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자만이 오로지 죽을 수 있기에 어떻게 죽을 것인가_라는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_라는 질문으로 반드시 되돌아온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저마다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고 말하는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보면서 고요하다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인간이 자신에게조차 소외되는 이유는, 멈추고 존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텅 빈 것이 아니라, 답으로 차 있다. 이겨내는 것보다 느긋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소리에 둔해지더라도 고요를 들을 줄 아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 적 있던가. 창문 너머로 펼쳐진 구름바다를 본다. 이 생은 무엇을 남길지가 아니라, 얼마나 가볍게 떠날 수 있는지를 묻는 여정 같다. " ㅡ 197
이 문장에 밑줄을 긋다가 갑자기 코끝이 시큰해졌다. 늙는다는 것은 서러운 것이 아니라 단지 서운할 뿐인데 많은 사람들은 서운하기보다는 서러워 한다. 문장 하나하나 구슬 같다. 신파조의 간증 서사(2 에 빠지지 않는 것은 이 책의 탁월한 업적이다. 누구나 살아가다 보면 세상 풍파에 몸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작가는 죽음을 준비하는 시어머니를 바라본다. 깃털처럼 가벼운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1)
■ < 조용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학교 수업 종이 땡땡 울렸지만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이때 무섭기로 소문 난 호랑이 선생님이 교실 안으로 들어온다. 화가 난 선생님이 소리친다. " 조용히 해 ! " 정적에 휩싸인 교실. 이때 교실은 고요한 것이 아니라 조용한 것이다. 이처럼 < 조용하다 > 라는 단어는 인위적이며 청각적이다.
■ < 고요하다 > 는 단어의 풍경은 이렇다 : 투명한 유리컵에 흙탕물을 담으면 온통 흙빛이다. 하지만 시간이 경과하면 부유물이 바닥에 가라앉으면서 투명한 물색으로 변한다. 뿌연 시야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투명하고 청명하게 보이는 풍경의 감성이 " 고요 " 다. < 고요하다 > 라는 단어는 자연적이며 시각적이다. 교실은 조용한 것이고 바다는 고요한 것이다.
2) 에세이가 실패하는 지점은 사유보다 사연이 앞서기 때문이다. 사유 없는 경험의 나열은 에세이의 품격을 떨어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