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와 장국영 : 난닝구와 빤스'에 대한 단상
크리스마스 날 가장 바쁜 사람은 산타 할아버지가 아니다. 주인 몰래 마구간에서 날마다 팩 소주를 빨던 술주정뱅이 딸기코 루돌프 氏도 아니다. 이명박도 아니다. 숙박업 종사자들도 아니다. 영화관 종사자들도 아니다. 당신들이 아무리 바쁜들 이 사람만 할까 ! 존 맥클레인, 크리스마스 때만 되면 죽도록 고생하는 사나이. 그렇다 ! 영원한 마초, 존 맥클레인 형사’가 주인공이다. 실베스타 스텔론이 용병이 되어서 베트남에서 싸울 때, 브루스 윌리스는 형사가 되어서 뉴욕에서 흰 쫄티와 맨발로 악당과 싸운다. 공통점은 남의 땅, 남의 건물’에서 폼 나게 총 싸움을 한다는 점이다. 한 방 쏘면 해결될 걸 열 방 쏜다 ! 어차피 그들은 돌아갈 고향이 있으니 싸움터가 심해 밑바닥 뻘보다 더 참혹한 폐허’가 되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닥치는 대로 쏜다 !
미국이 내세우는 전략은 언제나 동일하다. 남의 나라에서 폼 나게 싸우기’다. 미국 본토’가 적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적은 일본 가미가제 공격과 알카에다 공격이 유일했다. 가미가제가 모더니즘적 증후라면, 9.11테러는 포스트모더니즘적 증후였다. 영화 <다이하드>는 무대만 바뀌었을 뿐, 남의 건물/국가’에서 인질들을 구출한다는 측면에서 영화 <람보>를 근사하게 변형시킨 꼴이다. 캄보디아와 크리스마스는 서로 어울리지 않으니 말이다. 나카토미 빌딩’은, 아시아 전쟁터’이다 ! 영화 속에서 브루스 윌리스는 < (간댕) 간댕거리는 자지> 였다. 그의 페니스는 발기와 거세 사이에 있는 것이다. 잘린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꼴린 것도 아닌 상태였다. 마치 휴대폰 표시창에 방전을 알리는, 깜박거리는 아이콘’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그는 직장에서는 골치 아픈 동료였고, 아내에게는 무능한 남편이었으며, 딸에게는 유령'이나 다름없었다.
가정은 위기일발 상황에 놓여 있다. 나카토미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아내는 자신의 이름을 숨긴 채 처녀적 이름’으로 직장 생활을 한다. 그러니깐 아내는 <홀리 멕클레인’> 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홀리 제네로' > 로 처녀 행세를 하는 것이다. 맥클레인 형사는 나카토미 빌딩 로비에 있는 방문자 명단에서 아내가 처녀적 이름을 쓰고 있다는 사실에 눈살을 찌푸린다. 설상가상 회사 동료가 아내인 홀리를 “홀리” 는 더러운 꼴도 본다. 아, 그는 위기의 남자’다. 어쩌면 처한 상황은 발기와 거세 사이가 아니라 발기와 불능 사이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한때, 왕년에, 오래 전에, 잘나갈 때, 엄청 딱딱했던, 오동나무와 같은, 매우 “하드“ 한 페니스를 복원하기 위해서 제목 그대로 <좆빠지게> 뛰어다닌다. 그는 아내가 보는 앞에서 그 무수한 수컷들을 제압한다. 영화 초반부는 초라한 멕클레인 형사와 화려한 나카토미 빌딩에서 잘나가는 직원들을 대비시킨다.
최고급 명품 양복, 이탈리아 장인이 한 땀 한 땀 수놓은 명품 와이셔츠, 나비 넥타이, 고급 와인, 번쩍거리는 빌딩의 외관 등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초라한 형사의 볼품없는 외형을 강조한다. 심지어 테러리스트조차 근사한 양복으로 우쭐대지 않던가 ? 위기 상황에 대처하는 상류 사회 임원들이 보여준 태도는 한 마디로 쭈구리’였다. 악당의 등장에 벌벌떤다. 근사함'은 직책이나 명품이 주는 잠깐의 후광’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이 남근은 무기’를 가진 테러리스트들이 차지한다. 무기가 곧 남근이다. 바로 이때 띨빵하며 띨띠리인, 물렁물렁한 개불이며 쭈구리’인,빈대떡 신사 존 맥클레인 형사’가 멋지게 등장한다. 그는 흰색 난닝구로 검은 양복’을 제압하며, 맨손과 맨발로 무기를 든 손과 페르가모 구두를 신은 악당’을 물리친다. 맨몸 vs 최첨단 무기, 난닝구 vs 턱시도의 결투다. 으르렁 !
