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이여,
웃으면서 굿바이 !
동양과 서양은 보는 관점이 다르다. 서양인 엄마는 아이와 놀 때 " (달리는 테엽 장치 자동차를 보며 ) 지나가는 게 뭐지 ? " 라고 묻지만 동양인 엄마는 " 자동차가 달리네 ? "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서양인은 명사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끌고, 동양인은 동사를 중심으로 대화를 이끈다.
상대방에게 차를 더 마실 것인가를 묻는 질문도 서로 다르다. 서양인은 " more tea ? " 라고 묻지만 동양인은 " 더 마실래 ? " 라고 묻는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부모를 대하는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서양인은 부모를 기득권이자 낡은 세력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춘기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독립을 원한다. 그렇기에 집을 떠날 때 웃으면서 떠난다. 지긋지긋한 부모로부터 해방, 야호 ! 그들에게 부모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니다. 갈 데까지 가는 관계가 바로 가족 관계이니까. 반면, 동양인은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 독립하는 상황을 슬퍼한다. 집을 떠날 때 웃으면서 굿-바이'라고 말하는 대신 슬퍼서 굿-바이를 외친다.
동양인에게 부모는 존경할 만한 인물인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서양인의 세계관을 가진 동양인인 것 같다. 내 부모를 존경하지 않을 뿐더러 존경하지 않은 속내를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자식을 위해 고생했다는 사실은 연민의 영역이지 존경의 영역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가 가지고 있는 병의 근원은 가족주의에 있다. 내 새끼가 귀하다 보니 네 새끼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밥상머리 교육이 이렇다 보니 한국인은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라기보다는 대상과의 분리 불안 장애에 시달린다. EBS 치유 프로그램인 << 달라졌어요 >> 는 화목하지 않은 가족을 치유하는 상담 프로그램인데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은
대부분 상대방(아내 혹은 남편)에게 있다기보다는 부모와 웃으면서 바이바이'를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다. 부모라는 대상과 분리를 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된 사람은 여전히 부모의 그늘에서 살아간다. 폭력적인 아버지 혹은 신경질적인 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절대 닮지 않으리라 다짐하지만 결국은 자신도 폭력적인 아버지가 되거나 신경질적인 어머니가 된다. 그들은 어릴 때 자신과 불화했던 아버지나 어머니를 배우자인 남편이나 아내에게 투사하거나 스스로 빙의한다. 대상 애착에 따른 고질병은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다. 가족주의는 결국 " 우리가 남이가 " 정신으로 발전해서
우리가 남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남이가_ 라고 묻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처럼 떨어지지 않고 붙으려는 떼거지 근성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 뭉쳐서 거대한 사회 악을 이루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실패한 대표적 주거 환경인 아파트가 대한민국에서는 유독 부의 상징이 된 것 또한 < 집단 - 내 - 존재 > 가 되어야지만 불안을 상쇄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믿음이 아니라 자기 최면인 것이다. 21세기 한국 문단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 거대한 백조 > 를 연상케 한다. 물 위에서는 우아한 자태를 뽐내지만 물 밑으로 들어가면 존나게 물질하는 세계인 것이다.
물 위에 뜬 백조의 여유가 물속에서 호들갑을 떨어서 얻은 보상인 것처럼 문단의 우아한 지성은 노회한 정치가의 발빠른 물밑 작업이 만든 자태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밥그릇을 확장하기 위해서 등단 제도와 청탁 제도 그리고 신춘문예를 이용한다. 그들은 문창과 교수로, 문예지 편집위원으로,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예비 문학 소년 소녀를 " 지도편달 " 하여 등단이라는 월계관을 씌워준다. 그러데 등단 제도는 해괴한 자격증이다. 인간에게 밥을 먹을 자격을 운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는 밥 먹을 자격이 없는 놈은 없다. 당장 내일 교수형을 당하는 사형수라도 오늘의 밥은 챙겨 준다.
고로 모든 인간은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글도 마찬가지'다. 한글은 공공재이지 특정 집단의 사유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문단의 선생님은 한글로 소설이나 시를 쓸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자격증을 부여한다. 김선달의 물 장사보다 더한 짓이 등단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는 자격증 장사'다. 나랏 말쌈이 듕국과 달라서 화가 난 세종대왕이 만든 공공재를 가지고 생색을 내니 나는 정색을 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단이야말로 대상(대타자)과 웃으면서 빠이빠이를 외치지 못하는 대상 애착 장애를 앓고 있는 집단'이다. 이명원 - 김윤식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버지를 욕하는 놈은 자식들이 용서를 하지 못한다.
그 옛날, 젊은 이명원은 그들의 아버지에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는 이유로 한동안 교수 사회와 문단에서 쫒겨나야 했다. 정작 아버지는 한발짝 물러났는데 자식들이 앞장서서 호들갑을 떨었던 이유도 대타자와 불초소생이라는 유사 부자 관계가 만든 흉물스러운 풍경이었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가 남이가 ? 그럴 때마다 나는 이렇게 대꾸하고 싶다. " 시발놈아, 그럼 우리가 남이지 님이니 ? " 문학이 그들 세계에서만 북 치고 장구 치고 물장구 치고 노니 독자는 이웃 나라 먼 나라 보듯 한다. 그들은 대중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신들이 대중을 왕따시킨다고 굳게 믿는다.
" 흥, 됐거등여 ! 순문학 좋아하시는 분들만 모이세요. 흑흑, 싸구려 소설만 좋아하는 대중은 필요없어요. 저희는 소수의 순문학 독자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리렵니다. 눈믈이 아, 아아아아압을 가리지만........ " 정말 그럴까 ? 그들은 문학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영역이 주는 권력을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 문단도 이제는 존경하는 대타자와의 결별을 준비해야 한다. 이성복 시인의 시를 빌리자면 " 아버지, 아버지 씹새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어 ! " 라고 외쳐야 한다. 슬프지만 웃으면서 빠이빠이 해야 한다. 그래야 한국 문학이 살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