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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 -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2년 4월
평점 :
괴물과 짐승'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좀비』는 악인의 입장에서 서술된 일지다. 그렇다고 독자에게 악덕을 설득하거나 악행에 대해 변명하지는 않는다. 악을 권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러니까 보기보다 위험한 책은 아니다. 차라리 『좀비』는 독자로 하여금 잠시 그 악인이 되어보도록 한다. 이건 추천장도 아니고 사용설명서도 아니고 초대 편지도 아니다. 입체영상을 보게 해주는 안경 같은 것이다. 이걸 쓰면 사이코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어쩌면 반대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입체로 존재하는 세상이 이 안경을 끼면 평면으로 보인다. 사이코패스의 시선은 매우 폭력적으로 세계를 단순화하니까. 조이스 캐럴 오츠의 짧고 멋 안 부리는 문장 덕에 우리는 너무나 손쉽게 연쇄강간살인범이 될 수 있다. 그냥 미끄럼 타고 내려가듯 악의 심연에 뚝 떨어진다. 악은 이토록 쉽고 간결하고 명쾌한 것이던가, 어리둥절해질 지경이다. 악의 화신이 된다는 건 전혀 어렵지 않더라. 타인들을 입체로 보지 않는 것, 오로지 자기만 들여다보는 것, 제 욕망만을 보는 것. 단순화, 평면화, 내면화, 그리고 단절.
- 박찬욱, < 좀비 > 책 소개 글 中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을 사적인 자리에서 본 적이 있다. 내가 " 아는 형이 아는 형 " 이 바로 박찬욱'이었다. 내가 아는 형'은 영화 감독이었고, 내가 아는 형이 아는 형 또한 영화 감독'이었다. ( 그 당시에는 영화 감독이 아니라 감독 지망생'이었다. ) 내가 " 아는 형이 아는 형 " 을 다시 만난 것은 아는 형의 병원 장례식장'에서였다. 내가 아는 형은 너무 이른 나이에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아는 형'을 화마를 잃어버린 내가 아는 형이 알고 있던 형'은 내가 아는 형의 부재 앞에서 슬퍼했다. 그 이후에도 몇 번 박찬욱을 우연히 만났지만 아는 척을 하지는 않았다. 자격지심이라고 해도 좋다. 나는 원래 사람들에게 아는 척을 안 하기로 유명해서 싸가지없는 놈이란 소릴 자주 듣던 터였다. 그냥 질투와 무관심이 반반 섞인 태도라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박찬욱 영화'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열광적인 팬 가운데 한 명'이다.
< 복수는 나의 것 > 은 내가 한 손에 뽑는 걸작 리스트'다. 봉준호 감독의 < 살인의 추억 > 에서 송강호가 박해일에게 " 밥은 먹고 다니냐 ? " 라는 명대사를 날렸듯이, 송강호는 < 복수는 나의 것 > 에서 신하균의 손과 발을 밧줄로 꽁꽁 묶어서 강 속 깊숙이 끌고간 후 이렇게 말한다. " 내가 너 미워하는 거 아니란 거 알지 ? " 그리고는 물속으로 들어가 칼로 밧줄로 묶인 발목 힘줄을 끊는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좋으냐고 묻는다면 잠시 망설이게 된다. 그냥 둘 다, 좋다 ! 사실 박찬욱은 영화 감독이 되지 않았어도 재주가 많아서 다른 밥벌이로 성공했을 것이다.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서 글을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솔직히 말해서 박찬욱의 글'은 정성일보다 예리하고 신형철보다 뛰어나다. 신간을 소개할 때 명사의 추천글'만큼 뛰어난 광고 효과는 없기 때문에 대형 출판사에서 신간을 내면 어김없이 유명 인사의 추천글'을 내놓는다.
그런데 추천글을 읽다 보면 책을 읽지 않고 추천사를 쓴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글이 많다. 그것은 마치 유명인의 이름만 빌린 " 간장 게장 홈쇼핑 " 광고처럼 보인다. (삐에르 바야르의 지적처럼) 책을 읽지 않고도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고서 추천사를 남발하면 안 된다. 전자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요령에 대한 것이지만 후자는 도덕적인 문제에 해당된다. 설령 책을 다 읽고 나서 추천사를 쓴다고 해도 남발하는 것은 좋아보이지 않는다. 요즘 신간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이름이 신형철 평론가'다. 이런 말이 싸가지없게 들리겠지만 문학평론가는 칭찬 일색인 100평 추천글을 써서 돈을 버는 직업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 문학을 분석하는 직업이다. 100자 이내로 핵심을 찌르는 문장은 카피라이트'에게는 훌륭한 덕목이지만 평론가에게는 독이 된다.
누누이 말하지만 평론가는 100미터 단거리 선수가 아니라 마라톤 선수에 가깝다. 과유불급이라 하지 않았던가 ? 지나친 100자평으로 칭찬 릴레이'를 잇는 것은 재능을 낭비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나는 출판사 소개글에 인용된 명사의 추천글'을 거의 믿지 않는데 박찬욱이 < 좀비 > 에 대해 쓴 짧은 추천글'은 무릎을 칠 만큼, 아.... 좋았다 ! " 입체영상을 보게 해주는 안경 같은 것이다. 이걸 쓰면 사이코패스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그리고 자기 내면을 관찰할 수 있다. 어쩌면 반대가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입체로 존재하는 세상이 이 안경을 끼면 평면으로 보인다. 사이코패스의 시선은 매우 폭력적으로 세계를 단순화하니까. " 이 문장은 조이스 캐롤 오츠의 < 좀비 > 를 매우 압축적으로 표현한다. 이 책을 읽은 독자는 박찬욱이 쓴 문장을 읽으며 무릎을 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박찬욱은 영화뿐만 아니라 글도 잘 쓰는 팔방미인'이다.