존은 곤경에 빠지면 빠질수록 더욱 단단해진다. 이 남자, 화나면 딱딱하다. 영화는 해피엔딩’이다. 심지어는 로맨틱하기까지 하다. 부상을 입은 그가 (무전기를 통해) 동료 형사에게 고백한다. “ 이 말을 꼭 전해주게. 난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수천 번 했지만 미안하단 말은 한 적이 없네. 아내에게, 존이 미안하다고 전해 주게. ” . 하지만 이 영화가 마냥 아내를 향한 마초의 < 맨발의 청춘> 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 영화는 <역시, 여자는 골칫거리야! > 라는 의중이 담겨 있다. 홀리’가 평범한 아내처럼 부엌에서 크리스마스 케이크와 칠면조’를 요리하며 남편을 기다렸다면 이 개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 이러한 밑바닥 정서는 시리즈 4탄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늙은 형사는 이번에는 딸 때문에 <다이하드> 한다. 아마, 시리즈 5탄’에서는 손녀 때문에 <다이하드> 할 것이다. 하여튼...맥클레인 형사’는 반드시 여자를 구한다. 그리고는 늘 생각한다. 언제나 문제는 여자야 ! 그게 이 시리즈의 진리’이다.
브루스 윌리스가 런닝구를 입고 런닝맨이 되었다면 장국영은 런닝구를 입고 댄서가 되었다. 그는 난닝구와 빤스만 입고 맨발로 음악에 맞춰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며 몸을 흔들었지만 수초처럼 흔들리는 청춘은 아름다웠다. 난닝구가 패션이 될 수도 있다는 불가능한 사실을 장국영은 멋지게 증명했다. 평범한 수컷이여 ! 그렇다고 모두 따라하면 안 된다. 그것은 장국영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않은가 ? 원빈 앞에서 우리는 모두 꾀죄죄죄죄죄죄죄한 오징어가 되듯이, 장국영이 빤스 입고 거울 앞에서 무국적 춤을 출 때 우리는 모두 누추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백양 메리야스 흰 빤스를 입고도 멋진 놈 있다면 손들어 보라 ! 원빈과 장국영이 은은한 은갈치라면 우리는 모두 오징어다. 그래도 브루스 윌리스의 흰 쫄티'는 나름 잘 어울렸다. 하지만 그가 바지를 벗고 빤스만 입고 뛰어다녔다면 그는 여전히 멋진 마초처럼 보였을까 ?
여자는 빤스만 입어도 멋있지만 남자는 빤스만 입고 돌아다니면 추해진다. 이상하게도 그렇다. 윤창중 선생님이 워싱턴에서 추레했던 이유는 백 퍼센트 빤스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빤스는 남자를 초라하게 만든다. 존 맥클레인 형사가 < 하드 바디' > 라면 장국영이 연기한 아비'는 < 소프트 바디'> 였다. 그는 남성적이기보다는 중성적이었다. 남성인 내가 보기에 빤스는 남성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패션'이다. 반면 여성에게는 잘 어울린다. 빤스는 본질적으로 여성적 바디라인에 어울린다. 장국영이 빤스만 입고도 패션을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의 여성적 소프트 바디 때문이었다. 그래서 장국영이 동성애자'라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그 사실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키워준 계모를 농락한 바람둥이를 찾아가 망치로 위협을 해도 그 장면은 폭력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약한 장국영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 아비정전 > 이란 영화를 40번 넘게 보면서 결국 발견한 것은 걷는다는 행위'가 보여준 미학이었다. 이 영화에서 장국영은 브루스 윌리스처럼 뛰지 않는다. 그는 걷는다. 그가 자신을 낳아준 엄마'에게 버림받고 돌아서는 장면은 걷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를 일깨워준다. 장국영의 걸음은 묘하게 음악적인 구석이 있다. 사실 그가 난닝구와 빤스만 입고 거울 앞에서 춤을 출 때,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춤과 걸음의 혼용'이다. 그는 춤을 추듯 걷고, 걷듯이 춤을 춘다. 이러한 걸음은 < 해피투게더 > 에서 정점을 이룬다. 그가 추는 탱고는 < 아비정전 > 에서 그의 뒷모습을 슬로우모션으로 잡은 그 유명한 장면과 겹친다. 왕가위 감독은 뒷모습을 아름답게 포착하는 감독이 아니라 걸음을 예술로 승화시킨 감독이었다. 장국영을 생각할 때마다 자꾸 그의 걸음걸이가 생각난다. 브루스 윌리스는 뛰고 장국영은 걷는다. 그것은 두 문명의 문화적 특징으로도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