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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화려한 거짓말과 초라한 거짓말 !
거짓말'에는 의외로 종류가 많다. 선의의 거짓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 화려한 거짓말, 초라한 거짓말, 행복한 거짓말, 사소한 거짓말, 달콤한 거짓말, 터무니없는 거짓말, 입에 침도 안 바르고 하는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등등. 북한에서는 거짓말쟁이를 " 꽝포쟁이 " 라고 하는 모양이다. 꽤, 마음에 든다.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고는 한다. "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어 ! " 그런데 정말 그럴까 ? 오히려 사람들은 거짓말에 대해서는 관대한 편이고 진실 앞에서는 불같이 화를 내거나 외면하기 일쑤'다. 대중들이 꼴도 보기 싫어하는 것은 " 꽝포쟁이 " 가 아니라 진실을 폭로하는 자'이다. 거짓말은 달콤한 초콜릿 같고 진실은 쓰디쓴 씀바귀 같으니깐 말이다. 세상은 < 진짜인 척하는 가짜 > 가 팔 할이다. 죽은 척하는 생태이거나 얼어죽을 동태이거나......
그러나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다. 조지 오웰, 나에게 < 그 > 는 얼음 조각이 깔린 나무 궤짝 안에서 입을 쩍 벌리고 자빠지거나 흐리멍텅한 동태 눈깔로 세상을 바라보는 생태'가 아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죽은 척하느니 차라리 총을 들고 스페인 내전'으로 뛰어든 인물이다. 얼어죽을 동태가 될지언정 죽은 척하는 생태로 살지는 않겠다는 앙칼진 양심. 그가 여러 지면에 기고했던 에세이'를 모은 책이 << 나는 왜 쓰는가 >> 이다. 이 책은 조지 오웰을 단순히 << 1984 >> 와 << 동물농장 >> 을 쓴 작가라는 단순한 정보에서 벗어나 생활인으로서의 조지 오웰을 엿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그는 << 1984 >> 와 << 동물농장 >> 으로 명성을 얻기 전까지 돈을 벌기 위해서 꾸준히 에세이와 칼럼과 서평을 써서 밥벌이를 해야 했던 생활인'이었다. 그는 한 해에만 백 권 이상의 冊을 읽고 서평을 했다.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부분이 에세이 < 어느 서평자의 고백 > 이다. 이 에세이를 읽다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내용인즉슨 : 그가 밥벌이를 위해 정해진 시간 안에 읽어야 하는 책은 네다섯 권이지만 차일피일 미루다가 마감 하루 전에야 들춰본다는 식이다. 정독일 리는 없다. 대강 훑고 감으로 써내려가야 하는 영혼 없는 글쓰기. 그는 서평자에 대해서
책을 무차별적으로 평하는 일을 오랫동안 한다는 건 유난히 달갑지 않고 짜증스럽고 피곤한 노릇이다. 그것은 쓰레기를 칭찬하는 일일 뿐 아니라 그냥 두면 아무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않을 책에 대한 반응을 계속해서 날조해내는 작업이기도 하다. ( 나는 왜 쓰는가, 286쪽 )
이라거나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서평을 하다보면 대부분의 책에 대해 과찬하지 않는다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책과 일종의 직업적인 관계를 맺고 보며 대부분의 책이 얼마나 형편없는 것인지를 알게 된다. 객관적으로 참된 비평은 열에 아홉은 ' 이 책은 쓸모없다 ' 일 것이며, 서평자의 본심은 ' 나는 이 책에 아무 흥미를 못 느끼기에 돈 때문이 아니면 이 책에 대한 글을 쓰지 않을 것이다 ' 일 것이다...(중략) 내가 보기에 최선의 방법은 대부분의 책은 그냥 무시해버리고 중요해 보이는 소수의 책에 아주 긴(최소한 1000단어는 되게) 서평을 쓰도록 하는 것이다. ( 같은 책 287쪽 )
이 글을 읽다가 문득 한국의 대형 출판사에 종속된 평론가(편집위원)들이 떠올랐다. 출판사의 홍보부장이 되어서 자사가 출간하는 작품에 대해 의무적으로 비평을 남발해야 하는, 주례사와 정실과 덕담으로 얼룩진 영혼 없는 칭찬 팜플렛이 떠올랐다. 언제부터인가 책 뒤에는 항상 문학평론가'가 길게 늘여 쓴 만연체'로 원고지 칸을 꾸역꾸역 메운 평론이 부록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우연한 일치이겠으나 문학 작품 뒤에 문학평론가가 출판사로부터 청탁을 받고 쓴 평론이 부록처럼 달리기 시작하면서 한국 문학은 신문지에 쌓인 시금치처럼 야금야금 시들어 가기 시작했다. 100자면 충분할 < 사용 후기 > 를 1000자 이내로 작성해야 하는 < 서평 > 에도 독자를 위해 달콤한 거짓말을 하느라 진땀을 빼야 하는데,
