먹고 당당하게 나오는 것이 성공이고,  실패는 처음에는 으리으리한 7성급 호텔에서 뒹굴다가 끝에 가서는 돈이 없어서 여인숙에 머무는 인생 말로'를 뜻했다. 성공과 실패'에 대한 뜻풀이'를 이런 식으로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보통 뜻풀이사전(들)'은 " 목적하는 바를 이룸 "  이라거나 "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침 " 이라고 하는데 오소리 사전'은 달랐다. 태진아 노래방 기기 성우'였다면 저자인 소율'에게 " 어디서 쫌, 놀아보셨군요 !!! " 라고 외쳤을 것이다. 숙박업체에서 꽤나 뒹군 경험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뜻풀이'었다. 나는 소율에게서 강한 동료애'를 느꼈다. 그나 나나 모두 색기 있는 풍각쟁이'였다.

 

참고로 오소리 입말 사전에서는 < 허풍선이 > 를 " 여인숙에 머물면서 주위사람들에게는 호텔에 머물고 있다고 말하는 자 " 이고, < 구두쇠 > 는 " 호텔 생활을 하면서 주위사람들에게는 여관에 머물고 있다며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 " 이라고 적혀 있다.  아, 했다. 사전'을 읽다가 감동한 적은 이 사전이 유일했다. 이래저래 < 여인숙 > 이라는 단어는 바닥 인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낱말'이다. 하지만 나는 여인숙이란 단어가 서정적 감수성'을 간직하고 있어서 좋다. " 여인 - " 이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과 " - 숙 " 이라는 여자 이름의 통속적 보편성'이 묘하게 어우러져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그럴까 ? 시인은 호텔, 모텔, 여관'이라는 낱말보다는 여인숙'이라는 단어를 시어로 자주 사용한다. 여인숙은 복고적 향수를 자극한다. 나는 여인숙에서 많이 뒹굴었다.

 

※  한때, 나는 침대가 " 삐걱 " 하는 소리를 1분에 3000번이나 낸 적도 있었다. 엄청난 스피드'를 자랑하고는 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당시 내가 머물던 객실 옆에 투숙했던 이'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하지만 지금은 늙어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스무 번 정도 나면 많이 나는 축에 속한다. 당신도 늙어봐라, 시바.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라면 탄력을 잃은 매트리스 스프링'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는 오히려 우리를 흥분시킬 뿐이었다. 땀이 등골을 타고 또르르 내려와 엉덩이 골에 고일 때, 아... 좋았다. 그뿐이었다. 그 시절에는 집'보다는 방'이 좋았다. 숨어 있기 좋은 방 말이다. 내가 그 여자를 처음 만난 곳도 비디오방'이었다. 당시 나는 서울역 근처 비디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녀는 손님이었고 나는 종업원이었다. 그녀가 내게 처음 던진 말은 " 고무인간의 최후란 영화 있나요 ? " 였다. 일 년 후, 우리는 비디오방에서 뒹굴었다. < 비디오방 > 에 대한 뜻풀이는 다음과 같다.

 

비디오-방 video 房  [ 명사 ] : 혼자 가야 몰입이 잘 된다. 둘이 가면 영화는 안 보고 빤스와 브라자'만 서로 만지작거리다가 나오기 일쑤다. 그러니까 비디오방은 혼자 가면 몰입이 잘 되고, 둘이 가면 산만해지는 장소'다. 비디오방은 본디 고독한 장소다.

 

관련어휘

 

비슷한말 ㅣ 달방

반대말 ㅣ 여인숙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소율 著

 

그렇다, 혼자 가면 몰입이 잘 되지만 둘이 가면 산만해지는 곳이 바로 비디오방'이다. 반면 여인숙은 혼자 가면 산만해지고 둘이 가면 몰입이 잘 되는 곳이다. 나는 속초 여인숙 달방'에서 홀로 1년을 살았다. 그때 깨달았다.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듯이, 둘이 머물면 행복하지만 혼자 머물면 불행해지는 곳이 달방'이란 사실을 ! 어떤 이'는 이 글을 읽고 투덜댈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의 <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에 대한 리뷰는커녕 온종일 숙박업소 유람기'에 대한 이야기만 하니 화딱지가 날 만하다.  하지만 노여워 마라. 화가가 바람을 그리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리는 꽃을 그려야 하듯이, 나는 이 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숙박업소와 비디오방'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말한다. 짐승으로 태어났으나 인간으로 죽기 위해서는 고독해야 된다고 말이다. 고독한 인간만이 참된 삶을 살게 된다고. 그래야 가와이 간지'라고. 방 네 개에 파우더 룸이 딸린 58평짜리 집을 탐하지 마라. 3평짜리 비디오방이면 족하다. 외로움은 타자를 향한 그리움이지만 고독이란 자기 자신을 향한 어떤 몰입이다. 마루야마 겐지'가 하고 싶은 말일 것이다. 칭찬이란 플로베르의 만연체처럼 길게 늘어지면 추해지는 법이고, 헤밍웨이의 건조체처럼 간단명료하면 깔끔한 법이다. 이제부터 <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 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겠다.

