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일기
용산 사태를 다룬 < 두 개의 문 > 을 보기 위해 머리를 감았다. 어제 개가 잡아온 참새는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어쩌면 기면증을 앓는 새인지도 몰라. 그런 막연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는 어제보다 조금 더 딱딱해졌다. 하루가 지나면 오늘보다 조금 더 딱딱해질 것이고, 어제보다 조금 더 딱딱해질 것이다. 마당 한켠에 있는 터앝으로 가서 삽으로 땅을 팠다. 새를 크리넥스 티슈에 곱게 싸서 묻었다. 그러다 보니 늦었다. 머리를 말릴 시간도 없이 달렸다. 딸랑딸랑, 나의 불알이 방울소리를 냈다. 맙소사, 어르신들의 걸죽한 농담인 줄 알았는데 바둑알처럼 예쁜 나의 불알에서 방울소리가 들리는 것이 아닌가 ! 7018 버스를 기다린다. 내가 사는 곳은 빈민촌이라 버스도 30분에 한 대 온다. 압구정동이었다면 1분에 한 대씩 지나갔을 것이다. 다행히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버스가 왔다.
버스에 올랐다.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오른쪽엔 볕이 들고 왼쪽엔 그늘이 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늘에 앉았다. 그래, 그것이 바로 당신과 나의 차이지. 똑똑한 사람은 지금이 아닌 앞을 내다보는 법. 당신들이 앉은 자리는 10분 후면 쨍쨍 불볕 드는 자리가 되리라. 나는 7018번 버스 노선도의 방위각을 생각했다. 자하문 터널을 지나면 방위각이 바뀌어 내 자리는 시원한 그늘이 질 것이다. 나는 일부러 땡볕으로 달구어진 자리에 앉았다. 아야, 뜨거워라. 그래도 참으련다. 버스는 세검정길을 지나 상명대를 지났다. 불볕이었다. 자하문 터널을 지났다. 불볕이었다. 괜찮아, 다 될 거야. 효자동을 지났다. 불볕이었다. 내 예측은 완벽하게 틀렸다. 시부랄...... 목적지인 세종문화회관에 다다르자 그때 비로소 그늘이 졌다. 이런 걸 두고 천재의 오류'라고 한다.
< 두 개의 문 > 주세요 ! 라고 했더니 상영 시간표를 잘못 읽었단다. 그 시간에는 다큐 < 두 개의 문 > 대신 독립 영화 < 슈퍼스타' > 를 상영하고 있었다. 교차상영'이었다. 다음 회'를 기다릴 수도 있으나 이 다큐 영화는 저녁 8시까지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하는 수 없이 독립 영화 < 슈퍼스타 > 를 보았다. 충무로에서 놀던 가난한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는 무척 후졌다. 징징거리는 감독의 신세 한탄이 보여서 짜증이 났다. 독립영화라고 해서 다 좋은 영화는 아니다. 영화가 끝나고 교보문고에 들렸다. 교보문고에 가서 유하의 < 바람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 박형준의 < 생각날 때마다 울었다 > , 심보선의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 로맹가리의 < 솔로몬 왕의 지혜 > 그리고 미국 성 의학회'가 엮은 < 혼자서도 실전처럼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마스터베이션 45선 > 을 샀다.
김종삼 시인의 시집은 절판이어서 구매할 수 없었다. 다시 7018번 버스를 탔다. 이번에는 그늘에 앉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어떤 남자가 탔는데 어디를 앉을까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는 놀랍게도 볕이 드는 곳에 앉은 것이다. 이런, 병신.....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병신이 있구나. 꺄르르르르. 그를 보며 쿡쿡 웃자 그 사내의 얼굴에 험악해졌다. 버스는 힘차게 달렸다. 5분 정도 달렸을까 ? 그늘 진 내 자리는 어느새 볕이 들고, 볕이 든 자리엔 그늘이 졌다. 쿡쿡, 그 사내가 웃었다. 돌아오는 길에 치킨 가게에서 치킨'을 샀다. 기다리는데 얼마나 침이 고이던지! 골목을 지나가는데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 안녕하세요 !!! " 누구였더라 ?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 아하, 너구나 ! 어이구, 많이 컸네. 그 아이 집 앞 골목에서 치킨 포장 용기를 열어서 김이 모락모락나는 닭 네 조각을 주었다.
아이가 폴짝폴짝 뛰었다. 집에 도착하니 개가 다시 새를 물고서는 나에게 다가왔다. 새를 터앝에 얕게 묻은 무덤 탓'이다. 새는 네기 묻었을 때보다 말랑말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옷으로 새를 감싼 후 책상 위에 두었다. 남은 네 조각 중 한 조각은 개에게 던져주었다. 남은 세 조각으로 맥주 2병을 마셨다. 이때.... 새가 눈을 뜨더니 방 안을 날아다녔다. 기면증에 걸린 새였던 모양이었다. 새는 열린 창문 사이로 날아갔다. 아주 오래전이었다. 저 새처럼 아버지를 깨워도 깨워도 깨지 않는 날이 있었다. 마른 장작처럼 딱딱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새처럼 눈을 떠서 자유롭게 날기를 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