연쇄 살인자의 일기처럼 쓰여진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문장이 너무 단순해서 조이스 캐롤 오츠가 쓴 것이 맞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적 구원의 세계도 없고, 사드적 지옥의 현현도 없다. 망설임도 없고 후회도 없고 죄책감도 없다. 그냥 뾰족한 꼬챙이로 뇌를 쑤신다. 그런데 이 묘사를 조이스 캐롤 오츠는 대수롭지 않게 담담하게 묘사한다. 여기에는 죄의식이 없다. 왜냐 ?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것은 범죄자의 시점이지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회적 개입으로 이루어진 해석'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 < 날것'> 은 박찬욱이 지적했던 것처럼 매우 단순하다. 이 소설은 역설적이게도 악이라는 욕망을 < 지속 > 시키기 위해서 < 선 > 을 이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이 행한 범죄를 감추기 위해서 끊임없이 착한 척'을 한다.
그러니깐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선'은 악'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僞善)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이 소설은 가르쳐 준다. 주인공은 괴물'이 아니라 짐승 같은 인간이다. 괴물과 짐승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짐승은 위선적이고 괴물은 위악적이다. 짐승 같은 인간은 대부분 자신의 악마적 본성을 숨기기 위해서 선한 척을 하지만, 괴물은 악마적 본성을 숨기기 위해서 적어도 선한 척을 하지는 않는다. 홍상수의 < 생활의 발견 > 이라는 영화에서 서로 각자 다른 인물들은 동일한 대사를 쏟아낸다. 그들은 모두 " 우리 더 이상 괴물은 되지 말자 ! " 고 말한다. 그런데 홍상수는 괴물과 짐승의 차이를 잘 모르는 것 같다. < 괴물 > 이란 생김새가 괴상하게 생긴 것을 의미하고, < 짐승 > 은 야만적인 인간을 비유적으로 뜻하는 단어이다.
그러니깐 "괴물" 이 시각적 편견에 기대어 대상을 관찰한 결과라면, "짐승(같은 인간)" 은 내면적 통찰에 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무명씨'를 괴물'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짐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은 단지 생김새가 추할 뿐이다. 정작 나쁜 놈은 생김새는 멀쩡한데 내면이 추한 놈'이다. 지킬 박사의 이중적 자아인 하이드 씨'는 짐승이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괴물'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내가 늘 주장하지만 괴물'은 잃어버린 휴머니티'를 복원하기 위해 나타나는 존재'이다. 얼핏 보기에 괴물은 무시무시한 악당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과 괴물'이 짜고 친 고스톱'이다. 골목길에서 만난 불량배를 멋지게 소탕해서 여자의 관심을 받는 남자 이야기'는 알고 보면 친구들과 짜고 친 고스톱이 아니었던가. 마찬가지다. 괴물은 불량배 역할을 하는 그 친구 역할이다.
고질라가 열불나서 " 이... 시부랄 놈들아 ! 다 부셔버리겠어 ! " 라거나 용가리가 " 용가리 통뼈 맛 좀 봐라. 인간 사람 새끼들아 ! " 라며 도시 전체를 공포의 소용돌이로 몰고 가지만, 사실 괴물들은 신이 내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내려온 액션 배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한번 잃어버린 휴머니티'는 이런 식의 재난 퍼포먼스'가 아닌 이상은 복원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고질라, 죠스, 용가리와 쮸쮸, 티라노 공룡'은 눈물을 삼킨 채 위악적 캐릭터를 소화한다. ( 혜성 충돌, 쓰나미, 화재 등도 괴물이라 할 수 있다. 다만 무생물이다. 불춤과 물쇼는 이들의 특기이다. ) 용가리는 꼬리로 63빌딩을 내리치며 눈깔을 부리부리하게 뜨지만 속으로는 슬퍼서 운다. 인간은 이처럼 재난이 몰려오면 그때부터 정신을 차린다. 불이 빌딩을 덮칠 때, 물이 도시를 점령할 때 비로소 가족이라는 가치를 깨닫는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게 인간의 속성이 아니었던가. 카메라가 살아남은 가족끼리 꽉 쥔 손'을 클로우즈업해서 보여주다가 이내 물러나면 폐허의 잔재가 보인다. 이 폐허는 다시 복원될 것이다. 파괴는 괴물이 하지만 건설은 이명박이 할 것이다. 그리고 재난이 끝나면 콘돔은 불타나게 팔릴 것이다. 산부인과 사업도 번창할 것이다. 이처럼 가족을 구원/복원'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다. 명심하도록. 괴물은 악당 캐릭터를 연기하는 마음 여린 액션 배우다. 반면 짐승 같은 인간'은 악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선을 행한다. 그러므로 선'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다. 선한 선이거나 선을 가장한 악이거나 ! 사실 선은 잘 표현되지 않는다. 어떤 선행이 지나치게 선명하거나 잘 표현된다는 사실은 선이 아니라 위선'일 확률이 높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홍상수의 말은 틀렸다. 괴물 같은 짐승은 짐승 같은 인간'에 비하면 선한 자'다.
그러므로 인간을 파멸시키는 것은 괴물 같은 짐승이 아니라 짐승 같은 인간이다. < 자연 > 의 반대말은 < 인간 > 이지만 < 인간 > 의 반대말은 < 인간 > 이다. 인간을 파괴시키는 것은 오로지 인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