 

이 책, 좋다 !

 

 

 

 

 

 

 

덧.

이 글을 읽고 책을 살 결심을 했다면 반드시 thanks to 를 눌러라. 나에게 100원 떨어진다. 내가 한 달에 땡스투'로 벌어들이는 돈이, 놀라지 마시라 ! 자그만치 한 달 수입이 평균 1000원'이다. 1000만 원이 아니다. 말 그대로 천 원이다. 어마어마하다, 시바. < 덧 > 을 붙이지 않았다면 멋진 리뷰가 되었을 텐데 덧대서 구질구질한 문장이 되었다고 ?  이 리뷰에 thanks to가 몇 개나 달리나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겠다.  나... 원래 그런 놈이다.  나란 남잔 쪼잔한 남자.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남자란 다 그런 존재다.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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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 2013-11-15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갖고싶다.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

인생따위엿.
곰발님이 공유해준 목차보고 저도 주문했는데
일하며 뜨문뜨문 몇페이지 넘기다 말았어요

겐지상이 당장 그만두고 정독하지 못해! 라며
호통칠 듯 하여 ㅋ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0:20   좋아요 0 | URL
이 사전을 드릴 수는 있어요. 이 사전은 내 머릿속에 있으니
이 사전이 탐나면 나를 가져야 합니다. 싸게 내놓을 테니 사십시요.
또 압니까 ? 하루키를 능가하는 글쓰는 인간 기계가 될지..
10만 원에 팝니다. 비싼 거 잘 안 먹습니다.
소주면 감지덕지합니다..

엄동 2013-11-15 12:14   좋아요 0 | URL
소주한잔"이 땡겨붙는 계절이긴 한가 보네요 ㅎ

곰발님 머릿속 사전은 앙사요.
갖고 나면 갖고 싶을때보다
가치가 덜해지잖아요 ㅎㅎ

대신
소주 한잔 하시고 담배 한 대 검지에 끼우시고
사전 내용 초큼 읊어주세요
받아적게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2:32   좋아요 0 | URL
필사로구뇨 ? ㅎㅎ. 좋습니다.
하여튼 나탈야 고 여시 같은 것은 늘 경계해야 합니다.
내 스토커인데 아주 귀찮아서 죽게씀....
아무래도 날 사랑하는 거 같습니다....

metro318 2013-11-15 1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눌렀습니다.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지 마시고 살포시 웃어 주십시오.

탐나는 깻잎 오소리 입말사전.
문득, 오래전 페루애님이 적어 주신 가짜 계좌번호 들고 은행 cd기 앞에서 삽질하던 제가 보이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1:12   좋아요 0 | URL
어, 진짜 그랬습니까 ? 아...ㅋㅋㅋㅋㅋ 농담으로 한 말인데.... 쩝쩝.....
언제 서울 함 놀러오세요. 술 한 잔 살게요.

metro318 2013-11-15 11:18   좋아요 0 | URL
언젠가 서울 올라갈 일이 있으면 연락드리지요,
술이야 누가 산들 어떻습니까.
즐겁게 마시면 되는거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1:21   좋아요 0 | URL
메트로 님 11월 님 맞으시죠 ? 하여튼 오시기 전에 미리 귀뜸 부탁드립니다.

metro318 2013-11-15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습니다.
여하튼 가기 전에 귀뜸드리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1:33   좋아요 0 | URL
11월 님 서재가 눈에 선하군요. 엄청난 분량이었는데....ㅎㅎㅎ

슈퍼고양이 2013-11-15 1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컹... 책을 사게 만들다니, 나쁜 사람!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1:36   좋아요 0 | URL
이 책 어렵지도 않고 속 시원합니다. 꼰대 냄새도 적고....
분량이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만....
뭐 이 정도 가격에 이 정도 목소리를 얻으 수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죠.. 흠흠...

ㄱ나저나 오늘 하루만 이 책을 4분이 사셨으니 바다출판사에서 저에게 1000만 원 정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네요...

슈퍼고양이 2013-11-15 1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다 출판사에 아는 분이 계셔서 한 권만 달라고 구걸을 해볼까 하다가, 상도덕에 어긋나는 듯하여 질렀다는...
담에 그 양반한테 술 사달라고 졸라야겠음.
책도 샀는데 술 한잔을 못 사냐며 협박해야겠음.
근데... 저 네이버의 슈퍼고양입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1: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그럼 3분으로 줄었군요... ㅎㅎㅎ
그럼요. 책은 모름지기 사야 합니다.

