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약속.
속초에서 1년 정도 살았다.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떠난 타관살이'였다. 딱딱한 각오를 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작품 하나 써내리라. 곰 쓸개를 먹고 바늘 침대에서 잠을 청하리라 ! 하지만 내가 속초에서 한 일이라고는 모텔 달방'에서 에로 영화를 보는 게 전부였다. 에로 영화가 질리면 낚시 방송을 보았다. 하는 일은 없었다. 불면증이 찾아왔다. 24시간 잠을 자지 않았다. 술병을 깨서 난동을 부린 적도 있었고 유리 조각이 등에 박혀서 속초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술에 취해서 45,000원 주고 산 자전거를 타고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진 적도 있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때 알고 지내던 분이 " 강원도 좌파 " 라고 불리는 사내였다. 사내는 자동차 정비소에서 일했고 그의 아내는 생선 조림 가게를 했다. 나는 하루에 한 끼'를 식당에서 해결했는데 그때 내가 자주 가는 곳이 바로 이 식당이었다.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 식당이어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식당은 아니었다. 나는 가끔 그 식당에서 강원도 좌파 아저씨'와 술을 마시고는 했다. " 내가 있드래요, 요기 강원도 토박인데요. 내가 말만 하면 사람들이 빨갱이 같은 말만 한다고 해서 속이 답답했드래요. 그런데 이렇게 곰곰발 선생을 만나서 속 시원한 말방귀를 뀔 수 있어 이래 좋습니다. " 우리는 식당에 있는 막걸리를 모두 비우면서 주로 반공주의를 앞세운 우익 진영과 대기업의 횡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는 했다. " 허각보다 인기도 없는 놈이 뭔 놈의.... " 강원도 좌파 감자 아저씨'는 울분에 가득 차서 항상 엿 먹어라, 라고 외치고는 했다. 그 자리에서 나온 말 중 하나가 어느 택시 기사에 대한 내용이었다. " 내 아는 사람 중에 택시 모는 사람이 있드랬죠. 그집 딸내미가 삼성 반도체에 다녔는데 말입니다.
어느날 병에 걸려 집에 온 겁니다. 그 사람 말 들으니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아빠가 모는 택시 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드라고요. 그 사람 지금도 삼성을 상대로 싸운다고 합디다. 달걀로 바위 치기지만 그 용기가 대단하지 않습니까 ? " 우리는 의례 목소리를 높이며 쌍욕을 했다. 내가 속초를 떠나던 날, 아쉽게도 강원도 좌파 아저씨를 만나지는 못했다. 대신 강원도 좌파 아저씨의 외아들인 바다'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 아이 이름이 바다'였다. )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다가 작년에 유투브에 떠도는 영화 예고편 하나를 우연히 보았다. 낯익은 풍경,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속초였다. 예고편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백혈병에 걸린 딸내미가 아빠가 모는 택시 안에서 죽었단다. 문득 강원도 좌파 아저씨가 술자리에서 했던 말들이 생각났다. " 아빠가 모는 택시 뒤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하드라고요. " 삼성 반도체 노동자 황유미 씨에 대한 이야기'였다. 영화의 제목은 < 또 하나의 약속 > 이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 영화 제작 두레'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얼마 전에 나는 알라딘 리뷰 대회에서 상금 50만 원을 받았다. 세금 떼고 차, 포 떼니 40만 원에 못 미치는 적립금이 쌓였다. 이 가운데 일부는 내가 알고 지냈던 지인들에게 책을 돌리고 또 일부는 알라디너'에게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문태준의 < 가재미 > 라는 시집을 알라디너 10명에게 드릴까 했는데 달랑 시집 한 권 보내는 게 뭔가 좀 궁상스러워서 고민을 하다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이 글을 읽고 이번 주말에 영화 < 또 하나의 약속 > 을 보신 알라디너 중 선착순 5명에게 < 삼성 백혈병 진실 세트 2권 > 을 드리겠습니다. 이 영화가 좀 오랫동안 극장에 걸렸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절차는 어렵지 않습니다. 보셨다면 덧글에 단순히 보셨다고만 남기십시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두 편의 동영상을 올린다. 하나는 삼성 백혈병 진실 세트에 있는 < 사람 냄새 > 와 < 먼지 없는 방 > 트레일러이고, 또 하나는 이건희 선생님께서 애국 충정의 마음으로 따끔하게 국민과 노동자에게 하신 말씀이시다. 역시 대단한 선생님이 아닐 수 없다. 인터뷰의 핵심은 매우 간단하다. 유럽과 일본의 경제가 어렵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로 국민이 지나치게 복지를 요구하고 일을 하지 않으려는 게으른 노동자 때문이란다. 시바, 할 말이 없다. 강원도 좌파 아저씨가 이 동영상을 보았다면 주먹을 불끈 쥐며 쌍욕을 했을 것이다. 이 글 읽고 이번 주말에 영화를 보신 분들은 댓글을 남겨주십시요. 5분에게 책을 보내드리겠습니다.