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기억
책이 2000권 정도 되다 보니 가장 근심스러운 순간은 " 이사 " 가는 설정'이다. 바로 그 날이 다가온다. 6월에 이사를 가야 한다. 요즘은 책장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쉰다. 구질구질한 흑역사'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상한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진열된 책장을 보면 스스로 대견한 마음을 갖는다는데 나는 한숨이 먼저 나온다. 책장은 두 개 빼고 나머지는 누가 버린 것을 주웠다. 유기견을 보면 안쓰러워서 집으로 데리고 가는 유기견 동물 보호 협회 간사 어윤부 씨'처럼 말이다. 책장은 신기하게도 색깔도 각각 다르고 출신도 달라서 개성도 제각각'이다. 어느 놈은 광명 아파트 단지에서 주웠고, 어느 놈은 군산 가구점에서 샀고, 또 어느 녀석은 지금 살고 있는 집 근처에서 주웠다(솔직히 출생지가 헷갈린다). 칸 간격이 다르니 들쭉날쭉, 가관이다. 하지만 누굴 탓하랴. 적정 용량보다 2배 정도 무거운 짐을 탑재하고 있으니 싸구려 5단 MDF 책장으로서는 등골이 휠 것이다. 어느 놈은 운이 좋아서 고려 청자 하나 받드는 " 진열장 " 으로 태어나 귀한 대접 받지만 가난한 곰곰생각하는발 씨 책장으로 태어난 놈은 사는 게 하루하루가 무간지옥이지 않을까 ? 책장을 볼 때마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느껴져서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옛말에 비천지교불가망 조강지처불하당 (貧賤之交不可忘 糟糠之妻不下堂) 이라 하여 가난하고 천할 때 사귄 벗은 잊을 수 없고, 지게미와 쌀겨로 함께 끼니를 잇던 조강지처는 집 밖으로 내보내지 않는다 하였으니 내 로또 백 억'에 당첨된다 해도 너희를 버리지는 않으리라, 라고 말할 줄 알았지 ? 아니다. 나 그렇게 인간적인 놈 아니다. 고양이가 생선을 호시탐탐 노리듯이 날을 잡아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여튼 포장 이사'를 하더라도 책을 정리할 필요를 느껴서 하루에 조금씩 책을 우체국 4호 박스에 담는다. 문학 책 같은 경우는 앞으로 다시 읽을 일이 거의 없으니 책 상태를 살피고 파손된 부분은 손질을 하고 잘 닦은 후 박스 안에 넣는다. 정원 있는 넓은 집을 살 때까지는 이 봉인을 뜯지 않으리라. 눈물이 앞을 가리지는 않더라. 오히려...... 뭐랄까 ? 어떤 잔인한 쾌감 같은, 짐승 같은 쾌락에 몸을 부들부들 떨게 된다. 마치 시체를 땅속에 암매장하는 살인마 같다. 그러니까 박스는 관'이다. 골판지로 만든 관 뚜껑을 닫은 후 박스 테이프로 마무리할 때 느끼게 되는 전율. 아, 좋다. 이렇게 해서 쥐도 새도 모르게 묻어버린 놈이 400개 된다. 앞으로 문학 책을 200개 정도 더 묻어야 하지만 힘들기는커녕 짜릿하다. 피식, 웃음이 난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정상적인 것은 아니지 않은가 ? 닝기미, 책을 박스에 담아 보관하는 상황을 시체를 몰래 암매장하는 것에 비유하다니 말이다. 장르 소설을 많이 본 탓이리라. 오밤중에 책을 정리하다가 문득 데니 보일 감독이 연출한 << 셀로우 그레이브 : 얕게 묻은 무덤 >> 이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자고로 시체와 아픈 기억은 깊이 묻어야 한다. 얕게 묻은 무덤에는 파리가 냄새를 맡고 몰려들 테니까, 윙윙거리면 머리맡이 어지러울 테니깐. 박스 테이프를 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붙인 자리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 옛날, 기분 좋은 봄날. 종로 3가 피카디리 만남의 광장 앞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옛 애인'이 생각났다. 어쩌면 내가 박스에 담아 봉인한 책들은 책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했던 기억인지도 모른다. 독서 편식이 심했던 나에게 문학을 권했던 여자. 손에 힘이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