나탈야 2013-11-15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_-;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14:45   좋아요 0 | URL
-_- ;

푸르푸르 2013-11-15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샀슴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23:47   좋아요 0 | URL
아, 오늘 내가 책 몇 권 팔아준 거냐...

비로그인 2013-11-1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루애의 글을 종이로 읽으면 참 좋을텐데요. 요샌 모든 책을 함부로 사지 말자는 주의라서 도서관에서 읽어본 뒤 소장해야겠다 싶으면 사야겠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23:47   좋아요 0 | URL
그래요. 그 방법 좋은 방법이죠.
책을 함부로 사는 것도 문제임.... 그런데 뭐 알 수 있나요.
사서 읽어봐야 아니...
하여튼 도서관에서 읽고 좋으면 산다..
요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새벽 2013-11-15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참.. 이웃들 공간에서 반응만 보면 인생 따위... 저 책 완전 초베스트셀러 될 듯 :)

깻잎 오소리 입말 사전은 정말이지 쫄깃쫄깃한 사전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23:46   좋아요 0 | URL
짧은 단문 위주여서 읽기도 편하고, 그렇습니다
마초인데 매우 건조하고 느끼하지 않아요. 새벽 님이 읽으시면
아마 많이 공감할 겁니다.

수다맨 2013-11-15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이 책을 읽어본 저로서는 모든 문장이 좋게만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어떤 대목은 논리의 부족이 엿보이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선 저자의 격앙된 어조가 감정의 과잉처럼 보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그럼에도 저는 이 책이 (곰곰발님 말씀처럼) 좋은 책이라 자신 있게 말합니다. 망설임 없는 직설과 질타, 권위와 나태를 비웃는 조소, 자신이 걸어온 삶의 문법으로 세계와 인간을 이해하려는 저 열정적 태도가 그의 글을 참으로 글답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독자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는 글은 논리나 체계가 정확한 글이 아니라, 불타는 도도한 감정을 담은 글이라는 것을 다시금 되새깁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23:45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사실... 저도 모든 문장과 소리가 좋게만 들리지는 않습니다. 읽으면서 이 양반, 욱하다가 터졌네, 라는 소리를 종종했으니까요. 아마도 이 글은 블로그나 트위터 이런 데 올린 걸 모아서 나온 책이라 예상합니다. 이런 모음집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결핍이 있잖아요. 그게 보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어떤 진실성입니다. 그것은 그가 살아온 독고다이와 겹치면서 획득한 결과물인데
제가 요즘 신물이 나는 게 혓바닥만 반지르르 하고 속은 개같은 경우거든요.
백민석의 경우도 사실 그의 문장이 저는 다른 작가들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보거든요.
그런데 백민석은 다른 작가들보다 소중합니다. 그것은 그가 가지고 있는 고집 때문인 거 같아요. 그래서 이 책 권하기로 했습니다...

히히 2013-11-19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비슷한말 : 사랑, 여행
반대발 : 우정, 관광

비로그인 2013-11-27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아 1분에 3000번!
색기 있는 풍각쟁이!


thanks to 눌렀다는;
ㅎㅎㅎㅎㅎㅎㅎㅎ
아아주 오오랫만에 알라딘 로그-인 하게 만드셨다는; ㅋㅋ


한 달 수입 평균 1,000원에 제가 일조하게 될지는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 구매 욕구는 성욕만큼 불타오르나 워낙 게을러서요. ㅎㅎ
이 책 얼마 전 배철수에서도 소개하더군요. 공교롭게도 그 날 저는 곰발 님 블로그에서 소개글 먼저 봤습니다만;;
아무튼 오늘도 재미나게 읽고 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11-27 11:46   좋아요 0 | URL
100원 벌었으니 붕어빵 꼬리 한쪽 사서 먹어야겠군요.... ㅎㅎㅎㅎㅎㅎㅎ
사실 이 책 조각글 모임이라 그냥 일종의 100자평 같은 느낌이어서 진한 감동은 없어요.
다만, 겐지 선생이 뚝심있게 살아온 삶을 보았기에 믿는 겁니다.

하여튼 꼬리 잘 먹겠습니다 ~~~~~



한때 별명이 벌새였습죠. 벌새가 1분에 3000번 날개짓할 때 전... 흐흐...
 