거창하게 평론이라는 이름으로 10000자'를 써내려 가야 했던 팸플렛(문학 작품 내 평론) 저자들은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 그동안 출판사 청탁을 받고 쓴 그 무수한 팸플렛 부록 글'을 읽었지만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평론을 본 적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다. 청탁료 받고 쓴 글이니 말이다. 그래도 글재주는 남달라서 거짓으로 쓴 글은 꽤나 화려하다. 미학에서 < 화려하다는 것 > 은 < 초라하다는 것 > 보다 상위(上位) 개념이다. 하지만 거짓말'이라는 영역에서 보자면 화려한 거짓말'보다는 초라한 거짓말'이 도덕적으로 그나마 우월한 서정'이다. 거짓말은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 위선 > 일 뿐이고, 거짓말이 초라하면 초라할수록 < 연민 > 을 생성한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자꾸 김수영'과 겹쳐진다. 깡마른 외모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뿐만 아니라 글과 양심의 합일'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이 책은 자서전적 에세이, 서평, 칼럼이 뒤섞여 있다. 그중에서도 몇 안 되는 서평'은 꽤 흥미롭다. 특히 <<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 라는 글'은 조지 오웰이 서평가로서도 탁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 서평 쓰기의 하, 하하하찮음 > 에 대해서 투덜댔지만 사실은 뛰어난 서평가'였다. 매의 눈과 사자의 발톱을 가졌다. 그는 이 글'에서 톨스토이'가 왜 셰익스피어'를 극도로 싫어했는지에 대해 분석하는데 이 지적질이 꽤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이 글에 의하면 톨스토이는 << 리어왕 >> 을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그 원인은 톨스토이와 리어왕의 말년 신세가 서로 유사했기 때문이라고 조지 오웰은 지적한다. 자기 혐오'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으로 전이된 것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문득 찰스 부카우스키'가 떠오른다. 그가 어느 자리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해 " 아, 몰라 ! 좆까, 난 셰익스피어 좋아하지 않아 ! " 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이에 격분한 독자가 부카우스키에게 긴 편지를 써서 당신은 셰익스피어를 비판할 자격이 없다고 적는다. 찰스 부카우스키'는 일기에서 이 일화를 소개한 후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 야, 좆까. 그리고 난 톨스토이도 좋아하지 않아 ! "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부카우스키가 보기에는 < 똥 묻은 개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꼴 > 이다. 셰익스피어를 좋아하지 않은 나에게 톨스토이의 지적은 통쾌했지만 그런데 어쩌나...... 나 또한 부카우스키처럼 셰익스피어를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톨스토이도 좋아하지 않는다. 명료한 언어의 대적 大敵은 위선이다. 진짜 목적과 겉으로 내세우는 목적이 다를 경우, 사람은 거의 본능적으로 긴 단어와 진부한 숙어에 의존하게 된다. 조지 오웰이 에세이 << 정치와 영어 >> 에서 쓴 구절이다.
아, 하게 된다. 어느 스타 평론가가 진짜 목적은 쪽팔리니깐 숨기고 겉으로 내세운, 한국 문학에 대한 짝사랑 고백'을 읽었을 때 그 아부가 한심해서 징그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가 독자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는 것은 문학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애정을 빙자한 출세 욕망'처럼 보였다. 거짓말은 차라리 화려한 것보다는 초라한 것이 낫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진짜 목적을 숨기고 겉으로 내세운 화려한 문장은 진짜 목적을 숨기고 어쩔 수 없이 내세운 초라한 문장보다 비열하다 ■
- <<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 라는 글도 탁월하다
- 톨스토이는 셰익스피어 작품을 반감과 지루함과 당혹감의 연속이라고 지적한 후 평균적인 작가도 못된다고 비판한다. 심지어는 셰익스피어를 호전적 애국주의자'라고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