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구두구두구두구
구두 이야기
동화 속에서 신데렐라는 왕자님과 결혼하여 계급 장벽을 무너뜨린 입지전적인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인생 역전 로또는 < 구두 > 였다. 그녀가 무도회장을 떠나면서 남긴 것은 발에서 벗겨진 구두 한 쪽. 왕자님은 방을 붙여 잃어버린 유리 구두의 주인을 찾아 나선다1). 자고이래로 자기 발에 딱 맞는 구두는 찾기 힘든 모양이다. 인생 역전을 위해 수많은 아가씨들이 유리 구두를 신어보지만 크거나 작거나. 뭐, 다들 아시는 동화이니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기로 하자. 신데렐라 10자평은 이렇다 : 새 구두는 불편하다. 오늘은 구두에 대한 썰(舌)을 풀어 볼까 한다. 기대하시라. 두구두구두구두구....... 아니, 구두구두구두구두.
읽는 기계, 다독의 대명사인 독(讀)한 다치바나 다카시 달인이 쓴 <<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 >> 라는 책은 제목 그대로 책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보유한 책이 수만 권이니 일일 독서량 또한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터. 책 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이 예외없이 정독을 모범 답안으로 내놓을 때, 독한 다치바나 다카시 선생은 속독을 권유한다. 그가 말하는 독서론은 간단하다. " 인생은 짧고 읽을 책은 많으니, 후딱 ~ 읽으셔 ! " 그가 내놓은 << 후딱 읽기 ㅡ 요령 >> 中 하나는 동종 테마의 책을 몰아서 읽는 것이다. 특정 분야를 공부하고 싶으면 우선 가벼운 개설서를 먼저 읽고 나서 바로 입문서를 읽는다. 그리고 나서 그와 관련된 동종 테마의 책들을 연속적으로 읽는다. 그가 이 방법을 권유하는 까닭은 속독이 가능하기 때문이란다.
동종 테마(의 책)이니 첫 번째 책보다는 두 번째 책이 읽기에 수월하고, 세 번째 책보다는 네 번째 책이 읽기에 수월하다. 내용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동종 지식이 축적되다 보면 속독이 가능하게 된다. 경기를 펼칠수록 더욱 강해지는 인공지능 알파고 시스템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마르크스를 읽고 나서 프로이트를 읽는 것보다는 마르크스를 읽고 나서 알뛰세르를 읽거나 프로이트를 읽고 나서 바로 라캉을 읽는 것이 속독에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철학은 다음과 같다. " 입문서 한 권을 정독하기보다는 입문서 다섯 권을 가볍게 읽어치우는 편이 낫습니다2) " 쉽게 말해서 이 분야 저 분야 두서없이 읽지 말고 한 분야'에 몰빵하라는 말이다. 다치바나 다카시...... 이런 분이야.
< 몰빵 > 이라는 속된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도 " 몰빵 " 하면 한 몰빵 했던 사람이었다. 하나에 꽂히면 " 그것 " 만 한다. 하지만 몰빵의 미덕이 독서 영역이 아닌 소비 영역으로 뻗치면 문제는 달라진다. 한때 " 니트 넥타이 " 에 꽂힌 적이 있어서 니트 넥타이'를 열심히 사서 모은 적이 있다. 안다, 나도 알고 있다. 명품을 모으면 콜랙터(collecter)가 되지만, 싸구려 가품을 모으면 호더(hoarder)가 된다는 것. 그래서 의미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싸구려 니트 넥타이를 열심히 모았다. 하나둘 모으다 보니 넥타이 공장을 차려도 될 만큼 모았다. 문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실증이 난다는 점이다. 발품 팔아서 모은 열정은 온데간데없고, 어느 날 갑자기 한갓 천조각으로 보이는 거라.
이깟, 천조각 따위나 모으려고 사나이로 태어났단 말인가 ! 희귀 비디오를 모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택까지 가서 웃돈을 주고 사왔던 그 수많은 희귀 비디오 테이프들이 어느 순간 폴리에스테르 플라스틱 쓰레기로 보이는 거라. 열정이 식을 때 내가 선택한 방식은 가혹하게도, 가혹하게도, 아아. 가혹하게도 쥐도새도 모르게 한방에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 정도면 신경쇠약 직전의 조울증적 소비 습관'이라 할 만하다. 구두도 마찬가지였다. 금강제화 랜드로버에 꽂혀서 랜드로버를 사 모으기 시작했다. 한달에 두세 켤레를 산 적도 있다. 그렇게 모으다 보니 1년에 4,50켤레를 사게 된 것이다. 문제는 새 구두는 불편하다는 점이다. 새 구두가 50켤레에 육박했지만, 정작 내가 신고 다니는 구두는 뒷굽이 닳을 대로 닳은 낡은 신발이었다.
단순한 이유. 새 구두는 불편하고 낡은 구두는 편하니까. 새 구두를 신고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녀야 하는 것은 악몽이니까. 신발과 신발 주인의 관계는 야생마와 카우보이의 관계와 비슷하다. 새 신발과 날뛰는 야생마는 길들여야지 편해지는 법. 신발은 뒷굽이 닳아서 보기 싫어질 때 가장 편한 상태가 된다. 애인도 그렇다. 좋은 애인은 낡은 구두와 같다. 내가 사 모았던 50켤레의 구두는 그렇게 방치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구두는 먼지가 쌓이고 공기 접촉으로 인해 가죽이 굳게 되었다. 새 구두는 한번도 신지 않은 채 낡은 구두가 되었으니 신지도 않을 신을 사 모으는 것(가지고 싶다는 욕망)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새 구두이지만 편한 구두는 드물지. 발에 물집이 잡혀야 나중에 편한 구두가 되는 법...... "
그때 깨달았다 : ㉠ 읽지도 않을 책을 사 모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사실, ㉡ 새 책이지만 읽지 않은 책은 낡은 책이라는 사실, ㉢ 지난 일을 되돌아보면 독자를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 결국에는 좋은 책이었다는 사실, ㉣ 낡은 구두와 읽은 책과 오래 사귄 애인은 서로 닮았다는 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