2012년 여름 일기

 

 

 

 

용산 사태를 다룬 < 두 개의 문 > 을 보기 위해 머리를 감았다. 어제 개가 잡아온 참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어쩌면 기면증을 앓는 새인지도 몰라. 그런 막연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는 어제보다 조금 더 딱딱해졌다. 하루가 지나면 오늘보다 조금 더 딱딱해질 것이고, 어제보다 조금 더 딱딱해질 것이다. 마당 한켠에 있는 터앝으로 가서 삽으로 땅을 팠다. 새를 크리넥스 티슈에 곱게 싸서 묻었다. 그러다 보니 늦었다. 머리를 말릴 시간도 없이 달렸다. 딸랑딸랑, 나의 불알이 방울소리를 냈다. 맙소사, 어르신들의 걸죽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바둑알처럼 예쁜 나의 불알에서 방울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  7018 버스를 기다린다. 내가 사는 곳은 빈민촌이라 버스도 30분에 한 대 온다. 압구정동이었다면 1분에 한 대씩 지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랐다.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오른쪽엔 볕이 들고 왼쪽엔 그늘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늘에 앉았다. 그래, 그것이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지. 똑똑한 사람은 지금이 아닌 앞을 내다보는 법. 당신들이 앉은 자리는 10분 후면 쨍쨍 불볕 드는 자리가 되리라. 나는 7018번 버스 노선도의 방위각을 생각했다.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방위각이 바뀌어 내 자리는 시원한 그늘이 질 것이다. 나는 일부러 땡볕으로 달구어진 자리에 앉았다. 아야, 뜨거워라. 그래도 참으련다. 버스는 세검정길을 지나 상명대를 지났다. 불볕이었다. 자하문 터널을 지났다. 불볕이었다. 괜찮아, 다 될 거야. 효자동을 지났다. 불볕이었다. 내 예측은 완벽하게 틀렸다. 시부랄...... 목적지인 세종문화회관에 다다르자 그때 비로소 그늘이 졌다. 이런 걸 두고 천재의 오류'라고 한다.

 

< 두 개의 문 > 주세요 ! 라고 했더니 상영 시간표를 잘못 읽었단다. 그 시간에는 다큐 < 두 개의 문 > 대신 독립 영화 < 슈퍼스타' > 를 상영하고 있었다. 교차상영'이었다. 다음 회'를 기다릴 수도 있으나 이 다큐 영화는 저녁 8시까지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독립 영화 < 슈퍼스타 > 를 보았다. 충무로에서 놀던 가난한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는 무척 후졌다. 징징거리는 감독의 신세 한탄이 보여서 짜증이 났다. 독립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교보문고에 들렸다. 교보문고에 가서 유하의 <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박형준의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심보선의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로맹가리의 < 솔로몬 왕의 지혜 > 그리고 미국 성 의학회'가 엮은 < 혼자서도 실전처럼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마스터베이션 45선 > 을 샀다.

 

김종삼 시인의 시집은 절판이어서 구매할 수 없었다. 다시 7018번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그늘에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어떤 남자가 탔는데 어디를 앉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볕이 드는 곳에 앉은 것이다. 이런, 병신.....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병신이 있구나. 꺄르르르르. 그를 보며 쿡쿡 웃자 그 사내의 얼굴에 험악해졌다. 버스는 힘차게 달렸다. 5분 정도 달렸을까 ? 그늘 진 내 자리는 어느새 볕이 들고, 볕이 든 자리엔 그늘이 졌다. 쿡쿡, 그 사내가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치킨 가게에서 치킨'을 샀다. 기다리는데 얼마나 침이 고이던지! 골목을 지나가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 안녕하세요 !!! " 누구였더라 ?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아하, 너구나 ! 어이구,  많이 컸네. 그 아이 집 앞 골목에서 치킨 포장 용기를 열어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닭 네 조각을 주었다.

 

아이가 폴짝폴짝 뛰었다. 집에 도착하니 개가 다시 새를 물고서는 나에게 다가왔다. 새를 터앝에 얕게 묻은 무덤 탓'이다. 새는 네기 묻었을 때보다 말랑말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으로 새를 감싼 후 책상 위에 두었다. 남은 네 조각 중 한 조각은 개에게 던져주었다. 남은 세 조각으로 맥주 2병을 마셨다. 이때.... 새가 눈을 뜨더니 방 안을 날아다녔다. 기면증에 걸린 새였던 모양이었다. 새는 열린 창문 사이로 날아갔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저 새처럼 아버지를 깨워도 깨워도 깨지 않는 날이 있었다. 마른 장작처럼 딱딱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새처럼 눈을 떠서 자유롭게 날기를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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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히 2013-11-15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울서 내려오기 전에 교보문고를 들렀는데
몸이 개운치 않아서 그런지 숨이 막히고 정신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과거로의 향수가 강한 듯 합니다.
솔직히 책방은 아니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11-15 08:23   좋아요 0 | URL
서울토박이인 저는 잘 모르겠는데
가끔 지방에서 1년 정도 살다가 올라오면 정말 공해 때문에 숨이 탁탁 막히더군요.
하루빨리 서울을 벗어나는 것이 건강에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