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풀과 밥풀때기
나는 남보다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 ~ 이(었)다 " 라는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내 " 다독의 경험 " 은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시대와 불화하는 성격이기에 티븨 매체와 당대의 유행에 호감이 없던 터라 술 마시고 노래하는 것 이외에는 취미 생활이 없어서 책과 영화’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꼴에 성격은 “ 레트로 지향적 ” 이어서 주로 고전‘을 읽거나 고전을 보았다. 곰곰 생각하니 내가 책을 사는 데 투자한 비용은 대략 5,000만 원 정도. 여기에 책 한 권 읽는데 6시간 정도 소모된다고 했을 때 독서하는 시간 대신 부업으로 곰 인형 눈깔을 붙이는 일을 했다고 가정하면 : 1억( 책 산 돈을 저축 + 부업으로 번 돈) 정도는 저축하지 않았을까 ?
그 돈으로 근사한 외제차 하나 사서 “ 야, 타 ! 홍콩 가자 !! ” 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 아니면 그 종잣돈으로 사업을 해서 배, 배배배배배벤츠 타고 루, 루루루루루룸살롱에서 양주 마시며 쌀밥에 괴깃국 먹지 않았을까 ? 아, 아아. 이렇듯 가정법은 허무맹랑한 서사'일 뿐이로구나. 책 한 권에서 지혜 하나를 건질 수 있다면, 나는 대략 5000개 정도의 지혜를 득템하여 간달프 같은 지혜의 어르신’이 될 법도 하지만, 이상하게 어느 순간부터 책을 읽을수록 지혜 하나를 얻는 게 아니라 지혜를 와장창 잃어버리게 되었다. " 지혜가 뭐예염 ? " 뒤늦은 후회이지만 다독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깊이 읽기에 실패하다 보니 어쭙잖은 똥고집만 남아서 사람들에게 흥야항야하기 일쑤였다. 다독의 피해는 오독이었다.
내가 읽은 책 가운데 팔 할은 오독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읽었던 책을 다시 읽자 결심했다. 발췌독이 아닌 정독으로 말이다. 비록 5000개의 지혜‘를 얻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소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사랑 > 은 “ 사랑을 나누는 행위 ” 에 있는 것이 아니라 “ 노동을 나누는 행위 ” 에 있었다. < 오병이어의 기적 > 도 알고 보면 노동을 나누는 행위'다. 빵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는 일을 해서 번 재화이니, 이것을 이웃과 나눈다는 것은 결국 노동을 나누는 행위'다. 예수가 말하는 < 사랑 > 은 받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다. 노동을 나누는 것이다. 나는 이 단순한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랑을 나누는 행위는 사랑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였다. 그것은 고상한 문학적 표현이었을 뿐, 성욕과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조건 없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노동을 나누는 것. 페미니즘을 이론적으로 배운 사람‘은 양성평등’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진다. 페미니즘 이론은 남녀 간 권력의 분배에 방점을 찍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노동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양성평등을 위한 지름길이라는 평범한 진실에는 어두웠다. 양성평등은 책을 통해서 배우지 말고 싱크대 앞에서 배워야 한다. 한여름 불 옆에서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 여자라고 해서 모두 요리에 일가견이 있으리라는 생각은 지나가는 민들레나 딱정벌레에게 줘야 한다는 점.
"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 라고 말하기에 앞서 " 나도 힘드니 너도 힘들겠구나 ! " 라는 말의 온도와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 그래서 내가 가진 노동을 당신을 위해 써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싱크대 앞에 서면 사랑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집회에 참석해서 함께 물대포를 맞으며 연대하는 방식도 노동을 나누는 행위’다. 내 노동의 힘듦‘을 이해하면 당신의 밥그릇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내 밥그릇만 움켜쥐면 밥그릇 타령만 하게 된다. 김훈처럼 말이다. 노동을 나눈다는 것은 연대하는 행위와 동일하다. 연대’는 한 덩어리가 되기 위해 힘을 나누는 행위'이다. 노동자는 노동의 힘으로 먹고 사는 족속이다. 그들은 대다수이지만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다. 뭉쳐야 힘을 얻을 수 있다.
오늘 7,000원짜리 밥을 먹으면서 한 끼 끼니도 되지 않는 최저임금 6030원을 생각하니 입맛이 떨어졌다. 대기업 곳간은 차고 넘치는데, 동전 몇 닢 올리면 경제가 망한다고 하는 그들의 공갈을 들을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다. < 밥풀 > 과 < 밥풀때기 > 는 모두 “ 밥알 ” 이라는 동일한 뜻을 지시하지만, 또 그와는 사뭇 다르다. 왜냐하면 “ - 때기 ” 는 비하의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기 때문이다. 배때기, 귀때기, 볼때기, 이불때기처럼 말이다. 밥상머리에서 부모들은 < 밥풀 > 흘리지 말라고 가르치지만 < 밥풀때기 > 흘리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밥풀때기는 이미 땅바닥에 떨어져 더러워진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밥풀은 생명의 근본이지만 밥풀때기는 쓸모없는 것이다. 밥풀(밥알)이 밥풀때기가 되지 않고 밥’이 되기 위해서는 내 옆에 있는 밥풀과 연대해야 한다.
연대하기 위해서는 손을 붙잡아야 한다. 이 또한 노동을 나누는 행위가 아닐까 ? 따순 밥 한 그릇, 마음 놓고 먹을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 진보인 척하는 진보는 팔 할이 " 입 진보(입만 살아서 나불거린다는 의미) " 다. 입으로는 양성평등을 외치지만 실천은 전무하다. 점잔 빼고 쓴 글이라 오글거리는 감은 있다. 내 식대로 말하자면 “ 시바 ! 밥알, 목구멍에 걸리것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